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사랑의 이별(愛의 離別)
요한복음 13:13-15
신공숙(申公叔) 목사.
此聖句主於被捉前夜對離別之門徒, 動靜苦樂與門徒共之, 今此惜別之席, 主將以將來之事托之, 門徒皆未深信, 且患難臨之, 故主慮之深而持坮也. 盛水而命徒脫足, 主親滌之, 命徒使相滌之, 我先爲本, 滌後又賜新戒, 曰互相愛, 互相謙, 此何意也? 主來世非爲義人, 爲罪人而來也. 汝非謙遜不能也. 一, 我愛汝汝亦相愛, 摩西律法中, 無此愛的精神, 齒償齒,目償目, 此律的也. 主之愛超越人間, 愛讎非人性也. 爲架下之人而祈禱, 敎會初代스듸반이致命, 亦此精神也. 保羅之悔改, 在스듸반之被殺時, 保羅目睹其死也. 스듸반之顔光如天使, 此死猶榮也, 此時保羅生悔心, 스듸반之死, 怨不在殺之者, 反歸之自己也. 故主命徒謙遜, 敎其門徒也. 吾等信之後尙不及此愛, 然當欲進步, 向此太陽之光熱, 主之愛滿盛此坮也之內也. 其次敎育謙遜也, 門徒蒙恩之前多野心, 而今蒙恩之後能謙遜. 今此謙遜, 非屈辱也, 卽讓步也. 謙以讓之, 於電車之內多見之, 男讓婦少讓老, 此公衆道德也. 今朝鮮之公衆道德向上, 卽基督敎文明也. 此吾等於地上成主旨, 今我朝鮮社會集會, 肖爾進步然尙有退步, 如商店內多見異狀, 店主薄待顧客甚矣, 余曾入某商店, 店主待遇亦薄甚非矣. 其得奉仕也. 吾等之奉仕何也? 爲我非奉仕也, 愛他卽奉仕也, 無窮花三千里, 此歌曲人皆歌之, 而無窮卽吾朝鮮之國花也. 而家庭或敎會無植樹者何也? 此非兒童之罪也, 卽父母之罪也. 愛他卽奉仕也. 謙遜卽奉仕也.
이 <성경> 구절은 주님께서 붙잡혀 가기 전날 밤에 이별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고락과 동정을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지금은 이와 같이 이별하는 자리에서 장차 장래에 있을 일을 부탁한 것이지만, 제자들은 깊이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환난이 임박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걱정이 깊어서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제자들에게 발을 벗게 하고 먼저 본보기로 친히 발을 씻겨주고, 또 제자들이 서로 씻어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기신 뒤에 새롭게 훈계하시기를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겸손하라’고 하였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세상에 오실 때 ‘의인(義人)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으니 너희도 겸손하라’고 하신 뜻입니다.
첫째,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사랑의 정신이 없습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 하였으니,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 원수를 사랑함은 사람의 본성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교회의 초기시대 스데반이 목숨을 잃은 것도 역시 이러한 정신이었습니다. 바울이 회개한 것은 스데반이 살해 당한 그 때였습니다. 바울이 그 죽음을 직접 보았는데 스데반의 얼굴 빛은 마치 천사와 같았습니다. 이 죽음은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회개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음에 임박하여 원망을 살해자에게 두지 않았고, 도리어 자기에게 그 허물을 돌렸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은 뒤에도 아직까지 그 사랑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태양의 빛과 열을 향하여 마땅히 진보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 대야 안에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둘째는 겸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은혜를 입기 전에는 야심(野心)이 많았지만, 은혜를 받은 후로는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굴욕이 아니고 바로 양보입니다. 겸손으로써 양보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전차 안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젊은이가 노인에게 양보하는 것은 공중도덕입니다. 지금 조선인의 공중도덕은 향상되었는데 이는 바로 기독교 문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는 지상(地上)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사회의 집회는 조금 진보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퇴보된 것이 있습니다. 상점에 가보면 이상한 일을 많이 봅니다. 상점 주인이 고객을 박대하기 일쑤입니다.
내가 일찍이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그 상점 주인도 역시 박대가 심하였는데 이는 아주 잘못입니다.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는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하는 일은 봉사가 아닙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봉사입니다. ‘무궁화 삼천리’라는 가곡을 사람들이 다 노래 잘합니다. 무궁화는 바로 우리나라의 국화입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그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아이들의 죄가 아닙니다. 바로 부모의 잘못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봉사이고, 겸손도 바로 봉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