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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이요 신도비(麟坪大君李㴭神道碑) 이경석(李景奭)
1658년(효종 9년)에 효종(孝宗)의 명에 의하여 포천시 신평리에 건립한 인평대군 이요(李㴭)의 신도비이다. 인평대군 이요(1622~1658년)는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 사옹원도제조(司饔院都提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40년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부터 4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詩) · 서(書) · 화(畵)에 두루 능했으며,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으로는 서울대학교소장의 <산수도(山水圖)>와 개인 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있다.
(전액)인평대군 증시충경공 신도비명
조선국 인평대군 겸오위도총관 증시충경공 신도비명과 서문
원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이경석(李景奭) 지음.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부총관 세자좌빈객 오준(吳竣) 글씨.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오정일(吳挺一) 전서(篆書).
무술년(효종 9, 1658년) 5월 13일 인평대군이 성동(城東)의 자책에서 사망하여 석 달 만에 장례를 지냈다. 왕이 내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나는 너무나 송구하여 이튿날 대궐로 달려가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왕이 비답을 내렸다. “경이 짓지 않으면 나의 지극한 정을 펼 수 없을 것이오.” 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또 어떻게 감히 사양하겠는가? 행장은 대사헌 오정일이 명을 받들어 지어 올린 것으로 그 행장에 준하여 서술했다.
공의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고 선조대왕의 증손, 원종대왕의 손자, 인조대왕의 셋째아들, 왕의 동생이다. 인조가 아직 왕이 되지 않았을 때 인열왕후가 천계(天啓) 2년 임술년 (광해군 14, 1623년) 12월 10일 공을 낳았다. 공은 남달리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고 민첩했다. 겨우 말을 배울 나이에 글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품속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인헌왕후가 병환이 나서 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자주 약을 복용했는지 묻곤 하자 왕후가 기특하게 생각하여 억지로 마시곤 하였다. 인열왕후가 몸이 불편한 일이라도 생기면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왕이 하는 대로 같이했다. 아우 용성대군과 장난치며 놀다 공이 다치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인열왕후가 용성대군을 나무라자 공이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했다. 용성대군이 천연두를 앓게 되어 유모가 공을 업고 병을 피했다. 용성대군이 요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소리치며 울었다. 어려서부터 왕을 잘 따라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얻게 되면 형에게 주었다. 왕이 보살펴주면 공은 은혜를 생각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왕은 더욱 안쓰러워서 함께 자곤 했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었다.
갑자년(인조 2,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대가가 남쪽으로 행행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선부(膳夫: 밥 짓는 사람)가 산 꿩을 잡아 바치려 하자 공이 보고 “빨리 놓아 보내라”고 명하며 말했다. “어떻게 참아 살생을 할 수 있겠느냐?” 다섯 살 때 이현궁(梨峴宮)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추위 속에 거지 아이가 울면서 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옷과 밥을 주고, 나중에도 여러 차례 왔으나 처음 번과 똑같이 주었다. 인조가 공에게 옥으로 만든 벼루를 내리자 공이 보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시사(侍史)가 실수로 깨뜨린 일이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깨뜨린 자를 미워했으나 인조에게는 자기의 실수라고 대답했다. 공의 인자하고 관대함이 이와 같았다.
숭정(崇禎) 무진년 치아를 갈 때쯤 공은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하루는 인조가 만세루(萬歲樓)에 나와 술을 차려놓고 훈신들에게 권했다. 예를 마친 뒤 공에게 명하여 서열대로 비단을 나누어주게 했는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인조가 가상하게 여겼다. 여덟 살에 사부로부터 효경과 소학을 배웠는데 일취월장하여 사서와 경사(經史)를 차례로 익혔다. 갑술년에 빙례(聘禮)를 행하였는데 예를 행하는 모습이 의젓하여 보는 사람들이 혀를 차며 칭찬하고 감탄했다. 을해년 인열왕후가 사망하자 지나치게 슬퍼하여 겨우 몸을 보전했다.
