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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2. 발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2008년 계리직 3번 기출
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왕임을 자처하였다.
② 문왕 때에는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③ 무왕 때에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
④ 발해 유적지에서는 온돌 장치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되었다.
※문제해설
①발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친선을 유지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과 일본의 답서에도 고려 국왕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만주에 세워졌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②3대 문왕(文王, 737~793 : 대흠무, 연호-대흥)은 ㉠당과의 국교 수립, ㉡황제 국가 체제,㉢수도 천도,㉣독자적 연호 사용,㉤관제 정비,㉥주자감을 설치,㉦신라도 개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
③2대 무왕(武王, 719~737 : 대무예, 연호-인안)은 대당 강경책으로 ㉠영토 확대, ㉡장문휴의 수군 당의 덩저우[登州] 공격,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발해를 공격 실패, ㉣발해는 당과 신라를 견제하고자 돌궐·일본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10대 선왕(宣王, 818~830 : 대인수, 연호-건흥)는 최대 전성기로 당에서 해동성국이라 불렀고,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로 정비하였다. 따라서 정답은 ③번이다.
※이론 정리
발해(渤海)왕조사(698~926)
1. 발해의 건국 배경
(1)고구려 유민들의 대당 저항 :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평양(나중에 요동으로 이전)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유민들을 통제했으나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2)동족의식 강화 : 당은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677년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말갈족과 함께 당에 항전하였다. 이러한 당의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을 결속케하여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2. 발해의 건국
(1)건국 : 7세기 말 696년 이진충·손만영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장군 출신의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여, 지린성(길림성) 둔화시(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이었다.
※동모산의 오동성지(敖東城址)가 첫 도읍지로 밝혀지고 부근에 제3대 문왕 대흠무의 제2녀인 정혜공주(貞惠公主)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2)국호와 연호의 제정: 처음에는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 이후 당 현종(712~756)은 대조영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화해를 요청하고, 대조영 고왕을 713년 발해 군왕에 책봉하였다. 이후 발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3대 문왕(대흠무,737~793) 때에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국’을 표방하였다.
(3)발해의 영역 확대: 발해는 건국 후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고구려의 옛 영역인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4)남북국 시대 :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통일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함께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5)고구려 계승 의식 표방
발해는 영토면에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포함하고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한 국가였다.
①일본과의 외교 국서:발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친선을 유지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과 일본의 답서에도 고려 국왕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만주에 세워졌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➁발해 문화면: 문왕 이후 적극적으로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으나 고구려적인 요소도 많았 다.
㉠발해 문화의 고구려적인 요소☜매우 중요
유적,유물 | 내용 |
ⓐ정혜공주묘(굴식돌방무덤)양식 | 둔화시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문왕의 둘째 딸의 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이다. |
ⓑ고분 천장의 모줄임 구조 | 네 귀에서 세모의 굄돌을 걸치는 식으로 반복해 모를 줄여가며 올리는 돌방무덤의 천장구조로 ‘말각조정식천장’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유행하였다(안악3호분, 쌍영총, 수렵총, 강서 수산리벽화고분, 삼실총, 모두루총 등) |
ⓒ궁전 터의 온돌장치 | 고구려 온돌장치를 계승했다. |
ⓓ금제 관장식 |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제 관장식은 고구려 조익형 관식을 닮아서 고구려 계승성을 실물로 확인해준다. |
ⓔ이불병좌상 | 흙을 구워 만든 전불(塼佛)로 불상의 얼굴, 광배, 의상 등의 그 제작 수법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막새기와(와당)의 연화문 | 고구려 막새기와의 영향으로 강건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
