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m. 2만 2천보. 7시간.
진남문 ~ 외성 ~ 남포루 전망바위 ~ 남포루 ~
가산바위 ~ 서문 ~ 서포루 ~ 북문 ~ 중성문 ~
저수지 2개소 ~ 동문 ~ 가산임도 ~ 진남문.
동문에서 중성까지 오르막.
중성에서 북문까지 내리막이다.
물론 가산(900)이 제일 높다.
내성 안에서 제일 낮은 곳은 북문이다.
가산산성에 물길이 두 곳으로 나있다.
북쪽은 북문 옆 수문을 통하여 윗산당 마을로 빠진다.
사창천으로 연결된다.
남쪽 개울은 북쪽에 비해 길다.
관아와 산성 마을의 서쪽을 지나가는 물길은
진남문 서쪽 수문으로 이어진다.
동명지를 지나 팔거천으로 흐른다.
↓내성. 제일 먼저 쌓은 것. 1640년.
병자호란 4년 뒤다.
내부 면적 20만 평. 길이 5km.
↓외성. 내성 쌓고 60년 뒤인 1700년에 축조.
5km. 내부면적 40만 평.
↓외성 완성하고 40년 후에 중성 축성. 1741년.
관아 쪽 방비를 보강할 목적으로 내성을 2 등분하였다.
산성에서 제일 높은 지대를 따라 쌓았다.
북문 쪽은 토성. 저수지 쪽은 석성인데 아직 미복구 상태.
현재 서장대에서 중성문까지 100m 정도가
날림으로 복원되어 있다.
100년에 걸친 3차례 공사로 가산산성은 완벽한 요새가 되었다.
칠곡 평지에 있었던 행정 관청이 850m 고지로
옮겨감에 따라 도호부를 찾는
백성들의 고충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본래 있던 장소로 이전해 달라는 빗발치는 민원에도
조선 왕조는 백성들의 요구를 180년간 묵살했다.
유사시에 대구 지배층이 피난할 장소였기 때문에
국가 자원이 엄청나게 투입된 산성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높으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안전이 확실하게 담보되는 이곳이 좋았다.
산성 생활에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가산산성 남쪽 방향 물은
전부 진남문 서쪽 개울로 모인다.
↓진남문(380)에서 왼쪽으로 올랐다.
진남문(鎭南門)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벽 위에 들쭉날쭉 요철(凹凸)로 나지막하게 쌓은 담을
여장(女墻)이라 한다.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한다.
장(墻)은 ‘담’을 뜻한다. 여장 아래의 높은 체성에 비하여
여장은 높이가 작다,
키가 큰 남자와 키가 작은 여자가 연상되어
‘여(女)’를 붙여 ‘여장’이라고 불렀다.
치이봉(700)이 뾰족하게 보인다.
치이봉과 치키봉의 차이점은
가산산성 다른 후기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등로에 소나무가 빽빽하다.
6.25 때 가산산성에 대규모의 인민군이 은거하고 있었다.
산성 밑에서 쏘는 포격만으로 제압이 어려웠다.
미공군 전폭기의 공중 폭격이 유일한 해결책.
그때 가산산성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관아터나 산성 마을 부근은
풀 한 포기 없었다고 한다.
포격과 폭격의 피해를 덜 입은 곳.
치이봉 쪽은 본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지난 10월에 직접 확인했다.
남포루 전망바위(750)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보았다.
팔공산 주능선과
치키봉 치이봉이 보인다.
남원리. 도덕산. 480봉.
480봉. 지마산
남포루 전망바위. 750m.
가산산성에서 최고의 전망을 보여주는 조망처.
가산바위와 견줄 만하다.
남포루. 750m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지난여름보다 더 심해졌다
바로 옆에 수구문과 동문이 있다.
높이가 30m 이상 차이 난다.
남포루 위 초심님과 은풀잎님.
다정한 초심님에게 야코죽지 않는 남자는 없다.
중성 가는 길.
남포루 위.
뒤로 치이봉. 도각봉. 해일봉이 보인다.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길게 내밀어 쌓아 놓았던 돌출부를
'치'(雉)라고 불렀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야 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하고,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다.
치에 '꿩 치(雉)'자를 쓰는 것은
꿩이 몸을 감추고 적을 잘 엿보는 데서 온 말이다.
남포루나 동포루, 북포루에 치 구조물이 뚜렷하다.
가산바위(850)와 유학산(840)
유학산 도봉사 뒤 쉰질바위. 신선대가 보인다.
유학산은 능선 중간이 푹 꺼져 있다.
가산바위 안내판
가산바위 상부 면적을 270 제곱미터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실제는 600 제곱미터 안팎이다.
서문 가는 길
서문. 810m
서문 통과해 봤다.
유학산.
서병장님 사진이 거의 없다.
정면에서 찍히면 혼이 빼앗긴다고
말씀하시는데 농담이다.
서포루 오르는 길.
백운산 황학산
유학산. 학상리 쪽이다.
지난 6월에 알바했던 곳이다.
산 아래쪽은 6.25 때 전차전이 벌어졌던 천평 계곡.
산에 가려서 안 보이는 왼쪽이 다부동.
서포루. 850m. 북문과 서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
상장대. 가암. 860m 중성벽 봉우리(중문봉)와 마주하고 있다.
서포루에서 내려가고 있다.
서포루에서 내려오면서 뒤돌아 보았다.
상당한 경사지.
이곳이 가산산성 북쪽 끝이다. 810m.
붓필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
북포루와 삼칭이 능선이 살짝 보인다.
북포루. 860m
북포루 올려다보고 있다.
북포루 아래 삼칭이 능선
북문이 보인다.
북문(780)에서 북포루(860)로 오르는 길. 급경사지.
북문 앞.
아찔한 오르막이다.
북문. 780m.
북문 옆으로 물길이 있다.
북창마을 사창천으로 흘러간다.
북문에서 중성문 가는 길.
중성문. 870m
중성문에서 저수지로 내려가고 있다.
2개 저수지가 있다.
위쪽은 초심지.
아래쪽은 은풀잎못으로 이름 지었다.
얼음을 깨며 한참을 놀았다.
못 중간에 섬이 있다.
저수지 근처 뿌리가 약한 낙엽송이 넘어졌다.
물이 풍부한 환경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릴 필요가 없었다.
소나무 참나무 다음으로 가산산성에 흔한 나무가 서어나무다.
낙엽송은 조림수로 보인다.
나무 이름이 서쪽에서 자라는 나무를 뜻하는
서목(西木)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껍질은 암회색에서 밝은 회색까지
서식지 환경에 따라 조금 다르다
동문. 은풀잎님
성문을 격파하려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문 양측면에 불룩하게 돌출되게 만든 시설을
적대(敵臺)라고 부른다.
성문 좌우 양옆에 설치된 '치'라고 말할 수 있다.
관아터 옆 개울가에 수령의 선정비가 서있다.
조선 후기에는 선정비 세우기가 유행했다.
비석 메시지 이면에는 비석을 세운 이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담겨 있다.
헛된 명성을 과장하여 돌에다 공적을 새기고
욕된 이름을 후세에 전하려 하고 있으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하늘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