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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접촉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의 줄거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행위언약이라 부르는 것은 참으로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행위언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특성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 때문에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판단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자기 존재의 본질에 역행하며 자기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괴적인 판단은 바로 접촉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지요.
나는 접촉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
(창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접촉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유명한 명제가 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의 제목은 ‘나는 접촉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니면, 아마 많은 선생님들이 이 창세기의 선악과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실 때 복숭아나무로 비유해서 전달해주시는 경험들을 해보셨을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성인이 되면 목에 튀어나오는 부분을, 복숭아를 몰래 따먹다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에게 들킬까봐 급하게 먹다가 복숭아씨를 삼켜버렸는데 그게 목구멍에 걸려서 남자들의 목이 튀어나왔다.
그런 거에 비하면 여자들이 범죄 할 때도 상당히 침착한 편이라 먹을 것 싹 먹고 씨는 목구멍으로 안 넘기고 던져버리는데 남자는 마누라 때문에 먹게 되었으면서 양심에 가책을 갖고 덤벙거리다가 그만 복숭아씨를 삼킨 바람에 목이 불쑥 튀어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말해도 하나도 틀린 말도 아니고 잘못된 말도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떨 때 그렇습니까?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2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듯이, 행위언약이라고 본다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선악과나무일 필요가 없습니다.
복숭아나무도 되고 사과나무도 되고 어떤 과일나무든지 임의로 하나 정해놓고, 그걸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얘기하면 된다는 거예요, 행위언약이라고 이해할 때.
행위언약이 뭡니까?
이런 행위를 하면 내가 너에게 벌을 줌으로써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게 행위언약이거든요.
그래서 이 선악과나무 열매를 따먹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가 살고 죽는 일이 결정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처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행위언약으로 이해하느냐 다른 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이겁니다.
행위언약으로 이해해버리면, 기독교를 고사상태에 빠뜨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죄도 짓기 전에 나온 이야기 속에서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잘못된 거예요.
단지 선악과 자체가 갖는 의미를 배제하고 선악과 열매를 따먹느냐 안 따먹느냐는 행위만을 따지기 위해서 이 사건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선악과나무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복숭아나무 세워두신 다음에 저 열매를 따먹으면 죽는다, 이렇게 얘기해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불순종 하느냐의 여부만을 따진다면 선악과나무일 필요가 없습니다.
복숭아나무도 되고 사과나무도 되고 배나무도 되고 감나무도 되고… 다 괜찮은 거예요.
어는 것이든 임의로 정해놓고 ‘먹지 말라 불순종 하면 죽는다!’ 이런 게 행위언약이지요.
무엇 때문에 선악과나무라고 정해놓았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상태로 인간이 바뀌어버리잖아요, 그러면 죽는다는 얘기는, 내 스스로가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또 거기에서 발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대해서 어느 것이 좋고 나쁜지 판단을 하게 되는 이 상태가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지으실 때 인간 존재의 특징과 본질에 역행한다는 얘깁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에 역행한다는 것이고, 인간존재의 본질을 파괴함으로써 그 존재됨, 인간다움이 파괴돼버린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얘기는, ‘너의 존재의 특성과 본질상 너 스스로가 너에게 해당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상황이 되면, 너의 존재는 파괴돼버리고 만다’라는 얘기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의 생각은 판단이 근거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어야 생각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가 파괴된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동안에 내 존재의 본질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내 존재다움이 파괴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얘깁니다.
그러면 ‘나는 접촉한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요?
접촉, 서로 맞닿는 겁니다.
근데 오늘 제목에 사용한 접촉은 우리 육체의 접촉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접촉을 말합니다.
접촉 이야기를 왜 합니까?
판단이라는 것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접촉이라는 거예요.
접촉하지 않으면 판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닿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 느낌이 주어지고, 느낌이 주어지면서 판단이 되어 지고, 판단이 되기 때문에 생각이 나오고, 생각이 나기 때문에 말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마음에 접촉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뉴스에 흉악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흉악한 사건들로 말을 하자면, 정말 어마어마해요.
그중에 예를 하나 들자면, 옛날에 있었던 형제복지원사건,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고 있던 그 시절에 88올림픽에 대비해서 거지나 심지어 구두닦이까지도 다 잡아다가 12년 동안 50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갇혔던 3천 명 중에 지금도 후유증을 앓고 있어서 정신병자도 많고 평생 불구로 사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복지원을 경영하던 원장은 풀려나와서 그 가족은 지금도 실로암이라는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재판을 하는데 정부에서 압력을 넣으니까 판사들조차도 이 사회의 복지에 많이 기여한 사람이라고 판결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훈장까지 달아주는 그런 것까지 나오더라고요.
공분하게 될 일이지요.
아니, 구두닦이 한 가족을 잡아다가 아버지와 딸은 정신병자가 돼버렸어요.
