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ㆍ대림피정 Re: 사순피정 특강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ㅣ 서론(1) ㅣ 정적주의
지도사제 24.02.20 01:14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Re: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새번역-서문(1)텍스트의 역사 / 정적주의(Quietism)
지도사제 20.11.09 19:06
━전영준 신부의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0) 17세기 ③ - 정적주의
지도사제 18.07.14 09:2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0) 17세기 ③ - 정적주의
하느님 은총이 내리기만 기다린 사람들 2018. 06. 24발행 [1470호]
▲ 그림 왼쪽부터 몰리노스, 귀용 부인, 페늘롱.
17세기에 프랑스에서 그리스도교 수덕생활을 극단적으로 실천했던 얀센주의 이단이 출현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수덕생활을 극단적으로 실천했던 또 다른 이단이 출현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를 통한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이끌려야 신비체험이 가능하다는 점을 잘못 이해한 정적주의(Quietism)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몰리노스의 정적주의
스페인 동부, 무니에사(Muniesa) 인근 마을 출신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는 1646년 동부 해안에 위치한 발렌시아(Valencia)로 이주해 예수회가 운영하는 성 바오로 대학에서 종교 교육을 받고 1652년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몰리노스는 1662년에 수덕생활을 실천하며 영적 지도를 훈련하는 수도회인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회했으며 1663년에 로마로 이주해 이 학교의 로마 지부에서 1675년까지 활동하면서 영적 지도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몰리노스가 1675년에 저술한 저서 「영적 안내서(Gua Espiritual)」는 유명해지면서 많은 유럽 언어들로 번역되어 읽혔습니다.
몰리노스는 저서에서 완벽한 관상과 내적 평화의 풍요로운 보물을 얻는 내적 길을 통해 영혼을 해방하고 이끌어주는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즉, 이성을 사용하는 표면적인 기도보다 단순히 하느님을 관상하며 머무는 내면적인 기도를 바칠 때에 우리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몰리노스의 주장은 스페인에서 유행했던 영성 훈련이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의지로 성덕에 나아가는 것으로 비치게 했습니다.
또한, 이성을 이용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라고 여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몰리노스의 저서가 교회 승인을 받고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678년과 1681년에 예수회원들이 몰리노스의 저서를 비판하면서 예수회원들과 몰리노스의 사상을 지지하는 정적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685년에 몰리노스는 교황청 감옥에 갇혔으며, 1687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 (Innocentius PP. XI, 재임 1676~1689)는 교황 헌장 「천상의 목자(Coelestis Pastor)」를 발표해 몰리노스의 주장에서 68개 조항을 단죄했습니다.
몰리노스는 교회의 판단에 즉시 승복하고 자신의 오류를 공식적으로 철회했으며, 물의를 일으킨 윤리적인 죄를 인정하고 여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몰리노스의 저서에 나오는 단죄된 주장이 불명확하고 실체가 없다고 새롭게 평가하고 있지만, 그 당시 몰리노스의 주장은 프랑스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이단인 정적주의가 출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귀용 부인의 정적주의
프랑스 중북부, 몽타르지(Montargis) 출신인 귀용(Jeanne Marie Bouvier de la Motte Guyon, 1648~1717) 부인은 어린 시절에 병치레가 잦아서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나, 신심이 깊은 부모님 덕분에 경건한 신앙을 지닐 수 있었고
프란치스코 드 살(Franois de Sales, 1567~1622)과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eanne Franoise de Chantal, 1572~1641) 의 영향을 받으며 수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1664년 16세인 귀용은 아버지의 강요로 38세인 자크 귀용(Jacques Guyon, 1625~1676)과 결혼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1668년에 귀용 부인은 회심 사건을 체험하면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시작했으며, 친구였던 베네딕토회 수도원 원장 주느비에브 그랑제(Genevive Granger) 수녀가 소개한 교구 사제 자크 베르토(Jacques Bertot, 1620~1681)에게 과거 프랑스 신비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귀용 부인은 1675년에 내적 시험을 동반한 신비체험의 절정에 도달했으며, 1676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영성생활에 더욱 투신하였고 1680년에 또다시 신비체험에 들었습니다.
