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시와 디카시의 현장(13)
매주 월요일에 현대시와 디카시의 현장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이주송 시인의 시 두 편과, 손병만 시인의 디카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식물성 피 외 1편
이주송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도 합승해,
홀연 질주 본능으로 기슭을 배회하다가
봄으로 감쪽같이 견인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효율성 좋은 자동차라고
차 문을 열거나 지붕 위에서 뛰기도 하지만
계절의 시속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도 차 주위로
푸릇한 수만 개의 부품이 조립되고 있다
풀씨창고 쉭쉭
멧돼지 한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댈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은 움튼다
이주송 시인
2019년 7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주송 시인이 첫시집 『식물성 피』(걷는사람, 2022.)를 출간했다.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바위솔
새벽 찬바람이 전해준
한 방울 생명수 머금고
세상 끝에 서기까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척
통증 끌어안고 오롯이 서있는 것은
아직 다 채우지 못한 그대 향한 그리움
_손병만
마중
거름더미 같은 이 마음을
거울처럼 밀어버리고
그 위에 꽃배 띄워
그대 오시는 발걸음 맞으리라
_손병만
손병만 시인
시사모, 한국디카시학회 회원
아마추어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