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불교 지킴이, 증심사 3층 석탑
무등산 자락은 수많은 사찰을 품고 있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를 보면, 광주의 사찰 10개 중 7개가 무등산에 건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무등산이 통일신라시대부터 국가가 직접 제사를 지낼 만큼 성스러운 산이었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사찰 건립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불교가 들어왔겠지만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금곡동 무등산 자락의 원효사는 원효대사(617~686)가 머무른 암자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머무르기 이전부터 암자가 있었다면, 원효사는 삼국시대에 이미 창건된 사찰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원효사에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질 않다. 단지 1980년 대웅전 신축 공사 당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하여 백제 토기 기와, 고려시대 흙으로 빚은 불상 등이 출토되어 원효사의 창건 시기와 역사를 더듬게 해 줄 뿐이다.
현재 원효사에는 20세기에 제작된 광주 최고의 서양화가 오지호 화백의 명품 탱화가 한 점 남아 있다. 1954년 독실한 불교신자인 장모의 간청으로 그린 198센티미터×152센티미터의 거작이다. 원효사를 찾게 되면 종무소 오른편 주지스님 방에 걸린 명품 탱화를 꼭 한번 감상해보길 권한다.
무등산 자락의 불교는 9세기에 유입된 선종과 함께 꽃을 피운다. 무등산 자락의 불교가 9세기에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삼국 통일 후 무진군이 9주의 하나인 무진주로 승격된 정치 상황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무진주가 15개 군을 거느린 남도의 정치 중심지가 되면서 불교문화 역시 광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학승에 의해 유입된 선종은 참선 수행을 통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우칠 수 있다는 새로운 불교를 말한다. 선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기존의 이론적인 교종 체제를 부정하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당시 신라 사회의 변화 요구에 상응하는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이었다. 내재적 불성을 발견하려는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중앙 정부의 거추장스러운 간섭에서 벗어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 호족의 경향과도 잘 들어맞았다. 이에 선종은 각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전국에 9개의 산문을 개창하게 되는데, 이를 9산 선문이라 부른다. 9산 선문 중 3곳이 우리 지역에서 개창되면서, 남도는 선종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는 구산선문의 중심 도량이었고, 화순 쌍봉사와 구례 연곡사는 개산조사의 거처였다. 이들 선종 산문과 승려들은 광주 지역, 무등산 자락의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광주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가지산문을 연 보조선사 체징(804~880)이 859년 무주(지금의 광주) 지역의 황학난야에 머물렀음은 확인된다. 그리고 무등산 자락의 증심사, 약사사, 개선사 등도 이 무렵 창건된다. 이 중 증심사와 약사사는 사자산문의 실질적인 개산조로 화순 쌍봉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던 철감선사 도윤(798~868)에 의해 창건된다.
9세기, 무등산 불교가 꽃피웠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불교 유물로는 동구 지산동의 동 5층석탑(보물 제 110호), 약사사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600호), 증심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 131호), 오백전 앞 삼층석탑(광주시유형문화재 제 1호), 광주 댐 근처의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 111호)과 원효사 등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조각 등이 있다.
오늘 무등산 자락의 사찰 중 더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취를 감추거나 터만 남기기도 했지만, 현존 최고의 사찰 중 하나는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증심사다. 증심사는 통일 신라 시대인 860년, 철감선사 도윤이 세웠음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런데 사자산문의 개산조사인 철감선사 도윤은 증심사나 약사사 창건자로서보다는 화순 쌍봉사에 남은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인 철감선사 승탑(국보 제 57호)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증심사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094년 고려 혜조국사가 중건하였지만 정유재란(1597) 당시 침입한 왜구에 의해 소실된다. 광해군 1년(1609) 석경 스님 등에 의해 다시 세워진 후 여례차례 중수되지만, 6·25전쟁으로 오백전과 사성전만 남기고 다 불에 타고 만다.
1970년 대웅전이 다시 준공된 후 지장전, 비로전, 일주문 등이 다시 세워져 오늘 제법 사찰다운 풍모를 풍긴다. 그러나 증심사의 건축물은 6·25전쟁의 화마를 비켜간 조선 후기의 오백전(유형문화재 제 13호)과 사성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년 이후에 건립된 것들이다.
증심사에 남아 전하는 문화재로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 3층석탑, 석조보살입상 등 지정문화재와 범자7층석탑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보물 제 131호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우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성전 안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90센티미터 크기로 비교적 작은 불상이지만, 철불이 유행하던 신라 하대의 작품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불상은 처음부터 증심사에 있던 것이 아닌 광주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옮겨 놓은 것이어서, 진짜 증심사의 주인은 아니다.
증심사의 진짜 주인, 이는 대웅전 뒤 오백전 앞에 자리 잡고 있는 3.2미터 높이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상륜부의 일부 석재가 없어지고 1층 머릿돌이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정유재란도, 6·25전쟁의 화마도 견뎌낸 채 건립 당시의 모습을 당당하게 유지하고 있다. 3층 석탑은 높은 2중기단과 몸돌 부분의 뚜렷한 체감 비율 등이 통일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증심사의 창건 시기를 9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1971년 해체 복원되었지만 몸돌 안의 사리함이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증심사의 창건 및 탑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증심사 3층 석탑은 무등산 자락에 남아 전하는 최고의 불교 흔적이며, 증심사 창건 당시부터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켜 낸, 증심사 지킴이가 아닐 수 없다.
명문이 새겨진 개석사지 석등
증심사 3층 석탑과 함께 신라 하대에 세워진 중요 불교 유적 중 하나는 광주 댐 가장자리의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 111호)이다. 신라 하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유명한 경문왕(861~875)은 왕비와 공주의 발원을 담아 쌀 300석의 거금을 쾌척하여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 부근에 개선사란 절을 짓고, 정말 잘생긴 석등 하나를 세운다.
이 개선사지 석등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보면 간주석(상대석과 하대석을 잇는 기둥모양의 돌) 부분까지 묻힌 채로 있었다. 1992년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시멘트로 바닥을 짠 다음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일부 석재에 20세기의 돌이 들어가 조금은 어색하다.
개선사지 석등이 대단한 불교 유물인 이유는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등 중 유일하게 13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 연대가 경문왕 7년(867)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등산 자락에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유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석등에 새겨진 글자 중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발원하여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구입된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왕이 직접 나서서 만든 석등이고, 석등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까지 구입한 것을 보면 개선사지 석등에 들인 왕실의 정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왕실의 이런 정성이 정말 멋진 석등을 만들어 냈고, 1,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석등 속에 그 품격이 남아 전하고 있다. 왜 신라 경문왕이 왕비와 공주의 발원을 담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 무주에 쌀 300석의 거금을 보내 이런 석등을 세웠는지는 지금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석등이 건립되기 20여 년 전에 일어난 장보고 피살(846) 등 청해진 세력 제거와 관련된 무주인에 대한 민생 수습용은 아니었는지 추정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