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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간의 해외연수기 (터키 이스탄불) 7
1월 8, 9, 10일 / 아시아와 유럽의 가교, 터키 이스탄불에서
8일 아침 5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아테네 공항으로 갔다. 아테네에서의 짧은 일정을 아쉬워하며 1시간 정도를 날아 9시에 도착한 곳은 이스탄불의 ‘아타투르크 공항‘이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케말 아타투르크의 이름을 딴 것으로 2000년에 개항한 현대적 공항이었다.
공항에서 현지 안내인인 최미애씨가 우리를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지난 밤에 비가 와서인지 지중해와 면한 유럽쪽 이스탄불의 첫인상은 매우 깔끔했다. 행정 수도는 아시아 땅에 있는 앙카라이지만 경제와 문화, 역사의 중심지는 단연 이스탄불이고, 최근 들어서는 아가사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배경이자 007 영화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 아닌가.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아타투르크는 터키의 독립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인데, 어디를 가든 초상화가 있다하면 모두가 아타투르크일 정도로 터키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한다. 본 이름은 무스타바 케말, 국부란 의미로 케말 파샤라고도 부르는데 국민들이 준 이름은 케말 아타투르크라고 한다.
아랍어 대신 터키 알파벳을 만들어 문자를 개혁하고 모든 이슬람 방식의 제도를 서구적으로 개혁했던 근대화론자이며 오늘날의 이스탄불 지역의 유럽 대륙을 고수하느라 아시아 대륙쪽으로 면한 많은 섬들을 그리이스에게 내준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 이런 것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기도 한데 어쨌든 오늘날 터키를 명실공히 지형학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양다리를 걸치게 하고 이로 인해 최근에는 EU 가입 여부에 대한 논란거리를 제공하는데 단초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터키의 근대화를 위해 일했는지는 그의 부인과의 이혼에서 잘 드러난다. 거의 밖에서만 활동하는 그를 견디다 못한 부인의 이혼 요구에 이혼한 뒤 개인적으로 매우 외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밤이면 외로움을 술로 달래다보니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의사는 하루에 한 잔 이상의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의사와의 약속을 지키긴 지켰는데 그 잔은 대접처럼 큰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때 손순효란 학자가 떠오른다.
우리가 탄 승합차가 마마라바다를 오른편으로 끼고 이스탄불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시내로 향했다.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문화권이라 곳곳에 돔형의 이슬람 사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인상적으로 눈에 띈 것은 해안가에 세워진 엄청난 규모의 성벽이었다. 이것은 또한 동서양 문화가 혼재해 있다는 이스탄불의 한 상징이기도 했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 시대 즉 로마제국 때 로마인들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시를 둘러싼 대성벽인데 곳곳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1천년 이상을 버틴 동로마제국의 번영을 보는 듯했다. 성벽은 해자와 외성과 내성의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해자 폭은 18m라고 하는데 제 아무리 명마라 하더라도 16m를 뛰어 넘을 수 없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로마인들이다.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비잔틴제국의 로마인들이 아무리 콘스탄티노플을 철통같이 수비했다고 하더라도 허점은 있는 법.
본래 몽골족에 의해 밀려 내려온 돌궐족들의 후예인 오스만 투르크족들은 상대적으로 성벽 방비가 약한 골든만(유럽쪽 이스탄불을 두 개의 도시로 나누는 내륙해협)쪽을 택해 침공하는데 배로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넌 다음 그 60여척의 배들을 골든만의 북쪽에 있는 육지로 끌어 올려 넘은 다음 다시 골든만으로 끌고 내려가 성벽을 공략해 무너뜨리고 오스만제국을 세웠다니......
정복자는 집요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케 된다. 정말 지독한 술탄, 메메드 2세이다. 과거의 치열한 접전과는 상관없다는 듯 성벽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서 집시들이 농사를 짓고 길거리쪽에서는 손수레를 이용해 거기서 나온 양상치와 빨간 무 등의 채소를 팔고 있는 모습이 그저 한가롭기만 할 뿐이다.
정복자들의 상징물 전시장, 히포드롬 광장
차는 로마대성벽을 오른쪽으로 지나다가 잔잔하면서도 넘칠 듯한 바닷물이 도시를 양쪽으로 가르는 골든만을 왼쪽으로 두면서 오른편으로는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역을 지나 히포드롬 광장에 도착했다.
성소피아 성당과 푸른 모스크(술탄 아멧 모스크)에 둘러싸인 광장인데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경기장과 예술 공연, 군중집회 등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한다.
벤허에 나오는 전차경기장이 바로 이곳이며 3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만한 크기였다고 한다. 지금 그 옛날의 광장은 땅 속에 묻혀 있는데 발굴해서 기단 부분을 드러나게 한 오벨리스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비잔틴시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와 콘스탄틴 7세가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오벨리스크, 그리이스의 델피신전에서 가져온 청동뱀상, 독일의 카이저 황제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지어주었다는 아름다운 우물(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이 샘은 이후 ‘눈물의 샘‘으로 불리운다) 등이 있어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군중의 환호성이 담겨 있던 경기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슬리구의회 방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식당에서 터어키 전통식인 케밥으로 점심을 하고 공식 일정에 따라 이스탄불의 32개 구중 하나인 시슬리구 의회를 방문했다. 이스탄불에서도 가장 번화하고 경제력이 높은 곳이다. 문화유적이나 구의 위상으로 보자면 우리의 종로구와 중구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전체 45만의 구 인구를 대표해 12명의 의원이 있는데 그중 3명이 여성이라는데 이날 우리를 맞이해 준 사람은 부의장이었다.
