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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는 조용한데 등뒤에 감겨오는 으스스함에 눈을 부릅뜨고 옆부터 찬찬히 돌아보니 다양한 형태의 무신도와 창검류, 방울·명두류, 부채류, 신(神)악기류, 깃발류, 각종 제사상 등 200년 전 우리 민족의 무속 풍습이 거기 그대로 살아숨쉬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기란 응당 나무나 놋으로만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질박한 백자 제기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금성당은 굿당으로 지어진 이후 한번도 거처를 옮긴 적도, 한 해도 굿을 거른 적도 없이 힘겨운 세월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었다. 세월 저 너머에서 무가(巫歌) 한 소절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며 귓가에 들려왔다.

“어떤 광대씨가 올라왔소/ 나무도 뚝 꺾어 다리를 놓고 돌을 던져서 구렁 매구/ 가는 소망도 생겨주고 오는 천량도 생겨주고/ 입설수 귀설수 물려주고 억울한 누명수 저처주고/ 홍액대액이요 삼재환란은 손재식물 일년도액을 막아주고/ 은자천 금자천 재물번성요 천신이 받들어서/ 동서사방을 다니셔도 태평성대로 도와주고/ 부귀장성을 하구 일년의 홍수도 막고 갈제…”
우리 사회는 무당이나 굿을 일체 미신(迷信)으로 치부하고 부정적이다. 실제 무당 가운데 상당수가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신사참배 신앙만이 옳고 우리의 전통신앙과 샤머니즘은 잘못됐다고 억압하자 어둠의 세계로 밀려난 뒤틀린 현상일 뿐, 본래 굿에는 집안의 우환을 덜어보려는 소박한 꿈과 함께 국운융성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옛날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모두 그리 뛰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던 곳이 아니던가. 특히 금성당은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민초들이 보리 한 됫박 차고 가도 부담 없이 고통을 풀어내던 곳이었다.

금성당(錦城堂)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 걸쳐 있던 국사당 성격의 마을 굿당이다. 조선시대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1426∼1457)을 주신으로 모셨던 곳으로, 한때는 지역민과 유명 만신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대동으로 굿을 하며 한마음이 되었고, 마을 액을 공동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서울에는 마포 들머리와 각실점(장위동), 구파발 아랫·위 등 3개의 금성당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구파발 아랫 금성당만이 남아 있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자 세조의 아우였다. 어릴적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두터웠던 그는 조카의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의 모함으로 삭령, 광주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주 순흥에서 처형돼 생을 마감한다. 당시 마을 주민들도 금성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순흥 두렛골에는 정월 보름에 금성대군의 충의를 기리는 대동놀이가 펼쳐진다. 무속에서도 그를 영검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금성대군이 무속신앙의 중요한 신으로 등극한 기록은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금성당의 유래는 이렇다. 한강변에 궤짝이 떠내려 왔는데, 두 사공이 발견해 한강변 망원동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렸다. 궤짝이 저절로 열리면서 그 안에 장군 등이 그려진 탱화에서 마을 전체에 빛을 발하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신이라 생각하고 마을에 당을 지어 모시게 됐다. 당에 모셔진 신이 영검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안에 사는 사람이 말을 타고 당을 지나다가 말굽이 떨어지지 않자 내려서 절을 올림으로써 말굽이 떨어졌다. 이 사실을 임금이 알고 왕신으로 모시라고 명하니, 그 뒤로 궁궐을 드나들던 고관 부인도 찾아와 정성을 드렸고, 마포나루를 지나던 조깃배 임자들도 정성을 드려야 배가 순항했다. 이 일로 금성당의 영검이 널리 퍼졌고, 찾는 이도 쇄도했다.

