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고대 그리스어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의 뜻을 한자어로 표현한 말이다. 유 앙겔리온의 유는 ευ는 기쁨이란 뜻이고 αγγελιον 은 천사란 뜻이다. 두 개가 합하여 져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라는 뜻이 된다.
이 단어는 매우 재미 있는 이야기 속에서 태어났다.
고대 페르시아는 B.C. 538년에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하고 동방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그 나라는 세상을 더 지배하고자 서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가다가 그들이 마주친 것은 그리이스였다. 그리이스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군대 규모도 작고 약한 나라였다. 페르시아는 백만이나 되는 군대를 조직해서 그리이스로 쳐들어 갔는데, 그리이스는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 죽기로 결정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전쟁에 나섰다.
당시 그런 전쟁에서 항복을 하면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복하다 패하면 무참하게 멸망했다. 자기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모든 건물은 불에 타고 처자식은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전쟁이라는 것은 죽거나 살거나 두 가지였다.
그리이스로서는 페르시아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그리이스가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산 속으로 피해서 거기서 죽을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전쟁은 일어났고 전투가 시작된지 한 달이 넘어도 전쟁터인 마라톤 지역에서는 이렇다할 소식이 없었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매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터 쪽에서 한 사람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이스 아테네 도시 사람들은 그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그 병사는 마라톤 전쟁터에서 아테네 도시까지 36.75km를 달려온 것이었다.
지금 마라톤 경기는 42.195km를 달려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 때는 36.75km였다. 그 후 올림픽 개최국들의 사정에 의하여(구경하기 좋게 하기 위하여) 40km 내외로 거리를 조정하다가 지금의 42.195km가 된 것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온 병사는 사람들 앞에서 “승리는 우리에게”라는 단 한마디를 외치고 힘없이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유 앙겔리온”을 외치며 즐거워했다. “유 앙겔리온”
그렇게 기사회생한 그리이스는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권력을 잡은 후에 B.C.331년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동서방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이 된다.
초대 교회에서 서양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채용하여 사용한 것은 대단히 재미 있는 일이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한문으로 의역해서 쓰고 있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단순하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1.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2.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소망
3. 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 요한 복음
(그러나 네 사람의 복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일 뿐이다.)
4. 신약 성경 전체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 ‘복음’이라는 명사를 60여 차례나 사용했고, 복음을 전하다라는 동사를 20여 차례나 사용했다. 그는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복음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이루신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말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른 사도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전하든지 동일하다. 아테네로 온 병사가 '우 리가 이겼다'라고 외쳤듯 복음 속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는 하나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테네 시민들이 기다린 것과 같다.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복음이 '우리가 이겼다'라는 것인데 우리가 그리이스 아테네 시민들처럼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고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를 말하면 무엇이 해결되었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고 싸우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현실의 위험과 육체의 죽음이다. 복음은 이 두가지 두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겼다'라고 말해 준다.
1. 현실을 이겼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던 여동생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마르다는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다시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천국에 갈 것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의 고통 속에서 다시 회복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너무 힘든 현실 속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기쁠까?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48세 고영수 씨는 옆 동네 오창읍의 한 축사에 끌려가 '만득이'라고 불리면서 12년간 무임금 강제 노동을 당하다가 지난 해 7월 극적으로 탈출해서 가족과 다시 만났다. 고씨 모친(76)과 누나(51)는 모두 고씨와 같은 2급 지적장애인이라고 한다. 19년 전 고 씨를 잃어버린 엄마는 밤마다 아들이 혹여 불쑥 "엄마" 하며 돌아올까 대문조차 잠그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때가 되면 늘 돌아오는 추석 때 동네 집집마다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찾아와 '웃음꽃'이 피었지만 고씨 가족은 서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던 아들이 거기서 15km 정도 뿐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고영수 씨의 힘든 삶에 구원이 손길이 벋쳤다. 사람들은 그를 오송 초등학교 1학 년에 입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엊그제 입학식을 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나란히 있는 그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1학년 1반 교실에 들어서자 고씨는 어색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맨 뒷자리인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 위에는 '1학년 1반 20번 고영수'라고 쓰여 있었고, 교과서 8권이 놓여 있었다. 고 씨는 "너무 좋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특수반 교사 옥근아(61)씨는 "고씨가 입학하게 돼 정말 기쁘다"면서 "고씨가 사회 일원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교 교육 시간 외에는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청주 '희망 일굼터'에서 인테리어 용품을 조립하는 일을 하게 될 예정이다. 고 씨는 가족들과 떨어져 살던 19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고통을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 왔고 그는 긴 고통을 벗어나 따뜻한 사회의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쉼이 필요한 것 같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만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받아야 한다.
2. 사망을 이겼다.
살려고 하는 노력도 치열하지만, 죽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도 치열하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불과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음은 죽음을 이겼다는 소식이다.
바울은 유앙겔리온(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이 되어 이렇게 외친다.
(고전 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