각각이 한 분야를 맡아 활동하면서 매주 화요일마다 모임을 갖고 서로 의견 교환을 나눈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이곳도 구청사(한 건물에서 모든 업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분산되어 있었다)와 같이 있는데, 정치 제도는 유럽 방식을 취하고 있어 지방자치에 관한 한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터어키 공화국 탄생때부터 지방분권화가 실시되어 행정권은 물론 조세권, 교육권, 경찰권까지 다 갖고 있었다. 구립학교가 8개나 있다는 점이 부럽기도 했고 그들 나름대로의 복지정책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국민소득이 그다지 높은 나라가 아니라서 크게 눈에 띠는 점은 없었다.
여러 가지 의견 교환을 나눈 뒤 본회의장을 둘러보았다. 권위적인 우리 의회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얘기인즉은 이미 사전에 모두 의견을 조율하고 표결을 위해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다는데, 앞서 원탁의 미팅방과는 의자부터가 천양지차(본회의장의 의자는 철제 접는 의자)라 좀 의아했다.
소속 정당별 방과 전문위원실도 들러보았는데 본회의장의 분위기를 다소 이해할 만했다. 이 나라 경제력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의회에서 내려오면서 구청사의 민원실과 북적거리는 납세과를 둘러본 뒤 공식방문을 마쳤다.
어느 나라를 방문하건 마찬가지지만 작년의 월드컵경기가 전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좋은 기회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특히 터키의 경우 심판의 판정으로 선수가 한 명 탈락되자 ‘한 사람이 7천만 터키인에게 비수를 꽂았다‘고 언론에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래도 터어키가 한국보다 앞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밖에 돌아다니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게 안내인이 전하는 당시의 분위기이다.
동화 속의 궁전, 돌마바체 왕궁
앞으로는 보스포러스의 푸른 바다와 면하고 금은 보석으로 장식된 하얀 대리석 궁전, 상상속이나 동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궁전이 정말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돌마바체 궁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파리의 루브르 궁전과 런던의 버킹컴 궁전을 본뜨고, 마마라 바다에 있는 섬들에서 가져온 대리석과 이집트의 알라바스타,
고대의 페르가몬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무늬의 대리석들로 지은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예술가들이 내부를 치장하고,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가 그림을 그려 넣었으며, 파리의 가구로 장식하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750개의 촛대가 달린 샹들리에가 중앙홀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이 왕궁을 치장하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들어가고 각양의 화려한 실크 카펫이 바닥을 장식하고 그 위에는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우스 2세가 선물한 박제 곰이 엎드려 있다면?
어디 이뿐인가. 280개의 화려한 꽃무늬의 화병들과 크리스탈 장식들, 줄지어 늘어선 화려한 조각의 둥근 기둥들,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6개의 발코니, 6개의 터키탕, 1427개의 창문, 그리고 술탄들은 유별나게 시계를 좋아해 곳곳을 시계로 장식해 놓았는데 궁전 앞의 큰 시계탑을 빼놓고도 그 수가 156개 된다고 한다.
모퉁이마다에는 대형거울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뒤쫓아오는 자객으로부터 술탄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 거울이라고 한다. 지금 그 궁전은 주인을 잃고,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들은 세월의 먼지와 때를 뒤집어쓴 채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돌마바체는 가장 근세에 지어진(1843년에 짓기 시작하여 13년 후인 1856년에 완성) 2층의 화려한 왕궁이자 오토만 제국에 재정 압박을 가해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며, 터어키의 국부 아타투르크가 1938년에 눈을 감은 곳이기도 하다.
바다와 면한 곳이라 짠 바람에 외장의 대리석들이 쉽게 변색되어 거무튀튀할 뿐만 아니라 지반이 약해 내부 구조물들은 되도록이면 목재를 쓰고 그 위를 대리석처럼 장식, 하중을 덜어주게 설계된 곳이라 한다. (참고로 이 지역은, 지중해 전 지역에 해당하겠지만 목재가 귀하다는 사실을 서울에 와서야 ‘중동의 역사‘란 책을 보면서 알았다. 흔한 것이 대리석이고 그 차가움을 가리기 위해 카펫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을 한바퀴 돌아보고 정원으로 나와 해협을 보았다. 외국 손님들은 배를 타고 바로 이 궁궐로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바다는 예나제나 그곳에서 여전히 세월의 영욕과 함께 사라져간 영웅들과 오늘날에는 구경거리로 변해버린 왕궁을 지켜보면서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남대문 시장, 그랜드 바자르에서
호텔로 들어가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라 우리의 남대문 시장에 해당하는 그랜드 바자르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꼭 들러보아야 할 곳 중의 하나로 거듭난 곳이기도 하다.
1층 일부를 죽 걸어서 구경하는 것만도 피곤했다. 각종의 터어키 특산물을 전시해 팔고 있었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물론 호주머니 사정도 문제였지만, 유명하다는 푸른 색의 터키석조차 디자인의 조악함으로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두어달 전에 운현궁 답사를 마치고 인사동에서 산 터키석 목걸이가 훨씬 세련미가 있었다. 몇몇 나라에 다소 뒤진다는 평가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만큼 손재주가 탁월한 족속이 있을까?
5시 30분도 안되었는데 날은 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쉬멜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앉아 책들을 뒤적였다.
서울을 떠난 지도 벌써 6일이 되었다. 짧은 일정 속에 색다른 문화양식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것들을 제대로 다 소화해 글로 쓸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더군다나 이슬람문화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도 없지 않은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은근히 걱정이 된다.
아니다. 그래도 본만큼 안다고도 했다. 그래, 몰라도 열심히 보아두자. 나중에 다시 책을 보면서 새길 수 있으니까......편한 마음으로 잠이나 자두자.
<출처 : 家苑 문화유적답사 문집 (해외편) : http://tae11.org 200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