결국, 귀용 부인은 1681년에 영적 지도자로 ‘성 바오로의 수도 성직자회(Clerici Regulares Sancti Pauli)’ 소속의 프랑수아 라 콩브(Franois La Combe) 신부를 선택했으며,
1682년에 그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내적 체험을 담은 작품 「영적 급류(Les Torrents Spirituels)」에서
인간이 급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하류까지 떠내려가 물에 떠 있듯이 인간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며 조용히 머물러 있기만 하다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돌보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귀용 부인은 1684년에 저술하고 이듬해에 출판한 저서 「기도에 이르는 짧고 매우 쉬운 길 (Moyen court et trs-facile de faire Oraison)」에서 내적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을 언급했습니다.
즉, 완덕은 관상과 사랑의 지속적인 행동으로 구성되고 완덕에 도달한 영혼은 더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도 되며,
이런 영혼은 모든 것에서 무관심해야 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속성을 포함한 구별되는 모든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결국, 인간 영혼은 내적 기도의 작용마저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온건한 정적주의를 옹호한 페늘롱
귀용 부인은 1688년에 프랑수아 페늘롱(Franois Fnelon, 1651~1715)을 처음 만났습니다.
페늘롱은 1672년에 생 쉴피스(Saint-Sulpice)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675년에 사제품을 받고 생 쉴피스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기도생활을 실천하던 페늘롱은 처음에 귀용 부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다가 점차 귀용 부인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내적 기도생활에 심취했습니다.
1693년에 귀용 부인의 가르침에 정적주의적인 오류가 있다는 혐의가 확산하자,
페늘롱은 모(Meaux)의 교구장 자크 베니뉴 보쉬에(Jacques Bnigne Bossuet, 1627~1704)에게 구명 요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보쉬에 주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의 승인을 받아 1694년에 이씨(Issy)에서 심사위원회를 열어 관상과 순수한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은 귀용 부인의 작품들에 대한 이단 심사를 하고 1695년에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귀용 부인은 판결에 따라 1695~1703년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1695년 캉브레(Cambrai)교구장이 된 페늘롱은 이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씨의 조항들에 관한 해설(Explication des articles d’Issy)」을 발표하고 1697년 「내적 생활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 (L’Explication des maximes des Saints sur la vie intrieure)」을 저술해 귀용 부인을 옹호했습니다.
보쉬에도 같은 해에 「기도의 정도에 관한 가르침(Instruction sur les Etats d’Oraison)」을 써 페늘롱에게 보내면서 페늘롱의 저서를 문제 삼았습니다.
결국, 페늘롱은 자신의 혐의를 스스로 벗기 위해서 자신의 저서에 대한 검열을 교황청에 요청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PP. XII, 재임 1691~1700)는 1699년에 교황 칙서 「다른 기회에(Cum Alias)」를 공포하면서 온건한 정적주의를 옹호했던 페늘롱이 범한 23개의 오류를 단죄했습니다.
따라서 페늘롱은 즉시 자신의 교구민들에게 교황의 결정에 순명한다는 교서를 발표하고 여생을 교구에만 머물렀습니다.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은총만 강조한 신비생활의 극단이었던 정적주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생활과 잘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단 판결 이후에 교회 안에서 정적주의는 얀센주의보다 쉽게 제거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 *
<댓글>
지도사제 24.02.20 01:20
< 이러한 것들이 코사드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전부이다.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면, 그가 한 권의 책을 익명으로 발행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은 『★ 모(Meaux)주교, 보수에 ★의 가르침에 의거한 여러 가지 기도 방법에 관한 영적인 지침들. 예수회의 한 신부』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p.18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출간된 그의 두번째 저서인 ★『하느님섭리에 내맡김』(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이 아니었던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이 두 번째 책을 썼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이것은 하나의 신비스런 이야기 ★이다. >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다시 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보쉬에(Bossuet, 1627~1704) 는 7년간 메쓰의 참사원, 10년간 파리에서 설교사, 10년간 왕태자의 사부(師傅)를 지낸 뒤 *모(Meaux)의 주교*가 되었고, 1681년의 성직자 회의에서는 프랑스 교회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오직 자기의 신앙에만 몸을 바쳐 살아온 전형적인 성직자로, 평생 가톨릭교를 설교하고, 신교도며 정적(靜寂)주의자(페늘롱과의 논쟁)며 훈고(訓詁)학자들에 대해서 가톨릭교를 옹호했다.
