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주의 허락을 기다림
시편 130편
홍제원교회
此詩猶民在巴比倫時, 聞古例王勝巴比倫而歡喜者也. 盖王前一百四十年間, 神至以賽亞預言, 猶民獲罪神付于巴比倫, 傳七十年, 主旁于古例王使伐巴比倫, 還猶民于聖京, 重建聖殿等事, 先知已爲預言, 猶民聞古例王之事, 不勝喜歡, 誦此傳也. 神已允許吾等得救, 已有主之許, 豈不喜歡者乎? 姑分三則論之, 一, 絶望中有望, 距今五百年前, 日耳曼(게르만), 有哥倫布, 硏究地球圖形, 必有西半球, 求助于本國, 王不許, 乃得西班牙王助, 得三巨艘, 船員一百二十人, 偕行至大洋之中, 水天一色, 渺無際涯, 諸船員輒生厭惡, 不欲開往而更爲東向矣. 哥氏再三勸之, 然欲不聽, 哥氏乃約以三日後回航爲約, 又向西而往, 亦水天一色, 渺無際涯, 詎知第三日, 前行之船員大呼曰 彼有陸地云, 須臾有鳥來坐檣上, 遂放砲不勝歡喜. 吾等皆以元罪及犯罪, 不復有天堂之望. 耶蘇發見天堂, 以己血贖罪使至天國, 是絶望中有望矣. 今朝鮮之人亦然, 皆有絶望曰 無可奈何. 加密山上片雲浮動, 而人皆言不雨, 而獨以理亞知之信之, 須臾乃雨, 不曰晩時. 雖似無望, 今說眞理而行之, 則豆者爲豆, 粱者爲粱矣. 然種豆而望粱則絶望, 種稻而望豆則絶望矣. 誰今當擇福路, 以色烈之人被擄巴比倫, 徒坐而絶息, 豈能過困乎? 二,神爲人之望則確實, 凡人盼望未必盡確, 有可望者, 有不可望者, 人心變化無常, 故所望亦無常, 昨望今虛, 今望明虛, 擧例父望子, 見其聰明, 長成後必爲國之棟樑, 且爲父母之榮, 而誰知嗣後慣習不良, 變爲悖子者多矣. 且忽患病喪失者亦多, 故子亦不可望, 況他人乎? 親友亦不可望, 以金交之而金盡則變, 以勢交之勢窮則變, 雖知己之友, 亦不可望, 燕丹把荊軻以殲秦而失敗, 張良把力士以椎秦而亦失敗, 故友亦不可望, 皇帝亦不可望, 一朝選在君王之側而寵愛無比, 又一朝賜死, 翻覆無常, 皇帝亦不可恃. 神爲人之望則不然, 非如人不確, 惟基督永遠不變, 希十三章八. 其已語者有不立乎? 民二十三章十九. 惟神無所不能. 太十九章二十六. 我終始, 黙一章八. 此諸經之言, 是爲人之所望也. 三, 望神則神佑, 吾人有何所望乎? 望長壽乎? 摩西曰人生七十年, 或八十年, 詩九十章十. 望子女乎? 人或生百子而且長壽, 然生不得福, 且死而不葬則反不如胎死. 傳六章三. 望財産乎? 保羅曰我來時無所持, 去時亦無所持, 딈前六章七. 然望神則神必佑之, 大衛詠詩曰 人之在世, 宛如何歟? 營謀皆屬徒然, 蓄積不知誰取, 今也我有何望乎? 神乎? 我所望者惟主也. 詩三十九章六-七. 大衛在世之時, 曾欲建聖殿, 而主云傳爾子建之云, 至將死, 聖殿之規模示其子所羅門, 足見其誠心仰望矣.
이 시는 유대민족이 바벨론에 있을 때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이기고 기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는 고레스 왕 이전 140년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강림하시어 예언한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죄를 얻자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붙여 주어 70년이 지난 후, 고레스 왕을 시켜 바벨론을 치셨습니다. 그 일 후에 유대민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여 성전을 중건하게 하셨으니, 이는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유대민족이 고레스 왕의 일을 들어 알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말씀을 암송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이미 주님이 허락한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우선 세 가지 법칙으로 나누어 의논하겠습니다.