88올림픽 하면 구두닦이는 있으면 안 됩니까? 공분하게 되지요.
왜 공분합니까?
마음이 그 뉴스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사실에 가닿았기 때문에 그래요.
닿으니까 느낌이 주어지고, 닿으니까 판단이 생깁니다.
이게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판단하면 죽는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따먹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는 죽는다.’ 이 말은 더 깊이 들어가면 ‘네 마음이 이 땅에서 그 어느 것에도 접촉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접촉하면 느낌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손으로 만지면 만지는 대로 느낌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손수건을 만지니까 손수건의 느낌이 있고, 강대상을 만지면 강대상에 대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마음이 가닿으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반드시 판단이 생기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얘기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접촉하지 말라 너희 마음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접촉한 상태로 살아라.
근데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판단이 필요하잖아요. 어떻게 판단을 할 겁니까?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해야 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사건이든 사람이든 마음이 접촉하지 않으면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과 맞닿습니다.
여기서부터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은 믿음으로 풀어나가야 되는 거예요.
믿음이 뭐라고요? 마음을 드리는 겁니다.
심장을 꺼내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접촉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느낌으로부터 하나님의 판단이 주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지으신 이 피조의 세계에 대해서는 그 모습이 악하든 선하든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마음이 가닿아 있으면서 하나님이 느끼시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판단을 받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주체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일이, 이 피조의 세상의 기본 설계인 혼돈과 공허가 우리의 존재를 압도해버리고 뒤덮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죽음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접촉하지 말라는 얘기를 성경에서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민수기 20장에 보면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마르다고 아우성치면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여기서 죽도록 만들었냐?’
앞에서 정탐이야기 속에서 믿음을 보이지 않아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한 선조들과 함께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얘기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치잖아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뭡니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의 현장의 주인공입니다. 근데 어떻게 모세가 믿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근데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는 거예요.
믿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뭐에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보입니다.
출애굽부터 기적을 통해 온갖 능력으로 광야 속에서 먹이시고 살리시며 이끌어 가시는데 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껴안고 가셔도 아직도 믿지 않는 거예요.
조금 목마르면 참으면 될 일인데 그걸 못 참고 성질을 내고 원망을 하고,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원망을 합니다.
그러니 모세가 이 사람들을 볼 때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은혜를 경험하고서.
어느 민족이 그런 은혜를 경험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의 마음이 어디로 접촉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접촉이 됩니다.
이게 바로 믿음을 보이지 않은 거예요. 믿지 않은 겁니다.
믿음이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난리를 치는 걸 보면, 거기에 접촉되면서 느낌이 있고 판단이 서는데, 이거는 살아남아 있어야 될 필요가 없는 종자들이라는 판단이 주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화가 나지요, 지팡이를 두 번만 칠 게 아니라 족장들을 불러다가 엎드리게 해서 엉덩이를 지팡이로 쳐내야 할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게 마음의 접촉이 엉뚱한 방향에서 일어났고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접촉이 됐어야 돼요.
하나님과 접촉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판단하는 판단이 모세에게 주어지고, 그 판단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할 때 하나님의 주체성이 표현되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스라엘의 목전에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본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거잖아요.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십니다.
풍랑 만난 상황에 마음이 접촉이 되면 느낌이 오고 판단이 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 접촉이 되니까 두려움이 느낌으로 오고, 어떤 판단이 나옵니까? ‘이러다가 죽게 생겼다!’ 그리고 행동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혼돈과 공허가 지배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던 베드로가 오순절 지나고 어떻게 됩니까?
내일 참수 당하기로 돼있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천사가 내려와 옆구리를 차야 일어날 정도로 깊은 잠을 자게 됩니다.
마음이 어디에 접촉돼있습니까? 하늘에 접촉이 돼있는 거예요.
접촉하면 판단하게 됩니다.
이 점이 기독교 경전인 성경의 첫머리에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잘못 나오게 되고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가 나오게 될 때, 행위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믿음을 문제 삼아야 되고, 믿음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지금 마음이 어디로 보내져서 마음이 어디와 접촉하고 있는지 봐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기독교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을 비전과 꿈으로 가지라고 하고, 이 세상에서 이룰 일에 마음이 접촉돼있는 상태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합니다.
그러니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올 수가 없지요.
이제는 그러니까 하나님 부르는 믿음 따로 행위 따로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가 점점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고사상태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귀가 나타나서 죽음의 개념을 바꿔버려요.
원래 흙으로 지은 이 육체는 육체의 목숨이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육체의 목숨이 끝나는 것은 그러나 죽음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일 필요가 없던 것이었어요.
그건 죽음이 아니라 졸업입니다.
그건 죽음이 아니라,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졸업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입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죽음은 뭐였습니까?
