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문학
- 원주 박경리문학공원과 하동 박경리문학관을 다녀와서
박경리. 통영이 낳은 대문호인 그녀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지』의 작가로 기억한다. 그런 그들이 통영에서‘박경리 생가’가 표시된 관광안내지도를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박경리가 통영사람이었어?” 어디 박경리 뿐 인가. 교과서에서 익히 보았던 류치환·김춘수의 고향이 또한 통영이다. 곳곳에 문화예술인들의 시비가 놓여있는 곳이 통영이다.
통영문화원에서는 올해 ‘향토사료조사’사업으로 박경리『김약국의 딸들』을 향토사적 관점으로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문화원에서 작년에 어르신동아리사업‘박경리 『김약국의 딸들』그 현장을 찾아서’를 시행한 바 있다. 소설 속 현장 답사는 물론, 유현목 감독의 영화를 함께 보고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고, 우리 통영의 현재 모습에서 소설 속 현장의 모습을 유추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올해는 박경리 소설『김약국의 딸들』의 향토사적 고찰이라는 자료집을 내려 한다.
9월 28일에 향토사 회원들과 소설 속 현장 답사를 하였다. 김봉제 영감이 관약국을 하던 간창골부터 한실댁이 용란의 손을 잡고 넘었던 서문고개, 박경리 생가, 한 동네에서 자란 공덕귀여사의 생가터를 지나 뚝지먼당 그리고 봉래좌와 충무교회까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박경리 선생이 작품 활동을 하시던 원주에 조성한 박경리 문학공원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가는 길이 머니 하루에 다녀오기는 무리다 싶어 1박2일로 계획하며 내려오는 길에 『토지』의 무대인 하동 최참판댁에 새로 건립한 박경리 문학관을 들르는 것으로 방점을 찍는다. 통영의 박경리가 원주와 하동으로 이어지는 문학탐방이 된 것이다.
원주는 멀었다. 11월 9일, 아침 8시에 출발한 버스는 12시 넘어서야 원주에 닿았다. 투옥한 사위 때문에 혼자 살아야했던 딸을 돌보기 위해 선택한 곳이다. 『토지』 제4권과 제5권을 집필하고 3만매의 대 서사시를 마무리 지은 곳이다. 선생이 지내시던 단구동 집 주변을 정비하고 『토지』에서 이름을 딴 동산과 마당을 만들고 문학의집을 세웠다.
해설사의 안내로 5층으로 올라갔다. 회상(回想). 박경리 선생의 영상을 보면서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선생은 영상 속에서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너머 보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토지 완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노래를 한 자락 하신다. 명정동 이야기가 나오는 노래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던 그녀는 독서로 소일했다. 결혼 후 영주와 철수 두 아이를 두고 행복을 잠시 맛 본 선생은 전쟁과 함께 힘든 시기를 보낸다. 김동리 작가의 추천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녀는 글쓰기를 치유의 방법으로 삼는다. 26년을 두문불출하며 글쓰기에 몰두한 이유가 아닌가 조심스레 유추해본다. 그렇게 속에 담은 아픔을 다 씻고 가시며 그녀는 말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라고.
4층 자료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계단마다 선생의 스냅 사진이 걸려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시는 모습. 키우던 거위들과 마당에 서 계신 모습 등이다. 선생의 집에서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단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은 태우고, 음식물은 깨끗이 씻어 짐승들 먹이로 내어주었다고. 개와 고양이들이 그녀의 품에서 생을 이어갔다. ‘생명 다독거리는 손길이 있어야’한다고 말씀하시던 그녀다.
4층에는 선생의 작품을 하나하나 걸어 놓았다. 그 중 『표류도』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단다. 『표류도』역시 『김약국의 딸들』처럼 영화로 만들어졌다. 시를 쓰고 싶었으나 소설을 써보라는 김동리 선생의 말에 소설로 전향하였던 그녀다. 그녀의 첫 산문집은 『Q씨에게』다. 『못 떠난 배』표지의 그림은 손자인 원보 씨가 어릴 적 그린 그림이라한다. 손자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는 그녀다. 아버지·남편·아들을 다 잃은 그녀에게 손자는 또 다른 위안처이고 울타리이지 않았을까.
선생의 유고시집『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도 보인다. 따님이 유품을 정리하며 나온 노트 속에 ‘남몰래 쓴 시’가 39편 있었단다. 그 시를 묶은 시집이다. ‘문 밖 늑대 여우 까치독사 하이에나’가 있었다던 그녀는 ‘모진 세월’ 다 지내고 편안히 눈을 감았을까.
3층은 『토지』테마관이다. 토지의 역사적·공간적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도도 그려놓았다. 『토지』는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평사리가 주 무대이다. 구천과 별당아씨가 야반도주한 후 홀로 남은 서희는 조중구에게 재산과 토지를 빼앗기고 마을 사람들과 용정으로 이주한다. 2부는 용정에서의 생활을 담고 있다. 큰돈을 모은 서희는 길상과 결혼하고 조준구에게 빼앗겼던 재산과 토지를 되찾아 귀향길에 오른다. 3부는 진주에 자리를 잡은 서희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4부는 30년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 담겨있다. 5부는 해방의 그날까지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하동과 간도, 그리고 진주와 서울을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시를 쓰면서 그녀는 지도를 놓고 작가적 상상력으로 글을 써냈다고 한다. 통영은 그녀를 명정동의 딸 『김약국의 딸들』의 작가로 기억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경리를 『토지』의 작가로 기억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박경리는 토지고, 토지는 박경리다’라고 한단다. 전시장 가득 『토지』가 전시되어 있다. 펼쳐 놓은 페이지마다 상징하는 것들을 올려놓았다. 흙이 있는 페이지가 있고, 피가 얼룩진 페이지도 있다.
