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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유학(儒學)과 맹자(孟子) 주희(朱熹)
〈목 차〉
Ⅰ 유학의 창시와 공자
Ⅱ 맹자
1, 맹자약전
2. 해제
가. 맹자서문(원문과 현토)
나. 맹자연보
3. 주요사상
가. 천인합일
나. 성선설
다. 인의(仁義)의 주장
라. 공부방법
마. 역사관
바. 정전법과 목민심서
Ⅲ 주희(주자)
1. 주희의 사상
가. 리와 기의 선후관계
나. 리와 기의 동정
다. 리일분수
라. 미발과 이발
마. 심통성정
바. 천명지성과 기질지성
사. 주경함양
아. 격물궁리
자. 도심과 인심
차. 먼저알고 나중 행한다
Ⅰ 유학의 창시와 공자
유학(유교)는 공자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기원전 6-5세기경의 일로 중국사에서 말하면 춘추시대(BC 771∼BC 403)의 말기가 된다. 춘추시대는 다음의 전국시대(BC 403∼BC 221)와 일괄하여 춘추전국시대로 불린다. 이 시대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로 이어온 중국 고대의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이며,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한 통일제국의 형성(BC 221)으로 종지부가 찍히기까지의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기였다. 그 현실은 주왕조(周王朝)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졌으며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제후(諸侯)들의 할거, 강대국의 실력에 의한 약소국 병합, 나아가서는 배신(陪臣)에 의한 국군(國君)의 추방·살해와 같은 하극상(下剋上)이 여러 번씩 있었던 전국난세(戰國亂世)였다.
문화적으로 보면 주왕조(周王朝)는 선행하는 두 왕조인 하(夏)·은(殷)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상당히 진보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조 창시 후 수 백년이 지난 이 시대에 이르자 그 정치지배 제도인 봉건제도를 포함하여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는 사회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과제 아래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공자에 의한 유교의 창시이다. 공자에 이어 그 계보를 계승하는 유가(儒家)뿐만 아니라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여러 사상가가 배출되어 전국시대에 피비린내 나는 난세를 배경으로 백가쟁명(百家爭鳴)·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가 전개된다.
공자를 비롯하여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사상가들은 제각기 사상을 영위하는 출발점에서 유구한 태고부터 그 시대까지 형성되고 축적된 두 문화적 유산을 공유재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상제(上帝)' 내지는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情念)이다. 이것은 자연이나 인간, 요컨대 우주의 근원 내지 근본원리라고 하는 두 종류의 직관에서 오는 것이나 모두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에 관한 사색이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는 현실적으로 전통 내지 습속(習俗)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의례나 제도 등의 문화에 대한 신뢰, 나아가서는 그 문화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성왕(聖王)들에 대한 존경의 정념이다. 이 두 가지가 난세에 살았기 때문에 종래에는 없었던 '인간'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응시(凝視)'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전국(戰國)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져 오랜 뒤의 중국인의 종교정조(宗敎情操) 기둥이 되는 온갖 사상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저자들 계통의 도가(道家) 및 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자(孟子)·순자(荀子) 들을 배출한 유가(儒家)였다. 도가(道家)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로 향하는 사색을 전개시켜 그 참된 실재를 '도(道)'라 부르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인간행동의 기본적인 본연의 자세로 했다.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신뢰의 정조(情操)를 받아들인 것은 공자 및 유가(儒家)들이었다(다만 유교에서도 맹자 및 그 계통의 사상가는 '천(天)'의 사상까지 다루고 있다). 공자는 전통적인 제도·의례·습속 ― 공자가 '예'(禮)로서 일괄하는 것 ― 가운데에서 인간행동의 규범을 발견하고 이 '예와의 관련으로 '인(仁)'을 파악했다.
공자는 만년에 "나도 무척 늙었도다. 그토록 존경했던 주공(周公)을 오랫동안 꿈에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노쇠를 탄식하였다. 주공이란 주 왕조(周王朝)의 창시자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조카인 성왕(成王)을 도와 창시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주 왕조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다. 공자가 주공을 그토록 숭앙했던 것은, 주공이 주에 선행하는 하(夏)나라·은나라의 두 왕조 문화를 모델로 하여 풍성한 문화를 이룩하고 그럼으로써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인 주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사상의 출발점이 된 '예(禮)'는 공자에게 있어서는 주공이 창시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무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전통주의자이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미 전국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춘추시대의 말기였다. 주공에 의해서 수백 년 전에 정해졌던 '예'도 사회적으로 적합할 수 없게 된 면도 있었고, 본래 지녔던 의미가 상실되었거나 다른 의미로 바뀌거나 한 경우도 생겨났던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의 양상에서 예가 흐트러짐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를 재검토하여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려고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보수주의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예를 재검토함에 있어서 그가 택한 방법에 공자의 새로움이 있었다.
공자는 예, 즉 전통적인 의례나 제도, 습속의 의미를 인간의 측면에서 탐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와 인간의 주체성을 결부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시키고 그와 같은 인간 본연의 자세를 인(仁), 즉 인간다움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인간 연구에는 전제(前提) 내지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공자가 주체성을 확립한 인간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던 '예'는 주나라의 봉건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분질서까지 포함시켰다는 점, 또 하나는 '인(仁)'이란 글자가 암시하듯이('仁'은 '人'이 둘 겹친 글자이다) 인간의 인륜(人倫), 즉 특정한 인간관계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인간이 사회의 신분관계를 떠나서는, 또는 '개인'으로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공자가 생각한 인간은 예컨대 얼마 후 맹자에 의해서 수립되는 '오륜(五倫)'이라는 범주에서 넘어서지 못한다. 프랑스 근대사상의 선구자 몽테뉴가 파악했던,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조건(人間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유교는 공자 뒤의 전국시대에 이르러 맹자·순자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서 발전했다. 인간 연구의 면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주장되나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공자의 기본적인 인간 파악의 범주에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또한 시대의 진전과 함께 정치사상 면에서는 맹자의 왕도사상(王道思想), 순자의 법치주의에 가까운 사상이 나오나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시대가 되어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한제국(漢帝國)의 국교적 지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실천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국교(國敎)가 되기까지의 준비단계에 있는 유교를 여기서는 원시유교라고 부르기로 한다.
Ⅱ 맹자
1.맹자약전(孟子略傳)
맹자의 생졸(生卒)에 대하여 설들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전국시대의 초기인 BC372년에 태어나 BC289년이 통설(通說)이다. 기원전1043년경 주(周)나라의 희발(姬發)은 상(商 또는 殷)의 주(紂)를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물리친 뒤 호(鎬)에서 도읍한다. 그 뒤 평왕(平王) 재위기간인 기원전770년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천도하니 이를 동주시대(東周時代) 또는 춘추시대(春秋時代)라 부른다. 그러다가 진(晉) 한 위 조 세 나라로 분립된 기원전5세기 중엽부터 진(秦)의 시황제에 의하여 6국이 병합된 시기인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특정한 조대(朝代)를 지칭함은 아니다. 160개 여국으로 분립된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일곱 개의 큰 나라로 재편성되는데 이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르니, 말 그대로 전쟁으로 날이 새고 전쟁으로 날이 저무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바로 이 혼란의 시대에 맹자가 태어났으니, 곳은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鄒邑)으로 공자의 고향과 지근한 거리다. 지리적인 인연이 더해져 일찍부터 공자를 흠모해 왔으며, 성장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으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자세한 사항은 현재의 문헌으로는 추론하기가 어렵다. 참고로 맹자는 총14편으로 구성되었고 글자 수는 도합34,685자이고 낱자로는 1,959자다.