마음의 접촉이 하나님께 가닿아서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생각을 받고 행동하며 사는 삶이 산 삶인데,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건 마음의 접촉이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이고 다른 것에 접촉하는 것인데, 마귀가 이 마음의 접촉을 따라서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죽음의 문제를 육체가 목숨이 끊어지느냐 안 끊어지느냐의 죽음의 문제로 속여서 바꿔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접촉이 끊어졌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 삶에 혼돈과 공허가 찾아오고, 모든 문제가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얘긴데, 그래서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온갖 악행이 다 나오고 있는 것인데, 이걸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게 인간 존재다움의 죽음이고, 존재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고, 나 스스로가 내 존재를 깨버리는 것인데, 이것을 마귀가 속여서, ‘육체가 살아있는 한 너는 산 것이다, 죽은 게 아니다, 그걸 먹는다고 죽어? 하나님이 당신 혼자서만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되시려고 욕심을 부리시며 독재하시려고 너희가 선악 판단의 자리에 설 수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죽기는커녕 하나님처럼 되는 자리에 설 수 있다’
거울을 볼 때 내 모습이 예쁘게 보여서 ‘아! 참 내 얼굴이 예쁘네!’ 그런 느낌을 받아서 외모에 마음이 접촉이 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것이 마음에 행동의 근거가 되어줍니다.
자신감, 또 남자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괜히 앞으로 삐죽삐죽 나갑니다.
한 60 되시는 분들이 모여서 하는 얘기 주제의 핵심은 항상 건강이에요, 무엇이 건강에 좋다더라, 어느 병원이 뭘 잘하더라 … 맨 건강얘기에요.
근데 내가 60이 됐는데도 혈압도 높지 않고 당뇨도 없고 관절도 튼튼하고 다 건강해요, 그것이 마음에 접촉이 되면 자신감이 생기고 행동에 자부심이 나타납니다.
이게 다 죽은 거예요.
어디에 마음이 접촉되어서 어디로부터 마음에 느낌이 주어지고, 마음에 판단이 주어지면서 생각하게 되고 행동이 나오게 되느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접촉이 된 상태는 다 죽은 겁니다.
철저하게 죽은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 스트레스를 받으시면서 기도하십니다.
왜 그래요?
몸 자체가 죽는 것이 큰일이 아닙니다, 몸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하늘나라로의 입학이고 세상의 졸업입니다.
졸업을 싫어하는 것은 바보 천치에요.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던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던 분이 왜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저주로 떨어지셔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놓여있는 죽음의 상태, 저주의 상태로 떨어져야 되기 때문에.
이 저주가 뭡니까?
마음이 하나님과의 접촉이 끊어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내팽개쳐버리십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상태로 던져버리십니다.
그곳으로부터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그 3일 동안을 못 참아서 그렇게 징징 우셨습니까? 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무서워하셨습니까?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분처럼.
잠깐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아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3일 동안 하나님아버지와 마음의 접촉이 끊어지는 것조차도 그렇게 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두려우셨던 겁니다.
우리는 왜 그걸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마귀의 꾐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서.
내 마음이 이 세상의 사업에 접촉이 돼서 ‘사업을 이렇게 하면 안 되겠는데…’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기도도 하면서 난리를 쳐요, 이게 지금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거예요.
어디로부터 내 마음의 느낌과 생각이 나오고 있는가? 어디에 접촉하고 있느냐?
‘이 세상에서 내가 접촉한다, 고로 나는 나를 파괴한다’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 이야기의 핵심인 것이에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 1장부터 3장까지의 모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까지 이해하는 일에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현실적으로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마음의 접촉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접촉을 끊어야 돼요.
하늘의 하나님께 접촉할 수는 없고, 세상에 대한 접촉을 끊고 기다리면 약속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접촉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접촉할 수는 없어요.
약속을 믿고 은혜를 믿고 기다리는 거죠.
단, 세상에 대한 접촉은 끊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세상에 대한 접촉을 끊는다는 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겁니다.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자식에 마음이 접촉된 상태에서 그 상태로부터 느낌을 받고 판단하고 행동하면 죽음입니다, 나도 죽고 자식도 죽어요.
사업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식과 사업에 대해서 마음의 접촉을 남의 일인 것처럼 끊어내야 되요.
그리고 내 마음은 어디로 접촉돼야 됩니까?
십자가를 붙잡고 기다리면 반드시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셔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접촉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자식문제 사업문제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주어지고, 그 판단이 주어지는 것이 주체성이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인간다워지는 것이고, 인간 중에서도 나는 나다워지고 너는 너다워지고, 그는 그다워지고, 그녀는 그녀다워지고… 할 수 있는 삶의 시작이 거기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귀에게 속아서 아직도 마음은 이 세상 온갖 상황과 대상들에 접촉되어 있어서, 거기로부터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여전히 살아있는 줄로 알고 있는 우리의 무지함을 깨우쳐주시고 어찌하든지 겟세마네의 주님이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아버지와만 마음이 접촉되어서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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