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가 휩쓸고 지나가 초토화된 산천
무성히 녹음 지던 나무는 찾아볼 수 없고
뾰족뾰족한 새싹만
그을음 가득한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거뭇거뭇한 산 여기저기엔
제비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거센 불길에 데어 말라죽은 소나무 위에
숲이 그리운 새들이 날아와 앉아 있다
여덟 마리 새끼 중 네 마리를 잃은 어미 오소리도
털이 드문드문한 몸으로 새끼들을 보듬는다
불길 때문에 잔뜩 움츠린 산을
미풍이 흔들어 깨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등성이와 계곡엔
예전 푸르렀던 시간을 되돌리려는 듯
화사한 봄이 쭉쭉 기지개를 켠다
잿더미만 소복한 마을, 다들 복구준비로 분주하다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
그 속에서 소복소복 쌓아올렸던
이젠 화형 당한 추억에
망연자실 주저앉은 사람들도 여기저기에서
전해지는 구호물자에 조금씩 힘을 낸다
불길에 그슬려 털이 구불구불해진
누렁이가 무너진 집터를 뱅글뱅글 맴돌다가
땅바닥에 코를 붙이고 킁킁거린다
추억이 불탄 자리
가녀린 민들레꽃들이 피어나 투명한 햇살에
노란 잎을 그나마 활짝 펼쳐 보이고 있다
"언제 일어날래, 응? 늦겠다 늦어!"
아침부터 엄마의 잔소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때 맞춰 울리는 알람소리는 나의 귓전을 매섭게 울리고 지나간다.
"따르릉 땡! 땡!"
확 집어 던져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또 집어 던져 버리면 벌써 깨진 알람시계 개수가 한 자리 수가 넘어가므로 그냥 놔두기로 했다.
'하∼암' 입이 찢어질 듯이 하품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대충 씻고 나온 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외출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우리 가족 모두가 자원봉사를 하기로 약속되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아빠차에 올라탄 나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오늘 갈 곳이 어디에요?"
아빠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더니,
"베타니아라는 곳이란다. 장애아동들과 고아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곳인데 그 아이들을 수녀님들께서 돌봐주고 있지."
하고 대답해 주셨다. 장애아동! 고아아이들! TV나 인터넷, 책에서만 보았던 그 아이들을 내가 직접 만난다는 게 한편으론 신기하고 또 한편으론 긴장되기까지 하였다. 베타니아는 우리 집에서 꽤 먼 곳에 있었는데 아빠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의 심기는 불편할대로 불편해져 있었다.
'빵빵! 끼익!'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나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제 1차 주범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 하러 가는 거니까 이정도 고통은 감수하자 스스로를 다스리며 베타니아에 도착했다. 베타니아는 중심지에서 한 20여분 더 달려 도착한 곳으로, 도시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게 조용하고 한적했다. 베타니아에 도착하니 수녀님들께서 우리 가족을 따스하게 맞아 주셨다. 온기가 가득한 실내, 환한 웃음을 띠고 계신 수녀님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는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오늘 우리 가족이 해야 할 일들을 배정 받았다. 자원봉사,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내가 해보려니 쉬운 게 결코 아니었다. 이불 빨래에, 아이들 목욕시켜주고 장난감 세척에 식사하는 것까지 도우려니 튼튼하기로 소문난 나였지만 어느덧 녹초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 이것 좀 먹어봐."
틈틈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천사들 때문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지 그런 아이들마저 없었으면 난 쓰러져 버릴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수녀님을 따라 다른 일을 하러 가셨고 나 혼자 남겨져 창 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아까 그 천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동화책도 읽어주고 장난감으로 같이 놀아주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매달려 빼꼼히 우리를 쳐다보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다가오려 하면서도 다가오지 못하고 수줍게 웃고만 서 있었다.
"이리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배시시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날 무시하는거 아냐?' 나는 조금은 언짢아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같이 놀자니까!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아이는 저 멀리로 도망쳐 버렸다. 별난 아이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문득 수지라는 아이가 말했다.
"언니, 아까 그 애 못 들어."
순간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를 무시한다고만 생각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고 제대로 사정조차 알아보지 못한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하루의 자원봉사는 그렇게 마무리 되어갔다. 난 내심 듣지 못한다는 그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만난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만나자마자 사과를 한다면 그 아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만 말똥말똥 거릴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사과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꼭 안아 주고만 싶었다. 나는 나직이 엄마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엄마, 다음주에도 꼭 오자."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또다시 일요일이 왔다. 나는 어쩐지 모르게 즐거운 마음으로 베타니아의 커다란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천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수지에게 물었다.
"수지야, 저번에 네가 말해줬던 그 듣지 못한다는 친구 지금 어디 있니?"
"아! 설희요? 설희 지금 자고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이 설희인 걸 알았고 수지와 같은 나이인 것도 알게 되었다. 설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수녀님의 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설희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녀님! 설희요. 청각 장애인이라면서요?"
나의 질문에 수녀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곤 말씀하셨다.
"설희 나이가 7살이니까. 그래 7년 전 일 일거야.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설희가 베타니아 정문 앞에 있더라구. 바구니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로워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 눈 내리는 날의 여자아이라고 '설희'라고 이름도 짓고 말이야. 그런데 자라면서 설희의 행동이 좀 이상하길래 병원에 가 보았더니 선천적인 청각장애아라고 그러더라구. 안타까운 마음도 컸지만 이것도 주님의 뜻이니 좋은 일에 설희가 쓰임받는 날이 꼭 오겠거니 생각하면서 키워온거야."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설희가 더 친근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 날 이후 설희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설희와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인 수화도 배우게 되고 함께 산책도 다니며 나의 자원봉사는 매주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희가 내게 손짓으로 물었다.
"언니, 난 소리를 듣고 싶어. 새 소리는 어떤 거야? 언니 목소리는? 파도소리는 어떻게 나는 거지?"
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해 주었다.
"설희야, 세상엔 아름다운 소리도 많지만 시끄럽고 불쾌한 소리도 많아. 어떤 때는 귀를 틀어막고 그런 소리들을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단다. 그리고 설희 너는 못 듣는 대신 일반 사람들보다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예쁜 눈을 가졌잖니."
그러자 설희는 다시 나에게 전하였다.
"시끄러운 소리, 듣기 싫은 소리, 그런 것들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어. 꼭."
난 설희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소음이라고 간주해 버렸던 주변의 소리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에겐 무시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게 되어진 소리들이 설희에겐 간절한 소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준 설희가 너무 고마웠다. 햇살에 적셔진 설희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학교 가야지! 이제 그만 일어나렴."
엄마의 목소리가 오늘은 시원하고 낭랑하게만 들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오늘 살아있음과 들을 수 있음에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햇살이 나의 방을 환희 뒤덮었다.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음에 다시 감사를 드렸다.
"엄마! 일어났어요."
내 목소리를 내가 들으며 기쁘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스승인 설희를 생각했다.
"설희야 고마워. 그리고 너도 꼭 세상의 그 어딘가에서 저 햇살처럼 빛이 되는 존재가 될거야!"
따사로운 햇살은 내 머리를 비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