정축년(인조 15, 1637년) 소현세자와 왕이 심양으로 떠날 때 공이 창릉(昌陵) 아래서 절하고 이별하며 손을 잡고 놓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먹였다. 경진년에 인조가 몸이 불편하자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보내오는 대신 공이 부인과 함께 가게 되었다. 심양에 이르러 세자의 관소에서 예를 행할 때 청나라 장수들이 공이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공이 대답했다. “아무리 동기간이라고 하나 세자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청인들이 덩달아 에워싸고 구경했다. 이해 겨울 부인과 함께 돌아왔다가 임오년 여름에 사명을 받고 심양에 들어갔는데, 청국에서 먼저 세자관(世子館)부터 들르라고 했다. 공이 말했다. “사사로운 친함을 먼저하고 공적인 예를 뒤로 하는 것은 대국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다.” 청국에서는 정말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을에 돌아왔다가 계미년 가을에 또 사사로 심양에 들어가니 공을 억류하고 다시 부인을 들어오게 하여 갑신년 가을 부인과 함께 돌아왔다. 을유년 가을에는 도총부도총관에 제수되었는데 그 뒤로 혹 체직되기도 하고 혹 겸직도 하게 되었다. 청국이 연경(燕京)을 얻은 후 세자는 아주 돌아오게 되었고 공은 사명을 받들고 연경으로 갔는데 왕이 돌아오는 길에 국경 밖에서 만나게 되어 7일 동안 머물렀다. 5월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소현세자의 부음이 왔다. 공은 영위를 설치하고 조석으로 서럽게 울었다. 청국에서는 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공의 뜻이 절박한 것을 알고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공은 수행을 간편하게 하고 달리다시피 돌아왔다. 때마침 비바람이 크게 일어 물을 건널 수 없었다. 도보로 산비탈을 돌아서 오자니 노비가 다 떨어졌으나 빨리 가서 곡하는 것이 급해 어려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돌아와 보니 왕이 이미 세자로 봉해져 한편으로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며 우애를 돈독히 했다.
정해년 여름 진하사로 연경에 가니 구왕(九王)과 용장(龍將)이 왜검을 얻고자 하여 각자에게 장검 한 자루씩을 보내면 본을 떠서 만들겠다고 했다. 공은 나중에 있을 폐단을 염려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자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폐물을 실어다 바치는 것이 온나라의 폐단이었으므로 공이 힘을 다해 감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감축을 허락받은 물건은 쌀, 무명, 명주, 활, 칼, 호초 등 수 천백 가지였다. 가을에 복명하고 무자년 가을에 휴가를 받아 천마산과 성거산을 유람했다. 기축년 5월 인조대왕이 사망하니 왕을 따라 상을 치렀는데 예법과 슬픔을 고루 갖추어 극진히 했다.
경인년 봄에 여섯 칙사가 함께 나와 구왕을 위하여 청혼하고 공이 사은사로 가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혼사를 주관하도록 청했다. 왕이 상제를 마치지 않았다고 거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6월에 길을 떠나 봉황성에 이르자 예부관원이 연회를 열겠다고 했으나 국상중이라는 이유로 사절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나 경석은 영의정으로서 왜인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성지를 보수해야 한다고 청국의 사신을 보고 누누이 말하고 이어서 청국에도 알렸다. 이 때문에 청국에서는 크게 미워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 또 대제학으로 있던 조경(趙絅)은 사은사의 표문을 지었는데 누락된 말이 있어 견책 당했다. 왕이 여섯 사신을 누차 설득하여 처벌을 완화하여 모두 백마산성에 위리안치 되었다. 공이 북으로 행차할 때 왕은 화를 늦추어보라고 당부했다. 의순공주의 호행사(護行使)가 돌아간 뒤 청국에서는 두 사람을 극률로 논하여 본국에서 처단하라고 했다. 공은 도중에 호행사를 만나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분하여 연경에 도착하자 곧 구왕을 찾아갔다. 성심을 다해 왕의 간절한 부탁과 새로 즉위한 뒤의 어려운 상황, 선대의 대신을 차마 처단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말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공은 관소로 돌아와 학질을 앓게 되었는데 파장(巴將)이 공의 병색을 보고 위문하자 공이 말했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속이 타고 답답하여 병이 났다.” 