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은밀한 신앙
에스더 10:1-3
이만규(李萬珪) 씨
7월 8일 (주일오전)
에스더氏曾捕虜於異邦, 爲異邦王后, 모르드개卽王后之四寸從兄, 하몬爲異邦權勢者, 모르드가不阿付, 故하몬立木于門外, 欲殺모르드개, 又欲殺猶大人, 모르드개乃蒙灰祈禱, 聲達에스터, 에스더亦蒙灰祈禱, 王覺悟乃殺하몬, 反使모르드개及猶大人. 今日問題卽하나님의保護, 今日信者中, 知하나님卽用人之靈魂, 而不用人之肉身矣, 然甚不然, 今世之山川草木巖石等, 亦神之造成者也. 故人之靈魂, 皆在神之支配下也. 人能自行自己之事可也. 모르드개守正直于王前故受福, 人或行正直于人前, 而於暗中失正直也. 個人之事, 超越于人者, 亦自行自己之事, 父行父事, 子行子事, 亦直者也. 不讓他人而直行者, 神必授福也. 善惡必有其報, 에스더自料, 我王后之位, 想猶失守, 正直冒險前進故受福. 民族與民族互相矛盾, 吾與世人互相矛盾, 其中有何故也, 彼成而我敗, 彼優我劣, 有何故也? 其中必有不足也. 故敗則必推究其源可也. 雖有困難, 必料他人可也. 不思自己之困難, 而必思他人之困難, 雖於信者前不難, 信弱故有他嘲笑. 或信者嫁不信之家, 不能禮拜, 六日間盡力勞働, 其舅感故問其婦, 婦同禮拜, 則此婦若信弱, 則必不能信, 然此婦篤信, 故其姑舅感而信. 吾人於大者則多成功, 世界學者必硏究其小者, 而忠誠也. 勿論其使命, 必忠誠可也. 神之眞必凝在于隱密, 모르드개不廣告, 에스더亦不廣告, 而在隱密而黙禱, 故神黙祐之.
에스더가 일찍이 이방의 포로가 되어 이방(異邦)의 왕후가 되었는데, 모르드개는 곧 왕후의 사촌종형이었습니다. 하만은 이방의 권세를 잡은 자인데 모르드개가 아부하지 않으므로 하만이 문 밖에 나무를 세워놓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고, 또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가 마침내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하여 그 소리가 에스더에게 이르니, 에스더도 역시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깨닫고 마침내 하만을 죽이고 도리어 모르드개와 유대인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문제는 곧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오늘날 신자 중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을 바로 이용하는 줄은 알지마는 사람의 육신은 이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에 있는 산천초목이나 바위들도 다 하나님께서 조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일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옳습니다.
모르드개는 임금 앞에서 정직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간혹 남의 앞에서는 정직을 지키지마는 아무도 못 보는 어둠 속에서는 정직을 잃습니다. 개인의 일에 있어서 남을 초월한 자도 자기 일은 자기가 행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아들은 아들의 일을 행하는 것이 역시 정직한 것입니다.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 직접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줍니다.
