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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4주일 메시지 (설교안)
시리즈 주제: 판타지로 쓴 하나님의 경륜
The Economy of God written in Fantasy
두 번째 설교
제목: 인간의 하나님 이해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성경 본문: 계시록 4장
설교 목적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함으로 역사의 이면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격려한다. 그래서 오늘의 현실을 바르게 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것을 결단한다.
설교 개요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운명을 결정한다!
2. 계시록이 소개하는 하나님
①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②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③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④ 보좌에 앉으신 이
3. 역사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운명을 결정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일과 궂은 일을 만납니다. 편안한 쉼도 있으며 곤경에 빠져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계절을 만납니다. 계절을 우리가 주관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제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는 반응은 선택으로 나타납니다.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사람은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그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는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할까요? 왜 그 직장을 얻었지요? 왜 그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왜 그 대학에 들어갈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왜 여기에 와 있을까요? 우리가 이 모든 선택을 내린 까닭은 그런 선택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그것이 가장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그 사람의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은 선택에 의해 결정되며 그 선택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여기는 기준이 되는 가치관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며,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까요? 누가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 주었을까요? 즉, 사람의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사람이 사리(事理)를 분별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성숙해 간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르지요. 그래서 아이는 부모로부터 하나씩 배웁니다. 가정에서 바르게 말하는 법, 중요한 행사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칭찬을 받는지를 경험하면서 사람의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는 점차 학교와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옳은 일, 가치 있는 일,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배워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관은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에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마다 가치관이 조금씩 다르고 가정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풍이 다르고 문화가 다릅니다. 또한 가치관은 시대마다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대차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교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시대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는 오늘의 시대정신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회에 복음이 들어가면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한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가 들어가면 이전에 있던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처럼 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람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이전에 갖고 있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새로운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수자였으며, 그들이 살던 사회에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고 인간을 신으로 섬기라고 강압하는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황제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서 그의 신상에 절을 하고, 그의 보호 아래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게 살아가던 한 교회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시록 2:13)
서머나교회가 있는 도시에는 사탄의 권좌가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섬기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 강압을 견뎌내고 그들의 유혹에 이겨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서머나에 사탄의 권좌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서울에는 어떤 권좌가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며,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까? 그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은 돈이 아닐까요? 우리는 돈 때문에 양심을 져버리고, 금전적인 손해를 먼저 생각하기에 인간의 도리를 져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바르고 견고할 때 우리는 사탄의 권좌로부터 내려오는 명령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현실 속에서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될까요?
2. 계시록이 소개하는 하나님
사도 요한은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섬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들에게 편지로 알려주려고 쓴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셨을까요? 다같이 성경을 읽어봅시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혼탁한 세상에서 명확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환경 속에서도 담대하고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새로운 이름입니다: (1) 알파와 오메가, (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그리고 (3) 전능한 자.
(1) 알파와 오메가
알파와 오메가는 무엇입니까? 우리 동네에는 ‘알파수퍼’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 중에는 ‘오메가 시계’가 있습니다. 알파는 그리스 문자의 첫글자요,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입니다. 알파수퍼는 첫 번째로 좋은 수퍼라는 의미요, 오메가 시계는 더 이상의 기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최종적인 시계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소개하셨을 때 그 말은 곧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의미입니다(계 22:13).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그것을 마치는 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시기에 주님보다 앞선 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파시기에 다른 모든 신이든 사람이든 베타와 감마, 엡실론… 카파, 오미크론 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만드신 처음 말씀을 선포하신 분이시며, 이 세상의 마지막에 그것을 새롭게 만드실 말씀을 선포하실 분이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하나님의 재창조를 믿을 때 이 세상의 어그러짐을 보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 저것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거야!”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만물을 붙드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셨고 그것을 마침내 다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요, 시작과 마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가르쳐주신 다른 이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였습니다. 그 말은 모든 만물을 있게 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계실 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과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은 미래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장차 오실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소개합니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시편 96:13-새번역)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여정에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이 세상의 종말에 만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와 담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니 우리는 믿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전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것입니다.
