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테우리
현 기 영
오름 분화구의 동북쪽, 완만한 경사면에 납작 엎드린 옛 무덤 하나, 마을공동 목장의 테우리 고순만 노인이 그 무덤가에 앉아 친구 오기를 기다렸다.
야트막한 분화구는 말굽쇠 모양으로 서남 방향이 터져 있어, 일망무제로 퍼져 있는 초원과 크고 작은 오름의 무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무덤 자리는 방목하는 소떼의 이동을 살피기 좋은 위치인 데다가 바람의지도 되어 그가 자주 찾는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소들이 모두 해변으로 내려가버리고, 바로 아래 분화구 바닥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저 암소와 송아지만 남았을 뿐이다. 그저께가 소설(小雪)이었고 계약 마감일인 그 날에 맞춰 목장 계꾼들이 올라와 자기 소들을 몰고 내려가버렸는데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현태문이만 어제오늘 이틀째 나타나지 않은 거였다. 날짜를 잊어버렸나? 아니면 몸이 아픈가?
노인은 기다리기 무료하여 자꾸만 졸음이 왔다. 잠깐 자울자울 졸다가 구름그림자만 스쳐도 금방 눈이 떠졌다. 늙으면 잠이 벗이라지만, 요즘에는 앉았다 하면 졸음이 왔다. 며칠 전에는 밥술을 뜨다 말고 깜빡 졸아 스스로 놀란 일도 있었다. 이제 노인은 또 졸음이 왔다. 절로 스르르 감겼다. 분화구 안은 포근하여, 엷은 졸음 속에서 햇볕이 부드럽게 무릎을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졸다가, 문득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길을 멀리 보내 더듬어보지만 목장 오솔길도 여전히 인적없이 비어 있었다. 아까도 졸다가 어렴풋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한데 이번엔 환청이라기엔 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어이, 순만이―" 그것은 분명 태문의 목소리였다. 노인은 귓구멍을 후비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놈이 대관절 오진 않고 왜 자꾸 사람을 불러만 대는가? 혹시 아픈 게 아닐까? 목장 계꾼 열아홉 명 중 유일하게 다른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였다. 저번 건초 장만할 때 목장에 올라온 걸 보니까 몸이 많이 축나 있었는데, 혹시 또 각혈해서 몸져 누운 건 아닐까? 낫질할 때마다 짙게 풍기는 풀냄새에 연방 쿨룩쿨룩 기침을 해대더니만……. 풀 베는 낫에 걸려 허리가 동강난 도마뱀을 폐병에 좋다고 그대로 꿀꺽 삼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술렁거리는 풀잎 소리에 묻어 멀리서 포클레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올 뿐, 들판은 여전히 질펀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오름 너머 참나무 숲속 표고버섯 밭에서 들려오던 전기톱 소리도 요 며칠 사이 잠잠해진 걸로 보아 인부 장씨도 한 해 일을 청산하고 마을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바람난 마누라와 싸우기 지겹다고 보름에 한번 꼴로 있는 휴일에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아침부터 술에 젖어 횡설수설 주정하더니……. 초원의 풍경을 찍는다고 일요일을 이용해 자주 올라오던 사진쟁이 총각도 일주일 전에 내년 봄을 기약하자며 작별인사를 하고 내려 가버렸다.
해는 중천을 휠씬 벗어나 있었다.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몸에 닿는 볕뉘가 포근했다. 굴뚝새떼가 잎 털린 덤불숲에 잔뜩 모여 깃털을 부풀리며 햇볕을 즐기고, 투명하게 맑은 허공에는 매 한 마리 높이 떠 느린 소용돌이 물에 뜬 낙엽처럼 빙빙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이따금씩 구름이 들판에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갔다. 들판이나 오름이나 거의 야초(野草)로 덮여 있어서 소 방목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목장마다 비로 쓸어낸 듯 소떼들이 자취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휑하니 비어 있는 초원을 바라보면서 노인은 가슴에 공동이 뚫린 듯 어쩔 수 없는 상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울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 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아래 소 두 마리가 외롭게 풀을 뜯고 있는 분화구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렸다. 하늬바람이 덜 미치고 샘물통 근처라 초록빛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초록빛도 하늬바람의 메마른 손길에 곧 지워져버릴 터였다. 이미 샘물통이 말라붙어 소들은 오름 너머 멀리 떨어진 냇골창의 웅덩이물을 먹고 있었다. 분화구 위 허공을 질러가는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노인은 덧없이 지나가버린 가을을 생각했다.
하늬바람은 추석 무렵에 터졌고, 그 바람이 불자, 농작물에 냉해를 끼치던 장마의 비구름떼가 먼 바다로 밀려나가 쾌청한 날이 계속되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아 오름 능선이 뚜렷해지는 절기였다. 사진쟁이 총각은 일기가 오름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일요일마다 목장에 올라오곤 했다. 한라산 기슭의 높은 지대라 바람은 늘 강하게 불었다. 그 총각이 바람에 물결 일으키는 풀숲에 잠겨 홀로 들판 이리저리 옮아다니는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마치 물 위에 등지느러미를 조금 내놓고 물살을 헤치는 작은 물고기처럼.