본시 공자의 사상은 자신의 3,000여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그 중 공자의 사상의 진수를 증자(曾參)에게 전하였으며, 증자는 다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이름은 伋)에게 전하였고, 그 후 자사의 제자의 제자가 맹자에게 학문을 전하였다 한다. 맹자의 공생애(公生涯)에 이루어진 약15-20여 년에 걸친 천하 주유 기간 동안의 언행과 사상은 후대 정통 유교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즉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인의설(仁義說)」「내성외왕(內聖外王)」「왕도정치설(王道政治說)」「성선설(性善說)」등으로 집약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맹자는 ‘덕이 없는 자는 결코 천하를 지배 할 수 없다’는 「혁명론(革命論)」을 앞세워 당시 열국의 군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으며, 당시 유교(유학)에 대하여 이단 시 되던 묵자. 양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등, 해박한 지식과 능란한 언변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거침없이 자신의 사상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표현하고 있으니, 흡사 2,000여 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눈앞에 마주 하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공자를 원융(圓融)에 비유한다면 맹자는 염각(廉角)이며, 공자가 성인이라면 맹자는 전사(戰士)에 비견된다. 특이할 것은, 바로 맹자의 경제 사상으로서, 당시에 이미 시장경제의 이론을 바탕으로 무역의 이로움을 피력 한 것을 보면,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마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2. 해제(解題)
주희에 의하여 체계적인 경전 주해 작업의 결과 사서집주(四書集註 : 대학. 논어. 맹자. 중용에 대한 현인들의 주석을 집대성함을 말함)가 나오면서 비로소 세간(世間)에 맹자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맹자의 중요성을 세상에 맨 처음 알린 이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 당나라 중기의 대 문장가)이다. 그는 맹자의 문장의 교묘함과 이단배척(異端排斥)의 의기(義氣)를 칭송하여 소위 ‘고문운동’(古文運動 : 한 대 이후 문장가들이 문자의 교묘한 배치와 기교에 힘쓰게 되어 문자 고유의 기능을 상실케 하자, 이에 반대하여 순수한 고문(맹자 등에 씌여진 문장)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친 것이 발단이 되어, 후대 송나라에 들어와 구양수.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등 걸출한 학자들에 의해 소위 ‘신유학운동’(新儒學運動 : 당시 성행하던 불교에 위협을 느껴 상술한 사람들에 의해 선진시대의 공자와 맹자의 원형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주로 성리학을 근간으로 발전되었으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대하여 700여 년간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음)으로 발전되면서 맹자의 사상은 주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맹자는 각 편명(篇名 : 편별 제목)은 공자의 논어와 같이 맨 첫머리의 글자를 땄으며, 문장의 형식은 전형적인 대화체이다. 생졸연대(生卒年代)에서 알 수 있듯 맹자는 공자 사후(死後) 약 100여 년 뒤에 태어났으며, 맹자 자신이 말했듯이 맹자는 공자를 사숙(私淑 : 직접 대면하지 못하여 그 사람의 뜻을 사모함)하였다. 맹자의 주석서(註釋書)로는 후한(後漢)의 정회(程會)가 지은 ‘맹자장구(孟子章句). 정현(鄭玄)의 ’맹자주‘(孟子註). 조기(趙岐)의 ’맹자장구‘. 고유(高誘)의 ’맹자장구‘. 유희(劉熙)의 ’맹자주‘ 진(晉) 기무수(綦毋邃)의 ’맹자주‘. 당(唐) 육선경(陸善經)의 ’맹자주‘. 장일(張鎰) 및 정공저(丁公著)의 ’맹자음의‘(孟子音義)등이 있었지만, 현전(現傳)하는 것은 「조기(趙岐)의 ’맹자장구‘」하나뿐이다.
송나라 이후에는 맹자 주석서가 많으며 또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주희가 지은 ‘집주(集註)’(주석서를 모두 모으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세인(世人)들은 조기의 주석서를 ‘고주’(古註 : 옛 날의 주석)라하고 주희의 것을 ‘신주’(新註)라 칭한다. 주희의 신주는 자신의 성리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풀이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기의 주석을 차용(借用)한 부분이 많다. 더욱이 주희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지나치게 부각함으로써 맹자 본연의 의미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겠다.
맹자는 성은 맹(孟) 이름은 가(軻) 태어난 나라는 제나라의 부용국인 추(鄒)땅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공자의 사후(死後) 약100여년 뒤인 4세기 중말엽(개략C372년경) 이며 활동한 시기는 전국시대의 초기이다. 전국시대라 함은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책에 기록된 시기를 말하는데, 춘추시대가 그 종언을 고하고 천하는 7개의 큰 나라로 구성되는 전환기를 가진다. 즉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양(梁)으로서 이들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른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는 정치적으로는 각국이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채택함으로써 인권(人權)은 유린되며, 사상적으로는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이 난립한 사상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바로 맹자는 이러한 제자(諸子)의 한 사람이며 그리고 그에 관한 책이름 이기도하다. 맹자(孟子)는 그의 소작(所作)이거나 아니면 그의 제자인 공명의 또는 만장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맨 처음 양나라 혜왕(梁惠王)과의 대화가 나오고 다음은 제나라의 선왕(齊宣王)과의 일들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때 맹자의 나이는 53세이고 양혜왕은 80의 나이다. 여기서 보면 제나라와 양나라 등 이른바 전국7웅에 속하는 왕들은 왕(王)이라 칭하지만 노(魯)나라나 진(陳)나라 등나라 등 부용국에 속하는 작은 나라들의 왕은 공(公)이라 칭한다. 비록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해도 엄연히 주나라(周)의 입장에서 보면 열국은 제후국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공(公)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러나 제. 연. 양의 경우와 같이 비교적 나라가 크고 힘이 있는 나라들은 이미 보편적으로 왕(王)이라 자칭 타칭되며, 7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작은 나라들만 공(公)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주나라는 쇠약할데로 쇠약해져 천자로써의 명맥만 겨우 유지 되는 형편임을 알 수 있다.
맹자는 빼어난 식견의 소유자이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능란하게 구사하는 언변(言辯)으로 혁명론을 구사하는 맹자는 당시 제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포 그 자체다. 더욱이 제나라의 선왕은 정국을 춘추시대를 대신한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극성기(極盛期)를 이끈 아버지 제위왕(威王)의 뒤를 이어 광활한 땅과 많은 인구와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전국의 통일을 꿈꾼 인물이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난 이후 제나라로 간 것은 제나라의 선왕(宣王)이야말로 자신의 지론인 인정(仁政)을 실천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최선의 인물로 본 때문이다. 그러나 6년간의 제나라 체류기간 중 객경(客卿)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선왕의 연나라 침공을 기점으로 둘은 갈라서고 만다.
맹자를 얘기하려면 맹자라는 책을 떠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맹자에 관한 기록치고 맹자의 권위를 능가 할 만 한 것은 없으니까. 맹자에 의하면 그가 벼슬을 하였던 나라는 아마도 제 나라 뿐이었고, 그 외의 나라들은 빈사(賓師)나 세객(說客)의 입장이었든 듯 하다. 그는 언필칭(言必稱) '경제를 바탕으로 한 성인의 정책'을 강조한다. 맹자에 이르기를 '사람이 제대로 된 생계가 없으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人無恒産因無恒心)'고 함은, 본래 인간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먹고 살기에 바빠 제대로 된 마음을 지니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국부책(國富策)을 제시하는데 무역(通功易事)을 강조하며 당시의 기간산업인 농업을 권장한다
제나라에서의 벼슬을 끝으로 그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남기는 작업을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난립하는 당시에 유(儒)의 입지는 미미하였다. 공자의 사상을 흠모하여 그를 사표로 삼아 살아왔던 맹자에게는 유학(유교)의 수호야말로 바로 자신의 존재목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와 언쟁도 불사한다. 이럴 때보면 그는 완전한 전사(戰士)의 모습이다.
공자에 의하여 집대성된 성인의 학문인 유학은 그의 제자인 증자(증삼)에게 전해지고, 증자는 다시 공자의 일점혈육인 자사에게 전해지며 자사의 전함은 결국 맹자에게 이른다. 이에 맹자는 마치 자신이 유학의 수호자처럼 행동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인의 학문 가운데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들에 의하여 후대 사람들에게서 공자는 원융의 성인에 비유되고 맹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로 그려지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공자에게 맹자 같은 이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맹자집주의 서문과 지금까지 전해지는 맹자의 연보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청나라 狄子奇의 '孟子編年'참조). 아울러 이 기록은 맹자(맹자의 본명은 孟軻이며, 그의 저작물 이름이 맹자이다)의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므로, 현존하는 어느 기록보다 사실에 근접할 것으로 사료된다.
