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보혜사(保惠師)
요한복음 15:26, 14:16, 17:26, 16:7
도화동교회
夫至難者受恩也. 恩惠卽無功而受, 無義而得者也. 故貴於金玉. 以天下不可易者也. 然一次受恩, 恐易失墜故, 主曰以忍保靈也. 눅二十一章十九. 信者於何時失恩也, 盖看受逼時失却也. 飢渴甚時, 誘惑甚時, 虛榮來到時, 皆失恩之時也. 人心雖堅固, 學識雖高邁, 才智雖超越, 皆不能保恩, 惟聖神來歸後, 可以保恩也. 故主號聖神謂保惠師也. 十五章. 慮門徒受過, 深深注意而更以保惠師托之也. 神可保恩故云耳. 門徒皆復活之證人也. 保負神之恩則使可證主之復活也. 不由聖神則恩惠之路閉塞而不通, 祈禱而不聞答, 聞道而不入心, 禮拜而不蒙恩, 冷冷不熱, 只似不信者, 反以信仰爲妨害, 怨謗牧師, 排斥敎會, 貽害不少矣. 故受聖恩必蒙神賜而後得也. 一次受恩爲足而不欲受恩則易生驕傲, 修理之室七鬼來守矣. 故日日受恩可也. 만나至六日朽敗者何也, 主賜마나日日所用, 日日賜之. 今日賜之非明日不賜也. 明日亦賜也. 故勿以今日受恩已足而明日又受可也. 神亦明日又賜也. 故欲日日受恩則必由聖神而得也. 今日受恩失却不可, 父母賜一物則永遠守之, 而子易其物失却則父母不更授矣. 趙簡子之二子, 一守父訓, 一不守父訓, 守訓爲太子矣. 救神遣神保恩也. 神賜我慈愛, 我不可失愛, 村守聖愛而至天國可也. 勇敢忍耐也. 皆可守而勿失也. 然則父尤賜之, 凡事感謝恒常喜悅, 祈禱勿休者皆保惠之道也. 此三者之恩, 非神賜則不能保也. 保惠之期非一時也. 至永遠欲保. 十四章十六. 父賜子基業則, 欲永久守之而子孫不良, 父祖之積成勤勞, 一朝蕩失, 是豈子之道乎? 神賜我永生之基業而不能久遠則神豈不悔恨乎? 夫人心乍熱乍寒乍緩乍急, 無永久之性, 故神賜永久之神傳保其恩惠也, 物久則貴, 恩賜亦然, 久而愈新是寶也. 余友有信而落心, 辭傳道之任而至飮酒者, 始信時有熱心勤勉致功而終至不信, 比比皆然, 如得位而信, 得位則不信, 如得子而信, 有子則不信, 如婚姻而信, 結婚後不信, 余種種見之. 皆無永久之性. 得神助而後可至永久也. 主曰我始終也. 聖神卽通達之神, 神以諸事告我, 二十四章二十六. 人皆以己意爲眞理, 欲爲妄斷, 故人世風波起焉. 一無利之. 前有雲柱火柱前導, 得入曠野. 神遣保惠師, 以諸事告我, 能由於行路, 卞別是非, 得至天國, 亂敎會有非外人也, 又非敎人也. 乃敎會之職員也. 各執己見, 互相排擊, 使敎會顚覆, 賣主者非羅馬人也, 乃主之弟子也. 己見雖是勿爲固執, 衆論彌集, 終當發見眞理, 雲霧雖纏太陽終當實現也. 故有風波之時, 靜而俟之, 待其淸淨可也. 此神之智慧也. 於此可見神之公平, 保惠師來則以罪義審責世, 十六章七. 罪者何也? 卽不信也. 此指世人乎, 指敎會內有名爲信而實不信者也. 初不信則猶有可諉, 而信爲不信者是罪也. 義何也? 主歸父也. 此得志也. 此指悔改乃在世之事, 非入園後之事也, 눅十三章. 稱再重生, 皆在世之事, 吾等在世而有不悔改, 則保惠師責之使悔. 審何也?
<下略?>
은혜를 받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합당한 공로가 없이 받는 것이고, 특별한 의미가 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이나 옥보다 귀중하여 천하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은혜를 받으면 쉽게 잃어버릴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르기를 ‘인내로써 영혼을 보전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21:19).