선과 악은 반드시 그 보답을 받습니다. 에스더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왕후의 지위를 잃을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면서 정직하게 모험을 걸고 전진하였으므로 복을 받았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모순되고, 나와 세상 사람이 모순되는데 그 가운데는 무슨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 까닭을 따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실패하면 그 근원을 따져 연구해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다른 사람을 헤아려 보는 것이 옳습니다. 자기의 곤란은 생각지 않고 반드시 남의 곤란을 생각하게 되면 신자들 앞에서는 어렵지 않더라도, 신앙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간혹 신자가 불신자의 집에 시집가서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엿새 동안 온갖 힘을 다 들여 노동하게 되니 그 시아버지가 감동하여 며느리에게 묻게 되고 며느리와 함께 예배에 오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가 만일 신앙이 약했다면 반드시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며느리는 독실한 신자였으므로 그 시부모가 감동하여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큰 것에 대하여서는 성공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학자들은 반드시 작은 것을 연구하는데 충성을 다합니다. 물론 그것이 사명이겠지마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진실은 은밀한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모르드개는 널리 알리지 않았고 에스더도 역시 널리 알리지 않은 채 은밀한 가운데 묵묵히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도와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30, 또 요한복음 1:1
백명철(白明哲) 씨
7월 8일 (주일저녁)
人皆願安樂, 而此安樂何處得來也, 何處可安也, 何處可樂也? 主曰皆來我云, 然則學主者果安樂. 此世十六億, 分兩種有神論無神論, 兩派相爭, 世人負何負也. 比他國人負重, 不可坐而食, 亦不可安寢, 口不發言足不可行甚無自由也. 吾家庭之內, 有父母焉, 有祖父母焉, 父母曰我爲父母, 我任意行之, 則家不得平安也. 主曰我溫柔謙遜云, 父母亦可謙遜, 則家可平安也. 爲子孫者以父母爲無知, 互相爭論, 家不可平安也, 某人爲男子, 不得樂於家內, 或亂飮無道, 而其夫人甚不得安樂, 不居家而常出者何故也? 入家而不得樂故男常出外矣, 其家何得樂也? 信道之家則不然, 男出外而入, 則其夫人備和樂而待其夫, 使夫樂而愛妻, 其家勝於音樂會. 孔子曰父母其安樂之已, 信仰家皆如此也. 何敎人欲入敎堂, 而衣褸則不欲入, 此人但務外貌, 不務內實, 貧弱如朝鮮之人, 사치如此, 甚可寒心, 今生活困難皆在사치也. 信者當尙儉可也, 神助自助人也. 有貧員者來, 我當發貧, 有富員者來, 我當益富, 平壤之敎友可欽敬也. 其敎友皆信而富矣. 其敎友信前甚貧, 其敎友夫婦間相爭, 欲和平男不欲先言, 婦不欲先言, 家不和則萬事不成矣.
사람은 모두 안락을 원합니다. 이 안락은 어디서 얻는 것입니까? 어디가야 편안하며, 어디가야 즐겁습니까?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배우는 사람은 모두 안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16억 인구가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 양쪽으로 나뉘어져 서로 다툽니다. 세상 사람은 어떤 짐을 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타국인에 비하여 짐이 무거우므로 앉아서 먹을 수도 없고, 또한 편히 잠잘 수도 없습니다. 입으로 말도 못하고 발로는 갈 수도 없게 되어 자유가 아주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 안에는 부모도 있고, 조부모도 있습니다. 부모가 말하기를 ‘나는 부모니 내 마음대로 행동을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 집안은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도 마음이 겸손하면 집안이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자손 된 자는 부모가 무지(無知)하다고 하여 서로 다투게 되면 집안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자가 되어 집안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니 가끔씩 함부로 술을 마시고 무도하게 굴었습니다. 그러면 그 부인은 조금도 안락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집에 있지 않고 늘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집에 들어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남자가 밖으로 나다닙니다. 그런 집안이 어찌 즐거움을 얻겠습니까?
신앙을 가진 집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면 부인이 화락한 분위기를 갖추어 그 남편을 기다리게 되고, 그러면 그 남편은 즐겁게 그 부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 집안은 음악회보다 더 좋게 됩니다.
공자가 ‘부모는 안락을 바랄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을 가진 집안은 다 이와 같습니다. 어떤 교인이 교회당에 들어가려고 하나 옷이 남루하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다만 외모만을 힘쓰고 내실을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빈약한 우리 조선인이 사치를 이와 같이 힘쓰니 이는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날 생활의 곤란은 다 이 사치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마땅히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마땅히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고, 부자는 더욱 부자 되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평양의 교우들은 존경할 만합니다. 그 교우들은 모두 신앙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교우들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교우들이 부부간에 서로 다투게 되면 화해를 하려고 하나 남자가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고, 부인도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불화하면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