조선혁명군제2사 사령장 최윤구(본명;최현구)활동 증(證) 자료와 전시 // 청원현 반만 각군 2천명 연합활동 // 최윤구 제2사 제1 연대장 //1940년2월15일 길림성 몽강현에서 양정우 호위하던 최윤구 1군 교도대대장 겸 총참모장 (전 조선혁명군 양세봉 부대)전멸(戰滅)전사(戰死)
한.중연합작전
한중연합작전의 성립
1932년영릉가 전투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 최윤구(崔允龜), 정봉길(鄭鳳吉)이 지휘하는 3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 왕동헌(王彤軒), 양석복(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신빈 왕청문에서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陡嶺地)에 도착,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중무기로 무장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후 혁명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맹공을 하였다.
주변지리에 익숙한 혁명군은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이 장악했던 주변고지를 탈환하고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돌격전을 감행하는 혁명군의 기세에 일본군이 퇴각하자 혁명군은 계속 일군을 추격하여 30여 리에 위치한 신빈성(현재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영릉진) 서쪽에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를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와 말·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첫 한·중연합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고, 유대가 한층 공고해졌다.
4~5월경에 최윤구崔允龜.조화선趙化善은 이춘윤과 신빈현 노성老城 전투에서 일.만군 80여 명을 전멸시켯다.최윤구.조화선.이춘윤과 2일간에 일 만군과 영릉가에서 전투 교전 하였다.그리고 군사상의 전략 전술로서 일 군 日 軍의 군사력의 타격을 위해 국내 진공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혁명군 박대호朴大虎.최창강(崔允龜)은 관전현.집안일대에서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초소와 군사거점을 습격 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32년에 조선혁명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모두16차례이며 참가한 인원은 101명에 달했다. 6)
*조선혁명군 편성*
이 무렵 조선혁명군에서는 조직을 개편하였다.
총사령부 아래 5개 사령부를 두었다.
총사령 양세봉(평북.철산).참모장 김학규(평남.숙천). 제1로사령 박대호(경북청도). 제2로사령 한검추(崔鉉秋)(평북.벽동). 제3로사령 조화선(황해도.평산). 제4로사령 최윤구(경북.청도). 제5로사령 정광배 이 였다. 새로 편성한 각 로군은 통화.유하.환인.즙안.등 각각 떠나 의용군과 연락을 갖고 전면적인 반일합작을 쟁취 하여 나갔다.
이때 제4로군 (第四路軍) 최윤구 사령(司令)은 제3로군(第三路軍)조화선 사령(司令)과 연합하여 심해선(瀋海線)과 길해선(吉海線) 철도 연선지역(沿線地域)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의용군 편성*
1932년 4월 20일 중국의용군 당취오(唐聚五), 왕육문(王育文), 손수암(孫秀岩), 장종주(張宗周), 이춘윤(李春潤), 왕봉각(王鳳閣), 서대산(徐大山) 등이 항인성에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를 높이 들고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을 계획하였다. 동 구국회도 정치·군사 양 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에는 당취오가 선임되었다.
반만항일무장군인 요녕민중자위군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 통화(通化), 신빈, 즙안(輯安), 임강, 유하, 본계(本溪), 휘남(輝南),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안동(安東), 봉성(鳳城), 청원(淸原), 동강(蒙江), 장백, 안도, 금천(錦泉), 반석, 서안(西安), 관전, 개원(開原) 등 20여 현을 관장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는 재만 제1의 항일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 구축을 계획하고 당·군대표에 김학규를 선임하여 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자위군 내에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이 담당하였다.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이 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구국회 선전부 내에 한인선전과를 두어 한글간행물과 신문 『합작(合作)』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선봉부대로 활동하였다. 두 차례의 신빈보위전을 전후하여 중조연합군은 상술한 전투성과 외에도 또한 각로 자위군에 편입된 조선특무대와 소속된 각 부 자위군과의 연합작전도 있다.예를 들면 최윤구 부의 500명은 자위군 6로,11로와 함께 청원지대에서 괴뢰군 600여 명과 10여 일간 격전을 벌여 적 괴뢰장병 80여 명을 살상하고 적들을 격퇴시켰다. 김광옥부 400여 명은 자위군 16 와함께 집안, 임강지대에서 일본 괴뢰군 5,000여 명과
《李春潤抗日殉國紀實》.이청천, 《朝鮮革命軍在東北的抗日戰線》.國史館論叢 第44輯 참조
대결하여 30여 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적들을 섬멸하였다.文英燦부는 자위군 제5로와 함께 환인 大野河 지대에서 괴뢰군 약 5,000명과 대결하여 반달동안 싸워 적들을격퇴시켰다. 이와 같은 사실이 많다.