가. 孟子序文(原文懸吐)
史記列傳에曰 孟軻는騶人也니受業子思之門人이라道旣通하여游事齊宣王하되宣王不能用하여適梁하되梁惠王不果所言하니則見以爲迂遠而濶於事情이라當是之時하여秦用商鞅하고楚魏用吳起하고齊用孫子田忌하여天下方務於合從連衡(橫)하여以攻伐爲賢이나而孟軻는乃述唐虞三代之德이라是以로所如者不合하여退而與萬章之徒로序詩書하며述仲尼之意하여作孟子七篇하시니라
韓子曰,堯以是傳之舜하시고舜以是傳之禹하시며禹以是傳之湯하시고湯以是傳之文武周公하시니文武周公은傳之孔子하시고孔子는傳之孟軻하시되軻之死로不得其傳焉하니荀與揚也는擇焉而不精,하며焉而不詳이라
○又曰,孟氏는醇乎醇者也며荀與揚은大醇而小疵니라
○又曰,孔子之道는大而能博하여門弟子不能徧觀而盡識也라故로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이러니其後離散하여分處諸侯之國하고又各以其所能으로授弟子하니源遠而末益分이라惟孟軻는師子思하며而子思之學은出於曾子라自孔子沒로獨孟軻氏之傳이得其宗하니故로求觀聖人之道者는必自孟軻로始하니라
○又曰 揚子雲이曰 古者에 楊墨塞路어늘孟子辭而闢之廓如也라하니夫楊墨行이면正道廢하나니孟子雖賢聖이나不得位하야空言無施하니雖切何補리오然이나賴其言하여而今之學者 尙知宗孔氏하여崇仁義하고貴王賤覇而已니其大經大法을皆亡滅而不救하며壞亂而不收하여所謂存十一於千百하니安在其能廓如也리오然이나向無孟氏면則皆服左袵而言侏離矣리니故로愈嘗推尊孟氏하여 以爲功不在禹下者는爲此也니라
○或問於程子曰 孟子를還可謂聖人否아程子曰 未敢便道他是聖人이라然이나 學已到至處니라
○程子又曰 孟子有功於聖門은不可勝言이라㑖尼 只說一箇仁字를孟子開口便說仁義하며仲尼 只說一箇志를孟子便說許多養氣出來하니只此二字는其功甚多니라
○又曰 孟子有大功於世는以其言性善也니라
○又曰 孟子性善養氣之論은皆前聖所未發이니라
○又曰 學者全要識時하니若不識時면不足以言學이라顔子陋巷自樂은以有孔子在焉이나若孟子之時엔世旣無하니安可不以道自任이리오
○又曰 孟子는有些英氣하니才有英氣라도便有圭角이니英氣甚害事니라如顔子는便渾厚不同하니顔子는去聖人只毫髮間이요孟子는大賢이니亞聖之次也니라或曰 英氣見於甚處잇가曰 但以孔子之言으로比之하면便可見이니且如氷與水精이라非不光이로되比之玉하면自是로有溫潤含蓄氣象하여無許多光耀也니라
楊氏曰 孟子一書는只是要正人心이니敎人存心養性에收其放心이니라至論仁義禮智하여는則以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으로爲之端하며論邪說之害하여는則曰 生於其心하여害於其政이라하고 論事君하여는則曰 格君心之非하여一正君而國定하라하니千變萬化가只說從心上來라人能正心이면則事無足爲者矣리라大學之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其本이只是正心誠意而已니心得其正然後 에知性之善이니故로孟子遇人에便道性善이니라
歐陽永叔 却言 聖人之敎人에性非所先이라하니可謂誤矣라人性上엔不可添一物 이니堯舜所以爲萬世法은亦是率性而已니라
所謂率性은循天理 是也며外邊의用計用數는假饒立得功業이라도只是人欲之私니與聖賢作處로天地懸隔하나니라
나. 맹자의 연보(年譜)
BC372년4월2일 : 鄒나라에서 출생(제나라의 부용국)
358년 : 魯나라에서 공부함
332년 : 鄒나라 穆公을 만남
331년 : 齊나라의 平陸에 머묾
330년 : 추나라에서 任나라로 옮김
329년 : 제나라의 평륙에서 서울인 임치로 감
328년 : 제나라의 賓師가 됨(손님의 입장으로 제후의 스승이 됨)
326년 : 제나라를 떠나 宋으로 감
325년 : 송에서 추나라로 돌아옴
324년 : 추나라에서 滕나라로 감
322년 : 등에서 추나라로 돌아옴
320년 : 梁나라로 가서 惠王을 만남
319년 : 양에서 제나라로 감
318년 : 제나라의 卿이 됨
317년 :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가서 장례를 치룸
315년 :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돌아옴
314년 :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로 감
313년 : 宋牼을 石丘에서 만나 외교에 대하여 가르치다
312년 : 송나라를 떠나 薛나라로 감
311년 : 설에서 노나라로 갔다가 다시 고국인 추로 돌아감
289년1월15일 : 별세
3. 주요사상(主要思想)
가. 천인합일(天人合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한 성품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단한 자기수양으로 천명을 바로 하여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 주장한다(正命而俟死).
나.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 된다. 도의 근원을 멀리 요순으로 시작하여 우 탕 문 무 주공에 이르고 다시 공자에서 자신으로 이어진다는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제를 수립한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하지 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과 옳지 않는 일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와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 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인 예(禮)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인 지(智) 등 사단(四端)이 존재하며, 이러한 본성을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마음이기에 인간의 성품은 본래부터 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질적인 예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위험한 우물 속으로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아이를 구한다는 논설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확충하게 되면 결국 성인(聖人)에 이르게 되며, 이러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결국 짐승에 진배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위대해 질 수 있는 가능성에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나도 저리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게 되는 것이다.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性善説)은 인간의 천성은 착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천성은 착하다 라고 한다면 모든 인간은 착해야하는데 현실에서 보면 착하지 않는 인간들이 엄연히 존재하니 과연 이는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이다. 이에 대하여 이른바 신유학을 표방했던 송나라(북.남송)와 명나라에 걸친 신진학자들은 성품에 대하여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여 천명지성은 인간의 천부적인 도덕성으로 기본적으로 착하지만 기질지성은 타고날 때의 경중 청탁 후박 등의 차이로 인하여 경 청 후의 기질은 착한사람이 되고 중 탁 박의 기질을 받으면 착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고 주장하였는데, 나의 견해로 이는 맹자가 주장했던 성선설과는 다르다.
얼핏 보면 신유학자들의 주장이 정치하고 완벽 한 듯 보이지만 이는 본질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의 본질은 무엇이며 현존하는 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내가 해석한 성선설은 이러하다. 맹자가 주장했던 천명지성은 이른바 도덕적 성품이니 인 의 예 지 등이 그것이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 자신은 물론 타인과 타물을 아끼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의는 나쁜행동을 보면 분노하고 스스로 지키려는 정의심이 그것이다. 예는 타인을 배려하고 질서를 지키려는 마음이고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변하는 마음이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마음이라는 것이 맹자 성선설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맹자가 주장한 도덕심인 인의예지는 곡식의 씨앗(종자)으로 볼 수 있다. 여기 두 사람의 농부가 있다. 한사람은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한데 반하여 다른 한사람은 게으르다. 이들은 봄이 되자 똑 같은 씨앗을 밭에다 뿌린 뒤, 부지런한 농부는 때때로 김매고 물주고 거름 주며 뿌리를 북돋운데 반하여 다른 게으른 농부는 일체 곡식의 성장을 돕지 않거나 제대로 돕지 않을 경우 가을의 수확은 달라진다. 즉 부지런한 농부의 수확은 풍요로움에 비하여 게으른 농부의 수확은 보잘것없을 것이다. 도덕심도 마찬가지다. 인의예지(仁義禮智)한 도덕심을 부지런히 닦고 가꾸면 착한사람이 되고 이에 반하면 착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맹자가 보기에 착하지 않는 경우는 기질의 품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니 고자장에는 이러한 귀절이 있다. “우산의 나무는 매우 울창하여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언젠가 우산 근처에 큰 도시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땔나무와 목재채취 등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우산에 올라와 나무를 베어가니 머잖아 우산은 헐벗어 보기가 흉해졌다. 그러나 낮의 에너지와 밤의 휴식. 비와 이슬의 도움으로 베어진 그루터기에서 싹이 트고 조금씩 우산은 푸르름을 찾아가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그나마 제 모습을 찾아가는 우산에다 소와 양을 치니 드디어 우산에는 풀한포기 나무한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민둥산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래의 성질이겠는가?”라고.
