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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집사님의 편지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2)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왕상14:24)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7)
이는 동성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중의 일부입니다.
오늘 우리 행정팀 쌤들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이 동성애에 대한 내용은 많이 아는 부분이라
굳이 여기서 나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분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고, 정죄 없이 그들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셔도 그분들에 대해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 하셨던 것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8:11)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스스로를 깨어 있고, 진보된 의식을 가진 성소수자들이며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질서를 싫어하는 세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 쌤들과 나누고자 하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1)
(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 18:23-25)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21)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반려동물: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로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존중하여 애완동물을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뜻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로 개칭하였는데 1983년 10월 27-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166006&cid=40942&categoryId=32310 )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아주 오래전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론 반려견,반려묘 등 이런 단어가 최근(10년 이내)에 생긴 건줄 알았는데요.
IS 무장단체의 테러나 기아, 재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에 대해 우리는 점점 무감각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사건,사고의 사망사고에 대해 무의식 하게 보고 그냥 불쌍하다 식으로 넘어가는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유독 동물들, 특히 반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동물이 학대에 의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는 온라인을 뜨겁게 달굽니다.
최근에는 이런 반려동물에 대한 카페나 자료나 정보가 온라인상에서 우후 죽순으로 생겨나고 반려동물에 대한 정보는 검색 한번으로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반려동물이 학대를 받아 장애를 가지게 되면 가해자의 신상을 우리의 온라인 세계에서는 그의 신상을 빠르게 털어(?)버립니다.
그리고 “ 그를 똑같이 해야 한다.” “같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 “ 그를 죽여야 한다. ” 등 그 동물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동물은 우리와 같이 살기에 보살피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이뻐해 주는것도 맞습니다.
우리집도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미가 버린 갓난 아이 때 제가 집에 데리고 와서 우리식구들이 정성과 사랑으로 살린 아이입니다.
동물병원에서는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동물은 동물입니다.
영혼이 있어서 함께 천국에 가는 우리 인간들과 다른 존재입니다.
자 이제 영적인 문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고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은혜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이런 반려동물에게서 어떤 이는 위로를 받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가족의 구성원 (본인도 우리 집의 고양이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합니다.)으로 생각하며 심지어는 이런 반려동물과 결혼도 하며 수간까지 하는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몇 년 전에는 개와 고양이, 그리고 심지어는 반려동물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오래 전~ 동물병원을 운영하시는 선배(안수집사님)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동물병원에 엑스레이촬영, MRI 촬영등 의료기기가 많이 발단된 것 아시죠?
“ 00야. 어떤 아가씨가 기르던 고양이를 가져왔는데, 고양이가 좀 이상해서
자세히 검사를 해 봤는데, 이 고양이가 사람들이 걸리는 성병에 감염되었더라~”
이 얘기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 창 9:1-3 )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엄밀히 말하면 개, 고양이, 소, 돼지, 닭, 오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은 우리가 다스리며, 필요에 따라 음식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도, 동물도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적으로 문제될 것 없이 애완동물을 잘 기르시는 분들도 물론 계십니다.
동물을 기르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동물을 자신의 안식처로 생각하고 의존하며, 동물에게서 위로를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새 힘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주적인 사탄마귀의 궤휼은 지금도 언론과 미디어를 이용하여 동물과 사람이 서로 친밀히 교감하는 장면을 많이 제작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보다는 그들과의 교제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차별반대관련 법안이 통과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세계 선진국들도 통과한 곳도 있으니 말이죠.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하나하나 깨트리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의 가치관으로 자연스럽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동물과 관련된 동물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 날것이며 사람의 생명보다 반려동물의 생명에 더 관심을 갖고, 반려동물에 더 깊은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를 인권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미화시키고 있듯이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그들의 권리 또는 수권(?)이라고 해야 하나요?
동물들의 권리에 대해 반려동물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들과 결혼하며 그들과 수간을 하는 것도 인간의 인권중의 하나라고 미화시킬 것입니다.