얼마 후, 7월 하순에 최윤구, 조화선은 2영을 인솔하여 자위군 1부와 함께 통화 快大茂子에서 적 80여 명을 격사하였다.동년 8월 7일, 조화선 특무대 300여 명과 自衛軍 800여 명이 淸原縣 馬山衛子에서일본군(500여 명)과 부딪쳤다. 치열한 전투를 거쳐 적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의 死傷이 매우 엄중하였다(죽은 자 36명, 상한 자가 퍽 많았었다)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각 특무대 소관 지역 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 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7)
통화회의 그 역사적 의의 1932년 8월 요령구국회와 요령민중자위군을 기초로 요령성정부가 재조직되었는데 당취오가 대리주석 겸 동북민중항일구국 의용군 제3방면 총지휘 요령민중자위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8월 9일부터 14일 통화사범학교 강당에서 당취오의 주최하에 5일간 일본통치구역에 새로운 주요 의제로 토론하였다.원 21개 로군과 후에 편성한 제37로군 사령관은 모두 소장급 군관으로 임명되었다. 왕동헌.양휘부와 양세봉도 소장급 군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취오는 정식으로 양세봉을 특무대 사령관으로 박대호.한검추.조화선.최윤구.정광배를 지대(支隊.여장)사령관으로 위임하였는데 이는 각 로군의 여장에 해당된다. 요령성정부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해진 일본침략군은 비행기로 동변도 여러 현(縣)에 삐라를 살포했고 포상금을 내걸고 항일장령들을 체포하려고 날뛰었다.
체포령에는 양세봉을 체포하는자에게는 상금2만원을 주고 박대호.한검추.조화선.최윤구.정광배등을 체포하는자에게는 상금1만원을 준다고 선포 하였다.이에 증언한 사람은 은진상.홍락원 1985년5월에 기록한 내용이다. 요령성정부의 성립은 국내외에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관내 <<흑백반월담>>(黑白半月谈) <<>> <<간보>> (艮报) 등 많은 장령들에 사적을 실었다.
1933년 흥경성 전투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략해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 환인, 신빈, 유하, 휘남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도 진격해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6월 15일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 청원 등지로 공격해왔다. 이에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이해천(李海天), 김일용(金一龍), 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되었다.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였다. 8)
석인구 전투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해왔다.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정,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였다.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에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한.중연합작전의 항전 간부 인물(1932~1937)
특히 항전(抗戰)을 연합했던 간부 요령민중 자위군 군제 및 각 로군(路軍)에 (생.몰년도) 대한 상황(참조)
조선혁명군 항일 장령명단과 나이 및 직책
한국인 애국지사 *양세봉 (1894~6-1934)총사령 /*양기하 고문 (1878 ~ 1931~2) *박대호 (1890-1947 )부사령 / *최윤구 (1885-1940~2 ) 특무대장 제2사 師長 / *조화선 (1892- ?~1942 )특무대장.제3사 司令 / *김학규 (1900-1967 )참모장 / *김두칠 (1893-1946 ) 참모장 겸 외교부장 / *고이허 (1902~?-1937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 / *장명도(1904-1935-7) 제3사 司令.제6중대장 / *김경근 (1885- ? )정의부소대장.제3사대리 司令 / 김두칠선생은 1937년에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망 신고를 미리했다고 합니다.
