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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요한복음 2:1-2:12
제 목 :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0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0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0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0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0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0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0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0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0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1.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조금 전 우리가 한 목소리로 합독한 가나의 혼례 사건은 신앙생활 좀 했다는 분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이라는 것이고, 그 이적의 내용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라는 순서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하시는 예수님이신데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이적이 뭐 그리 대단하고, 뭐 그리 놀랍고,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이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고자 하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에 대한 이해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1],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니까 1장의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던 날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에 가나의 혼례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음 주에 살펴볼 내용, 즉 [요한복음 2:13-22]에 기록된 이른바 성전 정화사건도 예수님 사역 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자마자 다짜고짜 성전부터 엎으시는 일을 벌이시겠습니까, 벌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벌이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미친놈이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고, 그랬다가는 곧바로 붙들려서 아주 심한 곤혹을 치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일으키신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가나의 혼례 사건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장에 이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기를 떠나 요한은 이 두 사건을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 중의 하나인 가나의 혼례 사건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어느 교회 주보의 목양칼럼에 실린 내용을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가나의 혼례 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아마 다 아실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잔치를 위해 열심히 연회를 준비했는데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그만 떨어져 버렸습니다. 당시 결혼식 문화는 일주일간 잔치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법도 중의 아주 중요한 법도가 포도주와 음식이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신 혼인 잔치에 그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잘못되면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신랑, 신부가 그 좋은 날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치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 인생에 시사하고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혼인잔치를 위해서 신랑과 신부가 얼마나 철저하게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했겠습니까? 그런데 포도주는 금방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내가 준비하고, 내가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계획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람도 내 계획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고, 우리 인생을 우리 자신이 자신 있게 이끌어 갈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만져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생도 포도주가 떨어지는 인생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준비해도, 내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도, 내가 이 정도면 되었다 할 만큼 준비해도 포도주는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떨어지게 됩니다. 잘 나가던 사업도, 건강도, 공부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함께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는 내가 얼마나 무릎을 꿇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내용의 목양칼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목양칼럼의 내용에 대해 몇 점의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저는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포도주를 떨어뜨리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는 팩트도 틀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업도 건강도 공부도 모두 그르칠 수 있다는 내용도 틀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결국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도 틀리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목양칼럼은 가나의 혼례 사건을 통해 성경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아주 차원 낮은 칼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의 혼례 사건이 보여주고자 하는 궁극적인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은 가나의 혼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 등장하는 몇 가지 표현을 아주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주 주목해서 봐야 하는 첫 번째 표현은 [요한복음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라는 표현입니다.
먼저 술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거의 술을 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술을 좋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술이 그렇게 나쁜 것입니까? 술이 그렇게 해로운 것입니까? 술을 팔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하나님 앞에 못할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물로 포도주를 바꾼 예수님부터 아주 이상한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몸과 정신에 해로움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술은 사람의 건강에 유익을 주기도 하고, 적당한 술은 사람과 사람의 교제에 유익을 주기도 하고, 적당한 술은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술이라는 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마치 마귀 보듯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오해입니다.
특히 술은 잔치 집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사람의 교제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술을 통해 사람이 마음을 열 수 있게 되고, 적당한 술을 통해 사람이 흥겨움을 갖게 되고, 적당한 술을 통해 사람의 소통이 원활해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 잔치를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의 혼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열렸던 마음이 다시 닫히게 됩니다. 한껏 달아올랐던 흥겨움이 이내 사라지게 됩니다. 더불어 자연스러웠던 소통이 막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더 이상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잔치를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잔치는 모두가 즐겁고 흥겹고 신나야 하는데 술이 떨어짐으로써 ‘갑분싸’해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삶의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기쁘고 흥겹고 즐겁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마치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짐으로써 재미도 없고, 흥겨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의욕도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인이 됨으로써 결코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상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주는 표현이 바로 ‘포도주가 떨어진지라’라는 표현입니다.
2.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하튼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고, 이 사실을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눈치를 챘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왜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려주었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 예수를 잉태할 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 인물이라는 것을 천사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들을 자랑하고 싶겠습니까,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랑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는 단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돌전에 걷기만 해도, 돌전에 말을 시작하기만 해도 우리 아이는 천재라고 생각하는 게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심정입니다.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자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잔치 집에서, 그것도 포도주가 떨어져 갑분싸해진 분위기에서 범상치 않은 아들 예수를 자랑하기 위해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는 성령으로 잉태된 범상치 않은 아들이니 어떻게든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을 수습해서 너의 능력을 보여주고, 이 어미의 체면을 크게 한 번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표현이 [요한복음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표현으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표현입니다. 우선 ‘여자여’라는 표현이 우리를 아주 놀랍게 합니다.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누가 이 내용을 보고 ‘예수는 참으로 싸가지 없는 인물이다’라고 예수님을 비난해도 마땅히 변명할 말이 없는 참으로 황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싸가지가 없는 분이시겠습니까, 싸가지가 있는 분이시겠습니까? 싸가지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과 은혜로 대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싸가지가 없는 분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의도적으로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자여’는 예수님의 어머니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모든 여자, 나아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려준 것은 마리아만의 성품이 아니라 조금 특별해 보이는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지는 모든 사람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결국 죄의 원리에 입각한 성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여’라고 의도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죄인인 모든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여자여’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표현도 놀라운 표현입니다. ‘여자여’라는 표현도 놀라웠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표현도 놀라운 표현입니다.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때는 그냥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해달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틀린 말씀입니까? 즉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까, 틀린 말씀입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집의 사정일 뿐,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사람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선택을 함으로써 말미암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표현입니다.