파장이 들어가 그대로 고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가을에 공이 돌아왔는데 청국 사신이 뒤따라 나와 더더욱 크게 책망하면서 기어이 공을 사은사로 삼고자 했다. 이에 앞서 공이 연경에 있을 때 이미 그러한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글로 왕에게 알렸다.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감히 일신의 편안함을 도모하겠습니까? 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도 공이 청하여 연경에 가서 주문(奏文)을 올리겠다고 파장에게 먼저 말하고 또 아문에도 보고했는데, 두 신하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윽고 파장 등이 와서 물었다. “이만(李曼)과 노협(盧協)은 무슨 죄로 처벌받았습니까?” 또 두 신하의 소재를 묻고 연경으로 데려다 다시 조사하려는 뜻을 보였다. 노협은 동래부사로 있고 이만은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 왜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으나 여섯 사신이 조사할 때는 죽음이 두려워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청국에서는 그대로 두었으나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배척하자 화를 낸 것이다. 공이 사실대로 명확하게 따져 설명했다. 이윽고 두 신하를 석방하되 다시는 서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는데, 칙사가 떠나기 전에 먼저 공에게 알려 공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또 1년에 한번씩 들어와 양국 간의 의심을 풀도록 했다. 공을 공경하고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해 겨울에 또 진하사은사가 되어 연경에 들어갔는데 호부상서가 말을 전했다. “진상한 물건이 모두 품질이 열악하고 태후의 호마저 잘못 써서 주관한 사람을 불경죄로 다스리려 했으나 대군을 보고 그만두었다.” 이처럼 특별하게 대우했다. 내가 직책을 떠나자 고 이경여(李敬輿)가 후임이 되었다. 이경여도 두 신하의 일에 대해 따지다가 또 청국으로부터 죄를 얻었다. 공이 연경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정월초하루의 연석이 파한 뒤 틈을 봐 조용히 각로(閣老)에게 말했다. “태후를 존숭하는 일은 큰 경사입니다. 은택이 두루 미치고 있으나 유독 세 신하에게만 미치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말이 극히 조리에 맞으니 각로가 말했다. “이경여는 선황에게 죄를 지었소.” 공이 전에 이경석의 서용을 윤허한 칙서를 품에서 내놓고 분명하게 따졌다. 정역(鄭譯)이 말했다. “이곳에 사신으로도 안 오고 그곳에서도 만날 수 없으니 아무리 중임이라 하나 무슨 대수요?” 공이 즉시 정역과 친한 역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네가 이 말을 들었으니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은 듣고 안 듣고는 저들에 달려있지만 내 할 말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일에 임하면 할 말은 다 했다.
임진년 봄에 돌아와 사옹원도제조를 겸하고 아울러 종부시제조를 겸했는데 누락되는 일이 없이 모두 처리하자 낭관이나 서리들이 쩔쩔맸다. 10월에는 말미를 청해 관동으로 가서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했다. 계사년에 변방인들이 금령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다가 적발되어 청국에서 문책하므로 또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조정 의논이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곧 칙사의 행차가 있다고 하므로 공이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말하자 사신을 중지하고 사신을 보내려던 일에 대해서는 공이 돌아오는 편에 부쳐 보냈다. 갑오년에는 청국에서 심양을 순행할 계획을 세웠다가 중지한 일이 있었는데, 공은 문안사로 안주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겨울에 또 사은사로 연경에 갔다가 을미년 봄에 돌아왔다. 병신년 봄 능원대군이 사망하자 공이 주관하여 상을 치렀는데 모두 예제에 따라 행했다.