그렇다. 맹자의 견해로는 인간은 누구나 착한 심성을 타고 났지만 성장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천부의 본성을 침해받지 않고 기르고 보존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반면 자신의 게으름과 주위의 나쁜 환경 등으로 인간 고유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착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학자들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니 맹자의 식견은 위대하다 할 것이다.
다. 인의(仁義)의 주장
맹자 전편을 관통하는 주된 사상은 바로 인의(仁義)다. 인이란 사랑의 큰 개념으로 인이 바로 인간을 규정하는 주요한 질료다. 즉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진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만일 어진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단언한다. 인이란 사람이 살아갈 편안한 집이요 의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큰 길이다.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대도(大道)를 구현하고, 만일 뜻을 얻지 못한다면 자기 혼자서 도를 지니고 살아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아니하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절대 권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떳떳함이 바로 대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장부는 지대지강(至大至剛)하고 천지(天地)에 유통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니고 있으니, 이를 키우는 것은 바로 존심양성(存心養性)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표는 어디인가? 유학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목표는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다.
라. 공부 방법
-공부란 다른 게 아니다. 잡으면 얻게 되고 놓으면 잃어버리는 것(操則得之捨則失之)
-학문의 길이란 다름이 아니라, 달아난 마음을 구할 따름이다(學聞之道無他求其放心而已)
-독서나 공부는 쌓음(蓄積)이 관건이다. 쌓여지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에 불과하다.
-가득차면 다시 나아가라
공부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다.
원류를 이루는 샘이 아득하여 그 흘러내리는 물이 밤과 낮의 쉼도 없으며, 흘러내리다 웅덩이를 만나면 밑바닥부터 가득 채워 수면이 높아지면 다시 아래로 흘러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源泉混混不舍晝夜盈科而後進放于四海)
-거듭 생각하고 매사에 의심하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책만 읽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위험해진다’고 하셨다. 독서와 사유의 균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귀와 눈 같은 기관(器官)은 자체적인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관은 사물에 접촉하면 끌려갈 뿐이다. 마음이란 생각 할 줄 알기에 생각하면 얻게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의역지(以意逆志)
의(意)는 책을 읽는 사람의 생각이며 지(志)는 글을 쓴 사람의 뜻이다. 이 말은 자신의 생각으로 글쓴이의 뜻을 유추함을 가리킨다.
-요약(要約)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 할 수 있을 때 진정 체득(體得)의 단계에 이른다. 만일 수 십 년간에 걸쳐 공부를 했다 해도 체득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다.
마. 역사관
-진신서즉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 : 만일 서경의 기록을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존재하지 않음만 못하다.
*무성(武成)편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공격함에 많은 이들이 죽어 흐르는 핏물에 쇠로 만든 절구공이가 떠내려갔다는 내용에 대하여 맹자는 “천하의 가장 어진이가 천하의 어질지 않는 이를 공격함에 어찌 그 많은 피가 흐른단 말인가?” 라 하면서 “서경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처라리 서경이 존재 않음만 못하다”라 한 말임. 이는 역사를 판단함에 문자에 천착하여 그 역사적 사실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바. 점전법(정전제)과 목민심서
목민심서(牧民心書) 제6장 호전육조(戶典六條)는 농촌의 현실에 맞는 세금 징수에 관한 조항을 설명한 것이다. 조세(租稅)란 국가를 경영하고 가정을 운영하는 근간이며 나아가 공맹(孔孟)이 주창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기 위한 인정(仁政)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세금이란 정도에 지나치면 국가는 부유해지는 반면 가계(家計)는 궁핍(窮乏)하며, 가계가 넉넉해지고 여유로우면 반대로 국가경영이 어렵다. 이처럼 조세는 칼의 양면과도 같고 천칭(天秤)과도 같아 이를 사용함에는 중용(中庸)이 중요하다.
목민심서에는 많은 예를 들었지만 여기서는 등문공(滕文公)과 맹자(孟子)와의 대화에 나오는 부분을 취하였다. 맹자가 등문공을 만난 것은 BC31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맹자 자신의 신념인 왕도정치를 통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여 행복한 민생(民生)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택한 제(齊)나라를 떠나 고국인 추(鄒)로 돌아온 이후다. 사실 맹자에게 있어 당시의 전국(戰國)에서 제(齊)나라는 매우 매력적인 나라였으니, 많은 인구와 넓고 비옥한 땅 그리고 풍부한 물산을 가진 동방의 강국이었고, 더욱이 위왕(威王)의 위업을 계승한 선왕(宣王) 또한 왕천하(王天下)의 충분한 자질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제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 실의(失意)에 찬 맹자에게 있어 등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그래도 인정을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실험장이기엔 충분했다.
자질(資質)이 출중했던 등문공은 세자 때 송(宋)나라에서 맹자와 만나 알게 된 사이로 그 후 부왕(父王)인 정공(定公)이 죽고 문공(文公)으로 즉위 한 뒤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정(仁政)을 시행하게 되는데 그 핵심이 바로 정전법(井田法)이다. 정전법에 대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며, 또한 실제 역사적으로 정전법이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 다만 맹자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의 공포와 가혹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줄 왕도정치를 펼침에 목적을 둔 그에게 있어 정전법은 최선(最先)의 대안(代案)임은 분명하다.
사실 정전법에 대해서는 이 보다 먼저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편 끝부분에 실려 있는 자료가 최초의 기록이다. 맹자(孟子)가 양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간 것은 서력기원전(BC)321년경으로 추정되니 이때 맹자의 나이는 53세가 되며 당시 제나라의 군주인 선왕(宣王)의 재위 3년차가 된다. 이 부분은 제선왕(齊宣王)과의 국정 전반에 관한 토론에 등장하는 것이며 양혜왕장구 상편에 소속된다. 논설은 맹자와 제선왕이 문답형식으로 이어지는 대화가운데 백성들의 산업에 관한 법도 제정에 관한 언급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먼저 한 가족이 가지는 집은 둘로서 면적은 오늘날의 면적으로 150평이며 절반인 75평(二畝半)은 농사철에 기거하는 곳으로 정지(井地)에 딸려 있고, 나머지 절반인 75평은 본가(本家)인 마을(또는 성안)에 있다. 집 둘레에는 담장을 치는 대신 뽕나무를 심어 여기서 생산되는 뽕잎으로 양잠(養蠶)을 하고 그것으로 비단을 생산하여 상대적으로 추위를 많이 타는 노인들의 의복으로 삼으며, 집안에는 개와 돼지 닭 등을 때 맞춰 기름으로서 노인들에게 단백질 공급원인 고기를 공여(供與)한다.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는데, 만일 먹고 사는 것이 해결 되었음에도 예의(禮義)를 모른다면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기에 그제서야 학교를 만들어 교육(敎育)에 힘써 인문적 지식의 습득과 부모와 형장(兄長) 등에 대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가르치며 나라에서는 백성들을 위하는 어진정치(仁政)을 펼치는 것으로, 이는 맹자의 일관된 사상인 무항산인무항심(人無恒産因無恒心)의 근간이다.
또한 전제(田制)의 핵심인 정전(井田)에 관한 논의는 양혜왕 장구 하편에서도 보이는데 이 또한 제선왕과 맹자와의 문답이다. 제선왕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하여 묻고 이에 대하여 맹자가 답한 것으로 예전 주(周)를 창건한 문왕(文王)이 옛 주나라의 땅이었던 기(岐)를 다스릴 때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고 벼슬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대로 안정된 봉록을 줌으로서 국가경영에 진력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소국(小國) 등나라의 신임군주인 문공과의 문답을 기록한 등문공장구 상편의 기사에는 정전법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논의된다. 즉 선진(先秦)의 하(夏)나라의 세법(稅法)은 공법(貢法)으로 이는 몇 년간에 걸쳐 생산되는 소출을 헤아려 그 중간인 상수(常數)를 도출하고 이를 세율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의 문제는 풍년든 해는 정해진 세율(稅率)로 세금을 낸다 해도 오히려 적게 내는 결과가 되어 백성들의 소비가 증진되어 국가적인 낭비를 초래하게 되며, 흉년에는 설혹 흉년을 감안하여 세금을 적게 거둔다 해도 생산량에 비하여 과대한 세금지출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곤궁해져 노약(老弱)들은 구덩이로 밀어 죽이고 장자(壯者)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유랑하게 되니 이는 산술적 평균인 절충법(折衷法)으로 최악의 세법이다.
