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험업의 발전
보험은 사망과 질병, 사고와 재난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리 돈을 낸 사람에게 정해진 보상을 해주는 금융수단이다. 현대의 보험은 크게 사망과 노후 등에 대비한 생명보험과 화재, 자동차나 해상 사고 등과 관련된 손해보험으로 나뉜다. 이외에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의 중간 성격으로 제3보험이라 칭해지는 상해 질병보험이 있고, 보험회사의 위험을 분담해주는 재보험 등이 있다.
큰 사고나 가족의 죽음과 같이 아주 어려운 일도 혼자 감당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나누면 견디기 훨씬 수월하다. 보험의 원형은 공동체의 상부상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빌려주고 돌려받는 금융과 같이 인류의 생존수단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발전해왔다. 미래에 닥칠 사고나 재난에 대한 일차적 대비는 식량이나 재물 등의 저축일 것이다. 그러나 저축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재난이 오거나 저축을 충분히 하기 전에 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아, 저축으로 미래의 불안을 대비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재물을 모아서 사고나 재난 등에 대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부조 조직은 동서양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 삼한시대에 있었다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계조직도 보험의 원형이다. 로마제정시대에 있었다는 콜레기아는 가입자들이 회비를 내고 사망 시 일정 금액을 받아 지금의 사망보험과 유사했다. 함무라비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조건부 대출도 보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조건부 대출은 사업 등 어떤 일이 성사되었을 때만 대출금의 상환의무가 있기 때문에 사업 실패의 위험을 보장하는 성격이었다.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의 등장과 발전)
위험을 분담하는 상호부조 모임은 직업이나 지역 등에서 동질성이 있는 경우 더 쉽게 활성화되었다. 중세에 동업자 조직인 길드와 성직자 모임 등에서 상호부조 활동이 활발했다. 중세 용병의 대표적인 공급 국가인 스위스에서는 지역별로 용병으로 나간 가장이 죽었을 때를 대비한 상호부조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모임이 현대 생명보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보험료로 얼마를 걷어 보험금으로 얼마를 주어야 자신들의 상호부조 조직이 지속 가능할지 알기 어려웠다.
중세의 상호부조 조직은 젊은 구성원이나 나이 많은 구성원이나 동일한 보험료를 내고 사망 시 같은 보험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젊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게 되어 보험금을 계속 지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극복은 수학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수명과 사망 관련 통계가 정비되면서 가능해졌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수학에서 대수의 법칙, 정규분포, 확률적 추론 등이 발전하면서 받아야 할 보험료와 필요한 보험기금 규모 등을 산출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을 연령별, 성별, 직업별 등으로 분류하여 생존확률, 사망률, 남은 수명 등을 계산한 통계표가 만들어지게 되자 수학적 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보험이 수학과 통계를 바탕으로 상호부조와 도박의 성격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현대 금융의 하나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700년대 중반 대수의 법칙이라는 수학이론과 생명표를 기초로 현재의 생명보험과 거의 비슷한 체계를 갖춘 상호부조 조직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생겨났다.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의 목사 로버트 윌리스와 톨부스 교회의 목사 알렉산더 웹스터, 에딘버러 대학 수학과 교수 콜린 매클로린이 정확한 사망 통계와 수학 이론에 기초한 보험기금을 고안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들이 보험료를 내고 목사들이 죽으면 남아있는 처자식에게 연금 형식의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보험기금(Scottish widow’s fund)을 1744년 설립했다. 보험료 수입과 보험금 지급, 기금의 운영 수익과 운영 경비 등을 모두 감안해 지속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이 스코틀랜드 과부기금은 260년 전에 수백 명 남직한 성직자들의 처자식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보험회사(Scottish widow’s Insurance)로 발전했다. 1800년대에 들어 생명보험의 가입은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신사들의 품위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사람들의 재무상환능력 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기도 하였다.
생명보험과 함께 해상사고나 화재에 대비한 손해보험도 발전했다. 해상사고에 대한 보험은 무역이 활발했던 이탈리아에서 1350년경부터 체계화되었다. 당시 손해보험업은 전문 금융업자의 전업 형태가 아니고 무역업을 하는 상인들이 위험을 분담하기 위해 겸영하는 형태이었다.
손해보험도 도박이나 투기 대상에서 벗어나 예측 가능한 금융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가입자가 많아 대수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하고 사고 통계가 축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손해보험업이 발전한 곳은 1600년대 후반의 영국이었다. 1666년 런던의 대화재 이후 화재보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화재보험회사가 생겨났다. 1700년대 들어서는 런던을 중심으로 원거리 해상교역이 활발해지자 선박과 화물에 대한 보험시장이 커졌다.
런던 롬바르드 거리에 있는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 커피 집에서 보험업자들이 모여 정보를 나누고 보험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보험업자들의 모임이 1744년 조합(Society of Lloyd)으로 성장했다. 현재는 세계 최고의 공신력을 갖춘 보험조직(Lloyd’s of London), 세계 최고의 선박평가조직(로이드선급협회), 금융그룹인 로이드은행지주(Lloyd’s Banking Group)로 분화 발전했다.
당시 보험계약은 보험계약서의 아래에 보험업자가 이름을 기입하는 것(underwrite)으로 효력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보험업자는 underwriter라 불리고 보험계약이나 채권 등의 책임을 지는 것을 인수(underwrite)라 하게 되었다.