공이 전에 을미년 겨울 부인의 오라버니인 오정일(吳挺一)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술 취한 사람 하나가 어스름에 갑자기 찾아와 많은 실례를 했다. 잠시 후 공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사과를 하는데 말이 헷갈렸다. 그 집 자제들이 서로 전하면서 웃었는데, 말이 돌다 보니 좋지 않은 말이 부풀려 전파하게 되었다. 군수 서변(徐抃)이 이것을 듣고 고변했는데, 아무개의 집에서 소를 잡아놓고 모여서 술을 마셨다고 한 말이 공까지 침해했다. 왕이 몹시 놀라고 통탄스럽게 여겨 직접 인정문으로 나와 엄히 국문하게 되었다. 왕이 대신들에게 말했다. “내게 아우 하나밖에 없는데 감히 이간시키려 하는가? 아니면 우애하는 마음이 혹 부족해서 그런 건가? 이렇게 흉측한 말이 나도는 것은 내 잘못이다.” 즉시 무함을 받은 신하들을 앞으로 불러놓고 위유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읍했다. 서변과 홍만시(洪萬始) 등은 곤장을 맞다 죽고 유언을 퍼뜨린 자들은 모두 궁벽한 변방으로 유배당했다. 사람들은 “전하의 우애와 분명한 결단이 누구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 드러난 공의 적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가을에 공은 사은사겸진주사가 되어 떠나게 되었는데 떠나기 며칠 전에 아들을 잃었다. 왕은 공을 안타깝게 여겨 부사(副使)더러 먼저 떠나라고 명하였다. 공은 차자를 올렸다. “사사로운 정은 통절하지만 국가의 일이 중하므로 함께 떠나겠습니다.” 왕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윤허하여 겨울에 돌아왔다. 정유년에는 청국에서 공을 수행한 사람이 금령을 범했다고 책망이 내려왔다. 공이 달려가서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사과하여 무사히 끝내고 돌아왔다. 이해 12월 왕이 대비를 위해 만수전(萬壽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삼궁(三宮)이 차례로 앞에 나가 술을 올렸다. 공도 명을 받아 잔을 올리고 즐겁게 모셔 기쁨을 다하고 파하였다. 일이 많아 오랫동안 행하지 못한 예를 이날에야 비로소 행하게 되었으므로 돌아와서도 기쁜 기색이 충만했다.
무술년 첫봄에 감기가 들어 오래 끌고 낫지 않으니 의약이 계속되었는데, 모두 내국에서 나온 것이었고 신찰(宸札: 임금의 서찰)이 줄을 이었으며, 좋은 음식이 끊임없이 내려졌다. 4월 19일에는 왕이 친히 공의 집에 가자 공이 억지로 일어나 의대를 갖추고 마당에 나가 맞이하고 절을 하려고 했다. 왕이 손을 부여잡고 말리면서 공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세자도 따라가고 모든 공주도 다 모여 집안사람의 예로써 대하여 화기애애했다. 저물녘에 환궁한 뒤 많은 물건을 하사했다. 공은 모든 종친을 대표하여 사전(謝箋)을 써서 맏아들 복령군 욱(栯)에게 올리게 하고, 또 장률(長律)의 시를 써서 감송하는 뜻을 나타내니 여항에서 전송하면서 천년에 한 번 있을 성대한 일로 여겼다. 왕이 공을 궐 안으로 옮겨 친히 돌봐주고자 하자 공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한 여름이 되자 하루아침에 병이 더해 왕이 크게 놀라 견여를 재촉하여 지름길로 나가고 따르는 신하들은 걸어서 갔다. 왕이 허둥지둥 들어가 손을 잡고 두 번 세 번 불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이 통곡하여 눈물이 비 오듯 했고, 부인은 패도를 꺼내 자결하려 하였으나 왕이 직접 구해 겨우 소생했다. 찌는 듯한 더위는 불 속에 있는 것 같았으나 왕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염습을 친히 살피고 조카들을 달래며 온종일 미음도 들지 않았다. 세자도 따라가서 슬퍼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오열하며 눈물을 닦았다. 정부에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진위했으며 조시(朝市)를 3일간 철폐했다. 또 왕이 친히 관염(棺斂)하는 데에 나가려고 하자 삼사에서 그만두기를 청하니, “끝내 나를 막아 못 가게 하면 울화가 나서 죽게 될 것이다.” 라는 비답을 내렸다. 삼사에서도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마침내 비를 무릅쓰고 가서 몸에 딸린 것을 모두 살폈는데, 모두 어의로 상의원에서 새로 만든 것이었다. 하사한 관재도 장생전에서 상품으로 가져다 썼으며 제수로 쓰는 모든 음식과 상탁 등은 사옹원과 상방에서 공급했다. 장례를 지내는 날에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몸이 불편하여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은 더욱 슬퍼하고 한스러워 하며 중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되 제문만은 친히 지어 어려서부터 커갈 때의 정과 우애가 독실했음을 말하고, 떠나고 만났을 때의 슬픔과 기쁨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하여 내용이 너무나 애처로워 읽는 사람이 한글자 한글자마다 눈물을 흘리느라 목이 메여 잇지 못했다.