처음에 언급한 동성애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인데, 마귀의 궤계는 과거에 몰래하던 일들이 이제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악한 풍조를 아무런 분별없이 따라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하며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고리타분한 존재로 여기며 비난하고자 하는 인식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동성애, 동성혼, 동물 권리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동물 권리, 인권, 차별 금지 등의 이러 저러한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반박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가치로 삼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하나님의 뜻은 부정하고 마귀의 뜻에 따르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세상 속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질서를 하나씩 하나씩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쉽게 전하던 복음, 우리의 노방전도도 이제는 법적으로 못하는 세상으로 오게 됩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이제는 하나씩 하나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만 골라서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도록 사람들의 가치관을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인 남녀 간의 결혼을 부정하여 ‘남녀가 꼭 결혼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동성 간에도 결혼을 못할 이유가 없다’며 법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인생이 가장 소중하다며 아이를 낳고 키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경기와 그 어떤 경제적인 논리 (자녀출생후 생계비, 학원비,학비 등등) 라는 소스를 치면서 그 시너지 효과가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생각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그건 하나님 말씀에 꼭 위배되는 것은 아니지’라며 마귀의 계획대로 오염되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주며 합리화하는 것은 마귀의 궤계에 말려들어가는 위험 천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동성애와 동물에 대한 권리 등 여러 가지의 감당치 못할 일들이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악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며 안전한 구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세상이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반석 위의 지은 집과 같은 뿌리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치관, 생각, 마음이 쉽게 오염됩니다.
반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유일한 진리로 따르는 사람들은 늘 영적으로 바르게 분별하면서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찬양하는 것이고, 말씀의 진리 가운데서 영의 눈이 열려 세상이 오염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분별하면서 악한 가치관에서 분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000 집사님께,
동료 교사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고민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자 하며 그 길을 찾으려는 고민과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보내주신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세상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견해
2. 세상에 대한 성경의 견해
3.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주님의 계획과 방법
4.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적용
첫째, 세상의 타락에 대한 성경의 견해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창조된 세계와 인간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타락과 함께 에덴동산 밖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록은 하나님 앞을 떠난 인간의 삶을 기록하여 보여줍니다. 그 대략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형제살인, 라멕의 잔인함, 죄악이 자라남, 노아 시대의 죄악 극치--- 결국 심판
2. 바벨탑의 죄악 --- 결국 심판(언어의 혼잡)
3.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죄악 --- 결국 심판(불과 유황)
4. 가나안의 죄악 --- 이스라엘을 통한 심판
5. 사사 시대의 죄악 --- 하나님의 심판(강대국을 통해)
6.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 ---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한 심판
7. 신약시대의 언급 --- 로마서 1장: 이미 심판을 받음---하나님을 떠나 행하는 부끄러운 일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함.
8. 계시록의 언급 ---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된 못에서 심판을 받음. 그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심.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사는 그 어디에서나 언제나 인간은 타락하고 땅을 어지럽히고 저주를 받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저주요,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다양한 모습의 증상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두드러진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 성적인 타락, 그리고 폭력과 압제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람이 아닌 짐승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그 속성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성령을 좇아 살아가기에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있는 곳에는 이런 죄악된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세상에 대한 성경의 견해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대상입니다(요 3:16).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생각과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을 회복하실 것(계 21:5)을 소망하며 예언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은 처음부터 영원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 제 생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라는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것은, (1) 바다의 물고기, (2) 하늘의 새, (3) 가축, (4) 온 땅과 (5) 땅에 기는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정죄하는 바는, 이 짐승들은 인간이 다스려야 할 대상인데 짐승들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개탄한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계시록의 짐승의 표를 받아 사는 사람들도 같은 모습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인간에게 선물입니다(약 1:17). 인간이 주님 앞에서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은 바르게 다스려지고 바른 방식으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짐승들을 식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들의 종을 말살하여 생태계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적 소임을 깨닫지 못하고 탐심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정신으로 살아가면 언제나 멸종되어가는 동물들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이 그런 멸종은 진행되어 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지라는 복을 이어갑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 없는 인생에서는 왜곡되고 추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동성애는 이런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나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과라고 하는 진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해도 이것은 성경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한 시도 포기하신 적이 없으며, 영원히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끝없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시려고 언제나 일하고 계시며(요 5:17) 결국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주님의 계획과 방법
그렇게 세상이 타락하고 어지럽게 될 때마다 즉, 다시 세상이 공허와 혼돈으로 가득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노아 홍수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의 홍수는 다시 모든 피조세계를 수면 아래로 잠기게 하신 사건입니다. 태초에 만물이 수면 아래에 있었고,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수면 위로 뭍이 드러나게 하심으로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노아의 홍수는 이 세상이 다시 창조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로 물 속에서 일어난 땅은 신세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의 선언을 동일하게 노아의 가족에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바벨탑의 사건도 사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하신 것이지만, 온 세상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온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반대의 길을 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홍수로 다시 새 창조를 하신 것처럼, 언어의 혼잡으로 인간을 온 세상에 흩어져 가득하게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멸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선명한 계획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건설을 통해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로 삼고자 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아담과 같이 이 세상을 맡은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처럼 그들도 범죄하고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계속됩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고 그들을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요, 새 아담이요, 그리스도같은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 5:18)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하늘의 권세자들에게까지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바울은 비밀스런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알려줍니다(엡 3:19~10).