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시조 안원형) / 제학공파(3세 안정생) / 보성 주부공종중(6세 안민) / 8세 안수잠(安秀岑,1486~미상, 합천공문중 파조) 어른은 7세 안범(安範, 1460~1523)의 둘째 아드님으로, 중종2년(1507) 생원진사(生員進士)양시 합격 후 중종17년(1522) 문과에 급제하여 합천군수를 지내신 분인데, 선부인(先夫人)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태종(太宗)의 12남17녀 중 14번째(태종의 6남)로 숙의(淑儀) 최씨(崔氏)의 소생인 이정공(夷靖公) 희령군(熙寧君) 이타(李袉)의 장남 화성군(花城君) 이감(李堪)의 따님을 부인으로 뒀고, 슬하에 외동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따님이 광주이씨(廣州李氏) 6세 광원군파(廣原君派)로 보성(寶城) 입향조(入鄕祖)인 내청시 판관(判官)을 지낸 이수완(李秀莞,1500~1572)의 아들 이유번(李惟蕃, 증 참의)과 혼인하여 4남1녀를 두는데 이응남(李應男, 현감), 이명남(李命男, 찰방), 이제남(李梯男), 이현남(李顯男, 무과, 부사)의 네 아들이 있고 따님 한 분은 생원(生員) 양천회(梁千會)와 혼인하여 창평으로 출가합니다. 광주이씨 자손들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며 보성읍 우산리 담안에서 살게됩니다.
또한 죽산11세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1573~1654) 선조의 조부되는 죽산9세 안축(安舳,1500~1572)과 강진김씨(康津金氏)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어 안중관(安重寬), 안중홍(安重洪), 안중돈(安重敦)이 있고, 그 따님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수완(李秀莞)의 둘째아들 이유창(李惟昌)과 혼인하여 이윤남(李允男), 이신남(李信男), 이의남(李義男), 이기남(李奇男)과 이태남(李泰男, 현령)의 5형제를 두었다.
광주이씨 이수완(李秀莞,1500~1572)의 셋째아들 이유번(李惟蕃)은 죽산8세 안수잠(安秀岑,1486~미상)의 외동딸과 혼인하고, 또 다른 둘째아들 이유창(李惟昌)은 죽산9세 안축(安舳,1500~1572)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되며, 각각 4남1녀와 5남의 자손을 두게되어 크게 번창하게 됩니다.
또한 이수완의 첫째아들 이유형(李惟亨), 그의 아들(이수완의 손자)인 이영남(李英男)은 안중관(安重寬)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수완(李秀莞,1500~1572) | 1남 이유형(李惟亨) | ?남 이영남(李英男) | 안중관(安重寬,1524~1605)의 딸 |
2남 이유번(李惟蕃) | 안수잠(安秀岑,1486~미상)의 딸 |
3남 이유창(李惟昌) | 안축(安舳,1500~1572)의 딸 |
광주이씨 5세 이세정(李世貞, 1461∼1528)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광주이씨 4세 광원군(廣原君)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의 셋째 아들로 호남관찰사를 지낼 때 고을을 순시하던 중 보성 한실(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에 살던 부호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 종실(宗室)로 임성부수를 지낸 이언정(李彦廷)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아들을 두지 못하고 외동딸 만 두고 있어, 광주이씨 이세정(李世貞)은 미혼이던 그의 다섯째 아들 이수완(李秀莞, 1500~1572)과 혼인을 하게 된 인연으로, 전주이씨 집안의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며 보성 한실과 강골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광주이씨로 호남관찰사를 지낸 이세정의 다섯째 아들인 광주이씨 보성 입향조로 보성 한실마을(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에 살던 이수완의 아들 이유번이 지방의 보성 지방의 유력가문인 죽산안씨 안수잠의 외동딸에 장가들어 강골마을(현 보성 득량면 오봉리) 일대의 재산을 무려받아, 보성 한실에서 강골마을로 이주하면서 광주이씨 집성촌이 시작되었다.
두 대에 걸쳐 한실의 전주이씨와 보성 담안의 죽산안씨 외손봉사를 통해 광주이씨는 보성에서 반명한 가문으로 자리 잡아 강골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된다.
현재 후손 중에 명사는 이용훈 대법원장과 이중재 전국회의원, 이중재 의원의 아들로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있다.
이세정(李世貞, 1461∼152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권(仲權)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참의 이지직(李之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고,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이극돈(李克墩)이다. 어머니는 예조참판 권지(權至)의 딸이며, 부인은 예천군(蘂川君) 이청(李蒨: 효령대군 증손)의 딸이다. 성종 중기에 문음(文蔭)으로 와서별제(瓦署別提)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감찰(監察), 사평(司評)을 역임하였다. 1501년(연산군 7) 경력(經歷)으로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한 뒤 1503년(연산군 9)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병조참지에 제수(除授)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사사(賜死)된 이극균(李克均)의 조카라 하여 형신(刑訊)당하고 남해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사면과 함께 예조참의에 재임용되고, 곧 병조참지로 체직되었다. 1510년(중종 5)에는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1512년(중종 7)에는 다시 예조참의에 올랐다. 1507년(중종 2) 광주목사(光州牧使)로 파견된 뒤, 이듬해 판결사(判決事)로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후 1519년(중종 14)까지 전주부윤, 예조참의, 해주목사, 돈녕부도정,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520년(중종 15)에는 전라도관찰사로 파견되었는데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24년(중종 19)에는 좌승지에 제수(除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가 출납을 소홀히 한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호조참의에 재임용되고, 다음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28년(중종 23)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세상을 떠났다. 청렴강개한 성품과 효행으로 인망이 높았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城南市) 하대원동(下大院洞)에 있다.
