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핍으로 유지되는 삶
곽재구 시인의 <길귀신의 노래>를 읽고
2018. 1. 향기 이영란
냉동실 온도와 비슷한 겨울 날씨이건만 햇살이 한 조각이라도 비치는 곳은 응달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다. 가만히 있는 것과 무엇인가를 하는 것 역시 그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한 겨울의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 얼른 얼른 실내로 들어가서 따뜻하게 지낸다. 삼시 세끼 밥 때가 되면 또 밥을 먹는다. 아침에는 굴에 참기름을 넣어 볶아 끓인 미역국을 먹었고, 점심은 교육청에서 제공한 물회를 먹었다. 무척 맛있었다. 저녁에는 친정엄마의 도움으로 너댓가지 나물을 무치고 된장국을 자글자글 끓여 비벼 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사이사이 커피와 둥글레차, 떡, 귤, 빵을 챙겨 먹었다. 함께 연수를 받은 학교 동료들과는 서로 예의를 지키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가 다니고 있는 어떤 한의원이 좋고, 아는 선생님 부부가 홍콩 여행을 갔는데 백화점에서 감쪽할 사이에 아이가 없어져서 공안에 신고를 해서 찾았는데, 아이가 8층 화장실에서 머리가 반쯤 깎인 채로 발견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들었다. 또 베트남으로 가족 여행을 가서는 아이가 아파 3박 4일동안 리조트에서만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오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 상처받지 않을 말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적당하게 소비하며 보냈다. 나는 그렇게 따뜻하고 안락하게 지내며 날아가버린 시간들과 함께 사라진 언어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본다.
이렇게 추운 겨울 아침에 해는 어떤 모습으로 떴을까, 얼음기 서린 파도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물 아래에서도 느낄까. 이 추운 겨울에 오히려 더 봄눈을 키우는 목련의 힘겨움은 어떨까? 일요일이 물 주는 날인데 자꾸만 미루고 있는 나를 두고 우리집 화초는 어떻게 기다릴까, 기다리다 지쳐버리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고민을 건너뛰어 버린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 나는 일들만 그럴듯하게 하고, 진짜 약속한 일들은 대충 얼버무린다. 나 혼자 약속한 일이니까,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하며. 매일 그 짓을 반복하며 지낸다.
나는 <우리가 사랑한 1초들>를 그다지 성실하게 읽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읽어야 했겠지만, <길귀신의 노래>를 핑계 삼아 읽어보고 싶어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를 신청해서 구해보았다. 박웅현씨가 쓴 <다시, 책은 도끼다>에 스쳐가듯 소개한 책인데, 나는 그가 소개한 책들을 신뢰한다.
<길귀신의 노래> 옆에는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라는 부제가 조그맣게 적혀있다. 책에는 결핍으로 가득찬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와 신춘문예 당선과 그 이후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이루었을 때에는 그 스스로 결핍을 찾아 다닌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의 안락한 삶이 이렇게 한켠이 불편한 이유는 결핍이 없기 때문이리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없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어쩌면 풍족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그걸 느낄 수 없는 사랑으로 지켜 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나에 대한 대견함일 것이다. 결핍을 채우려고만 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여러 가지 질환으로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셨을 때 나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찌 나만 그러하겠냐만은 다른 사람 모두 겪는 일이라고 해서 그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개별적인 경험이고 과정이었다. 지금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안개가 많이 내려앉았던 늦은 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저만치서 아버지가 걸어가고 계셨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가 있는, 생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손자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 있으시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버지는 자식 많은 집에서 굳이 태어나지 않아도 될 존재였던 모양이다.(들은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천덕꾸러기로 자랐는데, 다섯형제 중 삼형제가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없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변변한 밭 한떼기조차 물려받지 못해 한 몸 움직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었고, 엄마와 함께 서로 기대며 삶을 꾸려나왔다. 사랑받지 못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은 따뜻한 말보다 상처주는 말을 훨씬 더 잘 기억한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내게 준 사랑보다 왜 저렇게 말할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힐난과 비난이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존재였다. 덕분에 나는 그 존재를 의지하고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 빈 자리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결핍된 순간 아버지는 그리움이 되었다.