ⓖ돌사자상(고구려와 당문화 복합) | 정혜공주묘에서 출토된 유물로, 당의 영향으로 당의 돌사자와 유사하나 당당하고 힘있는 자세는 고구려 미술의 패기와 정열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발해의 초기 성터 | 고구려 전통 계승(환인 오녀산성이나 집안 환도산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방어체계 (성산자 산성)→ 8세기 중반 이후-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장안성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한다. |
ⓘ정효공주 무덤의 천장 | 이 무덤은 벽을 벽돌로 쌓으면서 천장은 돌로 평행고임을 해 당나라 양식과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
㉡발해 문화의 당적 요소☜ 중요
유적,유물 | 내용 |
상경용천부의 주작대로 |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수도에 대로를 건설하였다. |
정효 공주 묘(벽돌 무덤)양식 | 정효공주는 정혜 공주의 동생으로 무덤 안의 구조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굴식돌방무덤이지만 전형적인 중국 무덤인 벽돌무덤으로 무덤 안에 12명의 남장한 여자의 인물도가 그려져 있으며 고분 뒤에는 독특한 형식의 벽돌탑을 조성한 흔적이 있다. 백제의 무령왕릉과 함께 벽돌 무덤의 대표적 무덤이다. |
잠자는 미녀상,삼채 여용,삼채 그릇 | 화룡 북대 고분군에서 발견된 삼채 그릇과 삼채 여용, 잠자는 미녀상은 당 문화의 요소를 가졌다. |
돌사자상 | 정혜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로 당당하고 힘있는 자세는 고구려 영향이지만 상의 배치나 모양은 당적 요소이다. |
4․6 변려체 | 4․6 변려체로 쓴 정혜공주 묘지와 도교의 내용을 기록한 정효공주 묘지(墓誌)는 한문학의 발달을 알 수가 있다. |
정치,행정,군사제도 | 3성6부의 중앙 관제, 10위의 군사 제도, 15부 62주의 지방 조직, 관료 제도,관복 제도 |
정효 공주 묘 12명 인물도, 삼릉둔 2호묘 | 정효공주 묘의 12명의 인물 벽화도 당나라 벽화 양식을 모방하고 삼릉둔 2호묘의 벽화 인물들도 역시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
㉢발해의 독자적 요소☜매우 중요
ⓐ명칭과 운영방식:발해의 중앙 관제의 6부는 당적 요소이나 명칭이 서로 다르고 정당성 아래 좌사 정과 우사정이 각각 3부씩 나누어 관할하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독자적 연호:발해의 왕들의 연호는 독자적인 자주성을 나타낸다. 고왕(천통), 무왕(인안), 문왕 (대흥,보덕), 선왕(건흥)
ⓒ무덤 위에 탑을 쌓은 방식: 정효공주 무덤이나 마적달 탑처럼 승려가 아니라 일반 귀족을 위해서 무덤 위에 탑을 쌓은 방식은 발해의 고유한 것이다.
ⓓ다인장(多人葬) 방식: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다인장(多人葬) 방식도 발해적 인 양식이다.
ⓔ사유관음상(思惟觀音像)이 서 있는 자세로 표현:상경성에서 출토된 불상 가운데에 사유관음상이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있어서 이것도 역시 발해에서만 독특하게 확인되고 있다
3. 발해의 발전
(1)2대 무왕(武王, 719~737 : 대무예, 연호-인안) : 대당 강경책
➀영토 확대 : 당과 대립하면서,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➁장문휴의 수군 당의 덩저우[登州] 공격 : 당이 동북방 지역에 있던 흑수부 말갈족과 연결되어 흑수주를 설치하여 발해를 위협하자, 이에 발해는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부 말갈을 정벌하게 했으나 대문예가 당에 투항하였다. 장문휴로 하여금 당의 산둥반도 덩저우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을 죽였다.(732),
➂신라와 당 연합군이 발해를 공격 실패: 이에 당은 신라 성덕왕에 원군을 요청하여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발해를 공격했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 신라 이때 대동강 이남을 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➂돌궐·일본과의 관계 : 발해는 당과 신라를 견제하고자 돌궐·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2)3대 문왕(文王, 737~793 : 대흠무, 연호-대흥) : 대당 화친책
➀당과의 국교 수립 : 8세기 후반에 당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당은 문왕을 발해 군왕에서 발해 국왕으로 승격시켰다. 이 시기에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었다.➁황제 국가 체제 : ‘고려국’을 표방하였고, 불교의 전륜성왕 이념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발해가 천손(天孫)임을 내세워 황상(皇上)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또한 장자상속제를 확립하여 황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③수도 천도 : 문왕은 발해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서 동모산→중경 현덕부→상경 용천부(안록산 난 이후)→동경 용원부(훈춘) 등으로 천도를 하면서 영토 확장이 크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④독자적 연호 사용 :독자적 연호인 대흥을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표방하였고, 유신을 단행하면서 ‘고려국’을 표방하고, 불교의 전륜성왕 이념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➄관제 정비 : 당의 3성 6부 제도를 도입하여 발해의 현실에 맞게 명칭과 운영방식을 독자적으로 하였다.
➅주자감을 설치 : 국립대학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유교 정치 이념을 표방하였다.
➅신라도 개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특히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활발하게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하였다.
(3)5대 성왕(成王, 793?~794 : 대화여, 연호-중흥) : 다시 상경 용천부로 환도하였다.
(4)10대 선왕(宣王, 818~830 : 대인수, 연호-건흥) : 최대 전성기
➀해동성국 :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요동지역의 소고구려국을 정복하였다. 그 결과 북으로는 흑룡강, 동으로는 연해주, 남으로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확장하였고, 당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➁지방 제도 정비 : 확대된 지역을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로 정비하였다.