공의 수명은 37세로 덕에 걸맞지 않았으나 살아서는 영화로웠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은 것이 고금에 유례가 없었다. 1편의 어제 제문은 족히 공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게 할 만 했다. 태상시에서 공의 행적을 의논해 충경공(忠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왕실의 지친으로 존귀했으므로 마땅히 국사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으나 불행히도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여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저들의 핍박에 의하여 들어가기도 하고 우리 쪽 일이 다급하게 되어 혹한과 무더위를 무릅쓰기도 하고, 기구하게 눈 내리는 변방과 장마비 내리는 요동을 밟기도 했으며, 모기에 뜯기거나 찬바람과 서리로 고생하면서 심양에 세 번 연경에 아홉 번 들어갔다. 아무리 수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나 천금같은 몸에 상한 것이 많이 쌓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이 더욱 애통해 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던 것이다.
공이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쯤이면 왕은 항상 어찰과 시를 보내 봉황성에서 맞이하게 했는데, 음식과 술을 같이 보냈고, 공이 복명할 때는 안장을 갖춘 말과 노비를 내리고 아들들의 품계를 올려 주었다. 공은 감격하여 곧장 시를 지어 노래하곤 했다. 사망하기 하루 전에도 정신이 맑아지자 친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며 왕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벗들과 믿음으로 사귀고 마음에 거짓이 없고 의로운 행실을 한다면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적은 악이라도 해서는 안 되고 적은 선이라도 아니해서는 안 된다’는 한소열(漢昭烈)의 말은 참으로 격언이다.” 또 연경 행차의 고통과 금강산의 아름다움, 그 밖의 산수와 정자의 경치 등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밤사이 홀연히 서거했다. 속광(屬纊: 운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코끝에 솜을 대어보는 일) 때도 안색은 평일과 다름없었다. 몇 해 전에 공은 몸소 묏자리를 잡고 석물까지 갖추어 놓았다. 사람들은 공이 그렇게 서두르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아마 미리 짐작한 바가 있었던 듯하다.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기개가 준엄하고 시원하여 그 풍채를 바라보면 엄숙하게 되고 존경심이 솟았다. 임금과 부모에게는 진심을 다했고, 종족 간에는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공의 숙부 능창대군이 광해군 때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인조가 공에게 대군의 후사를 잇게 했하여 공은 예로써 제사를 지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경계를 긋지 않았으며 선비를 대할 때는 자기의 존귀함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칭찬하고 남의 잘못을 보면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지는 듯이 생각했으며, 남의 곤란을 보면 서슴치 않고 도와주었다. 평소에도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지냈으며 술은 마실 줄은 알았으나 만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간혹 취하게 되면 깜짝 놀라 선왕(인조)의 훈계를 되새기곤 했다. 아침 문안을 지성으로 하여 비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는데 간혹 들어가지 못할 경우는 왕이 바로 불러들여 밤새도록 함께 지내다가 물러났다. 서책을 좋아하여 수 천 여권을 쌓아두었으며 외기(外紀)와 제자백가의 서적에도 두루 통달하여 난해하다고 일컬어지는 곳도 모두 능통했다. 그런 여파가 넘쳐나 문장이 비단처럼 곱고 풍부하여 촉발하면 쏟아져 나왔는데 무척 여유가 있었다. 때로 문사들과 어울려 시를 주고받으면 긴 율시이든 짧은 글귀이든 즉석에서 지어냈고 깎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격률에 맞았다. 공이 지은 글도 매우 많고 역대의 문한과 차운한 것을 잘 베껴서 책으로 만들어 놓고 읽으며 간직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연경 행차를 기록한 기행록도 있고 천성산과 금강산을 유람한 뒤 기록한 유산록도 있다.