하늬바람 속에서 투명한 허공을 울리며 새 울음 소리 영롱하고 풀씨가 빠르게 여물었다. 자굴풀 씨가 터지기 전에 목장마다 계꾼들이 올라와 월동용 건초를 장만했고 뒤따라 아낙네들이 말똥버섯 캐러 왔다가자 초원은 다시 인적이 끊겨 정적이 왔다. 그 정적 속에서 툭툭 풀씨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늬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초원을 서서히 마르게 했다. 대기가 건조하여 콧속에 딱지가 앉곤 했다. 먼저 고사리떼가 시들면서 바람의 빗질에 풀잎새들이 서서히 황갈색으로 바뀌어갔다. 풀거미는 풀잎새를 돌돌 말아 제 몸을 감싸고, 꽁무니를 땅속에 박고 알을 싸고 난 메뚜기들은 풀밭 위에서 맥없이 비슬거리고, 죽어가는 메뚜기떼를 좇아 산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하늬바람은 계속 불어 땅속까지 마르게 하여 샘물통의 물줄기는 실낱같이 가늘어지고 새벽 안개도 더이상 피어오르지 않았다. 밤공기가 날로 차가워졌다. 동상 걸린 발가락들과 화상 입은 오른쪽 발바닥에 감각이 무뎌지면서 첫서리가 내렸다. 첫서리 내리던 날 밤, 소들은 잔등에 흰 서리를 인 채 불안한 듯 발굽을 쿵쿵 굴렸고, 테우리막 속의 노인도 밤새 잠 못 이루어 뒤치락거렸다. 그때부터 한밤중에 잠깨어 뜬눈으로 날 밝히는 일이 많아져, 그러한 밤에는 별빛 아래 목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도 했다. 바람이 허공을 흔들어 별빛은 마치 숨쉬는듯 말곳거렸다.
찬 서리 칠 때마다 풀밭은 눈에 띄게 달라져 황갈색이 초록을 덮으며 빠르게 번져갔다. 솔숲에서 알싸하게 풍기던 송진 냄새도 더이상 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닷새 전에 첫눈이 내렸다. 한껏 먹어 살찌워두려고 부지런히 억새밭을 돌아다니던 오소리들도 겨울잠 자러 땅속에 들어가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저 분화구 안의 초록과 소 두 마리뿐이었다.
노인의 메마른 가슴에 슬픔의 물기가 따뜻하게 번졌다. 여름철, 짙푸른 들판에 점점이 찍혀 있던 소떼들, 한낮이 기울어 긴 행렬을 이루고 저 샘물통으로 물 먹으러 오던 광경이 떠올랐다. 초원 위를 흐르는 황톳빛 냇물처럼. 숲을 이룬 뿔들은 햇빛에 빛나고 그 위로 금빛 먼지 같은 쇠파리떼가 떠돌고……. 은밀하고 잔잔한 그 슬픔은 오히려 생기를 주어, 노인은 자신이 좀더 젊어진 듯 여겨졌다. 불현듯 그 총각의 애젊은 얼굴이 떠올랐고 새삼스레 다시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랬다. 바람과 야초와 소떼로만 구성된 노인 내면 풍경 속에 어느날 홀연히 그 청년이 나타났던 것이다. 소떼 가운데서 소처럼 말을 잃고 살아가는 그에게 말문을 틔워준 게 그 청년이었다. 칼칼한 들바람에 쏘여 불그레 물들어 있던 그 얼굴. 시청 홍보실에서 사진을 담당한다고 했다. 일요일을 이용해서 올라오곤 했는데 때로는 새벽과 일몰 풍경을 찍는다고 토요일 오후에 올라와서 노인의 테우리막에서 일박하기도 했다.
한번은 저 샘물통에서 물 먹고 있는 암소를 뒤에서 수소가 덮쳤는데, 마침 옆에 있던 총각이 카메라를 들고 허겁지겁 대들다가 암소가 앞으로 고꾸라져 물에 빠지는 바람에 헛방을 놓은 적이 있었다. 하릴없이 쑥 빠져버린 수컷의 화젓가락같이 빨갛게 단 성기를 낭패스럽다는 듯이 흘끔흘끔 곁눈질하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 영락없이 서툰 수송아지 꼴이었다. "아하, 자네도 박지 못했군 그래. 하하하." 그때 장면을 생각하며 노인은 쿡쿡 혼잣웃음을 터뜨렸다.
총각은 자기가 사진 찍는 초원의 자연과 방목생활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 이것저것 캐묻곤 했다. "아니, 영감님, 저 소 백이십 마리를 기억한다구요? 제가 보기엔 그 놈이 그 놈 같아 보이는데요." "그거야 학교 선생 제 아이들 얼굴 아는 것과 한가지지. 남의 소를 맡아 키우긴 하지만, 다 내 손에 달린 목숨들인데 몰라서야 되나. 모양새도 모색(毛色)도 조금씩 다르고 뿔 생긴 모양만 해도 가지가지여. 잘 보게. 위로 솟은 뿔, 뒤로 젖혀진 뿔, 양옆으로 곧게 뻗은 뿔, 하나는 위로 솟고 하나는 아래로 처진 것, 넘어져 뿔 하나 꺾어진 놈……. 또 가시덤불에 눈 찔려 눈물 흘리는 놈, 뱀에 물려 튀다가 발목 부러져 절뚝이는 놈, 하여간 다 달라."