그의 연설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설교집(약 2007개의 설교),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662년 어전에서 행한 루브르의 사순절 설교인데,
이것은 '죽을 때까지도 회개치 않음', '섭리', '야심', '죽음' 등에 관한 설교이다.
송사(頌辭) 및 조사(弔辭)(조사에는 12개가 있다). 이것들도 사실은 설교에 지나지 않는데, 거기서는 한 인간의 생애가 교훈의 본보기로서 제시되어 있다.
예컨대 '성 베르나르 송사'(1653), ' 왕제비(王弟妃) 추도사'(1670), '콩데 공작 추도사'(1687).
사부로서의 필요상 그는 역사가가 되었다.
그는 〈세계사 논설〉(1681)을 썼는데, 이것은 이승의 사건들에 있어서의 섭리의 절대적 역할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종합적인 역사의 첫 시도이다.
그는 또한 왕태자를 위해 〈성서에 입각한 정치학〉(미완성)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는 현실적인 폭넓은 견해를 보였다.
그의 견해는 프랑스의 현상이 군주제이므로 군주 정치주의자의 입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보였다.
그의 논쟁적 작품들 중 주요한 것은 〈개신교회 변동사〉(1688) 인데, 이는 가톨릭 교회의 불변성에 대해서 개혁파의 변동성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면밀히 검토된 자료에 입각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비상한 생기를 띠고 있다.
보쉬에의 모든 논쟁적 작품들은 유일한 적, 즉 개인의 독자적 양심 또는 자유 검토의 정신을 무찌르기 위해 씌어진 것으로, 가지각색 형태(개신교, 정적주의, 데카르트 철학) 아래 존재하는 적의 탈을 벗기는 데 그는 뛰어나다.
만년에 보쉬에는 자기 교구의 수녀들을 위해 〈복음서에 관한 명상록〉과 〈비의(秘義)에 관한 감사 기도〉(1695)를 썼는데,
이 작품들 속에는 이제까지 논의의 필요상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던 두 가지 특성, 즉 그의 깊은 상상력과 열렬한 애정이 신비로운 토로 속에 펼쳐져 있다.
보쉬에의 문체는 바로 다음의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즉 용어와 표현들의 엄밀한 정확성으로 떠받쳐진 논법의 강력함, 억제된 감동, 웅대한 상상력.
[네이버 지식백과] 보쉬에 (랑송불문학사, 1997. 3. 20., G.랑송, P.튀프로, 정기수) ]
인노첸시오 12세 [ Innocentius XII ]
요약 제242대 교황(재위 1691. 7. 12∼1700. 9. 27).
루이 14세에게 황권으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독립적 입장을 주장하는 갈리카니즘 4개 조항을 철회하도록 하여 프랑스와 교황청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루이 14세의 말에 따라 페넬롱의 《성인들의 격언》을 단죄했다.
1615. 3. 13 ~ 1700. 9. 27
재위기간 1691년 ~ 1700년
본명 안토니오 피그나텔리(Antonio Pignatelli)
출생지 나폴리 근처 스피나졸라(Spinazzolo) 출신이다. 로마(Rome)에서 교육을 받았고,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 때 20세로 교황청에 들어갔다.
비테르보(Viterbo)에서 행정관을 맡았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ecentius X)의 사절로 토스카나(Tuscany)에 파견되었다.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는 그를 폴란드 사절로 보냈다. 1668년에 교황 사절로 빈(Wein)에 머물렀다.
1682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682년에 파엔차(Faenza)의 주교, 1682년에 나폴리(Napoli)의 대주교를 맡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가 죽은 후, 1691년 7월 1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Louis XIV)는 1682에 교황권과 세속권을 구별하고 프랑스 교회의 독립적 입장을 주장하는 갈리카니슴 4개 조항을 공표한 상태였다.