이에 비하여 하(夏)나라 다음세대인 은(殷 또는 商)의 세법은 조법(助法)으로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정전제(井田制)의 효시(嚆矢)다. 즉 가로세로가 반듯한 땅을 골라 이를 우물정(井)자로 나누면 9개의 구획으로 나뉘는데 한 구역은 2,100평(70畝)으로 한 가운데의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바깥의 8구역은 개인에게 지급되는 사전(私田)이로 삼는다. 공전의 농사를 우선으로 함은 선공후사(先公後私)로서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여기서 나는 소출을 세금으로 국가에 들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전의 소출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또한 공전(公田)의 일부인 420평(14畝)은 공동작업장과 우물 등의 공공의 용도로 활용되어 실제 생산에는 공여하는 땅은 1,680평(56畝)이며, 이는 개인인 여덟 가구의 총 생산량인 16,800평(560畝)의 10분의 1에 해당되어 결과적으로 세금은 생산량의 10분의 1일에 부합되니 이를 조법(助法)이라 한다. 조법(助法)이라는 명칭은 국가에 납입하는 세금인 공전의 농사는 백성들의 손을 빈다(助)하여 붙여진 것이다.
은나라를 이어 천하를 차지한 주(周)나라 또한 은나라의 조법을 본받아 철법(徹法)을 시행하는데 기본적인 골격은 은나라의 정전(井田)과 같은데 다만 면적이 2,100평(70畝)에서 3,000평(100畝)으로 늘어난 것이 다를 뿐이다. 주나라의 철법(徹法)으로 시행된 정전제는 산과 물이 없는 평평하고 비옥한 땅을 골라 가로세로 300미터로 잘라 이를 삼등분하면 가로 세로 각각 100미터로서 면적은 3,000평이 된다.
또한 하은주 삼대(三代)는 공히 생산량의 10분의 1을 내는 데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 또한 생산량의 10분의1을 내는 공법(貢法)을 적용한다. 그러나 선대의 이러한 법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들면서 세금이 더욱 늘어나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과 전쟁 등으로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제(田制)를 비롯한 수취체제의 개선과 국가제정의 확보와 민생의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깊은 성찰의 결과 조선후기 중농주의(重農主義) 학자들로부터 거론되었으니 그 가운데 본 목민심서의 저자인 다산의 논설 가운데 여전제(閭田制)가 있다. 즉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달라서 땅이 편협하고 산이 많으며 더욱이 땅의 비척(肥瘠)의 차이가 극심하다. 그러므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정전제를 구사한 것이 균전제(均田制)의 또 다른 변형인 여전제다.
산천(山川)을 경계로 한 일정한 지역을 하나의 여(閭)로 하여 여장(閭長)의 지휘 하에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일한날짜에 따라 수확을 균등하는 제도이니 땅을 정(井)으로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 실제의 내용은 정전제와 다름없다. 맹자는 말씀한다. 천하에 있어 인민(人民)이 가장 고귀하고 다음은 국토이며 맨 마지막에 군왕이 있는 것이라고. 인민을 위하는 정치야말로 선왕(先王)의 정치이니 이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지은 소이(所以)이기도 하다.
부록
〔惠王章句上〕
○五畝之宅樹之以桑五十者可以衣帛矣鷄豚狗彘之畜無失其時七十者可以食肉矣百畝之田勿奪其時數口之家可以無飢矣謹庠序之敎申之以孝悌之義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七十者衣帛食肉黎民不飢不寒然而不王者未之有也
(注)五畝之宅一夫所受二畝半在田二畝半在邑田中不得有木恐妨五穀於墻下植桑以供蠶事五十始衰非帛不煖未五十者不得衣也畜養也時謂孕字之時也如孟春犧牲毋用牝之類也七十非肉不飽未七十者不得食也百畝之田亦一夫所受至此則經界正井地均無不受田之家矣庠序皆學名也申重也丁寧反覆之意善事父母爲孝善事兄長爲悌頒班同老人頭半白黑者也
〔梁惠王章句下〕
○王曰王政可得聞與對曰昔者文王之治岐也耕者九一仕者世綠(下略)
(注)岐周之舊國也九一者井田之制也方一里爲一井其田九百畝中劃井字界爲九區一區之中爲田百畝中百畝爲公田外八百畝爲私田八家各受私田百畝而同養公田是九分而稅其一也
〔滕文公章句上〕
○夏后氏五十而貢殷人七十而助周人百畝而徹其實皆什一也徹者徹也助者藉也
(注)此以下乃言制民常産與其取之之制也夏時一夫受田五十畝而每夫計其五畝之入以爲貢商人始爲井田之制以六百三十畝之地劃爲九區區七十畝中爲公田其外八家各受一區但借其力以助耕公田而不復稅其私田周時一夫受田百畝鄕遂用貢法十夫有溝都鄙用助法八家同井耕則通力而作收則計畝而分故謂之徹其實皆什一者貢法固以十分之一爲常數惟助法乃是九一而商制不可故周制則公田百畝中以二十畝爲廬舍一夫所耕公田實計畝通私田而百畝爲十一分而取其一蓋又輕於十一矣竊料商制亦當似此而以十四畝爲廬舍一夫實耕公田七畝是亦不過十一也徹通也均也藉借也
○龍子曰治地莫善於助莫不善於貢貢者校數歲之中以爲常樂歲粒米狼戾多取之而不爲虐則寡取之凶年糞其田而不足則必取盈焉爲民父母使民盻盻然將終歲勤動不得以養其父母又稱貸而益之使老稚轉乎溝壑惡在其爲民父母也 田制
○詩云雨我公田遂及我私惟助爲有公田由此觀之雖周亦助也
○請野九一而助國中什一使自賦
(注)九一而助爲公田而行助法也國中郊關之內鄕遂之地也田不井授但爲溝洫使什而自賦其一蓋用貢法也卿以下必有圭田圭田五十畝餘夫二十五畝死徙無出鄕鄕井同井出入相友守望相助疾病相扶則百姓親睦方里而井井九百畝其中爲公田八家皆私百畝同養公田公事畢然後敢治私事所以別野人也
Ⅲ. 주희(朱熹)
공자께서 제창하시고 맹자가 살을 붙인 유가의 사상은 천 여 년이 지난 송대에 와서 그 찬란한 꽃을 피우는데, 그 중에서 주희(주자)는 이정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700여년간 동아시아의 사상계의 한 축을 이룬다. 여기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주희의 사상을 간추려 게시함으로서 유학 및 리학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주희(朱熹)의 사상(思想)
주희의 字는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남송 고종건염(建炎)4년(1130) ~ 영종 경원(慶元)6년(1200) 이들의 학파를 민학(閩學)이라 한다. 주희는 젊었을 때에는 사장에 탐닉하였고 불교와 도가에 심취하였으며, 여러 학문에 대하여도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관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19세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그 후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의 주부로 임용되었다. 동안에서 돌아온 후 양시(楊時)의 2대 제자인 이동(李侗)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이 때부터 도학의 발전을 위한 길을 걸었다.
주희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사서집주(四書集註)』『사서혹문(四書或問)』『주역본의(周易本義)』『태극해의(太極解義)』『서명해의(西銘解義)』『주자어류(朱子語類)』164권,『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20권 등이 있다.
가. 理와 氣의 선후 관계
‘理란 관연 무엇인가?’ 그러나 理는 결코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물리’ ‘도리’ 등과 서로 통하는 개념인데, 이렇듯 理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성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도덕법칙, 교제원칙, 추리원리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理는 사물의 규율과 도덕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주희는 이정(二程:程顥,程頤 형제를 말함)의 철학 중에서 理와 사물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계승하였고, 또한 그것을 진일보시킨 것이다. 그는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器(기:그릇)이다. 기가 되는 까닭(所以然)으로서 理는 道이다”라고 제기 하였다.
사물과 器는 형상이 있으며, 감성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理 또는 道는 사물의 본질과 규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理와 사물이 본체와 작용(즉 體用)에서 같은 근원임을 밝힌 정이의 사상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것이다. 理의 입장에서 보자면 理는 본체(體)이며, 모습(象)은 작용(用)이다. 理안에 모습이 있으니, 그 근원은 하나이다. ‘뚜렷함과 은미함에는 차이가 없다’라고 하는 말은, 모습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습은 뚜렷하고 理는 은미하다. 그렇지만 모습 안에 理가 있으므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주희가 생각할 때 사물은 뚜렷하며 理는 깊고 은미하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사물에는 理가 있다. 또한 理의 입장에서 보자면 理에는 형상과 흔적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사물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물 발전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이가 “본체와 작용은 그 근원이 하나이고, 뚜렷함과 은미함에는 차이가 없다(體用一源,顯微無間)”고 말한 뜻이다. 이러한 논리에 비추어 보면, 사물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물의 理는 존재 할 수 있다.