보성으로 광주이씨가 내려가 살게된 유래(광주이씨대종회 자료)
지금으로부터 400 여년 전 전라도 땅 동남쪽 보성 한실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에 자리 잡으신 휘 수관(諱 秀莞-한자로는 '수자 완'으로 읽으나 보성의 후손들은 '수자 관'으로 읽음)은 우의정이신 충희공 휘 인손을 증조로 좌찬성이신 광원군 휘 극돈(克墩) 조부로 감사공이신 휘 세정(世貞)의 다섯 번째 아들로 연산 경신(燕山庚申1500년)에 출생하셨다. 자는 군서(君瑞)요 호는 양진제(養眞齊)라 하였으며 公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문학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公께서 남하하여 보성 땅에 자리 잡으신 연유는 정확한 문헌이 유실되어 고증할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선고(先考) 감사공께서 전라감사 재임 시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보성조성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고을은 산자수려하고 들이 넓고 인심이 온화할 뿐 아니라 앞쪽에는 바다가 보여 매우 살기 좋은 고을이었다. 그 고을「도성면 대곡리 한실」에는 전주이씨이며 임성부수 이언정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종실(宗室)로서 그 고을에서는 부호로 지내면서 상당한 추앙을 받고 있었다. 한데 임성부수 이언정(李彦廷)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외동딸만을 두고 있었으며 감사공께서는 아들 다섯분을 두셨는데 다섯째 아들이신 公만이 미혼이셨다. 감사공께서 그 고을에 도착하자 임성부수 이언정의 집에 公께서 머무르게 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으며 한편 公의 돌아가신 어머니인 정부인 전주이씨 종실 효령대군의 증손녀로서 전주이씨와의 외가로 인한 혈록(血綠)에서 오는 혼인이 아니었나하는 추측이 든다. 또한 이언정의 양위분(兩位分) 묘소가 역시 公의 묘소상단에 위치한 점으로 보아 그러한 구전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듯 하다. 공의 시사일(時祀日)에 임성부수 이언정 양위분의 시사(時祀)도 같은 날짜에 외손들인 광이(廣李)의 보성종중 자손들이 현재까지도 제사하고 있다. 이 시사(時祀)는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본다. 공은 중종이십육년신묘(1531) 31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서사(筮사)로 곡성 임실, 구례, 장성 등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유적을 남겼고 특히 장성현감 재임 시에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선생과 더불어 도의교우(道義交友)하였으며 말년 관직은 내첨시판관에 이르렀다. 몸소 여러 사화를 겪어서 선상 은퇴의 뜻을 갖고 있었으며「관직에 몸담는 것은 나의 취할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과는 때때로 경(經) 례(禮)를 논하기도 하였다. 또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 황강(黃岡) 김계희(金繼輝) 선생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선생 등과 같이 형자를 호서에 짓고 도학과 성리학을 강론하니 여러 선생들이 항상 친구로서 대접하였다. 이분들이 강론을 폈던 오현정(五賢亭) 옛터가 해동록(海東錄)에 기재되어 있으나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해동록(海東錄)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公에게 보낸 서찰에서 말하기를 거년(去年)에 율곡옹(栗谷翁)이 서쪽으로 돌아가고 금년에 이수완(李秀莞)이 남하할 뜻을 갖고 있으니 나의 도가 외롭다 하였다. 만년에 부귀를 버리고 홀연이 남하하여 보성땅 '한실‘에 자리를 잡고 퇴거하여 앞쪽에는 푸른 바다가 보이고 뒤쪽에는 계산천석(溪山泉石)의 승경(勝景) 속에 거가(居家)의 서쪽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어 호를 양진제(養眞薺)라 하고 집의 북쪽에 매월당(梅月堂)이란 정자를 지어 시와 경서를 벗 삼아 여생을 한가로이 보내시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공이 진위한 매월당(梅月堂) 정자는 헐어 없어지고 그 후 자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매월당(梅月堂) 정자를 중건하여 도내 석학 유림 후손 200여명이 매월당 시회를 조직 매년 음4월9일에는 공을 추모하는 시회를 열고 있다. 여기 매월당(梅月堂) 원원을 소개하면 투불귀래만사경(投歸來萬事輕). 십년증피멱부명(十年曾被覓浮名). 춘일대곡매향동(春日大谷梅香動). 추입장천월색명(秋入長天月色明). 우과룡추사사설(雨過龍湫沙似雪). 야심어점화여성(夜深漁店火如星). 종금잉득유한취(從今剩得幽閑趣). 만안계산불세정(滿眼溪山不世情). 자손들에게는 시와 예로서 훈계하였고 성품은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선조들의 가르침에 쫓아 가법을 세웠다. 눌헌(訥軒) 이사균(李思勻)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둔암(鈍庵) 안축 눌제(訥齊) 박상(朴祥)등과 종유(從遊)하였으며 의리가 상통하였다. 선조 5년 임신(1572) 2월10일에 별세하니 향년 73세이다. 배위(配位)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종실 임성부수 이언정의 따님으로 묘소는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 을좌원이며 합장으로 모셔있다. 공의 옛터 한실에는 종중(宗中)과 자손들의 결의로 갑인(甲寅1974)년에 마을 앞에 유장비(遺庄碑)를 건위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10일 시제일에는 자손 수백 명이 시제에 참례하고 있다. 公이 남하하여 보성에 정착하게 되니 보성입향중조(寶城入鄕中祖)로 지금까지 약400여년에 이르렀으며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보성을 중심으로 해방 전까지만 해도 20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산업사회의 발달로 전국 각지로 이거하여 지금은 700 여 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