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미혹에 들지 말라
누가복음 21:5-9
1934. 3. 11.
右의 問題를 곷여셔.
信無義則爲迷, 信迷則爲惑, 故保羅言信必兼言義. 롬三章二十六. 信無義者如左, 一科學則信仰也. 余非不信用科學, 而科學不能說明眞理, 科學能飛上空中而不能飛入天國, 科學能說明草木之理而不能造一花一葉, 故神大於科學萬萬也. 二巫覡的信仰, 做事不到神而醫病逐鬼皆主之事也. 說夢說怪荒唐莫甚, 如體府之某夫人等之說妖怪也. 三儀式的信仰也. 洗禮聖餐, 指如敎理, 非洋屋亦非敎堂, 指西人之習慣, 衣服飮食盲目收入, 虛榮浮華, 此皆信無義之故也. 信兼義者何也? 如粉中之麵, 壁上之燈, 非如中國敎會之保樂主義, 又不如世外之佛敎與獨善之儒敎也. 主謂阿伯罕曰, 汝爲福之機, 아브란之主義, 爲福於世人, 故主謂之曰義人, 現今美國敎會, 流於浪漫主義, 吾等之宗敎自美國收入, 若美國主義收入則甚危矣. 今農村運動必要, 且敎會改良等亦必要也. 是皆信兼義之事也. 信者無氣色者何故? 無義故也. 或生或死基督之義充滿, 我信之內所可搖動, 且有義而不得行, 不必落心也. 最後勝利社會, 今信仰漸入迷宮, 果信如是則可乎? 鷙與蛇爭鶉子而後, 鷙與一羽則蛇與一羽, 鶉羽盡而鷙反爲蛇囓而斃. 我今日失一信, 明日失一信, 信盡而斃, 今言義, 在上不在下, 救我者義, 我信而得義則得救矣. 아부람之義, 노아之義, 皆是也. 故得救云者, 信兼義之言也. 故儒者言仁, 必兼言義, 以是仁而無義, 是徒仁也. 愛而無義, 是徒愛也. 徒愛徒仁, 是不足爲仁愛也. 盲人行路多顚沛者何也? 無分可故也. 不辨東西, 如在五里霧中, 信而前進, 無義之立, 則或左或右或是或非, 無一定之方向矣. 今世多無義之信, 皆迷惑也. 僉位愼之.
위[右]의 제목[問題]를 고쳐서.
믿음에 의가 없으면 미혹에 빠지게 되고, 믿음이 미혹에 빠지면 유혹에 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음을 말할 때 의를 겸하여 말하였습니다(로마서 3:26).
믿음에 의로움이 없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과학적 신앙입니다.
나는 과학을 신용하지 않지는 않으나 과학은 진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공중에 날아 올라갈 수는 있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풀과 나무 같은 식물의 이치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꽃 하나, 잎 하나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학보다 만만(萬萬)이나 위대합니다.
둘째, 무격의 신앙입니다.
일을 만들어내는 데는 하나님을 따를 수 없으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일을 하는데 이는 다 주님의 일입니다. 꿈을 설명하고, 괴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황당하기 막심합니다. 체부동의 어느 부인이 요괴를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셋째, 의식적인 신앙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교리를 따릅니다. 양옥이 아니면 교회당이 아니라고 하고, 서양 사람의 습관을 따르며, 의복과 음식을 맹목적으로 수입하여 허영과 부화(浮華)를 일삼는 것은 다 믿음에 의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의로움이 겸하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루 가운데 밀가루 같고, 벽 위에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중국 교회의 보락주의(保樂主義) 같은 것은 안 되며, 또 세상 밖의 일을 말하는 불교라든가, 독선을 주장하는 유교와 같아도 아니 됩니다.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람의 주의(主義)는 세상 사람의 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의인[義人]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는 낭만주의로 흘러가는데 우리의 종교는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었으나, 미국의 주의를 수입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지금은 농촌운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의 개량 등도 필요합니다. 이게 다 믿음과 의를 겸한 일입니다.
신자가 기색(氣色)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 죽고 사는 일에도 그리스도의 의가 충만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동요할 일이 있든지 또한 의로운 일을 행하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후에는 사회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지금 신앙은 미국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신앙이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독수리가 뱀과 메추리 새끼와 다툴 때, 뱀이 독수리의 날개 하나를 갖고 독수리도 하나를 가졌습니다. 메추리는 날개가 없어져 죽었고, 독수리도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의 믿음을 잃고, 내일 또 믿음 하나를 잃게 되면, 믿음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지금 말하는 의는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의를 얻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의와 노아의 의가 다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믿음과 의를 겸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자(儒者)들도 인[仁]을 말할 때 반드시 의를 겸하여 말합니다. 인(仁)만 있고 의가 없으면 바로 한 낱 인(仁)일 뿐입니다. 사랑에 의가 없으면 이것은 한 낱 사랑뿐입니다. 한 낱 사랑과 한 낱 인(仁)은 인(仁)과 사랑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맹인이 길을 가는데 자빠지고 넘어지기를 잘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옳은 길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서를 분간 못하고, 마치 오리무중에 있는 것 같아서 믿음으로 전진하더라도 의로움을 세우지 못하면, 혹은 왼쪽으로 가다가 오른 쪽으로 가고, 혹은 옳다고 하다가 그르다고 하여 방향을 정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의가 없는 믿음이 많아서 다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