◇오색의 석채로 정성스럽게 그려진 무신도는 서민들에게 전염병을 고쳐주는 등 다양한 영험을 보여줬다.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삼불사 할머니, 호구아씨, 별상님, 맹인도사.김주성 기자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이자 문화재전문위원인 양승종씨는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구파발 아랫 금성당을 다년간 연구했는데, “200년은 족히 되는 목조 기와단층의 19세기 중요 건축양식”이라고 평가한다. 그 규모나 위치를 보면 처음부터 국가기관이 국사당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금성당의 위치는 서울 경복궁과 성산(聖山)인 개성 덕물산 일직선 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좌청룡 우백호’를 아우르는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과거 나라굿에 직접 참여했던 고 김점석씨는 한 자료에서 “금성당은 조선시대에 호국사찰을 지명한 것과 같이 국가예산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나랏님 행차가 그려진 탱화가 모셔져 있는데, 이는 나랏님을 주신으로 모신 굿당이기 때문”이라고 밝혀 타당성을 얻고 있다.
금성당에는 공통적으로 금성님 등 10여점의 무신도가 모셔져 있다. 각실점 금성당은 30∼40년 전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포 금성당도 개발에 쓸려나가면서 무속인 이영덕(정릉 거주)씨가 금성님과 용궁장군님 등 2점의 무신도와 몇가지 ‘기물(귀물·鬼物)’을 어렵게 구해 보관하고 있다. 구파발 아랫금성당에도 16점의 무신도가 있었는데, 20여년 전 본당에 모셨던 금성님, 용궁장군님, 칠성님 두 분, 육대신마누라 용궁부인, 삼불제석, 부처님 등 8점을 도난당하고 현재는 맹인도사, 맹인삼신마누라, 호구아씨 등 8점과 기물들이 굿당을 지키고 있다.
400평가량의 아랫금성당은 전면 세 칸에 붙여 서쪽으로 두 칸을 지은 역기역자 구조로 돼 있다. 오래전 본당 안쪽에 붙어 있었던 다락방에 켜놓은 촛불이 넘어져 불이 나는 바람에 다락방 부분이 소실됐다. 본당 정면은 네 짝의 격자 문살의 분합문을 옆으로 달아, 위로 접어올려 고정시킬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본당 앞으로 하당이 있으며 본당 양옆 앞쪽으로 새롭게 조성한 살림집이 붙어 있다. 오른편에는 시봉자(당주) 송은영(68)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고, 왼편으로는 세입자가 산다. 본당 앞면 우측으로 또 다른 기와 건축물이 있는데, 당주의 큰아들이 살고 있다. 금성당의 법적 권리자는 사실상 큰아들이다.
송 할머니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금성당 시봉자들은 ‘신씨(여)∼박윤수(여)∼이정숙(여)∼송 할머니’로 이어진다. 송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이정숙씨이고 시할머니가 박윤수씨인 모계 대물림으로 4대째 이어지고 있는 것. 서울 진명여고 출신인 송 할머니는 이곳으로 시집와 굿당에 대한 큰 관심 없이 그저 굿할 때나 정성을 드릴 때 음식 장만 등에만 신경을 썼다고 한다. 과거에는 큰 굿이 많았지만, 지금은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본래 금성당에서는 마지(공양)를 올릴 때 무엇을 얼마나 해와라 주문하는 법이 없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각자 형편에 맞게 가지고 가서 정성껏 빌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금성당에서는 연례적으로 국가안위와 재해방지를 기원했는데, 특히 ‘홍수맥이 굿’이 유명하다. 몇해 전 구파발 일대에 뉴타운 개발 결정이 내려지면서 금성당도 헐릴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히 상명대박물관과 서울시 도시개발공사의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금성당의 보존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금성당 소유자는 개발이익 20억원가량을 날릴 판이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 또 관계기관이 보존한다 해도 다른 곳에 옮겨 보존한다면 그 역시 국내 유일의 ‘원형 굿당’은 훼손되고 만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현재 그 자리, 그대로의 원형 보존이다. 그래야 훗날 그 가치를 몇백배 몇천배 보상받을 수 있다. 그토록 핍박이 심하던 일제 강점기도 잘 넘기며 200년을 버텨온 전통 굿당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지, 재개발에 부닥친 옛 소중한 문화유산 한 점이 우리 시대에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글 정성수, 사진 김주성 기자 hul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