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줄거리: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여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게 될 위기에 처한 부부관계를 구출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부부간 전쟁을 종식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부부가 되고 부자, 부녀의 관계가 되는 신앙적 관계를 위한 클리닉의 경우는 상황이 어떨까요? 하나님과의 이혼과 결별을 피하고 사랑으로 유지되게 하기 위해 모세는 잔혹한 전쟁을 명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종식 되면 하나님 사랑도 끝이 난다는 말씀이지요.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
(신7:1~26)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시리즈1과 2를 끝낸 뒤에 지금 3이 계획 중에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사랑과 전쟁’이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전쟁하면서 이혼하게 될 위기에 처한 부부관계를 구출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 진료하고 치료합니다. 이 진료의 목적은 죽어가는 부부관계를 살려내기 위함인데, 치료의 기본 방식은 전쟁을 종식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어느 쪽이 더 강하게 전쟁에 임하고 있는지 등을 진단해서 치료를 합니다. 시리즈2에서는 시청자들의 실제 제보에 근거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의 100% 실화로 아주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부부관계가 되고,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되고, 하나님과 부녀 관계가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곧 하나님과 주님과의 관계인데 클리닉이 필요한 것은, 이 관계도 깨어질 수 있는 위협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이혼과 결별을 피하고 사랑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진료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모세는 잔혹한 전쟁을 권면합니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는 부부간에 일어나는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하는 반면에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는 하나님과의 사랑관계를 유지하려면, 치료를 위한 권면으로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만 하고 전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전쟁’은 말 자체로는 서로 반목하고 공존할 수 없는 단어이지만 하나님과 사랑 관계에서는 전쟁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하는 대상은 다르지만 부부클리닉에서는 전쟁종식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클리닉을 지금 수행하고 있는 모세의 말씀에서는 전쟁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쉐마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은 모세의 조언과 권면에 의하면 아주 잔혹한 전쟁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선민으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 될 일은 바로 이 전쟁을 통하여 사랑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의 내용을 읽어서 아시겠지만 가나안에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일곱 족속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말씀의 단어를 살펴보면 얼마나 잔혹한 전쟁인지 모릅니다.
2절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하십니다. 국제협약에 의하면 ‘전의를 포기한 상대방 적국의 군인들에 대해서는 포로로 인격적인 대우를 해줘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예 ‘진멸하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하시고 또 당연히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잔혹한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4절에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쉐마의 말씀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과의 사랑을 유지하려고 하면, 마음에서 여호와를 잃지 않아야하고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필사의 항쟁을 해야 하고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마음의 지성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거룩한 장소에 내게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을 담게 되고, 그 지성소에 담은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손에 쥐려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이 형식은 잘못 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의 어떤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아서 추구하고 사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고 잘잘못이 발생하는 것이지, 마음의 지성소에 이름을 담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허락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담게 된 선민들도 살다보면 그 이름이 어느새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리고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있는데, 어떻게 해야 그 하나님의 이름이 내 마음의 지성소에 유지 될 수 있겠습니까?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전쟁자체가 이미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의 내용이 됩니다.
이 전쟁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밀쳐내고 들어오려고 하는 세상의 가치들과의 싸움으로, 내 마음 안에서 진멸시켜야 하는데 내 마음이 가나안 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 안에 돈이 들어오려고 하면 돈과 싸우고 진멸시켜야 합니다. 돈에 대한 사랑과 애착과 집념으로 은근히 바라든지 노골적으로 바라든지 돈이 없으면 큰일이라는 생각들을 진멸시켜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야 큰일이 나는 것인데, 돈이 없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될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야 내 노후가 보장이 안 되는 것인데, 돈이 없어서 나의 노후가 보장이 안 된다고 하니 반드시 진멸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의 동선을 따라 승천한 상태에서 마음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연합합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이름을 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담아야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하시는 하나님께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고 마음이 하늘로 갈 수는 없는데, 인간의 생리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부터 승천까지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므로 무조건 잔인하게 칼로 진멸을 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갓 태어난 자식일지라도 무고한 죄가 없는 아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 없는 어린아이는 없는데 이게 초점이 아니고, 얼마나 사랑스럽고 그 연약한 아이를 돌봐야하는데 사춘기가 지난 자식과는 다르잖아요. 그런데 내 마음에서 잔인하게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내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는 자식도 내 마음에서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잔인하게 죽이고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방해하기 때문에 갓 태어난 자식까지도 내 마음의 가나안에서는 진멸을 시켜야만 하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이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4절에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신은 그 자체가 신적인 능력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없고 연약하고 무력한 갓 태어난 자식도 내 기쁨과 만족의 이유가 된다면 신이 되는 것이므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기 위해서 잔혹한 전쟁을 치러야 되는데, 우리가 마음에서 이 잔혹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욥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셨다는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에서 죽이라’는 얘기지 ‘실제로 자식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의문점이 있습니다. 모세의 염려처럼 선민은 여호와를 섬기다가 왜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마음의 지성소로만 가능한데 이 점에서 생기는 의문점이라는 것입니다.