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 속에서 성령과 어린 양의 인을 받고 거룩함과 진실함의 옷을 입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겸손과 섬김을 통하여 세상에 거룩한 감화를 주고 사막과 같은 세상을 꽃동산으로, 메마른 황무지에 강물이 흐르게 하는 거룩한 건설자들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의 주권자들처럼 폭력이나 압제를 사용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사랑으로 희생과 섬김으로 거룩한 영향력을 펼쳐 나갑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노예제도의 폐지, 독재국가의 민주화, 가난과 모순으로 점철된 공산주의 사회에 개방과 개혁, 여성 인권의 신장, 경제민주화를 통한 약자 보호, 국제간의 협력 속에 질병과 기아, 문맹을 퇴치하려는 노력, 환경 보호와 지구 생태계 보호를 위한 공동 노력, 교육과 참정의 기회의 평등 확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국가 권력의 횡포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 등의 세상에 대한 회복 운동은 더욱 힘있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깨어난다면 이 모든 일이 형식상의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이런 아담적 대리인의 임무를 받았지만, 그것을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을 이 세상을 떠나 다른 곳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댐건설로 말미암아 수몰될 지역의 마을처럼 곧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지구촌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라는 위대한 임무를 져버리고 사후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모집하여 구조선에 태우는 것을 주요한 임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 생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타락도 결국 열방을 위한 제사장적 소임을 망각한 데서 온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의 방종도 결국 장자로서의 소임을 알지 못하기에 나온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곧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이어가십니다. 에스더의 임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그의 삼촌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스더 4:13~14)
하지만, 다른 면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교회가 그 수를 가장 많이 가졌던 중세시대에 교회는 정치적인 권력자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취해야 할 섬김과 희생이라는 귀중한 가치를 망각하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공격적인 전도로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것과 유사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드려 많은 이들을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십자가의 정신을 가장 많이 훼손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이슬람 형제들을 기독교의 원수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복음은 사마리아도 유대인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르지 않은 방식의 전도방법과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화목을 위한 대리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갈등의 유발자가 되게 합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회가 세상의 화목을 위한 어떤 중재를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능력이 시험을 받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해야 할까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더욱 연구하고 서로의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적용
- 동성애, 반려동물, 결혼관의 변화에 대한 입장
아무리 곱게 포장해도 죄는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누군가 아사셀의 염소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이미 그 죄 가운데서 심판을 받았습니다(요 3:18). 동성애자, 수간자(獸姦者), 그리고 온갖 죄악은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보다 더 비인간적인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움 중에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런 길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의 교제를 배우면 그가 비로소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고 피조 세계를 바르게 다스리는 대리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인간은 큰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형제처럼 지내며, 부부관계에도 기쁨의 샘이 넘칠 것입니다. 동물들도 사람과 더불어 진정 교감하고 모든 생태계도 환한 웃음을 머금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19~22)
어쩌면 지금 온 세상은 피조물의 신음소리로 가득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 받기 원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묶인 피조물을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누런 황소가 눈을 껌벅거리면서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동성애에 대한 제 입장은 지난 번 글에서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http://cafe.daum.net/Wellspring/VKLb/6)
반려동물을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여름 복날에 보신탕을 먹는 사람과 개를 위한 납골당을 만드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문화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며 지역과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가 절대적으로 옳고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 중에서, 여자는 머리를 가릴 수 있도록 천을 쓸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천주교회와 하나님의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본문을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고린도교회의 특별한 상황에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도 근본 정신이 있으니, 그것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그 문화를 존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문화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달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에 두건을 쓰는 사람들은 잘못인가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자유가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더불어 재밌게 살며 위로를 받고 사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문화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어떻다고 평가하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모든 문화는 그 문화 안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느냐에 따라 생명이 넘치느냐 사망의 그림자로 가득해지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러기에 문화 그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그 외에는 개개인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누가 누구에게 강요할 성격은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께서 제사 음식과 관련하여 내린 결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린도전서 8:7~8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왕의 진미를 거절한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제사 음식은 먹지 않았다고 해서 더 못 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디모데전서 4:3~5)
바울은 제사 음식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기도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그러나 형제를 위한다면 나는 먹지 않아도 좋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서 스스로 정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원리를 알려줍니다.
한 때 저는 아이들에게 노래방을 못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누구며 어떤 목적을 위해 지음 받고 부르심을 받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가르칩니다. 저는 노래방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요.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집사님의 가정처럼 고양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가족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분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르게 누리고 다스릴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사귀면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며 모든 것에 복이 임하는 것이니까요.
끝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씀을 덧붙이고 마칩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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