3.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표현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포도주가 떨어진지라’라는 표현이었고, 두 번째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 표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표현은 [요한복음 2:4],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표현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더불어 잔치 집을 나가버렸다면 예수님은 정말 싸가지 없는 분이 되어버리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결국은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아직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죄인이 되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예수님께 아무 책임도 없지만 때가 되면, 때가 이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지닌 모든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시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몹시 궁금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구조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르치시는 사역이고, 두 번째는 전파하시는 사역이고, 세 번째는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4:23]도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사역으로 나눌 수 있고, 예수님의 이적은 이 고치시는 사역에 포함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 권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다 위를 걷기도 하셨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셨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셨고, 걸을 수 없는 사람을 걷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고치시고, 먹이시고, 살리시는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적을 행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며, 구원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셔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내용들을 사람들이 보다 잘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긴가민가합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부인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사람들의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적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라는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역 후에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를 모두 가르치고 전파한 후에 예수님은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결국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장은 이제 막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을 무렵입니다. 이제 열두 제자만이 모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4.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가나의 혼례 사건에서 우리가 네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표현은 [요한복음 2:6-7],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라는 표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적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물이고, 역시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물이 아니고, 단순한 포도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로 바꾼 물이 원래는 어떤 물입니까? 그 물은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던 물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 또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깨끗이 닦기 위한 물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정결 예식을 잘 따르는 것, 즉 율법을 온전히 지켜 잘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 큰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 큰 복을 받기 위한 각종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종교가 바로 유대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무엇으로 변했습니까?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물로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이지 포도주로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례 사건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핵심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물을 없앰으로써 정결 예식이라는 종교행위를 행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는 것이고,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혼인잔치를 풍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것을 두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 손 씻는 것이 어때서, 식사하기 전에 손 씻는 것이 어때서라고 의문을 다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정결 예식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 이적을 통해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율법을 바로잡으시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곡된 율법의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원리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예수님 사역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내용을 종교행위로 변질시킨 유대교의 왜곡된 율법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원리가 풍성한 온전한 율법으로 바로 세우시겠다는 의미의 선언입니다. 바로 이 선언의 이적 버전이 가나의 혼례 사건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실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선언해주는 내용입니다. 즉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서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내용이고, 이 산상수훈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율법을 바로 잡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요한복음 버전이 바로 물로 포도주를 바꾸는 이적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로 포도주를 바꾸는 이적이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율법을 바로 잡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온 인류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의 혼례 사건도, 유대교의 율법도 오직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냐고,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실 분이 계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교가 단순히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 특별히 선택받은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일종의 샘플, 일종의 견본입니다. 즉 모든 죄인들의 샘플이고, 모든 죄인들의 견본입니다. 이 죄인들의 샘플, 죄인들의 견본인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종교가 바로 유대교로서, 유대교 역시 죄인들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의 샘플이 되는 것이고, 견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유대교의 죄적 원리만을 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죄의 원리를 폐하고 하나님의 원리를 세우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샘플인 이스라엘, 견본인 이스라엘만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다섯 번째로 주목해서 봐야 하는 표현은 [요한복음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는 표현에서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라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었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죄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죄 없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즉 물 떠온 하인들은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물 떠온 하인들이 알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듣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즉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읽으면 자신이 죄인이었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자신이 죄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죄 없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죄로부터 해방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5.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다섯 가지의 표현을 살펴보면서 가나의 혼례 사건이 지닌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만 더 간단히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주목해서 봐야 하는 표현은 의미보다는 가나의 혼례 잔치 집에서 예수님께서 왜 이적을 일으키셨는지 그 이적의 목적과 관련된 표현으로 [요한복음 2:11],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키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이적을 일으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이적을 일으키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결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코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코 결심과 결정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기독교를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원리가 가장 고귀하고 하나님의 원리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존재, 예수님을 믿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믿음이 생겼고, 믿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 여러분들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분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잘 가꾸어서 믿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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