만족과 기쁨의 이유가 된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들여놓는 자리가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들여놓았습니다. 돈이 있어야 된다고 느끼고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에서 돈을 잊어버릴 때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부관계조차도 돈 때문에 원수가 됩니다. 이혼 할 때의 마지막 싸움은 누가 더 돈을 많이 가지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자식을 길러도 돈을 잘 벌도록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집에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자식에게 가르치라고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집어넣고 있으면 자식을 양육할 때도 어떻게 하든지 돈을 잘 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회사에 들어간 사람이 승진에 마음을 두었다면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시간 동안에 승진을 마음에서 잊어버리는 적이 없습니다.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많은 질곡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그 질곡의 삶을 지나서 기필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그들의 질곡의 삶을 생각하면 대통령이 된 후의 5년간의 통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너무 싱거워요. 그런 정도의 질곡의 삶을 견뎌내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링컨이나 세종대왕 같은 치적이 남아야 하는데, 그걸 하려고 그렇게 대통령이 되려고 했나 싶을 정도로 싱겁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결심이 그렇게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포기 된 적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의 가치들의 이름이 마음에 지성소에 들어오면 추구하는 것이 포기가 되지 않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설사 이루지 못하고 힘이 부족해 포기하더라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지 마음에서 그 가치를 놓아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그것이 들어있지만 현실적으로 내 능력이 부족해서 포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은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와 있다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쓰윽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덧 기독교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은 입에만 담겨져 있고, 마음의 지성소에는 돈과 사업과 세상 형통과 건강이 들어와 있고 자녀의 성공이 들어와 있게 되고,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부흥과 예배당 건축이 들어와 있게 되는데, 굳이 하나님의 이름만이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오면 유지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이 죄가 우리 인격의 체질이 되고 인격의 일부가 된 죄의 기질이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이 되고 우리의 인격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나타날 때에 죄인 줄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비어있어서 채워져야 만족하고 기쁨이 주어지는데, 그 만족을 위해 마음이 흡입하려는 흡입력이 발동하는 주입구가 세상을 향하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쉽게 말해 이 땅에서 소원과 열망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를 들어 명품 백 하나를 갖고 싶다는 소원조차도 예외 없이 죄에서 나옵니다. 큰 소원이 아니더라도 작은 소원까지도 죄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얻겠다는 그 열망이 내 인격의 체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죄인 줄을 모르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소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세상을 향해서 소원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원해서 낳아도 이 모습 이대로 소원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소원한다고 해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소원하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순간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소원으로 이끌어져 갑니다. 인간의 소원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원래 이유는 땅에서 살지만 땅에서 소원을 갖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땅에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하면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담과 하와에게 바라신 하나님의 요구였고 이 세상 삶을 에덴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도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면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부족함이 없게 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에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소원해버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9절에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서부터 승천까지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까지 가셨던 길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임해지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임해지고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져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은 지켜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이 삶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삶에 대한 소원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주입구를 세상으로 향하고 있어서 세상에 대해서 소원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하라고 선민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주입구를 고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자꾸 이 죄의 성향이 땅을 향하도록 우리 마음의 주입구를 돌려놓는데 이것은 마치 혈압약과도 같아요. 혈압 약을 먹으면 높은 혈압 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거되지는 않고 혈압이 오르는 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죄적인 성향을 억누를 수 있을 뿐 뿌리째 뽑아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잔혹한 전쟁을 치러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승천까지 만들어 놓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 올라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잔혹한 전쟁을 치러서, 내 마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여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가려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황이든 모든 세상의 가치들을 진멸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고전15: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고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갈6:14절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소원 갖는 것을 자발적으로 죽인다.’는 것이고 ‘세상이 나에 대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세상이 내 마음을 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전쟁을 치러 내 마음에서 죽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내가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바랄 때에도 나를 죽여서 쫓아내버리고, 또 세상이 내 마음을 끌어 갈 때에도 십자가로 세상을 죽여서 쫓아내버려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이 불가능해지고 우리의 삶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사실 신약 시대에 오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라고 하는 식으로 복을 받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300년 동안 박해 아래에서 살게 됩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이 구약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카타콤에 들어가더라도 만족함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풍성하다, 풍족하다’는 말씀이 자꾸 나오는데 풍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인데 이게 기적 아닙니까? 어떻게 카타콤에 들어가서 풍성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해주시는데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구약에서도 십자가 복음의 역할과 기능을 예표적으로 수행했던 사건이 바로 상번제입니다. 이 ‘상번제’가 가나안 칠족의 전쟁을 내면화 시킨 것입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뺏어가려고 하는 모든 세상의 가치들이, 상번제의 양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죽는다.’고 고백하며 전쟁을 치르며 이겨 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흡입력을 발휘하고 소원하게 되는 것은 유전 죄입니다. 흡입하려고 하는 것은 죄는 아니지만 방향을 바꾸어야 되는데 그것도 날마다 십자가, 순간마다 십자가가 아니면 바꿀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 따라 가게 되면 자연히 주입구가 하늘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가지시고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소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소원에도 적용을 하세요. 예를 들어 손톱 밑에 까칠까칠한 것이 있어서 거슬리는데 요게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조차도 적용을 하세요. 다 죄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던 것도 그랬고 욥이 상실했던 것들도 욥이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진멸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가실 때에 마음이 아픈 이유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라도 이것들과 마음이 연합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서 상실 된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시고 십자가를 통해 날마다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서 진멸시켜 나갈 때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이 내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하면 계명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소원들에 의해서 이 세상의 내 삶은 진행될 것입니다. 결혼, 취직 등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소원에 의해서 진행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선민의 삶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선민의 삶을 위해 ‘신앙클리닉, 사랑과 전쟁’에 관한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죄적 기질을 억누르고 죄적 기질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흡입하려고 하고 소원하려는 모든 대상들을 마음에서 진멸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을 수행해서 이 땅과 내 삶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소원만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성민의 삶, 선민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