그 말 끝에 노인은 소를 잃어 애먹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후 이개월짜리 송아지를 도둑맞았다가 이년 후 한라산 너머의 어느 목장 소떼에 붙어 있는 걸 우연히 지나다가 찾아낸 적이 있었다. 그 사이 몰라보게 커버렸지만, 콧중배기에 찍힌 흰 털점이 아무래도 낯익어 궁둥짝 털을 면도칼로 밀어내니, 과연 거기에 그가 찍은 낙인이 나왔다. 잃어버린 소를 서로 찾아주는 게 이 고장 인심인데 그는 어쩌다 두 번씩이나 소도둑을 만났다. 두번째는 도둑에게 끌려가는 송아지를 도중에서 되빼앗은 경우였다.
그날 밤 서리만 안 왔더라도 아마 송아지를 못 찾고 말았으리라. 한밤중 테우리막 안까지 끼쳐드는 서리찬 야기에 잠이 깨었는데 그때 어렴풋이 소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떼가 모여 있는 솔숲으로 서둘러 가보니, 과연 암소 한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울음 울며 헤매다니고 새끼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나 도둑이 훔친 쌀자루에 구멍 터져 새는 줄 모르고 달아난 격으로, 흰서리 깔린 풀밭에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래서 그 발자취가 숨어든 억새밭 소롯길로 급히 서둘렀다. 날선 억새잎에 얼굴 긁히면서, 한 이십 분쯤 쫓아갔을까, 문득 어둠 속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소롯길에서 벗어난 큰 바위 뒤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엿들으니, 도둑은 두 놈인데, 송아지를 그 자리에서 도살하여 고기로 운반하자는 수작이 분명했다. 송아지 목숨이 경각에 놓인 그때 그 순간을 상기하는 노인의 눈에는 희미한 옛 정열의 빛이 어른거렸다. 상대는 두 놈이고 게다가 칼까지 가졌는데, 순간적으로 꾀가 생각났다. 이쪽도 혼자 아니라는 듯이 목소리를 꾸며 호기있게 나왔다. "어이, 태문이! 너도 들었지? 틀림없이 요 근처여." "새끼들, 여기 숨은 게 확실해. 자, 몽둥이를 단단히 잡으라구!" 이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놈들은 놀란 노루마냥 후닥닥 튀어 달아났던 것이다.
그땐 나도 기운이 참 좋았지. 노인은 총각이 바로 앞에 있기라도 한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총각은 그런 이야기를 퍽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새끼 밴 암소는 갑자기 사라졌다가도 며칠 후면 아기 송아지를 데리고 나타나고, 첫눈 내리는 날 없어진 소를 찾으러 온 산야를 헤매다가 낙심해서 돌아오면 소가 먼저 집에 와 있더라는 이야기, 안개 속에 사라진 소를 하루종일 찾아다니다가 지쳐 주저앉아 있노라니, 문득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는데 보니까 바로 옆에 소가 풀을 뜯고 있었고, 또 소들 중에는 여름에 그늘을 좋아하여 한라산 숲으로 들어가 애먹이는 놈들이 있는데, 그러다가 바위 틈에 발목 끼인 채 굶어죽는 수도 있다는 이야기……그리고 오른손 검지 끝이 뭉뚱하게 모지라진 걸 보고 의아해 하길래, 목장에 벼락이 떨어져 바로 앞에서 소 두마리 타 죽고 자기는 손끝과 발바닥에만 화상입고 무사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벼락 맞은 때가 언제였더라?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른다섯살 무렵인 것도 같고 마흔살이 넘은 때 같기도 했다. 그것이, 잃어버린 송아지를 이년 만에 찾은 일보다 먼저인지 나중인지, 또 소도둑을 쫓아가 송아지를 되빼앗아온 것은 또 언제적 일인지…… 앞뒤 순서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이렇게 노인은 먼 과거의 일들을 회상할 때면 시간 순서에 자주 혼동이 생기곤 했는데, 그것이 지금 그의 시야에 올망졸망 솟아 있는 오름들이 멀리 있는 것일수록 어느 게 앞이고 어느 게 뒤인지 한 지평선에 놓인 듯 구별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만큼 노인은 시간적으로 아득하게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이었다. 지지난 일요일, 총각은 자신의 어린 나이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일흔여덟살의 연륜도 사진에 담았다. 햇볕에 탄 흙빛 얼굴, 마른 땅거죽의 균열처럼 그물친 주름살, 나무옹이처럼 툭툭 불거진 굳은살, 시든 입술, 마른 억새줄기 같은 두 가닥의 목 심줄, 억새꽃 같은 흰 터럭의 머리칼과 구레나룻, 소처럼 알 수 없게 모호한 눈빛……. 총각의 보기에 노인은 늦가을의 초원 그 자체였다.