요령항일민중 자위군 나이 군제 및 장령명단 각로군 직책
총사령 唐聚五(당취오) 부총사령 張宗周(장종주)
중국인 열사 *왕동헌 (1873-1952)(제10로군司令) *당취오 (1898-1939)(제1로군司令겸총사령) *이춘윤(1901-1933)(제6로군司令) *왕봉각 (1895-1937)(제19로군司令) *등철매 (1892-1934)(제20로군司令) *장종주 (1882-1940)(제5로군司令겸부총사령) *양희부.양석복 (1896-1936)(제11로군司令)손수암(孫秀岩)(제16로군司令)곽경산(郭景珊)(제7로군司令)통화주둔★왕동헌(本名왕자신)선생은 한국사람은 모두 혁명지사이고 영웅호걸이다 라고 했습니다.
통화현 전투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던 제4로군의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으로 적을 격퇴했는데, 적은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욱이 항공기의 공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하게 공격하는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적들은 만주국 봉천 경비대 사령부에서 요동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 지도부를 잡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왕봉각(중국인)양세봉은 2만원 박대호.최윤구.조화선.한검추는 1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9)
양세봉의 피살 전.후 조선혁명당-국민부-조선혁명군 편성
1934년 9월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분이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고 자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 최창해(崔蒼海), 김추상(金秋霜) 등 4명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위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 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 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양세봉(본명:梁瑞鳳)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 각오하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고,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그 지점은 환인현 4구 소황구에서 1934년 9월 18일 밤 11시쯤(일설 9월 19일)이었다. 양세봉은 총 2발을 맞고 쓰러졌다. 같이 간 부하들이 들것에 싣고 가까운 동포집에 옮겨 정성스레 간호하였으나 워낙 상처가 깊어 회복하지 못하고 9월 20일 오후 1시 6분(음력 8월 12일)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추석 날 몇칠 앞두고 있었다.(양력 9월 23일, 음력 8월 15일) 비통하게 순국하였다. 약 15년 간을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맞서 싸우다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10)
양세봉 장례식 그후 일본경찰들에 만행과 순국한 김도선(金道善) 노인
장례식은 한주일(7일장)을 치루고 국민부.조선혁명당.군 각 로(路)의 간부들이 모여서 추도회를 하였다.
추도회 참석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장명도.양인원.전대성.고이허(최용성).김활석(문무경).윤일파.홍심원.이동산.박대호.최윤구.김두칠.김진방(김동산).조화선(장화선).김윤걸.정광배.김해산.산림대 지도자 천량(天良)등이다.
양세봉의 시체를 흥경현 흑구산성 기슭에다 평장으로 안장 하였는데 안장한지 얼마되지 안았는데 일본경찰들이 김도선(金道善)의 집으로 찾아와 양세봉 시체를 어디다 묻었는가?
입을 열지 않자 마을사람 70여 명을 앞세워 말을 안하면 전부 총살 시키겠다고 로계봉 촌장(툰장)을 협박하여 결국 산에 올라가 양세봉 시체를 가져다놓고 입을 열지 않았던 김도선에게 작두로 목을 자르라 호령졌다. 이때 김도선은 양세봉은 우리 수령이다. 백성으로써 수령의 목을 어떻게 자를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못한다 말이 떨어지자 일본경찰은 김도선 앞가슴에 총을 쏘았다. 그러나 정신만 돌개되니 김도선은 욕을 하며 완전히 죽여달라 하니 한발을 더 쏘아 사살 되었다. 결국 양세봉의 머리(수급)를 자기들이 작두로 잘라 가고 촌장 로계봉도 총살 하였다 한다. 머리를 들고가 통화.산성진 등지에서 효시(梟示뭇사람에게 보라는 뜻)하였다. 그후 양세봉의 몸시신은 북한에서 가져가 애국열사능에 모셔졌고 중국 왕청문 조선학교 운동장 한편에 1995년 조각상을 세웠으나 조선학교가 한족(원중국인)에게 매매되어 조선족인 뜻있는 분이 자기 토지를 내주어 그자리로 옮겨져 동상이 서있게 되었다.
양세봉 순국 전 · 후 무렵의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편제와 주요 간부 명단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새로 발견된 자료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34년12월에 정리한 비밀(秘密)자료 ≪국외 조선인 불온단체 분포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기록보존 차원에서 소개코져 한다. 사실 1938년 9월 까지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이었다.