모임 시간에 쫓겨가며 읽은 <길귀신의 노래>는 내게 모처럼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주었다. 시인에게 나타나는 시간은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 그 시간 이후로 그는 적어도 하루에 20시간 이상 시를 생각하고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하루에 10편 이상 쓰기로 결심하였다. 꿈 속에서도 시를 썼다. 현실의 삶에서 시가 써지지 않으면 현실을 바꾸었다. 포구, 작은 바닷가 마을, 인도, 러시아, 타슈켄트, 야간산행, 서울에서 입석으로 광주여행하기 등 자신의 삶이 시가 되도록 만들었다. 지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순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순하고 여린’이라는 말과 ‘지독한’이란 말이 한사람에게 공존할 수 있는 지는 모를 일이었다. 20시간 이상 시를 생각하는 사람이 쓰는 글은 표시가 났다. 똑같이 인쇄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자에 별빛과 꽃내음과 발걸음과 그의 고운 생각들이 묻어있었다. 곱고 아름다웠다. 20시간 이상 생각하고 쓰는 사람도 있는데 2시간은 내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쓴 스무살 시절의 시 <사평역에서>와 그 아래의 글을 그 때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책에는 시 <사평역에서>에 얽힌 이야기들이 제법 길게 나온다. 참 잘 읽히고 잘 들어온다. 하루 20시간 이상 한땀한땀 쓰고 있는 그에게 시의 신이 내려와 정원을 빚었기 때문이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신들의 정원
나는 왜 쓰는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날 나는 한 무리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병구, 해철, 동석, 몽구, 용덕...... 그들의 이름을 적어보는 이유는 그들이 내 글쓰기의 첫 스승들인 탓입니다. 나보다 높은 단계의 시를 쓰고 있었던 그들은 내게 예술에 대해서, 그 혼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언어와 이미지들에 대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나의 모든 글쓰기는 그 시절 이미 지금의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 생각만 했습니다. 눈뜨면 시 생각하고 눈을 감아도 시 생각하고 길을 걸으며 늘 시를 썼지요. 시가 내게로 온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 가방 안에는 시집과 세계문학전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교과서를 넣을 여백이 없었습니다. 빈 교실이나 나무 그늘 밑, 도서관 귀퉁이에서 종일 그 책들을 읽었지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는 나와 같은 아웃사이더 학생들이 더러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들어가지 않던 그들을 학교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학 시험에 합격했는가요?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습니다. 시의 신, 오직 그의 덕분이지요. 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을 믿느냐 물어온다면 경우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그 안에 신과 인간의 두 모습이 들어 있지요. 세상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간의 이야기는 그의 내면에 들어있는 좋은 에너지, 신성이 크게 작용한 탓입니다.
자신이 꿈꾸는 한 가지 일에 몰입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1년 2년 10년 묵묵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는 그 길을 걷습니다. 이런 인간의 내면에는 자신이 믿고 사랑한 선한 에너지들이 쌓이기 마련이고 어느 순간 이 에너지들은 주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에너지들은 사람들 속에 주인의 이름을 활화산처럼 빛내기도 하고 고통에 빠진 주인을 구해낼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가 이 단계에 이를 때 그는 신과의 조우가 가능해집니다. 이 말은 신이 지상 위에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내면에는 신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한 인간이 십 년 이십 년 동일한 꿈을 꾼다는 것은 자신의 안에 신의 정원을 빚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신의 숨결이 머무는 것입니다. 한 인간에게 그 인간만의 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그런 신은 아닙니다. 한 인간이 그 신을 사랑했고 신 또한 그 인간을 사랑합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답은 예!입니다. 내게 그 신의 이름은 시의 신!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지요. 어떻게 도왔는지 내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시시콜콜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겠군요.
대학시절, 친구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고 강의 시간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하나의 기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것은 나해철과의 지속적인 만남입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와 나는 매일 만나 함께 시를 썼습니다. 세 시간쯤의 시간을 함께 비우고 두 시간은 농과대학의 숲 속에 들어가 그날 정한 제목으로 시의 신과 만났습니다. 나머지 한 시간은 작품을 바꿔 읽으며 둘만의 토론시간을 가졌지요.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 날리고 싸리꽃이 은은하게 피어나던 그 숲길. 신들의 정원과 다름 없었습니다.