일흔여덟살, 그 나이에 슬쓸한 목장에서 홀로 테우리 노릇한다고, 소 죽은 넋 씌인 게라고, 마을 사람들이 뒤에서 흉보는 것을 노인은 모르지 않았다. 이제는 목장일 그만두고 집에서 쉬라고 아들이 자꾸 졸라대지만 쉰다는 게 바로 죽음처럼 느껴지는 그였다. 하기는 자식으로서 늙은 아비의 건강이 걱정되고 자기 소는 한마리도 없이 남의 소 뒷바라지만 하니 남우세스럽기도 하리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기 소가 여러 마리 있었고 마을의 다른 계꾼들과 더불어 번차례로 소들을 돌봤기 때문에 목장 테우리 생활도 일년에 길어야 한달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소값 파동으로 목장의 영리가 계속 폭락하여 폐쇄위기에 놓이자, 농삿일에만 매달리게 된 계꾼들을 대신해서 소를 맡아 키우는 고용 테우리로 자청해 나서게 된 것이다. 소 흥정하기 귀찮아 그때부터 자기 소는 아예 키우지 않았다.
비록 남의 소들이긴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요, 소일거리였다. 소들은 진드기약 치러 이따금씩 올라오는 제 주인은 몰라봐도, 노인만 보면 드러누웠다가도 와들랑 일어나 반색하곤했다. 그걸 시기하여 주인들이 제 소와 친붙여보려고 약 치고 나서 잠시 놀아주는 시늉을 하지만 그게 어디 당할 노릇인가. 노인은 입만 벙긋하면 돈타령인 마을 사람들보다 소들이 좋았다. 마을에는 더불어 벗할 옛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십오년 전의 그 사태에 다 죽고 남은 건 현태문이 하나, 그 역시 다른 마을로 이사가버려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노인은 해변의 인간잡사보다 초원의 야생이 좋았다. 초원은 옛 바람이 그대로 불어와, 법 밖에 세월 밖에 존재하는 양 생활이 임의로웠다. 구름자락이 와닿는 오름 위에서 땟자국 늘어붙은 것 같은 해변의 도시와 마을들을 바라보노라면 자신이 마치 다른 나라 백성인 듯이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초원이 한시절을 마감해버린 지금, 노인 역시 해변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한낮 짙푸른 풀밭 위에 민들민들 기름진 황톳빛으로 흘러가던 소떼들, 꽁지를 치켜들고 달리던 햇내기 송아지, 샅에 진드기 물려 천방지축 날뛰던 암소들도, 해저물 무렵 오름의 금빛 능선과 암청색 그림자도, 긴 그림자를 끌며 테우리막으로 돌아오는 노인 자신의 모습도 그 청년의 사진 속에만 남고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초원을 날마다 정화시키는 새벽 안개도, 그 안개 속에 섬처럼 둥둥 떠 있던 오름들도, 해 떠오르면 안개의 허물을 벗고 신생(新生)처럼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던 초원과 소떼들도……. 그렇게 깨끗하던 소들의 몸은 이제 겨우내 외양간에 갇혀 제가 싼 똥에 더럽혀질 것이고, 노인 역시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입맛 잃고 소줏병에나 정신팔려 점점 쇠약해갈 것이었다.
그러나 굶은 토끼처럼 겨우내 몸이 축나다가도 목장에 새 풀이 묵은 풀을 먹어치우는 초록의 들불이 번지면 신기하게도 새롭게 원기가 솟구치곤 하지 않았던가. 연일 촉촉하게 안개비 내려 봄풀이 하루 다르게 새록새록 자라나면 고사리 캐는 아낙네들과 함께 소들이 올라와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서로 뿔을 맞대고 비벼대곤 했다. 목장의 한철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과연 내년 봄에도 다시 목장에 올라올 수 있을지……. 여든 가까운 나이에 앞일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재작년부터 겨울나기가 무척 힘들어진 그였다.
문득 구수하게 풍기는 소의 입냄새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올라왔는지 소들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사람 곁을 찾는 꼴이 빈 들판에 저들만 남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한 눈치였다. 암소도 송아지도 그동안 잘 먹어 민들민들 윤나게 살쪘다. 송아지가 마른 풀 속에 핀 물매화 흰 꽃이 신기한 듯이 냄새맡다가 이쪽을 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앉아만 있느냐는 듯이. 뭘 하긴, 느네 애비, 현태문이를 기다리지. 생후 넉달밖에 안 되어 아직 인간이 사는 마을도 모르고 제 주인이 따로 있는 줄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송아지 다리에 달라붙은 도꼬마리, 도깨비바늘의 풀씨를 떼어주면서 노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귀여운것, 요놈을 한번이나 더 목장에서 볼 수 있을는지…….