보험의 기본 원리는 보험료 지급이라는 약간의 비용을 부담하면서 발생 확률이 낮은 큰 재난 등을 보상받는 것이다. 보험업이 발전하는 과정을 볼 때 사람들은 보험의 이러한 기본 원리를 잘 받아드리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즉 확률적으로 낮지만 큰 이익을 얻거나 큰 손실을 피할 수 있다면 작은 비용(보험료 지급)은 기꺼이 부담할 용의가 있는 것이다. 1800년대 후반 이러한 보험의 원리가 국가 단위로 확장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88년 독일에 국가 차원의 노령보험과 건강보험 제도를 구축하였다.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정책들이 도입된 것이다.
스코티시 위도우 같은 민간보험 펀드가 생겨나고 종교단체의 구빈활동 등이 늘어나도 가난하고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1800년대 후반은 자본주의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고 소득불평등이 급격히 확대되는 시기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867년 발간되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복지국가 모델은 사회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수주의자이고 국가주의 신봉자인 비스마르크에 의해 시작되었다. 국가가 재정지출을 통한 복지 확충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은 것이었다. 즉 기득권 체제의 붕괴 방지라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비용을 기꺼이 지급한 것이었다. 국가의 사회안전망에도 보험의 원리가 적용된 셈이다.
이러한 국가보험의 확대와 민간보험의 활성화 등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1960~70년대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복지국가의 기본 틀을 어느 정도 구축했다. 노령보험과 같은 국가보험은 가입을 강제할 수 있어 바로 대수의 법칙의 적용이 가능하고 광고선전비를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인 면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화의 확대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추진으로 경쟁과 소득불평등이 다시 커졌다. 기업과 사람들이 직면하는 위험이 복잡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보험에 대한 수요는 다양해지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보험의 업무도 전통적인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을 넘어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사망에 대비한 생명보험 이외에도 사고와 질병에 대비한 보험, 평균 수명보다 과도하게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한 연금 등이 크게 늘어났다. 건설공사나 납품계약 등의 이행 보증, 건물이나 비행기 등의 임대 보증, 개인의 신원이나 재정 보증, 채무 보증 등의 보험 등도 많아졌다. 가수의 목소리 보험, 기타 연주자의 손가락 보험, 인기 모델의 다리 보험 등의 보험도 생겨났다. 그리고 보험업도 다른 금융업과 마찬가지로 국제화를 통해 매출과 수익을 늘려 나갔다.
(보험업의 과도한 변신: AIG)
AIG(American International Group)는 1919년 설립되어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에게 보험을 팔고, 세계 제2차 대전 후에는 일본에서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여 조금씩 성장하던 보험사였다. AIG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한국전에 참전했던 그린버그(M. R. Greenberg)의 저돌적 영업으로 197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했다. 2000년대에 들어 CDS(Credit Default Swap)라는 보증 성격의 파생금융상품을 매입하여 수익을 늘리고 외형을 확대해 나갔다. AIG는 2007년에 자산규모 1조 달러, 시가총액 약 1천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가 되었다.
CDS는 대출 금융기관이나 채권투자자가 보유 자산의 신용위험(credit default)을 회피하기 위해 발행하는 파생금융상품이다. CDS는 대출이나 채권에 대한 보증이나 보험과 성격이 비슷하다. AIG는 당시 자신의 높은 신용등급(AAA)과 많은 자산규모를 바탕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금융기관들이 발행한 CDS를 자금 부담없이 매입(보증)하고 수수료 수입을 쉽게 올릴 수 있었다. AIG는 뛰어난 금융공학자 등을 채용하여 매입하는 CDS의 위험을 분석하여 문제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은행 등 금융기관은 대출이나 보유 채권을 근거로 한 CDS를 신용등급이 좋은 기관에 팔면 해당 대출 등은 위험자산에서 빠져 BIS자기자본 규제를 회피할 수 있다. 금융기관들은 대출을 하고 CDS를 발행하여 위험자산을 줄이고, 다시 대출함으로써 자본금을 늘리지 않고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AIG 등 CDS 매입기관과 은행 등 대출기관의 이해관계가 딱 맞았다. 당시 AIG가 매입한 CDS는 약 3,000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8년 9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대출의 부실화로 AIG는 대량 매입한 CDS에서 손실이 나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AIG가 도산하면 8,100만 명의 전 세계 보험가입자가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AIG에 CDS를 판 금융기관들도 연쇄 도산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 연준은 AIG 지분의 79.9%를 양도받고 850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여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를 구제하였다. 큰 금융기관이 경영 실패로 망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구제해준다는 대마불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금융기관이 아무리 덩치가 크고 정교한 위험관리기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시장의 큰 충격 앞에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보험업은 인간이 회피하고 싶은 위험이 늘어나면서 계속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은 인공지능 등 기술 발전, 세계화의 확대와 불평등 심화, 급격한 기후 변화, 테러 확산 등으로 더 많아지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AIG는 한 개의 보험회사가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여기에다 현대의 보험업이 정교한 수학이론과 많은 통계자료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보험이 갖고 있는 도박적 성향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험은 30년, 50년씩 지속되는 계약도 많다. 이러한 장기간 동안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의 극적 변화나 새로운 치료법의 발명과 같이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2001년 9월의 미국 뉴욕 테러, 2004년 12월 서남아시아의 지진 해일(tsunami), 2013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이 손실 규모가 과거 역사적 경험치를 크게 초과하는 사건이 또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미래 예측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보험업의 근본적 제약이다. 여기에다 보험회사의 경영진이 AIG사례와 같이 스스로 고수익을 쫓아 도박적 사업을 추구하면 보험회사는 더 위험해진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보험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