첫째. 절망 중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5백 년 전에 게르만[日耳曼]에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있어서 지도를 연구하고 반드시 서반구(西半球)가 있다고 하면서 본국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스페인 왕의 도움으로 큰 배 세 척을 얻어 선원 120인과 함께 대서양에 나갔습니다. 바다는 물과 하늘이 맞닿아서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은 두려움과 싫증이 나서 더 이상 가지 말고 동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콜럼버스가 재삼 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그는 사흘을 기약하고 사흘 뒤에도 아무 것도 없으면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서쪽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과연 약속한 사흘이 되는 날 앞에 있던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새가 날아와 돛대 위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대포를 쏘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원죄(元罪)와 범죄(犯罪)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써 다시 천당에 갈 희망이 없어졌으나, 예수께서 천당을 일러주며 당신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천당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절망 중에 희망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조선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이르기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갈멜산 산상 위에 조각구름이 일자 사람들은 모두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엘리야는 비가 올 줄로 알고 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조금 있다가 비가 왔습니다.
때가 늦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 비록 희망이 없는 것 같으나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십시오. 팥을 심은 데는 팥이 나고, 기장을 심은 데는 기장이 납니다. 그러나 팥을 심어놓고 기장이 나기를 바라면 희망이 없고, 벼를 심어놓고 팥이 나기를 바라면 절망입니다. 누가 지금 복을 받는 길을 택할 것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그냥 앉아서 희망을 끊었다면 어찌 곤궁한 처지를 견뎌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사람의 소망을 확실히 해 줍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바라 볼 때 다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랄 수 있는 것도 있고, 바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화가 무상하여서 바라는 바도 무상합니다. 어제 바라던 일이 오늘 헛일이 되고, 오늘 바라던 것이 내일 헛일이 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자식을 바라볼 때 그 자식이 총명하여 장성하면 반드시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니 그러면 부모의 영광도 또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예상하였겠습니까? 후사로 이은 뒤에는 버릇이 불량하여져서 패륜아로 변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갑자기 병이 들어 죽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아들도 희망으로 바라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타인이겠습니까?
친구도 역시 희망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습니다. 돈으로 사귄 사람은 돈 떨어지면 변하고, 형세로 사귄 사람은 형세가 궁해지면 변합니다. 아무리 친한 지기지우라도 역시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옛날 전국시대에 연나라 태자 연단(燕丹)은 형가(荊軻)라는 자객을 지기지우로 삼아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역시 그 당시 모사 장량(張良)은 지기지우인 역사(力士)를 시켜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니 친구도 희망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황제도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미인으로 뽑혀서 황제의 곁에 머무르면서 더할 수 없는 총애를 받다가도 하루 아침에 또한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황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희망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처럼 불확실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불변합니다(히브리서 13:8). 어찌 이미 말한 것을 실천하지 않습니까(민수기 23:19)?. 하나님만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9:26). 나는 처음이요 끝이니라(요한계시록 1:8). 이것은 다 여러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의 바라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오래 살기를 바랍니까? 모세는 이르기를 ‘사람은 70이나 80살을 산다’고 하였습니다(시편 90:10).
‘자녀를 많이 낳기를 바랍니까? 사람이 혹 100 명의 아들을 낳고, 또한 오래 살기도 하지만, 살아서 복을 받지도 못하고, 죽어서도 장사도 치르지 못한다면 도리어 낙태된 자만도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전도서 6:3).
재산이 많기를 바라십니까?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갈 때도 역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디모데전서 6:7).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사람은 세상에 살며 무엇을 하는가? 계획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고, 재물을 쌓아도 누가 가져갈지 모르니,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하나님을 바라는가? 나의 믿음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시편 39: 6-7).
다윗이 세상에 있을 때 일찍이 성전을 세우려고 했는데, 주께서 ‘너의 아들에게 전하여 건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을 무렵에 성전의 규모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알려 주었으니, 족히 그가 진심으로 우러러 바라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