그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포클레인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들들들, 피를 말리는 소리, 그 소리에 노인은 찬바람 맞아 생명에 위협을 느낀 늦가을의 여치처럼 가슴이 오싹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골프장 만든다고 또 목장을 까발기는 것이다. 생흙, 생피를 벌겋게 드러낸 채 뒤집어지는 야초지. 거기에 덮여질 것은 독한 농약에 절은 골프 잔디, 지렁이도 두더지도 도마뱀도 씨말려버릴 죽음의 카펫이었다. 노인은 신음처럼 괴롭게 한숨을 토했다. 초원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오는 포클레인 소리를 들으면서 노인은 자신의 몸속에서 차츰 좀먹어 들어오는 죽음의 진행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만하면 오래 살았다. 사태 때 이미 죽었을 목숨이 아닌가. 마을에서 남자로서는 그가 최고령인데, 그 나이 위는 물론 그 아래로도 거의 이십년 연하까지 사태 때 다 죽어 휑하니 무인지경이었다. 오직 과부노인들만 더러 살아남아 긴 겨울 심심파적삼아 모여 논다는 게 청승맞게도 눈물겨운 맷돌노래나 김매기노래였다.
사태 이후 그는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란 것도 믿지 않았다. 행복도 그 이전의 행복이었고 인간도 그 이전의 인간밖에 몰랐다. 그러니까 사태 이후 덤으로 주어진 그의 삶은 현실과 관계없는 가공의 삶이었다. 모두 떠나버린 자리에 홀로 남아 있다는 적막감, 그 빈자리를 그는 소떼로 메웠다. 물론 현태문이가 맡긴 소도 볼 겸 이따금 목장에 올라와 놀다 가곤 했지만 그 역시 사태 때 당한 고문으로 얻은 폐병에 몸져 눕기 일쑤여서 온전한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다. 초원에 송두리째 혼 빼앗겨버린 노인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변의 인간사를 그는 산기슭의 팔백 미터 고지에서 소들과 함께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옛 사람들은 초원에 누워 있었다. 바람도 옛 바람이 불어왔고, 그것은 저승 바람이기도 했다. 바람 속에 그들의 맑은 웃음소리,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러려 돌돌 어려 돌돌 고비 청청 돌아오라. 화앙, 이노무 소! 어이, 순만이, 앞에서 썩 대들어!
그랬다. 그들이 있으므로 초원은 아직도 세월 밖에 존재하고 해변의 법으로부터 비켜난 곳이었다. 노인은 불현듯 격정에 사로잡혀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사십오년 전 초원은 법을 거스르고 해변에 맞서 일어난 곳이었다. 오름마다 봉화가 오르고 투쟁이 있었다. 한밤중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노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던 총각은 그 대목에서 격정에 치받힌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보게, 안 그런가 말이여, 나라를 세우려면 통일정부를 세워야지, 단독정부가 웬말인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섬백성들이 투표날 초원으로 올라와버렸고, 그래서 초원은 여기저기 때아닌 우마시장이 선 것처럼 마소와 사람들이 어울려 흥청거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법을 쥔 자들의 보복은 실로 무자비했다. 그해 초겨울부터 시작된 대살육의 참화, 초원지대 근처 이른바 중산간의 이백여 마을을 소각시킨 무서운 불길과 함께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많던 마소들도 거의 전멸이었다. 적어도 이만의 인간과 이만의 마소가 비명에 죽어 초원의 풀밑으로 돌아갔다. 죽은 곳을 몰라 찾지 못한 시신들도 허다했다. 그 총각네도 조부의 시신을 못 찾아 헛묘를 썼노라고 했다.
초원은 그렇게 무참히 무찔러진 채 칠년간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인간도 마소도 자취없이 사라져 비어 있던 초원이 개방되어 죽다 남은 테우리들이 죽다 남은 마소를 거느리고 드문드문 방목을 다시 시작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보았던가. 수백 년 동안 마소와 테우리들이 다니던 목장의 소롯길들, 그 사태 후 풀숲이 우거져 사라졌던 그 길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은 풀밭 여기저기에 뒹구는 백골들을 보고 진저리쳤다. 흙 한점 묻혀보지 못하고 풍우 속에 허옇게 폭로되어 있던 백골들……. 지금도 건초 수확 때마다 풀밭에 늘비하게 눕혀 있는 건초뭇들을 보면 당시의 떼주검이 연상되어 몸이 오싹해지는 그였다. 초원에 묻힌 그들의 삭힐 수 없는 한이 저 거친 야초를 키운 것이 아닌가.
노인이 지금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무덤의 운명 또한 기구한 것이었다. 말굽형 분화구의 양 등성이가 만나는 중심부, 사람으로 치면 양가랑이 사이에 해당되는 곳에 자리잡은 묘인데, 말할 것도 없이 풍수지리설에 의한 택지였다. 초원의 오름들은 민틋하게 흘러내린 능선이 주는 부드러운 양감 때문에 양순하게 엎드린 암소를 닮았는 데다가, 정상에 우묵 파인 분화구가 거대한 암컷 형상이라 그런지 초원에 마소번식이 잘되었다. 그러니까 오름 분화구에 묘를 쓴다는 것은 자손 번식, 마소 번식 다 잘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묘 역시 자손이 사태 때 씨멸족해버렸는지 벌초하는 사람이 없어 그가 대신 돌봐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자손 번성, 마소 번성, 모두가 허사였던 것이다.