2층으로 내려간다. 박경리 선생의 유품과 사진이 걸려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어머니와 찍은 사진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부유한 집안에서나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하얀 용을 태몽으로 꾸시고는 박경리에게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하셨단다. 진주여고 당시 사진도 보이고, 결혼사진과 아이들 어릴 때 가족사진도 크게 걸어 놓았다. 『토지』육필원고와 만년필, 국어사전,『토지』의 여러 판본들이 보인다. 손수 만들어 즐겨 입으시던 옷도 걸려있다.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에 해설 신청을 하면서 통영에서 왔다 하니까 해설사가 사뭇 긴장했었다. 선생의 고향에서 온 사람들에게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마치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될까 싶었나보다. 게다가 문화원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원장님 눈에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출생지를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조일정) 402번지’로 적어놓았던 것이다. 박경리 출생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조일정(朝日町)은 현재 태평동을 가리키는 동리 명이므로 명정동을 조일정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조일정 402번지는 박경리 본가 주소이고, 박경리 출생지는 대화정(大和町, 현재 문화동) 328번지라고 재적등본에 적혀 있다 하신다.
해설사의 안내로 선생의 집으로 들어섰다. 대문 가까이 마로니에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심을 때 옆집 내외가 도와주었단다. 선생은 답례로 친하게 지내던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주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탄식한다. 치악산을 마주한 넓은 마당에 그녀의 좌상이 있다. 일하다 쉬던 자리에 그녀의 좌상을 두었단다. 들고양이 서른 마리의 밥을 손수 만들어 주시던 곳이기도 하다. 손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작은 연못은 여름이면 아이의 물놀이장이 되었다고. 세심하게 신경 쓴 집이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화장실을 가리기 위해 직접 디자인한 책장이 멋스럽다.
워낙 먼 길이다보니 내려갈 일도 만만치 않다. 대전 인터체인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전주로 들어갔다. 한옥마을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원장님께서 박경리 선생에 대한 이런저런 사연들을 말씀해주신다. 향토사 수업 때 들은 이야기건만, 사랑방에 둘러 앉아 나누는 이야기처럼 들어도 들어도 흥미롭다.
전주에서의 아침은 콩나물 국밥으로 시작한다. 벌떼가 모여들 듯 손님들이 모여들라고 벌 우는 소리로 상호를 지은 집이다. 시원한 국물로 배를 채우고 경기전으로 간다. 마침 6일부터 태조의 어진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가는 눈에 풍채가 좋은 태조 임금이시다. 조선을 건국한 임금이 아니던가. 풍채에서 그런 위엄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임금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어진마저 왕대접이다. 아니 임금 그 자체다. 어진을 통에 넣어 가마에 실어 옮겼다. 어진을 싣는 가마는 어진의 크기만큼 커야 했다. 임금의 행렬처럼 취타와 군사들이 앞뒤를 호위하였다.
가을이 한창인 경기전은 온통 가을색이다. 전주 향교까지 한옥마을을 걸었다. 전주향교는 통영의 향교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유교가 국교인 조선에서 공자를 모신 사당이 아닌가. 태조의 고향이니 역할이 더 컸을 것이다. 마침 11월 11일 행사 준비로 분주하였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가을빛에 물드는 정경을 바라보다 돌아 나왔다. 갈 길이 바쁘다. 하동으로 간다.
하동 평사리 들판은 이미 추수를 끝낸 빈 들판이었다. 대신 호롱불 같은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망태기 하나 가득 담아 놓고 1만원에 판다. 통영에서 사려면 적어도 3만원은 주어야 하는 양인데 산지에서는 이렇게 싸다. 무거워서 감히 사지는 못하고 감말랭이와 콩산적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토지』제1부의 무대가 된 곳. 소설 속 인물들의 집이 버섯처럼 들어앉은 언덕배기에 박경리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마당에서 선생이 반긴다. 통영 박경리 기념관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동상은 원주와 하동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있다. 사이즈가 좀 작다. 통영에서 처음 개막식을 할 때 그 아담한 사이즈에 놀랐었다. 차라리 원주 마당에 앉아계신 동상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생의 삼대 보물인 국어사전과 재봉틀 그리고 통영 장(欌)이다. 그 외 유품을 원주와 통영, 그리고 하동에 박경리 선생의 전시물을 나누어 전시한다. 다 버리고 가신 분의 물건들조차 기념이 되는 곳. 이곳의 해설사는 우리가 통영에서 왔다하니 “그럼 설명할 필요 없겠네요?” 하더니 나가버렸다.
박경리는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박경리 모녀를 떠났고, 사상범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남편은 전쟁 중에 사라졌다. 하나뿐인 아들조차 사고로 잃었다. 옛말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있다. 지금에야 낡아빠진 유교사상으로 치부할 수 있으나, 그녀가 살던 그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남편·아들 모두 그녀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 모진 풍파를 온 몸으로 맞으며 살았다. 그런 그녀의 한마디…“왜? 라는 질문에서 문학은 출발한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늘 물으며 살았을 것이다. “왜?” 그리고 그 질문과 대답을 글로 풀어 문학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작품을 내어주고, 집 없는 들짐승들에게 밥을 내어주고, 후배 작가들에게 밥을 해먹이며 당신 자신을 다 내어주고 가셨다. 그녀는 원망과 고통을 사랑으로 훑어 다 버리고 홀가분하게 가셨다.
“여기 참 좋네요”했다던 양지바른 통영 땅, 그녀의 유택에는 아직도 그녀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