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 흑산, 사람들은 그의 품에 안겼다
하얀 예수상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 산 정상에 우뚝 선 그것과 닮았다.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예수성심상이다. 흑산 예리항 언덕에 서서, 두 팔을 벌려 흑산 바다를 껴안고 있다. 영산도 너머 대둔, 다물도에 시선이 머문다. 아니 그 너머 ‘먼 바다’에 가 있을 것이다.
먼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일기예보에서 말하던 그 먼 바다 말이다. 그 바다는 달랐다. 파도며 물색이 영판 차이 났다. 검고, 거칠고 날카로웠다. 거대한 물 판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했다. 물판이 가벼이 움직이는데, 배는 놀래서 요동쳤다. 마치 지진의 지각 판처럼 파도는 무거웠고, 조류는 육중했다. 뭍, 목포에서 93㎞ 떨어진 흑산도는 먼 바다의 검은 한 점이었다. 예수 성심상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로했다. 생선과 미역이 밥인 흑산도에서 바다는 농토였다. 농토는 늘 두려움 위에 떠 있었다. 무서워 먼 바다로 가지 못하면 굶어야 했다.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야 한다. 믿음은 삶이었다.
신안군 흑산면 진리 천주교 광주대교구 흑산성당. 흑산도는 주변 11개 섬의 중심이다. 홍도와 TV ‘삼시세끼’로 유명한 만재도, 대한민국 서쪽 끝 가거도가 모두 흑산면에 속한 마을(里)이다. 인구래야 4396명, 흑산도 본섬에 2700여명이 산다. 통계상 논은 4.5㏊이나, 쌀농사는 이 섬에 없다. 집 터 귀퉁이, 모퉁이 작은 텃밭이 고작이다. 손바닥만 한 밭에 바람이 드는 지 돌담으로 에둘러 막았다.
성당에 오른다. 흑산도답게 성당 간판이 홍어 모양새다. 씽긋 윙크하는 홍어가 귀엽다. 오르는 길 오른편에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의 사형선고에서 무덤까지 14처를 조각으로 담아냈다. 14처 조각 위편에 하얀 예수상이 보인다. 성당 건립 50주년을 기념해 2008년 세웠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너른 마당이다.
마당에서 4계단을 다다르니 성모동굴이다. 동굴 속에 성모상을 놓은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기리는 조형물. 1858년 2월11일 프랑스 루르드지방 산자락 마을 마사비엘의 동굴에 발현했다고 한다. 이 마을 방앗간 집 딸 베르나데드 수비루는 성모를 만났다. 사흘 후인 14일 수비루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다시 만났다고 전해진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르드를 비롯해 7번만을 진실한 발현으로 삼고 있다. 최초의 진실한 발현은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였으며, 그 뒤 몇 차례를 거쳐 1933년 프랑스 바뇌에서 까지다. 만나고 보았다는 횟수는 지금까지 모두 2만1000번에 달한다.(1986년 사라고사에서 열린 제42회 성모주간에서 발표). 믿음은 존재의 의심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라 했다.
“성당이 참 이뻐요. 흑산도 사람들이 돌 주워다 만든 거랍니다. 지난해인가 새로 단장해 더 산뜻할 겁니다. 한번 꼭 보세요.” 숙소 주인장 격인 김동승씨가 성당에 간다니 건넸다. 허언이 아니었다.
3층 종탑에 함석으로 지붕을 두른 맞배 양식이다. 단출하고 단순하다. 정면 출입구는 좌우 대칭의 아치형으로 나무문이다. 아치 문 위에 다시 겹 아치를 두르고 그 안에 십자가를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3층은 높이를 절반 씩 나눠 종을 넣고, 그 위에 반원의 석조를 붙인 뒤 하얀 클로버 십자가를 세웠다. 아치가 주는 안정감이 사각으로 붙여 올린 석조와 썩 잘 어울린다.