백골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버섯이나 약초 캐러 들어간 으슥한 굴헝이나 덤불숲 같은 데서 이따금 발견되곤 했다. 노인은 인간의 뼈뿐만 아니라 마소뼈도 고이 묻어 주었다.
사태 때 그는 소백정 노릇을 한 사람이다. 토벌군들이 목장의 마소들을 그대로 놔두면 '폭도의 똥'이 된다고 보이는 대로 사살해서 고기를 가져가는 판국인데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중산간 마을들이 불탈 때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산야로 쫓겨와 먹을 것 없이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각 마을 젊은 테우리들이 소사냥에 동원되었다. 토벌군과 맞싸울 변변한 무기도 없이 추운 겨울의 산야에서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투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테우리의 활동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 돌보는 테우리가 소 잡는 백정으로 돌변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던가. 그렇게 양순하게 따르던 소들이 이제는 보기만 하면 달아났고, 달아나다가 가시덤불에 들어 길이 막히면 휙 돌아서서 뿔을 겨누고 무섭게 달려들곤 했다. 달아나는 건 올가미 던져 걸리고 덤벼드는 것도 날래게 옆으로 비켜서면서 뿔이든 꼬리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발을 걸어 쓰러뜨렸다. 테우리들은 대개 한라산에 야우(野牛)를 키운 적 있어 그런 일에 능했다.
그러나 소사냥에는 늘 위험이 따랐다. 소 있는 곳에는 소를 겨냥한 총구도 있지만 소를 잡으러 온 테우리를 향한 총구도 있었다. 그 역시 소가죽을 써 위장하고 소떼 있는 데로 접근하다가 진짜 소로 오인되어 사살당할 뻔했는데, 총알 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가 소가죽만 몰래 벗어놓고 풀숲 바닥을 기어 겨우 도망쳐 나온 일이 있었다.
그가 직접 칼 잡고 도살한 소만 해도 스무 마리가 넘었다. 제가 잡은 소의 가죽을 쓰고 다녔고, 동상 걸린 발을 소의 뜨뜻한 내장 속에 녹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던 이런 경험들이 훗날 가슴 속에 아픈 가시로 남았다. 제가 죽인 소가죽을 덮어쓰고 다녔는데 왜 '소 죽은 넋'에 안 씌겠는가.
그러나 정작 그를 초원에 머물게 하는 슬픔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원천을 두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노인은 양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다시 그 총각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 혈족처럼 사랑하던 소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그 청년의 눈에는 눈물의 그득했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 못다 한 말이 있었다.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그 비밀…….
유독 날씨가 춥던 어느날, 그는 물 먹으러 올 소들을 기다리며 연못 근처에 숨어 있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 토벌대에 잡히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달아나기에 충분한 거리였는데도 추위에 다리가 마비되어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다리를 주무르고 두드리며 애를 부득부득 쓰던 그때의 공포는 훗날 자주 나타나 꿈자리를 사납게 했다. 그는 붙잡힌 즉시 총개머리판으로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 맞았다. 소 고삐밖에 가진 게 없는 이른바 '비무장 폭도'로 잡히긴 했지만 살아날 길은 오직 자기 편을 배신하는 것뿐이었다. 가족도 소도 행방불명되어 찾으러 다니는 중이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막무가내로 두들겨패는 것이었다. 폭도들이 숨어 있는 굴을 가리키라! 네가 있었던 굴은 어디냐? 그가 있었던 굴은 피난민 열댓 명 가량이 숨어 있었는데 거의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가 한 일도 그 굴에서 살면서 지시에 따라 소 사냥하는 한편, 그 굴을 보호하는 보초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상부의 아지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피난민, 노약자라고 해서 사정봐줄 그들이었던가. 당장 죽을지라도 차마 제 마을 사람들이 들어 있는 그 굴을 가리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지난 봄에 잃어버린 소를 찾아 빗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조그만 굴이었다. 그 굴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젖은 옷을 말렸으니까 타다 남은 나뭇가지, 재 같은 사람이 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아 그런데 그 무슨 귀신의 장난이던가! 아무도 모르는 굴이라고 생각한 거기에 사람 셋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손주아이를 끌어안고 제발 이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두 늙은 내외…….
그해 겨울, 눈 덮인 초원의 지하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용암동굴들, 그 속에 피난민, 입산자 가족들이 과거도 미래도 끊긴 채, 극심한 굶주림에 제 살 깎이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누워 있었다. 굶주림은 졸음을 동반한 현기증일 뿐 고통은 아니었다. 동굴 천장에 매달려 겨울잠 자는 박쥐들과 함께 의식도 감각도 흐릿해지고 호흡도 맥박도 느려져 오직 잠자는 것만이 먹는 것이던 그들. 이따금 동굴 천장을 울리며 토벌군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무서워할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몽롱한 현기증 속에서 서서히 죽었던들 차라리 편안한 죽음이었을 것을. 그러나 무도한 자들은 그러한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발각된 굴속의 사람들은 밖으로 끌려나와 총살당하기도 하고 굴 안으로 불붙여 놓은 독약 태운 연기에 질식하여 죽기도 했다.