주희는 ‘理는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理在事先)‘ ’理는 사물 위에 존재한다
(理在事上)‘는 견해를 밝혀 理와 사물의 선후 관계를 설명한다. 만일 理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직 사물이 생기기 전이라도 이미 사물의 理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理만 존재할 뿐이지 실제로 그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일(事)은 없더라도 이미 도리는 있다. 예를 들면 임금과 신하가 있기 전이라도 이미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있기 전이라도 이미 아버지와 자식의 도리가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원래 이러한 道가 없었는데,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이 생긴 후에야 그 도리를 만들어 집어넣었겠는가?
요컨대 어떠한 사물이 아직 생성되기 전이라도 그 사물의 규율이나 법칙, 또는 원리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며, 환언하면 모든 사물의 법칙 즉 인류사회의 모든 보편적 원칙은 영원히 존재하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理와 氣 문제를 논하였다. 장재(張載:횡거선생)는 ‘기(氣)’를 강조하였지만 ‘리(理)’를 소홀히 하였고, 이정은 理를 중시하였지만 氣를 소홀히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모든 사물과 器는 理와 氣로 구성되었으며, 氣는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이고, 利는 사물의 본질과 규칙이다. 즉 우주 만물은 모두 理와 氣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천지간에는 理도 있고 氣도 있다. 理는 형이상학적인 道이며, 사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氣는 형이하학적인 器이며, 사물을 생성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성 될 때는 반드시 理를 품부 받은 뒤에 性이 생기고, 氣를 품부 받은 뒤에 형체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만물을 형식과 질료라는 두 요소로 보는 견해와 유사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희랍인들의 형식이란 주로 사물의 형식과 보편자를 가리키는 반면, 주희의 理는 주로 사물의 법칙과 규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理와 氣사이에는 과연 선후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천지가 있기 전에는 필경 理만 있었을 뿐이다. 이 같은 理가 있기에 이 같은 천지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理가 없었다면 이러한 천지도 없고, 사람과 사물도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으리라. 理가 있으므로 氣가 있으며, 氣가 유행하여 만물을 발육시킨다. 결국은 理가 氣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주희는 한 종류의 사물의 理가 그 종류의 개별적인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근거하여 한 종류의 사물의 理가 그 종류의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은, 理를 절대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理가 氣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사상은 ‘理가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사상을 우주 본원의 문제에까지 확장함으로써 도달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물질세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 보편 규율이 이미 존재한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객관적 개념에 속하는 것이다.
만년에 주희는 만약 理가 氣보다 앞선다고 단정해 버린다면,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수정하게 된다. 예를 들면, 리학의 창시자인 정이는 “동정에는 끝이 없고, 음양에는 시작이 없다(動靜無端,陰陽無始)”고 하였으니, 만약 理가 氣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주의 음양에 시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理가 앞서 존재하고, 氣는 나중에 존재하는가?’하고 묻기에, “理와 氣는 본래 선후를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계속 근본을 유추해 나아가면, 마치 理가 氣보다 앞서 듯하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理와 氣 사이에는 선후가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일종의 선후관계가 있는 듯 하다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은, 理가 근본이고 본체이며 제1성(性)이며, 氣가 제2성(性)이 된다는 것이다.
나. 理와 氣의 동정(動靜:움직임과 고요함)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는“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는다
(太極動而生陽)”하였으니, 이는 태극 자체가 운동하는 실체임을 선언한 것이다. 즉 주돈이는 태극을 혼연한 하나의 기운(混然一氣)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희는 태극을 理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문제점이 제기 되는데, 그것은‘ 理로 규정한 태극은 과연 동정(動靜) 할 수 있는가?’ 이다.
주희의 태극도설의 해석을 보면
태극이란 본래 그러한 오묘함이며, 동정이란 태극이 타는 기틀(機)이다. 태극은 형이상학적인 道이며, 음양은 형이하학적인 器이다. 주희는 동정이란 현상세계의 표현에 속하는 것으로, 이는 음양 두 氣의 동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태극자체의 동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본체로서의 태극은 음양의 동정 안에 존재하는 理이며, 그 자신은 동정하지 않는다. 동정이란 단지 태극이 타는 氣라는 기틀의 동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컨대 “양은 움직이고, 음은 고요하다”는 주돈이의 말은, 결코 태극 자신이 동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동정하는 주체는 음양이며 동정하는 근거는 理이다. 예를 들면, 理가 음양을 타는 것(즉 동정함)은 마치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理의 동정은 기의 움직임에 의한 상대적인 동정일 따름이다.
다. 리일분수(理一分殊)
‘리일분수(理一分殊)란 정이가 『서명(西銘:북송 초기의 사상가인 장재가 만든 글이름)』에 관한 양시(楊時:주희의 3대 스승)의 의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명제이다. 양시는 서명의 내용 중에 묵가의 겸애설(兼愛說: 전국시대 초엽의 사상가인 묵자의 주요사상. 즉 차등 없는 박애주의)과 혼동 될 만한 병폐가 담겨 있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이는 ’서명에서는 理는 하나인데, 그 직분이 나뉘어 다르게 된 점(理一而分殊)‘을 밝혔다.
그러나 묵자의 겸애설은 근본이 둘이면서도 나뉨이 없다. (이 말은 나와 남의 근본이 다른 것은 인정하고, 사랑함에는 구분이 없다는 뜻) “직분이 나뉘어 다르게 된다는 주장의 병폐는, 사사로운 감정이 강해져 仁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고, 나뉨이 없다는 주장의 병폐는 겸애 하면서도 義가 없다는 점이다“라고 정이는 답변하였다.
정이가 답변과정에서 제시한 ‘리일분수’의 명제는, 상이한 대상에 대한 한 개인이 담당하는 의무가 달라지는 점을 ‘서명’의 만물일체설이 결코 배척하지 않았음을 강조함과 아울러, 일반적인 도덕원리는 서로 다른 구체적인 규범으로 표현 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구체적 규범에는 공통적인 도덕원리가 함유되어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주희는 정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간에서 理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강건한 건도(乾道)는 남성적인 것을 이루고, 유순한 곤도(坤道)는 여성적인 것을 이룬다. 이 두 개의 氣가 교감하여 만물을 생성한다. 그러나 大小의 구분과 친소(親疎:가까움과 멂)의 등급은 열.백.천.만 가지여서 결코 같아질 수 없다. ... 건(乾:주역64괘중 제1번 순양괘)을 아버지로 하고, 곤(坤:주역64괘중 제2번 순음괘)을 어머니로 한다. 생명을 지닌 사물 가운데 그러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理는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은 태어나면서 자기 친속들이 있기에, 각자 부모를 모시고, 자기 자식을 양육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직분도 어떻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은 우주 안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관계와 지위(즉 대소와 친소)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에도 차이가 있게 된다. 따라서 仁愛의 원칙에도 사실상 친소의 차등이 있다.(이 말은 나의 자식과 타인의 자식간에는 멀고 가까움의 차등이 있음을 말함)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仁愛를 실천하는데 친소의 차등은 있을 지라도, 그 속에 체현 되는 도덕원칙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도덕의 기본원칙은 서로 다른 도덕규범으로 표현되며, 구체적인 규범 속에서도 보편원리가 관통하는 것이다. 주희는 한 걸은 더 나아가 윤리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관계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겼다.
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도리는 같은데, 그 직분이 다르기 때문에, 君臣간에는 군신의 도리가 있고, 父子간에는 부자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지위가 다르면 그 도리의 적용이 같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임금이라면 마땅히 어질어야 하며, 신하라면 마땅히 공경해야 하며, 자식이라면 마땅히 효도해야 하며, 아버지라면 마땅히 인자해야 한다. 모든 사물은 각기 이러한 도리를 갖는데, 그 적용은 서로 다르다. 그렇더라도 모두 하나의 도리를 갖는데, 그 적용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도리가 유행한 결과임을 간과 할 수 없다.