본채는 대칭구조로 좌ㆍ우에 각각 격자형 유리창 두 개를 달았다. 멀리서 보니 유리창 격자 틀이 십자가를 연상케 한다. 창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마감했다. 처마에서 지붕으로 이어지는 곳에 알파와 오메가를 역시 스테인드글라스로 조형했다. 그리스 알파벳 첫 글이자 마지막인 알파와 오메가는 ‘우주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하느님’의 동의어이다.
종탑을 제외한 나머지 성당 벽은 흑산도 몽돌을 벽에 넣었다. 모가 나지 않은 둥근 돌, 세파에 씻겨 단단한 돌들이 성전의 외벽을 마감했다. 정면은 순박한 마음인양 하이얀 페인트를, 나머지 벽면은 하늘과 바다를 닮은 파란색으로 도장했다. 지붕은 몇 해 전까지 파란색이었으나 최근 수리하면서 진주황으로 바뀌었다. 흰 벽에 서까래 주황색이 극대비를 이룬다. 성당 외부는 아름드리 40여 그루 해송이 담처럼 감싸고 있다. 내부공간은 신자 100~150명이 들어갈 만 하다.
성당 오른편 해송 아래 벤치에 앉는다. 흑산군도가 내려다보인다. 그리 보니 흑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하늘과 가까워 이곳에 성당을 지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피상의 쉬운 생각이었다. 가장 춥고, 비바람이 세차게 들이치는 곳, 신은 그런 곳에 있어야….
흑산도는 신앙의 섬이다. 이 섬에 온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다산 정약용의 형 손암 정약전(1758~1816)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배 왔다. 그러니 흑산과 천주교는 200년이 넘는 인연을 갖고 있다. 흑산도에 본격적인 복음은 1951년 조수덕씨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부터라고 한다. 한국전쟁을 피해 들어온 그는 열정적으로 전교활동을 펼쳤다. 금세 신자수가 증가하자 같은 신자였던 아버지 조준일은 목포 산정동 본당의 모란 (T. Moran)신부에게 사제를 요청했다. 또 가난한 섬사람들을 위해 밀가루, 옥수수, 우유 등 구호품도 부탁했다.
먼 바다의 두려움과 배고픈 삶은 섬사람들을 모았다. 가정집에서 미사가 어렵자 1951년 죽항리에 첫 공소 건물을 지었다. 이어 1954년 장도, 1956년 심리 , 1957년 사리에 믿음의 터전들이 세워졌다. 1958년 11월11일 골롬반 선교회의 도움으로 흑산성당도 올렸다. 1960년 성모중학교를 개교한데 이어 대건 조선소, 대건 발전소도 만들었다.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감귤나무를 보급한 것도 천주교였다. 그러다 보니 천주교 신자의 비율이 우리나라 평균치 보다 3배나 높다. 2013년 면민 4587명 중 신자는 1097명(23.9%)에 달한다. 2005년에는 36.4%였다. 1950년대에는 주민 80%가 신자였다. 가히 이 섬을 먹이고 입힌 건, 8할이 신이었나 보다.
이상배(66) 흑산성당 사목회 총무는 “지금 군부대 뒷 쪽 경사진 곳 집에서 예리 공소를 만들었는데, 그게 흑산성당의 시작으로 성당과 흑산도는 한 몸이었다. 성당에서 세운 성모중학교 졸업생이 모두 11회까지 950명인데, 섬에서 유일한 성모중이 있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면서 “신안군의 천주교 포교는 제일 먼 흑산도에서 시작해 거꾸로 육지 방향인 비금, 도초로 갈 정도로 흑산의 신앙이 깊고 넓었다.”고 말했다.
흑산 사람들에게 믿음은 무엇일까. 천국 가는 난해한 교리 보다는 삶을 지탱하는 일상이었을 테다. 먼 바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홀로 남은 뱃사람 아내를 위로하며, 가난한 이들이 함께 모이는 작은 공동체였으리라. 흑산이 ‘그 날’ 이후 힘들단다. 상가가 텅 비었다. 칼 달린 말들이 쏟아진다. 먼 바다에 뜬 검은 섬, 흑산을 보살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