사태 후 노인은 차마 오소리굴에 연기를 놓을 수 없어 오소리 사냥을 포기했고 늦가을의 목장에 돋는 말똥버섯들도 눈물겨워 캘 수 없었다. 말이나 소의 젖물이 땅에 떨어져 생긴다는 그 애틋한 말똥버섯들, 올망졸망 모여 있는 그 버섯가족들을 보면 그가 가리킨 굴속의 그 가족이 생각났던 것이다.
노인이 초원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슬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이제 격정은 아니었다. 그 잔잔한 슬픔은 마치 가슴속에 마르지 않는 찬 샘을 갖고 있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때때로 무서운 격정에 사로잡혀 영각하는 소처럼 들판을 향해 울부짖기도 했다.
초원의 안개는 여전히 죽은자들의 슬픈 영혼으로 무리지어 떠돌고, 임자 없는 백골들이 아직도 어느 굴헝, 어느 굴속에 뒹굴고, 풀 뜯다가 풀속에 숨어 있는 녹슨 탄피까지 잘못 먹어 장파열로 죽는 소도 있건만, 세상은 초원의 과거를 더이상 기억하지 않았다. 희생자 유족들도 체념해버린 지 오래였다. 서울 뚝섬 경마장에서 기수 노릇하다가 경기 도중 쇠파이프를 들이박고 머리 다쳐 반병신 꼴로 낙향한 오촌 조카, 다섯살 때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뇌수술을 받은 후로는 기억에서 흔적없이 없어져버렸다고 서럽게 울곤 했다.
그리하여 초원은 이제 다시 한번 환란을 맞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서 솔씨 하나만 날아와도 발 못 붙이게 완강하게 거부하던 초원이 사방에 아스팔트 도로로 절단되고, 야초를 걷어내어 그 자리에 골프 잔디가 심겨지고 있었다. 골프장 반대 운동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골프장에 잘못 들어간 송아지가 골프채에 얻어맞고 응접실의 카펫같이 고운 양잔디 위에 겁똥을 칙칙 내깔기고 달아난 정도의 미미한 반항에 불과했다. 그렇게 포클레인으로 초원을 파헤치다가 우연히 동굴이 발견되어 그 속에서 사람 뼈와 함께 소 뼈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옛날 몽고 지배 때의 우마적굴(牛馬賊窟)이라고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아무 가망없이 죽는 일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노인은 두 팔로 감싸안은 무릎 위에 머리를 떨구었다. 너무 오래 골똘히 생각한 탓인지 피로와 함께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하늘에 뜬 매의 그림자인가, 서늘한 감촉이 눈꺼풀 위를 휙 스쳐갔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들들거리는 포클레인 소리도 잠에 밀려 아득히 멀어졌다. 발끝에서 차오르는 낯익은 어둠, 죽음 역시 그렇게 낯익은 모습으로 오리라. 분화구 안은 자궁 속처럼 포근했고 노인은 자궁 속의 태아로 돌아가 몸을 조그맣게 움츠린 채 옛 무덤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노인은 반시간쯤 푹 잠에 빠졌다. 잠결에 어렴풋이 소 뛰는 소리가 들린 듯했고 또 누가 부르는 듯도 했다. 풀잎처럼 흔들리면서 들판을 질러오는 현태문이와 사진쟁이 총각도 보였다. 그러다가 몸이 오슬오슬 추워지면서 덜컥 악몽의 덫에 잡혔다. 마음이 산란할 때면 나타나는 예의 그 꿈, 그 언젠가 목장에 벼락 떨어져 소 두 마리 타죽고 그 자신 벼락에 감전되어 나동그라진 그 장면이 사태 때의 그 무서운 불과 총소리로 뒤바뀌어 그를 엄습했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어미소들이 제 새끼 부르는 다급한 울음 소리, 소떼가 우당탕탕 내달리는데 그 뒤로 천둥번개 치면서 검은 구름떼가 무섭게 좇아왔다. 들판이 온통 번갯불로 벌개지고 와작착와작착 내리꽂히는 불기둥들. 소떼의 처절한 울음 소리, 다음 순간 섬광과 함께 바로 코앞에 벼락불이 내리꽂혔다. 뜨거운 쇳조각이 몸속을 꿰뚫었다. ―거기에서 노인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 너무 생생하여 뜬 눈에도 번갯불이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것이 보이는 듯했고 아직도 벼락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닌게아니라 옆에 있던 소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갑자기 변하여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대기의 불안한 흐름이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소들이 어디로 갔나? 아까 잠결에 소 뛰는 소리를 들은 듯한데, 예감이 빠른 소들이라 강풍이 올줄 알고 미리 솔숲으로 피했나? 아니면 물 먹을 때가 되어 냇가로 내려갔나?