일반적인 도덕 원칙은 상이한 구체적 행위규범으로 표현되며, 각종의 도덕행위에는 통일적인 보편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리일분수’가 윤리적인 도리임을 의미한다. 만물을 합하여 말하면 하나의 태극이며, 만물은 모두 한 가지이다. 그 근본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하나의 理의 실체를 나누어 가지며, 그것을 본체로 삼는다. 그러므로 만물 안에는 각기 하나의 태극이 있게 된다.
본래는 하나의 태극일 따름인데, 만물은 각기 그것을 품부받아 하나의 태극을 온전하게 갖추게 된다. 예를 들면 달은 하늘에 하나만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도처에 분산된 달을 보고서, 달이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합해 말하면 하나의 태극이요. 나눠 말하면 각개의 사물마다 각개의 태극을 갖는다. 천지만물을 총체적인 하나로 생각할 때, 그 안에는 하나의 태극이 있고, 이 태극이 바로 우주의 본체이자 본성이며, 그 태극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물은 우주의 본체인 태극을 품부 받아 자신의 성리(性理)로 삼는다.- 總體一太極,物物一太極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의 理가 있다. 사물이 다르면 그 사물에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보편적인 理도 다르다. 모든 건물에는 공통의 理가 있지만, 그 건물의 理는 방과 주방 등 상이한 형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그 쓰임이 체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의 이치’라는 말은, 만물의 구체적인 규율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층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 동일한 보편원리의 표현이면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라. 미발(未發)과 이발(已發)
미발(未發:희노애락이 겉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고요하고 중정한 상태)과 이발(已發:희노애락이 이미 발하여진 상태. 발현하여 모두 중용에 맞음을 和라 한다)은 정이 이후 양시와 호굉 등이 모두 중시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심리학설 자체의 이론적인 의미를 지님과 아울러 수양공부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아울러 지니는 것이다. 대체로 양시로부터 이동(주희의 선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발”체험을 중시하였고, 호굉은 “이발”일 때 노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주희의 ‘미발이발설’을 살펴보면,
첫째, ‘미발’과 ‘이발’은 심리활동의 상이한 단계나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사려가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고, 사물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희.노.애.락의 제반 감정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다. 이 때는 심체(心體)의 유행이 고요하면서 움직이지 아니하는 상태이며, 천명지성(天命之性: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부여받는 성품. 즉 인.의.예지를 말함)의 본래 모습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지극히 중정하지만 이미 시체의 유행상태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성(性)이라 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의 작용은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끊임없는 마음의 작용 과정은 두 상태 또는 두 단계로 나뉠 수 있다. 사려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의 마음의 상태는 미발이고, 이미 생긴 뒤의 마음의 상태는 이발이다. 사려가 아직 생기기 전이라도 마음의 작용이 한순간도 정지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를 ‘고요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미발로 규정 할 수는 있다. 사려가 생긴 뒤라면 마음의 작용이 분명하게 활동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를 ‘느끼어 마침내 통한다’는 이발로 규정 할 수는 있다.
소위 중정하다의 中은 마음의 미발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性을 의미함은 아니다.주희는 이러한 심성론에서 출발하여 사람의 수양측면을 구분하기를, 하나는 미발공부 즉 주경함양(主敬涵養)이며, 또 하나는 이발공부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이 말은 “함양은 반드시 敬으로 해야하고, 학문의 진작은 致知(치지:지식에 이름) 하는데 달려있다(涵養須用敬,進學則在致知)“는 정이의 사상을 계승하여, ”주경으로 그 근본을 세우고, 궁리로 그 앎을 진전시킨다
(主敬以立其本,窮理以進其知)“는 학문의 종지(宗志:주된 뜻.지침)를 제기 하였다.
둘째 ‘미발’은 性이고, ‘이발’은 情이다.
주희는 ‘미발’과 ‘이발’ 개념을 전술한 첫 번째의 용법으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심성론 자체에서 性과 情사이의 체용(體用:본체와 작용)관계를 가리키는데 이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性과 情은 하나의 사물인데, 그렇게 나뉘어지는 것은 단지 미발과 이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미발과 이발로 그것들을 나누지 않는다면, 어느것이 性이며 어느것이 情이겠는가? 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는 性으로서 이른바 中ㅌ이며, 천하의 큰 근본인 것이다. 性이 이미 발현된 상태는 情으로서 그것이 모두 기율에 들어맞는 상태가되면 이른바 和이며, 천하에 두루 미치는 道가 되는 것이다.
주희가 볼 때, 性은 본질적인 범주로서 깊고 은미하며,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性은 현상적인 의식활동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情은 일종의 의식 현상적 범주이다. 情은 性의 표현이고 작용이며, 性은 情의 근거이자 근원이다. 그는 미발과 이발은 性과 情사이의 이러한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였다.
마. 심통성정(心統性情:마음은 性과 情을 거느린다)
호굉의 심성론에서는 性을 본체(體)로 삼고 마음(心)을 작용(用)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체계 속에서는 情의 지위가 없다. 주희의 심성론 중에서의 특징 중 하나가 그는 性을 본체로 주장하면서도 마음을 작용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情을 작용으로 삼았으며, 마음을 性과 情을 관통하는 총체로 생각한 점이다.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으로서 그 본체가 되는 것은 情이다. 그러므로 동정(動靜:움직임과 고요함)을 관통하여 없는 곳이 없다. 인.의.예.지는 性이고, 측은.수오.사양.시비는 情이다. 仁으로 사랑하고, 義로 미워하며, 禮로 사양하고, 知로 아는 것이 마음인 것이다.
性이란 마음의 理이고, 情이란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이란 性과 情을 주재한다. 주희가 생각할 때 性과 情은 서로 體와 用이 될 뿐만 아니라, 性은 마음의 본체이고 情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體用을 포괄하는 총체이며, 性情은 이러한 총체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의식활동의 체계와 구조를 고찰해보면, 마음은 사유와 의식활동의 총체적 범주를 상징하고, 그 내재적 도덕본질이 性이며, 구체적인 감정과 생각은 情이다. 性은 현실적인 의식과 감정이 생기는 근원이고, 현실적인 의식과 감정은 性의 외재적 표현이다. 情은 구체적인 것이고, 性은 일종의 일반원칙이며, 마음은 의식활동의 총체와 주체를 가리킨다. '심통성정'의 또 다른 주요의미는 '마음이 性과 情을 주재한다(心主性情)는 점이다. 주희는 性은 본체이고 情은 작용이다. 性과 情은은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것들을 통솔 할 수 있다. 통솔이란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주재한다는 말이다.
情에 대해 말 할 때는 ‘심주성정‘이 마음을 주재한다는 것이다. 즉 의식 주체와 이성이 감정을 주도하고 통제하는 것으로서, 도덕 의식이 비도덕적 관념을 제재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러나 마음이 性을 주재한다는 점에서는 문자에만 얽매여서는 안되고, 주경(主敬) 공부에 관한 주희의 사상과 연결해서 살펴야 한다. 의식활동의 총체적 본질로서 性은, 본래 의식활동을 지배하는 작용을 한다. 이러한 性의 지배 작용은 마음의 수양에 의해서 그 정상적인 표현과 발휘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주희는 情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가 性이며, 이 때 마음에는 천리(天理)가 혼연히 갖추어져 있다. 미발 상태라고 해서 마음이 없다고 생각 할 수 없다. 마음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中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면서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재자가 있어야 하며, 함양해 나가야 한다. 만일 마음이 미발일 때에 함양도 하지 않고 어떤 주재자가 없다면, 혼란은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主敬의 방법을 통해 미발일 때의 심경의 청명상태와 주의력 집중을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마음이 性을 주재한다’는 말은, 마음이 아직 발현하지 않았을 때의 주경공부가 性으로 하여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사람의 현실적인 사유 작용에 기능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말이다.
바. 천명지성과 기질지성(天命之性 及 氣質之性)
주희의 철학에서 性의 개념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정이는 일찍이 “性은 理이다(性卽理)”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성론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말은 사라의 본성이 도덕적 법칙은 물론 우주의 보편법칙과도 완전히 일치한다고 강조한데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정이는 주희와 같이 리기관(理氣觀)의 기초 위에서 품부받은 天理로 人性을 말했던 것은 아니다. 주희가 볼 때는 천지간에는 理도 있고 氣도 있어, 사람과 사물의 생성은 모두 천지간의 氣를 품부 받아 형체를 이루고, 천지간의 理를 품부 받아 본성을 이룬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과 천지의 理사이에는 직접적인 우주론적 연계가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물의 입장에서 볼 때 人性과 物性은 모두 하늘로부터 품부받아 本性을 이룬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과 천지의 理 사이에는 직접적인 우주론적 연계가 있는 것이다.