다음 간부 명단을 보면은 조선혁명당.군과 중앙집행위원이 겹침을 알수있다. 흥경현.왕청문을 조선혁명군.당.국민부의 본부 근거지를 두었다.(즉 수도.(서울 이라는 뜻으로 동포들은 인식했다.)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 이후 김활석(金活石)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후임되어 1934년 11월 11일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군사정부는 법무, 민사, 재무, 외교, 교양, 특무, 군사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활석이 부장을 겸임하였다.
김활석(본명: 金鐸) 총사령관 당시 병력은 양세봉 총사령관 때보다 훨씬 줄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9월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 한검추는 중국자위대 사령관 왕봉각과 집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동맹회의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 군대 총사령에는 한검추가 선임되였다.
1936년 조선혁명군 정부는 회의를 소집하고방면군을 취소하고 3개사로 편성하여 한검추(본명:崔錫鏞).최윤구(본명:崔鉉九) 조화선(본명:趙京福)이 각각 사령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신원이 파악된 조선혁명군정부 주요 간부들의 출신지역과 나이·경력을 정리해보면 〈표 8〉과 같다.
〈표 8〉
조선혁명군정부 주요 간부 출신지역과 나이·경력
(출신과 본명등 수정한 내용이 본문과 약간 보충하여 수정 하였습니다.)
직책 성명 출신지역 나이 경력 비고
총령 겸 군민위원장, 민사부장 김동산(본명 김진방) 충남 공주 50세
구한국 육군 참모부 근무 1921년 중국 망명,통의부 군사부원, 학교 교원 1932년 국민부 집행위원장1934년 조선혁명군정부 총령 환인현에 처, 자녀 2명 있음
군사위원장 겸정치부장 고이허(본명 최용성) 황해 수안 명월 35세 (나이는 부정확함)
1922년 배재학당 졸업후 망명정의부 재무부장 1930년 국민부 교양부집행위원장1932년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장 관전현에처 있음 혁명군 군사부장 겸 총사령
김활석.문무경(본명 김탁) 경기 포천 35세 (나이는 부정확함 다른자료에서는 당시 조선일보,1935년7월13일자 45세등으로 나옴)
초등학교 졸업후 1920년 도만민족운동 단체 가입 1934년 양세봉 서거후 조선혁명군 총사령 평북 벽동에 부모 있음 혁명군 조직부장
박대호(본명 박상춘) 경북 청도 화양 45세
1919년 3·1운동 후 최윤구와 함께 망명 통의부 입단 1923년 의군부 참모 1932년 조선혁명군 중대장 1933년 혁명군 부사령 1935년 법무부장 관전현에 처자 및 며느리 있음
외교부장 겸 참모 김두칠(본명 김현제) 경북 청도 매전 42세 (1893年生이며 당시 43세이다.)
興京合成公司(정미소) 경영 1929년 국민부 흥경지방공소 경무집행위원 1935년 혁명군 외교부장 흥경현에 처자 있음
교육부장 윤일파(본명 윤명호) 평북 구성 41세
1928년 남경 황포군관학교 졸업 1930년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1932년 총사령부 참모1933년 총사령부 참모장 1935년 제1사 사령 관전현에 처와 딸 있음
제1사 사령 한검추(본명 최석용) 평북 벽동 32세 (1903년이며 당시 33세이다.)
1928년 남경 황포군관학교 졸 1933년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1934년 제1사 사령 처는 협화회 특별공작본부에서 이용중
제2사 사령 최윤구(본명 최현구) 경북 청도 운문 48세
1919년 3·1운동 후 망명,통의부 입단 1932년 조선혁명군 중대장 1935년 혁명군 제2사 연대장1936년 2사 사령 1934년에 반석현 처와 아들3 거주하고 있음
제3사 사령 대리 김석강(별명 김경근) 평북 원산 51세
1919년 3·1 운동 후 망명 정의부 소대장 1935년 혁명군 제1사 3대대장 1936년 혁명군 제3사 사령 대리
热血同流 中韩抗战史迹寻踪 열혈동류 한중 공동 항일, 기억의 길을 걷다(2025년12월 최근에 발행한 역사 책으로 펴낸네요.)
서세명의 후손들은 베이징.단동에 살고있다.