4.10세기 동북아 정세와 발해의 멸망
(1). 15대 애왕(哀王, 906~926:대인선, 청태)
➀10세기 동아시아 정세: 남북국의 형세를 유지하던 통일신라와 발해는 애왕이 즉위하던 당시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발해 이남에서는 900년에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고, 901년에는 궁예가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후삼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당제국이 망하고 907년 후량이 들어서 5대 10국(907~960)의 개막을 알리고 있었다. 동북아에서는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16년 거란을 건국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918년 후고구려를 이어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한편 발해에서는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어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결국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만주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던 발해는 멸망하고, 거란은 상경에 동란국(926~982)을 건설하였으나 곧 928년 요양으로 옮겨갔다. 한편 신라도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다음해 936년 고려는 선산 일리천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5. 발해의 부흥운동
압록부를 중심으로 열만화가 정안국(?~986)을 세웠다. 그 외에도 후발해국(929년~1003), 1029년(흥요국), 1115년(고욕의 부흥운동), 1116년(대발해국)등이 있었다.
6. 발해의 대외 관계
(1)당과의 관계
➀초기 무왕의 대당 적대관계: 8세기 초 발해 무왕이 영토를 확장하자 당은 흑수부 말갈족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에 발해는 흑수부를 치는 한편, 장문휴로 하여금 산둥 덩조우를 공격하게 하였고 요서 지방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➁동북아 세력 균형: 발해는 돌궐·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신라와 당을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③문왕의 대당 친선책: 8세기 후반 문왕 이후 친선 관계로 바뀌어, 당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고 또한 오소도, 오광찬 같은 도당 유학생들이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당의 문물이 발해에 영향을 미쳤다.
(2)일본과의 계속적인 친선 외교: 무왕은 신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727년 일본과 국교를 체결한 이후 끝까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9세기 전반 승려 정소와 석인정의 일본에서의 활약이 컸다.
(3)신라와의 관계 : 신라 지배층의 보수적 성격과 발해의 건국 주체가 고구려 유민이었던 점에서 두 나라는 갈등 관계였다. 더구나 당의 견제 정책에 의하여 이 같은 상황은 더욱 조장되어, 신라와의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사신이 파견되고 경제적·문화적으로 교류가 있었다.
➀교류 관계
㉠대조영 대아찬 벼슬: 건국 후 대조영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였다.(700).
㉡원성왕과 헌덕왕 때 발해에 신라도를 통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790, 812).
㉢거란의 침입 때 발해가 신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911).
㉣신라도(新羅道):「신당서」에 의하면 8세기 중반 수도 상경에서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로 들어가는 상설 교통로를 신라도(新羅道)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사신들이 1년에 한 두 차례 왕래하였다.
➁대립 관계
㉠발해 장문휴가 당을 공격하자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였다(733).
㉡윗자리 다툼 사건(효공왕, 897):당에서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되었다.
㉢등제서열 사건(효공왕, 906) :당에서 최언위가 발해의 오광찬보다 빈공과의 등제 석차가 앞서자 오소도(발해의 재상, 오광찬의 부친)가 아들의 석차를 올려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되었다.
※발해사 인식 연구
저서 | 저자 | 내용 |
상태사시중장,사불허북국거상표 | 최치원 | 발해를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양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
삼국사기 | 김부식 | 발해사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고 신라중심으로 서술 |
삼국유사 | 일연 | 신라중심 역사서로서 왕력편은 발해가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말갈․발해조의 목차를 정리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제왕운기 | 이승휴 | 최초로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였다. |
조선전기,중기 역사서 | 동국통감, 동국사략(박상), 동사찬요(오운), 동사보유(조정), 동사회강(임상덕)등은 신라와 이웃한 나라의 역사로 파악하여 발해사를 민족사에서 배제하였다. | |
동국지리지(한백겸), 동사(허목), 동사강목(안정복) | 고구려 강역을 차지했지만, 부정적 시각으로 발해사를 바라보고 있다. 동사강목에서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외하여 통감 방식대로 외기(外紀)에 넣었다. | |
강계고(1756,신경준), 동국문헌비고,청장관전서(이덕무),연려실기술(이긍익) |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였다. | |
동사 | 이종휘 | 기전체의 형식으로는 최초로 발해사를 세가로 다루어 서술하였다. |
해동역사 | 한치윤 | 삼국과 발해의 역사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
아방강역고 | 정약용 | 발해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평가하였다. |
동사세가 | 홍석주 | 삼국과 발해의 역사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
발해고 | 유득공 |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발해사를 단독으로 다룬 역사서이다. |
대동지지 | 김정호 | 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방여총지 」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다.「발해국」항목에서는 삼한·삼국(신라·가야·백제)·삼국(고구려·신라·백제)·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
조선상고사 | 신채호 | 발해지역의 유물과 우적을 발굴하였다. |
대한강역고 | 장지연 | 1903년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현대식으로 증보한 책 |
남북국시대 설정 | 장도빈의『국사』(1916·1946), 권덕규의 『조선유기』(1924), 황의돈의 『상고시대』(19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