신자는 어느 때 은혜를 잃어버립니까? 대개 볼 것 같으면 핍박을 받을 때 잃게 됩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심할 때나, 유혹이 심할 때나, 허영에 사로잡힐 때가 은혜를 잃어버리는 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견고하고, 학식이 아무리 고매하고, 재주와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모두 은혜를 간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신께서 오신 뒤라야 은혜를 보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신(聖神)을 보혜사로 일렀던 것입니다(요한복음 15:26). 이는 문도들이 허물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아주 깊은 주의를 가지게 하고 다시 보혜사로써 부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른 것입니다.
문도는 다 부활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전하게 되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해 줍니다. 성신을 경유하지 않으면 은혜의 길이 막혀 트여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답을 듣지 못하고, 도를 들어도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고, 예배를 하여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냉랭한 마음은 열성이 없어서 믿음이 없는 자와 같아져 버리니 신앙은 도리어 방해가 됩니다. 그리하여 목사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배척하게 되니 그렇게 끼친 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은혜를 받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뒤에 받아야 합니다. 한 번 은혜를 받고 만족하게 되어 은혜를 더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습니다. 수리한 집에 일곱 귀신이 와서 지키게 됩니다. 그러니 날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옳습니다.
만나가 하루만 되면 부패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날의 필요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오늘 주었다고 내일 안 주지 않습니다. 내일도 역시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은혜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일 또 받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도 또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날마다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성신을 경유하여 얻어야 합니다. 오늘 은혜를 받는 일을 잊어버리면 아니 됩니다.
부모가 내려 주면 영원히 간직하여야 합니다. 아들이 그 물건을 쉽게 생각하여 잃어버리게 되면 부모는 다시 주지 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조간자(趙簡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훈계를 잘 지켰고, 하나는 아버지의 훈계를 지키지 않았는데 훈계를 지킨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면 보혜사를 보내어 은혜를 간직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애를 주시면 우리는 그 자애를 잃으면 아니 됩니다. 시골 마을에서도 거룩한 사랑을 지키어 천국에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용감과 인내는 다 잘 지키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는 더욱 많이 줍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것은 다 은혜를 보전하는 방편입니다. 이 세 가지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면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보전하는 기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보전하려고 하여야 합니다(요한복음 14:16).
아버지가 자식에게 기업(基業)을 주는 것은 영구히 보전하려고 한 것이나, 자손이 불량하게 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애써 이룬 공적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어찌 자식된 도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생의 기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구원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한탄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사람들의 마음은 금새 더웠다가 식었다가 하기를 급하게 하여 영구한 성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성령을 보내시어 그 은혜를 보전하도록 하였습니다. 물건도 오래되면 귀중한 것인데 은혜를 주심도 그러합니다. 오래 된 것이 새것보다 나은 것이 바로 보물입니다.
나의 친구가 신앙에 낙심하여 전도하는 임무를 사임하고 음주에 빠진 자가 있습니다. 그도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열심과 근면으로 공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불신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곳곳이 다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지위를 얻기 위하여 믿다가 지위를 얻으면 믿지 않게 되고, 아들을 얻기 위하여 믿다가 아들을 낳으면 믿지 않고, 결혼하기 위하여 믿다가 결혼을 한 뒤에는 믿지 않는 것을 나는 종종 보았습니다. 모두 영구성이 없는 소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움을 얻은 뒤라야 영구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신은 곧 통달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가지고 나에게 알게 함입니다(요한복음 17:26). 사람들은 다 자기의 뜻을 가지고 진리라고 하고 함부로 단정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풍파가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앞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여 광야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지시하는 행로를 경유하여 시비를 가리고 천국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외부 사람도 아니고 또 교인도 아닙니다. 바로 교회의 직원입니다. 각기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여 서로 배격함으로써 교회를 전복시킵니다. 주님을 판 자는 로마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자기의 견해가 비록 옳더라도 고집하지 말고 중론을 모으게 되면 마침내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름과 안개가 아무리 둘러쌌더라도 마침내는 진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풍파가 일어날 때는 조용히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오게 되면 죄와 의리로써 세상의 책임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6:7).
죄는 무엇입니까? 곧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교회 내에서 신앙으로 유명해진 사람이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애초에 믿지 않았다면 핑계나 댈 수 있지만 믿다가 믿지 않는 자가 바로 죄인입니다.
의(義)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뜻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지적한 회개는 바로 세상에 있는 일입니다. 동산[園]에 들어간 뒤의 일이 아닙니다(누가복음 13장). 중생(重生)을 말 한 것은 다 세상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보혜사가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합니다.
- 김진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