(3)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전능하시다’는 말은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모든 만물과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권능과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을 소개하는 사무엘하 5장 10절을 봅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점점 강성해져 갑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가 당하는 모든 곤경에서 그는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선택과 결단은 백성의 지지를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들레헴의 가장 작은 자가 이스라엘 전체를 통솔하는 지도자요 왕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윗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점점 강성하여 갈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원수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쫓기는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원수의 나라 한 가운데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신뢰하는 한 우리는 점점 강성해 가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3) 보좌에 앉으신 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는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마지막 칭호는 바로 보좌에 앉으신 이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5:7)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21:5)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감동되어 올라가 보니 하늘에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이 하늘에서 본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고 계신 산신령 같은 모습이 아니라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왕좌에 앉아 권세를 휘두르는 황제를 볼 때, 온 세상은 저 힘 있는 황제의 뜻대로 되는가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원하는 회사는 성장하고 황제가 원하는 사람은 감옥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황제가 싫어하는 이는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땅의 임금이 다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올라가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온 세상은 땅의 임금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이 엄연히 통치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요한은 좀 더 자세한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시록 4:8~11
요한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예배하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더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요한은 깨닫습니다. ‘아!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구나!’ ‘지금 하늘에서도 그런 예배가 드려지고 있구나!’ ‘우리들도 장차 하나님을 그렇게 예배하겠구나!’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예배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할 때 주님이 오시는 날이면 이들이 심판을 받겠구나!’
3. 역사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심은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박집사님에게 하나님은 꿈에 산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빨리 교회에 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박집사님은 그날 이후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박집사님은 역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에게 환상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온 세상의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땅에서 통치하는 세상 임금의 모습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폭력을 일삼고 나라와 민족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환상 중에 본 이 세상의 임금은 바다 괴물과 바벨론의 음녀입니다. 바다 괴물은 짐승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음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야수처럼 온 세상을 착취하는 로마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제국 전체를 타락시키는 로마의 더러운 문화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계시록 17장에는 이 음녀가 왜 심판을 받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시록 17:1~4
우리 교회에 청년이 블로그에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삶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위기를 경험하고 깨어질 위기 가운데 있는 젊은 부부가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파이어 프루프’(Fireproof, 2008)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블로그에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 전에는 폭력적인 영화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보았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영화를 볼 수 없더라고요. 이렇게 시간을 많이 투자하여 글을 쓰는데 그런 의미 없는 영화를 소개할 수는 없잖아요?’
좋은 것을 보고 나면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나면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환상 중에 하늘에 올라가서 참된 통치자가 누구인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자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짐승처럼 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지가 보였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기업들이 돈을 벌기 위해 더러운 사상을 퍼트리며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지가 보였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그것은 더러운 세상의 문화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야수 같은 통치자를 따르지 말고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시는 어린 양의 표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순교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성도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로마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그 짐승 같은 폭력의 결과로 생기는 이익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로마의 이데올로기와 풍조를 배척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이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늘의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그런 눈을 열어주는 새로운 그림과 환상, 그리고 비전을 줍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 중에 ‘비전’(Vision)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대목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요한처럼 환상 가운데 하늘에 올라가 보좌에 앉으신 분을 뵈옵고 그 영광 가운데 찬양하는 영광의 예배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하늘의 눈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이 세상의 짐승을 간파합시다. 음녀의 포도주를 버리고 거룩한 성찬에 참여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과 문제 앞에서 바른 판단을 하며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기는 자들’이 되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처럼 우리도 그 면류관을 벗어 어린 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드리면서 감격의 예배를 드립시다. 그것이 지금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제 그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합시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이루어지게 합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가운데서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끝>.
판타지로 쓴 하나님의 경륜2-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1) (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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