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의 詩를 넘어 - 이상옥 평론집
멀티포엠이 음악, 영상, 그림 등의 언어 외적 요소를 문자시(언어)에 병치시키거나 결합시킨 것이라면, 디카시는 문자를 오직 사진 이미지와 결합시킨 형태다. 이런 점에서 디카 시는 가장 기초적인 멀티언어 형태라 할 수 있다.
간혹 디카시가 문자시를 전제로 하여 사진과 결합시킨 포토포엠의 하위 갈래로 인식되거나, 포토포엠과 동의어로 해석되는 것은 이러한 멀티적 외연 때문이다.
그러나 디카시는 엄연히 포토포엠과 구분되는 뚜렷한 갈래 경계를 지니고 있다.
먼저, 디카시는 날시(raw poem)를 상정한다. 날시는 자연이나 사물 속에 깃든 시적 형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날시는 자연이나 사물이 스스로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빚은 언어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만 완벽한 시적 형상을 획득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디카시는 날시를 전제로 하고, 디카로 이 날시를 찍어 문자로 재현하기 때문에 문자시만이 독자적으로 존립할 경우, 그 의미는 온전하게 전달될 수 없다.
포토포엠은 문자시가 먼저 있고, 그 시에 어울리는 사진을 병치하여 감상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따라서 포토포엠의 경우, 굳이 사진 이미지가 제시되지 않아도 문자시만으로도 독자들은 그에 연상되는 이미 지들을 충분히 상상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디카시의 경우엔 순간 포착된 '기호'(이미지)를 통해 '의미'(해석된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이므로, 이미지 없이 문자로만 구현되었을 때 그 시가 주는 시적 감흥은 현저히 떨어지거나 아예 빗나간다.
즉, 포토포엠의 경우 문자시나 이미지가 따로 제시 되어도 그 본래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반면, 디카시의 경우엔 문자나 영상이 따로 제시되어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디카시는 포토포엠이 지적받는 시상의 고유성 훼손이라는 측면에서도 비껴나 있다. 다시 말해, 포토포엠은 문자시가 지닌 시상의 권위가 이미지에 의해 축소될 수 있지만, 디카시는 문자와 영상이 어울린 하나의 결합체 이기 때문에 오히려 '낯설게 하기'의 시적 기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디카시가 포토포엠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창작과 수용 심리' 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포토포엠은 영상이나 시가 각각 선후 관계로조합되는 탓에, 둘 사이엔 일정한 시간의 경과가 있고 그 동안에는 애초의 발상이나 감흥이 최종 창작품에까지 유지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디카시는 휴대폰(혹은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시적 형상을 순간 포착하고 역시 순간적으로 문자 재현한 후에 곧바로 휴대폰에 입력된 지인 혹은 독자들에게로 동시에 전송한다. 따라서 디카시는 포토포엠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며 생생한 감흥을 살려낼 수 있다.
포토포엠은 인터넷 시배달과 같이 일반 문자시를 보다 효과적으로 소통시키기 위해서 사진영상을 병치하는 것으로서, 디카시처럼 뚜렷한 새로운 장르 개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첫댓글 읽고 또 읽어 봅니다만 디카시의 본질에 다가 가기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고 문자 재현한 후 곧바로 전송할 만큼 경지가 쌓여야 할 텐데요~~~ 어려워 어려워~~
디카시 창작의 실제 과정이 이처럼 이론대로 ‘즉순간적’으로 현장에서 바로 일어날 수도 있고, 사진 이미지와 문자 기호를 연결하면서 상대적으로 긴 조탁의 과정(시간)을 거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카시에서 강조하는 즉순간성의 개념은 원론적으로는 유지하되 그 활용에 있어서는 창작자의 재량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와 경계] 2024 겨울호에 실린 오민석 교수님의 글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