1693년에 인노첸시오 12세는 루이 14세에게 비어 있는 주교 자리를 주는 대가로 그 조항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여 프랑스와 교황청의 적대적인 상황을 해소하였다.
프랑스 캉브레(Cambrai)의 대주교인 페넬롱(Fenelon)이 《성인들의 격언(Maximes des saints)》이라는 책에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자
★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루이 14세는 책을 단죄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
결국 ★★ 1699년에 인노첸시오 12세는 그 책을 단죄하였고 페넬롱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인노첸시오 12세 [Innocentius XI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상 권력의 입맛에 따라 뒤바뀌는 중세교회의 신학, < 어제와 오늘 >의 차이는?
제가 그래서 가끔가끔, < 거내영을 받아들이는 주교님(교회 권력) 한 분만 출현하면?
거내영은 그만 X고생 끝이다. >
라고 말씀드려왔던 것입니당! HaHaHa~~~ ^ ^
지도사제 24.02.20 02:17
몰리노스 [ Miguel de Molinos ]
출생 - 사망 1628년 ~ 1696년
신비사상가
저서 영의 인도(1675년)
스페인의 신비가.
로마에 파견되어서, 설교나 저작에 임했다. 내적인 기도를 신앙의 핵심에 두는 그의 정숙주의의 사고방식은 주 저서 『영의 인도』(1675)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부인하는 바가 되어서, 그는 옥중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되었는데,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귀용 부인이나 페눌롱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신앙을 심화시키려는 그는 명상에서, 나아가서 감각이나 이성에 의하지 않고 무사(無私)의 온화함으로써 마음의 중심에 숨어있는 관상으로 향하여야 한다고 하고, 그곳이야말로 내적인 기도와 신의 은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다시 길을 나아가면, 모든 것이 어둠에 둘러싸여서 사라진 것 같은 고통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시키고(순수화),
어떤 지지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수동적 관상에 이르는 시련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몰리노스 [Miguel de Molinos]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지도사제 24.02.20 02:22
귀용 [ Jeanne-Marie Bouvier de la Motte-Guyon ]
출생 - 사망 1648년 ~ 1717년
출생지 프랑스
유파 경건주의
별칭 귀용 부인(Madame Guyon)
신비사상가
저서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1685년)
프랑스의 가톨릭계의 신비가. <귀용 부인(Madame Guyon)>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된다. 병약하며 정신적으로 불행한 소녀 시대를 보낸 후, 열심히 신을 구해서 경건한 심신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녀는 ①기도를 통해서 혼을 정화할 것,
②신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한 자기의 있는 대로의 모습을 응시하고, 자기애를 완전히 버리고, 신의 내적인 진실에 자유롭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한 점,
③그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신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열렬한 신봉자를 획득했으나, 그녀가 주장하는 신앙의 순수함이 너무나 과격하였기 때문에 얼마되지 않아 가톨릭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아서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아르노르트나 그녀의 전집을 편찬한 푸아레(P. Poiret) 등 경건주의계 프로테스탄트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녀는 페누론과 보슈에의 정숙주의 논쟁의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특히 유명하다.
당시 널리 읽혀진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1685)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용 [Jeanne-Marie Bouvier de la Motte-Guyon]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Re:《서론 》 19-21쪽(정적주의)
지도사제 13.02.01 17:22
[주요뜻
①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를 최대로 억제하고 권인적인 신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수동적 사상
정적주의[靜寂主義]
【명사】 [종교]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를 최대로 억제하고 권인적인 신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수동적 사상.
좁은 의미로는 17세기에 에스파냐의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등이 주창한 가톨릭 내의 한 사조를 이른다.
* * *
<댓글>
지도사제 13.02.01 17:36
내맡김의 영성은 정적주의와는 전혀 다른 영성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최대로 억제할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하느님께 다 반납(내맡김)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동적인 삶인 동시에,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이끌려 드리는(능동)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맡김의 영성은 정적주의와는 전혀 다른 영성입니다.
지도사제 11,08,03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수동 + 능동의 영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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