인조가 전에 옛 궁궐의 재목을 뜯어다 공을 위해 한강 옆에 정자를 지었는데 끝을 맺지 못하고 승하하자 왕이 이어 완공했다. 공은 왕이 내린 것이라 호화롭게 꾸미기 위하여 대은(戴恩)이라고 편액을 했다. 또 조계(槽溪)의 수석을 사랑해 정사를 짓고 영휴(永休)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공이 송계(松溪)라는 자기의 호를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공의 저택은 낙봉(駱峯) 아래 있는데 원림도 윤택하고 골짜기도 매우 깔끔했다. 그 정원 속에 정사를 지어 영파청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편액은 어필로 한 것이어서 공이 더욱 좋아하여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바로 언덕으로 올라 배회하며 속세를 떠난 듯한 흥취를 갖곤 했다.
이해 7월 13일 발인하여 광릉의 서남 언덕 능창대군의 묘소 곁에 묻히게 되었는데 공이 직접 잡은 자리이다. 그러나 수혐(水嫌)이 있어 그 동쪽 묘향(卯向)의 언덕에 자리를 잡아 8월 2일에 장례를 지냈다. 사망한 때부터 장례를 지낼 때까지 왕은 중관을 보내 감호하게 했다. 왕은 대군이 항상 폐단을 줄이자고 말한 점을 생각하여 되도록 간소하게 치러 공의 뜻에 부응하라고 당부했다.
공의 배필 동복오씨(同福吳氏)는 부부인에 봉해졌는데, 관찰사 증우의정 서(端)의 딸이고, 이조참판 증영의정 백령(百齡)의 손녀이며, 이조판서 청송군 심액(沈詻)의 외손녀이다. 공과의 사이에 6남 4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복령군 욱(栯)이고, 2남은 복창군 정(楨)이다. 인조가 의창군에게 인빈(仁嬪)의 제사를 맡겼는데 후사가 없어 복창군을 의창군의 후사로 삼았다. 그 밖의 아들은 12살과 11살이고 2남과 4남은 요절했고 딸 둘도 요절했으며 딸 하나는 어리고 또 하나는 뱃속에 있다. 복령군은 지평 허열(許悅)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1남 1녀를 낳았고, 복창군은 서산군수 황도명(黃道明)의 딸과 결혼했다.
아! 옛날 한나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꽃다운 종친과 귀한 척족으로 하간왕의 예악과 한중의 문장이 있어 왕왕 시와 역사책에 실린 일이 있다. 그러나 공처럼 험한 길을 달려 다니면서 일신을 잊고 나라만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부러뜨리고 우환을 밀어버린 현명한 노고는 북산의 대부보다 더하여 둘도 없는 일이다. 어제 제문 중에 “저들이 감히 협박하지 못하고 네 뜻에 고분고분 따른 것은 어찌 네가 두려워서 그랬겠느냐? 지성에 감동한 것이다.” 는 구절이 있는데 실로 귀신에게 확인해 봐도 부끄럽지 없는 말이며, 오랑캐 나라에 가서도 행할 만한 공의 심사를 그리듯 묘사한 것이다. 그 위에 무슨 딴 말을 덧붙이겠는가? 공은 슬기로운 아들을 많이 두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공에게 보답한 것이 아닐까? 명왈(銘曰),
왕자 왕제면 존귀함 더할 나위 없고
인후한 성품 이름난 효도와 우애
호걸이면서 선비다움 옛날에도 있지만
누가 공처럼 오랫동안 원정 했겠나?
왜 직책에 구애됐나? 뜻이 나라뿐이라
독실하고 충직한 언행 모두 감복했네
임금을 위해 달리면 만리도 지척이라
몸은 험난했으나 위급함을 도왔네
목숨을 줄여가며 간난에서 구한 공로
애도와 영화 다하니 길흉이 함께 해
빛나는 의장 돌아오자 소복이 잇다랐네
왕이 애도하고 만인은 눈물 흘리는데
꽃떨기 사라지니 그림자도 없어지고
정원은 황폐하여 휘장엔 먼지만 앉네
덕을 쌓은 경사로 공자들이 떨치니
공은 죽었어도 죽은 것 아니라
높이 우뚝 선산 양양히 흐르는 물
커다란 비석 앞이 공이 묻힌 곳이네
바라보면 높다라니 영원히 보존하리라
무술년(효종 9, 1658년) 월 일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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