주희는 이를 일러 ‘하늘이 준 것을 일러 性이다(天命之謂性)’는 중용(中庸)의 뜻이라고 여긴 것이다. 따라서 주희의 철학체계에서는 天理가 개체적인 사람과 사물에 품부되어 이루어진 性을 항상 ‘천명지성’이라 부른다. ‘理를 품부받아 性이 된다’는 주장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善한 성품을 지녔음을 말해 줄뿐이지, 惡한 성품이 생기는 근원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주희는 惡한 성품도 똑 같이 선천적인 근거를 갖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기질(氣質)’ 이다. 그러나 선천적인 惡은 도덕적 수양을 통해 변화 될 수 있다. 품부 받은 기질에는 맑거나 흐리거나 편벽되거나 바름의 차이가 있으며, 그 품부 받은 기질 가운데서 어둡고 흐리며 편벽되고 막힌 것이 악한 품성을 이루는 근원이다. 기품의 善하지 않음이 惡의 근원이 되는 까닭은, 주로 기품의 혼탁이 본성을 끊고 가림으로써 사람의 善한 본질이 발현되는 것을 방해하며, 그로 인하여 惡한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온전한 性理가 구비되어 있으며, 다만 도덕적 품성의 선천적인 차이는 기품의 청탁(淸濁:맑고 흐림)이 性理의 표현을 끊고 가리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요하다”고 함은 미발일 때를 말하고, ‘그 이전’이라면 사람과 사물이 아직 생기기 전이어서 性이라 말 할 수 없다. 기질지성이란 사람이 태어난 뒤 理가 形氣안에 떨어져 들어 온 것으로, 온전한性(천명지성)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그 본래 모습도 氣質之性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그것에서 그것과 섞이지 않은 것을 알아 내야 한다. - 즉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여야 함
사람과 사물의 性이란 천지의 理를 품부 받아 생긴 것이다. 사람과 사물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천지의 理는 천지간에 유행한다. 이러한 理가 일정한 形氣에 품부 된 뒤에야 性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理가 일단 形氣라는 체질 속으로 진입하면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적인 사람의 性은 이미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기질에 영향(오염)을 받았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적인 사람의 性은 ‘기질지성’이다. 이 기질지성은 理의 작용과 氣의 작용이 함께 있는 것으로, 도덕이성과 감성적 욕구의 교차와 종합을 반영하는 것이다. ‘천명지성’은 ‘기질지성’의 본래 상태이고, ‘기질지성’은 ‘천명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아 진화된 것이다.
주희는 ‘천명지성’은 물과 같고, ‘기질지성’은 소금물과 같다‘고 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천명지성’은 동일하다. 그러나 사람의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기질지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주희는 이렇듯 性에 대한 두 관념을 설정하였으니, 즉 “性惡(성악:인성은 본래 악한 것)” “性善惡混(성선악혼:성품은 어떤 때는 선하고, 어떤 때는 악함)” “性三品(성삼품:성품의 3가지로 구분)” 등은 모두 ‘기질지성’을 두고 말한 것이며, 그러나 본래 성품은 理이기 때문에 악함이 없다.
사. 주경 함양(主敬涵養)
송명의 리학자들은 대체로 자기 나름의 수양방법을 갖고 있었다.
주희가 제창한 방법은 ‘主敬涵養(주경함양)’으로, 송명 리학에서는 비교적 영향이 컸다. 주희의 ‘주경함양’설에는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즉 협의는 미발공부만을 의미하므로 ‘궁리치지’와는 상대되는 개념이다. 광의의 ‘주경함양’은,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것으로, 動靜과 內外의 과정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敬이란 오직 ‘삼가 조심한다’는 말과 같다.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심신을 수렴하고 정제하며 순일하게 하여, 방종하지 않는 것이 敬이다.敬은 만사를 내버려 둠이 아니라, 오직 일에 따라 전일하게 삼가면서 마음을 풀어놓지 아니하는 것이다.
敬이란 오로지 늘 깨어 있는 방법으로서, 고요함 속에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즉 주경이란 바로 안으로는 헛된 생각을 없애는 것이며, 밖으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아. 격물궁리(格物窮理)
격물의 개념은
첫째 : 격물(格物)이란 사물과 접촉하는 것이다.
둘째 : 궁리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 한다는 것이다.
셋째 : 지극함(이치의 지극함. 즉 완전한 지식을 말함)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주희가 생각 할 때 致知(치지: 앎에 이름)는 결코 격물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니며, 자신의 고유한 지식을 힘껏 발휘해 내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하여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알아내는 것도 아니다.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힘껏 궁구함을 의미하지만, 사람들이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면 자기의 의식도 철저하게 완비된다.
치지(致知)는 주체가 물리를 궁구하여 개인적으로 얻게된 지식 확충을 의미할 뿐이다. 즉 치지란 격물의 목적이자 결과이다. 따라서 치지는 결코 격물과 병행되는 것도 아니며, 주체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인식방법이나 수양 방법도 아니다. 격물의 방법은 책을 읽는 것. 사물과 접촉하는 것. 도덕을 실천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격물의 최종 목표는 사물의 ‘그러한 까닭(所以然)’ 과 ‘마땅함(所當然)’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理를 의미하는 것이다.
‘소이연(所以然)’은 사물의 보편적인 본질과 규율을 가리키며, ‘소당연’은 사회의 윤리원칙과 규범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희가 주장하는 ‘격물궁리’의 최종적인 목표와 출발점은 바로 善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明明德)
앎(知)은 주체에 속하는 것이고, 理는 객체에 속한ㄷ다. 격물은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지극한 데까지 궁구하는 것이며, 그 방법과 순서는 ‘힘써 쌓아 나아가는 것(用力積累)’과 ‘확 트여 관통하는 것(豁然貫通)’이다. 격물의 목적은 최종적으로는 우주의 보편적인 理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한 사물에 이르고, 내일 또 하나의 사물에 나아가 이것이 반복적으로 누적되어 비로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며, 점차적으로 모든 사물의 공통적인 보편규율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외부 사물을 반복적으로 궁구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을 수행하다 보면, 사람의 사상과 인식이 어느 단계에서 비약하는 즉 ‘활연관통’에 이르게 되리라.
자.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理로써 욕망을 절제한다(以理節欲)’는 것은 공자이래 유가 철학의 고유한 사상이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특히 이상적 인격의 배양을 중시하여, 도덕적인 자각을 제고시킬 것과 도덕의식이 최대한으로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도록 노력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고문상서(古文商書:즉 서경이며, 僞書임)”의 인심과 도심(人心唯危道心唯微)이라는 문제를 부각 시켰다.
도심(道心)이란 도덕원칙에 합치되는 즉 도덕의식이며, 인심이란 개체적인 욕구 즉 감성적 욕구이다. 주희는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을 일률적으로 배척하거나 부정하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사상경향은 개인의 욕망을 가능한 한 감소시켜 사회의 도덕적인 욕구에 부응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봉건적인 신분제도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도학의 '도심 인심설' 과 '천리 인욕설'은 사회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다양한 욕망사이의 충돌이 인류사회의 기본모순이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리학에서 제시하는 사회와 개인,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이라는 윤리학적 모순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차. 먼저알고 나중 행한다
중국 고대철학에서 논했던 '지행(知行)'의 문제 중에는 인식의 내원에 관한 문제가 아인 경우는 종종 있다. 특히 유가 사상 체계에서 지행의 문제는 주로 도덕의식(즉 知)과 도덕실천(즉 行)에 관한 문제이다. 소위 도덕실천이란, 이미 규정된 도덕관념을 실행하고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도덕지식이 도덕실천보다는 앞섬을 의미하므로, ‘지선행후설(知先行後說)’이 그것이다. 여기에서의 行은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실행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주희의 철학에서 ‘격물치지’는 일종의 행위이지만, 그 활동은 理를 밝히고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속하지, 理를 실행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는 ‘知’로만 간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