조선혁명군 제7중대장활동 및 1935~6년 제2사 사령장 최윤구(본명;최현구)활동 증(證) 자료와 전시 // 청원현 반만 각군 2천명 연합활동 // 최윤구 제2사 연대장 //1940년2월15일 길림성 몽강현에서 양정우 호위하던 최윤구 1군 교도대대장 겸 총참모장 (전 조선혁명군 양세봉 부대)전멸(戰滅)전사(戰死)
조선혁명군에 관한 자료는 아래 참고 문헌을 보시기 바랍니다.
註 61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591쪽.註 619金學奎,<三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光復≫1-4, 1941년 6월: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년 영인본), 28쪽.註 620金學奎, 위와 같음.<中國九一八事變後朝鮮革命黨在東北工作經過狀況>(≪震光≫6호, 1934년 9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영인본), 15쪽.<李浩源 등 가출옥 관계서류>(정부기록보존소 소장, 수원대 박환 교수 제공).註 62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06·613∼616쪽.註 622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外事警察報≫121, 69쪽(李命英,≪權力의 歷史≫, 성균관대출판부, 1983, 88쪽에서 재인용).註 623曹文奇, 앞의 책(1990), 202쪽.註 624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註 625譚譯·王駒·邵宇春,<9·18사변 후 동북의용군과 한국독립군의 연합항일>(≪國史館論叢≫44, 1993), 201쪽.張洪軍,≪九·一入全史≫3(瀋陽:遼海出版社, 2001), 155쪽.註 626曹文奇, 앞의 책(1990), 112쪽.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張洪軍, 위의 책, 181쪽.註 627협정내용은 다음과 같다.① 東邊道(압록강 건너편과 남만주 남쪽 일대) 일대(즉 당취오 관할지)에서 조선혁명군의 활동을 정식으로 승인할 것.② 당취오군 관할 내에 예속하는 각급 관공서와 민중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에 관한 일체에 대하여 적극 원조해 줄 것을 당취오군 사령부에서 지시할 것.③ 조선혁명군의 군량 및 장비는 중국 당국에서 공급할 것.④ 일본군을 향하여 작전할 때 쌍방이 호응원조함으로써 작전의 임무를 완성 할 것.⑤ 조선혁명군이 일단 압록강을 건너 한국 본토작전을 전개할 때 중국군은 그 전력을 기울여 한국독립전쟁을 원조할 것(金學奎,<白波自敍傳>,≪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586∼587쪽).註 628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に於ける朝鮮の治安狀況≫(京城, 1933), 213쪽.註 629≪조선일보≫, 1932년 3월 31일·4월 13일.≪동아일보≫, 4월 1·15일.註 630金學奎, 앞의 글(1941), 29쪽.―――, 앞의 글(1988), 587쪽.註 631桂基華,<3府·國民府·朝鮮革命軍의 독립운동 회고>(≪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140쪽.張洪軍, 앞의 책, 185쪽.註 632계기화, 위의 글, 410∼411쪽.張洪軍, 위의 책, 185쪽.註 6331932년 8월 5일 신빈현 葦子谷에서 부근의 한인 농민대표와 조선혁명당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주요 영도자들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때 이들은 ① 국민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정부 조직, ② 독립정부의 군대편성, ③ 각현 행정기관 정비, ④ 재만 조선인 단체의 통일 및 중국 국민당정부와 연락, ⑤ 조선 현재의 사회·정치기구 교란·파괴, ⑥ 재정방침 및 징병제도의 확립과 임원선임 등의 주요방침을 결정했다(<在滿朝鮮人の不逞行動及取締狀況>,≪日本外務省警察史≫在滿大使館 第1, 국회도서관 소장 일본 외무성문서 제책본 제2268권, 2614∼2616쪽).註 63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10, 607∼608쪽.
热血同流 中韩抗战史迹寻踪(열혈동류중한항전사적심종) 열혈동류 한중 공동 항일, 기억의 길을 걷다/70~71면(2025년12월26일ROUND출판사/왕텐취안 지음 / 왕염 (한글번역) 옮김
증[證]자료 :조선혁명군 상황에 관한건 pp789-821「滿洲に於ける中國共産黨と共産匪」, 『思想情勢視察報告集(4) pp82-83 및 최윤구 아들 최영환 및 손자 최희봉 증언을 토대로 작성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독립기념관 제11집1997/235-236pp 참조)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