노인은 소 고삐 타래를 어깨에 메고 서둘러 오름 등성이로 기어올랐다. 정상 근처 엉겅퀴밭에는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발생한 생생한 유혈의 흔적이 있었다. 거멓게 말라죽은 엉겅퀴떼, 그 험상궃은 가시위에 핏자국 선명한 잿빛 깃털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매의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에 찢긴 멧비둘기의 잔해.
정상에 오른 노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소들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구름떼는 이미 바다를 뒤덮고 해변에 육박하고 있었다. 바람에 들볶인 바다는 온통 흰 거품투성이고 도시의 항구에는 자석에 끌린 쇳조각들처럼 배들이 가득 모여들어 있었다. 노인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폭풍이 닥치기 전에 소를 찾아야 할 텐데, 특히 어린 송아지가 걱정이었다. 우선 솔숲을 뒤져보기로 작정하고 서둘러 오름을 내려갔다.
그러나 검은 구름떼의 이동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잠깐 사이에 해변을 덮쳐 흰빛의 도시를 검게 지워버렸다. 초원에 한가롭게 떠돌던 흰 구름들이 급히 산 너머로 좇기기 시작하고 햇빛이 점점 야위어지면서 초원을 가로지른 아스팔트 도로에 불길한 강철빛이 떠올랐다. 그 도로의 서쪽편. 야초지를 벌겋게 갈아엎은 골프장 부지의 허공에 흙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일고 있었다. 강풍이 어느새 거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노인은 황급히 오름을 내려갔다. 그러나 다 내려오기도 전에 골프장 부지의 흙먼지를 싸안고 강풍이 밀어닥쳤다. 그 뒤로, 서릿발같이 눈부신 흰 테를 두른 검은 구름이 시야를 가득채우며 달려왔다. 초원을 쓸며 오는 꼬리 부분에 희끗거리는 눈송이떼가 뚜렷이 보였다. 눈이 내리기 전에 먼저 강풍에 날린 억새꽃들이 눈처럼 하얗게 날아올랐다. 마른 잎, 검불들도 휙휙 날아올랐다. 공중을 날던 까마귀들이 소리를 내며 무수한 뱀떼처럼 우쭐우쭐 풀밭을 휘저으며 무섭게 내달렸다.
검은 구름은 오름들을 차례차례 집어삼키며 굴러와 마침내 해를 침범했다. 그러자 초원은 대번에 핼쑥하게 빛바래지고 노인도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초원 한구석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마지막 빛줄기마저 사라지자 사방은 초저녁처럼 어둑해지고 그리고는 곧 죽음같이 차디찬 냉기를 몰고 눈보라가 밀려왔다. 골프장의 흙먼지 먹어 딱딱해진 눈송이들이 뺨을 아프게 후려쳤다. 노인은 얼른 마른 소똥 몇 장을 주워 가슴에 품었다. 눈보라의 급류에 휘말린 노인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바람에 밀려 발을 자꾸 헛디뎠고 얼굴을 후려치는 눈보라에 숨쉬기도 어려웠다. 얼마 못 가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매와 불과 얼음의 시련이 남겨놓은 옛 상처들을 추위가 매섭게 침범하고 있었다. 동상, 화상 입었던 자리들이 먼저 마비되고 개머리판에 찍힌 살속 뼈에 닿은 상처들에도 격렬한 통증이 왔다. 혈관이 경직되어 오금이 저리고 머리가죽이 바싹 오그라들었다. 불과 십 분 거리인데도 눈보라 속에 희끄무레하게 서 있는 솔숲은 피안의 세계인 듯 아득하게 보였다. 소 고삐 타래가 어깨를 천근 무게로 짓눌러댔다.
광란의 들판에서 노인은 풀들과 함께 몹시 흔들렸다. 천지가 온통 흰 눈인데, 그 가운데에서 오직 노인의 흙빛 얼굴만이 유일한 색이었다. 아직 눈으로 덮이지 않은 한 줌의 흙. 그러나 노인은 온몸으로 버팅기며 눈보라 속을 꿋꿋이 헤쳐나갔다.
간신히 눈보라를 벗어나 솔숲의 바위 틈새로 찾아든 노인은 곱은 손으로 어렵사리 마른 소똥에 불붙여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고드름처럼 굳었던 몸은 불을 쬐자 그제서야 한기를 느껴 와들와들 떨렸고 그렇게 한참 무섭게 떨고 난 노인은 완전히 탈진하여 앉은 채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때는 이미 밤이었다. 어느새 폭풍설도 그쳐 사위는 고요한데 그 광막한 백색의 정적 속에서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순만이―" 그것은 분명 현태문의 목소리였다. 노인은 황급히 솔숲을 뒤지다가 눈 위에 찍힌 소 발자국들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발자국들은 숲 밖으로 이어졌고 풀밭을 질러 냇가 소롯길에 닿았다. 노인은 홀린 사람처럼 눈 위의 소 발자국을 밟으며 그 길을 따라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내려간 곳에 그 마을이 나왔고, 거기에서 현태문이 임종의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