등록금 마련할 길이 더 이상 없어 군대를 가게 되었을 적 나는 전투경찰대에 지원했습니다. 남쪽 바다에서 서치라이트를 돌렸지요. 하늘 가득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깊은 먹물의 바다 속에 눈부신 서치라이트 광선이 쏟아졌습니다. 비와 바람과 눈보라 속으로 쏟아지는 불빛들이 그 무렵의 내 시인 셈이었지요. 습작의 광기와 국방의 의무가 결합된, 나로서는 견딜 만한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3년 후 학교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내가 써야 할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톨스토이와 타고르에 몰입했지요. 1905년쯤으로 기억됩니다. 눈보라가 펄펄 날리는 혹한의 겨울날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장원이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까지 걸어옵니다. 200킬로에 가까운 길을 걸었지요. 그쪽의 살인적인 겨울 추위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다 얼려 죽인 이력이 있지요. 며칠 전 해외뉴스 시간에도 모스크바 일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인생의 모든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그가 그 눈보라 길을 죽지 않고 보름 동안 걸어 자신의 장원에 도착하여 한 일은 농노해방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해방은 자신의 존재를 해방시킨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1995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야스나야 폴랴냐까지 도보 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요. 그 무렵의 내 허름한 영혼은 그 용기를 불어넣어주지 못했습니다. 숲길을 뒤져 장원 귀퉁이의 그의 묘소에 이르렀을 때, 작은 돌비석 하나 없었습니다. 마른 꽃다발이 몇 개, 눈송이가 하나 둘 날리는 하염없이 낮고 작은 묘지에서 나는 그가 내쉬는 따뜻한 숨결들을 느끼고 또 느끼곤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모든 생령들을 다 사랑한 그 꿈만으로 더 이상 치장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묘역을 그는 이 지상에 마련한 것이지요. 그 곳에 더 이상의 어떤 표지도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타고르의 시들은 그 자체가 꿈결이었지요. 신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달빛과 강물, 나룻배와 어린 소년의 노래, 엄마의 자장가, 라마야나 이야기와 참파꽃 항기... 그런 모두가 떨리는 꽃 이파리처럼 가슴에 닿아 왔습니다. 지상에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처음 쓴 시의 한 줄을 타고르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바람이 슬쩍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면, 이것 좀 봐. 그가 왔어. 타고르의 혼이 내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거야. 하고 생각했지요. 밤하늘에 뜬 무수한 별들이 그의 빛나는 눈빛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쓴 허름한 시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의 체에 걸러져 단 한 줄도 지상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의 성긴 체에도 걸러지지 않고 남은 시를 꼭 써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깊었습니다. 이봐요, 타고르... 지금 얼른 내게 와요. 내가 방금 쓴 시 봐줘요...
어쩌자고 이런 위대한 두 영혼의 이름들을 지금 내가 붙들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군요. 기실은 꿈, 아닐는지요. 신의 정원을 빚어내기 위한, 어릴 적 비닐봉지 안의 빛나던 별사탕들처럼 어떤 두렵고 쓸쓸한 영혼들에게도 따뜻함과 아름다움으로 남는 시, 삶이 너무 비참하고 굴욕적이어서 더 이상 존재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심한 시간들 속에서도 먼 포구 마을의 불빛들처럼 가슴 안으로 안겨오는 그런 시. 그리운 그 시들을 나는 지금 여전히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와온 바다의 선착장에는 모두 18개의 가로등이 서 있습니다. 나는 그 가로등들에게 각각의 번호와 이름들을 붙여주었지요. 그러고는 아침이거나 저녁이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 불거나 꽃이 지거나 가리지 않고 이 가로등 사이를 걷습니다. 걷다가 그 번호와 이름들에 걸맞은 시를 생각하고 잠시 주저앉아 음악을 듣다가 또 시 생각을 합니다.
지상에 언제부터 시가 있었을까요. 왜 내가 시를 쓰게 되었을까요. 왜 시를 쓰는 시간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그 시간들이 지상 위에 지속되는 한 시는 우리 마음 안에 영원한 신들의 정원으로 머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