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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발췌자 페이지
제1부 스테이트크래프트(치국경륜/통치 리더십)란 무엇인가
제1장 서 론 이동식목사
제2장 국가와 statecraft 이동식목사
제3장 전통 동양 국가에서의 statecraft 이기성목사
제4장 서양 국가에서의 statecraft 정화종목사
제5장 현대 국가들의 statecraft 정화종목사
제6장 소 결 론 정화종목사
제2부 대한민국 대통령의 statecraft
제1장 일제시대가 남긴 유산 박태영목사
제2장 해방공간이 statecraft에 남긴 영향 박태영목사
제3장 제1공화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statecraft 김춘한목사
제4장 4.19와 5.16 혹은 근대화 경로 선택의 statecraft 김춘한목사
제5장 박정희 대통령의 statecraft와 공과(功過) 강채은목사
제6장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statecraft 이종엽목사
제7장 노태우 대통령과 statecraft 이종엽목사
제8장 김영삼 대통령의 statecraft 김재호목사
제9장 김대중 대통령의 statecraft 김재호목사
제10장 노무현 대통령의 statecraft 조재호목사
제11장 이명박 대통령의 statecraft 조재호목사
제12장
맺는 말 - 2012년,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격들 조재호목사
제1부 스테이트크래프트란 무엇인가?
이 동 식
제 1 장 서 론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1945년과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당시는 물론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업 중심의 전형적인 전근대 사회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60여년이 흘러 21세기 첫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당당한 중견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2010년도에는 수출입을 합한 무역규모에서 세계 9위를 기록하였다. 특히 반도체와 자동차등 첨단 산업분야가 주도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등 대학 진학률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지난 두세대에 걸쳐 이룩한 변화와 성취에 대해서는 세계가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도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하나씩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미흡하고 아쉬운 부분 또한 적지 않다.
먼저 누구나 지적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엄연히 남북 분단과 대결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90년대 중반 김정일 정권 등장이후 북한을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강화하였으며 천암함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도발을 가해오고 있다.
대한민국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사정은 만만치 않다. 그동안 압축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간과한 부분, 그늘진 부분들이 여전히 정상화 되지 못한 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나아가 민주화와 맞물린 급속한 세계화 속에서 경제 사회적 격차가 더욱 커진 결과 사회 통합은 약화 되고 경제성장 또한 주춤거리고 있다.
제 2 장 국가와 스테이트크래프트
1.스테이트크래프트(치국경륜 혹은 국가운영경륜)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술과 통치학, 혹은 치국경륜의 의미를 갖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단순한 기예나 이론적 지식만은 아니다. 그것은 학문적 기반을 상당히 필요로 한다. 당면한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법을 추구하는데 학문적 지식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스테이크크래프트는 집단의 명운과 흥망성쇠를 책임진 사람이 갖추어야할 특수한 통치능력이다.
2.스테이트 크래프트의 4가지 특징
스테이트크래프트가 필요로하는 4가지의 능력과 덕목이 있다.
첫째./ 국가란 특정 목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각기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터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총체적 거시적 관점을 핵심으로 한다고 볼수있다. 특정 목표가 아니라 여러 목표들 간의 균형 특정 부문이 아니라 여러 부문들 간의 균형, 나아가 현재와 미래 목표간의 균형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가 취임초 신중성을 결여한채 한미 FTA를 서둘렀다든가. 많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대강 사업을 강행한 것은 각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떠나서 국가 운영상의 균형 감각과 완급조적에서 문제점을 드러낸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스테이트 크래프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측면 특히 상황적 맥락을 중시한다. 국가의 운영이란 특정이론을 적용해 보는 것일수없다. 이론은 고도의 추상성과 일반성을 갖고있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려면 구체적이고 비논리적인 상황에 대한 성찰을 통해 걸러져야만 한다. 정치가 민주주의 이론에 따라서 혹은 헌법에 규정된 바 그대로 작동되거나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공간적 경로를 통해 형성된 국가와 그 하부 제도들의 실상 그리고 상황적 맥락을 숙고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오늘날 한국정치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고 올바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셋째,/ 스테이트크래프트는 국정운영에서 직면하게 되는 각종 선택을 기본적으로 딜레마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적합한 공식을 찾아내서 이를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가는 기계 공학적 엔지니어링이 아니다. 현실 특히 정치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양면성, 나아가 다면성을 갖고 있을뿐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상극적인 요소들로 가득차 있으며 변화 무쌍하게 물극반전이 일어나는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스테이트크래프트란 국정운영상의 결정이 갖고 있는 이러한 양면성 혹은 다면성을 충분히 고려하되 무엇보다 선택에 따른 위험을 무릅쓰고 적시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요체로 한다.
넷째,/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시공간상의 환경을 중시한다. 모든 문명과 국가는 상호 교류속에서 발전해왔다. 국제 환경을 외면한 자족적 폐쇄주의로는 살아남기조차 어렵다는 것은 가깝게는 공산권의 몰락과 오늘날 북한이 처한 현실이 웅변하고 있다. 대처 전 영국수상도 “세계를 대상으로 살아야 하는 중위권 국가들의 경우 국제 환견을 살피는 것이 스테이트크래프트의 요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한 대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는 국제정치’라는 명제까지 등장한 바 있거니와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국가와 사회의 중핵으로 부상한 이른바 486세대에서 오히려 폐쇄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러운 일이다. ?
제 3 장 전통 동양국가에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이 기 성
1. 중국의 전통적 스테이트크래프트:<정관정요>를 중심으로
貞觀政要 : ‘貞觀의 治’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당태종 이세민의 통치철학을 오긍이 정리한 책. 漢제국의 멸망(200) 이후 수많은 왕조가 명멸한 가운데 약 400년 만에 등장한 당이 이전 왕조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뇌하고 탐색한 내용.
창업과 수성의 구분, 그리고 제왕학의 요체로서의 大道
정관정요의 관점은 태평성대냐 난세냐 하는 것은 운수소관이 아니라 철저히 군주가 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국운의 번창은 군주의 덕행에 달려있다. 당태종은 홍수와 재앙은 자연의 이치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서 아끼고 기르면 나날이 번창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시들어지고 말라죽게 된다고 하였다. 당시는 ‘큰 혼란의 끝이라 서둘러 잘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는 시대적 통념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당태종은 오히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쉽게 음식에 만족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아 조깅에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성격은 관개사업과 외침에 대한 방어의 기능을 위해 자원과 인력을 추출했는데, 그러나 실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부귀를 누리기 위한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정관정요는 군주의 사적 욕망과 공적 자제심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며, 군주의 통절한 자각을 강조한다. 백성의 이익을 손상한다는 것은 자기의 넓적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당장은 배를 부르게 할지 모르나 결국엔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백성이 감내할 수 있는 한에서 자원을 추출해야지 그 한계를 넘어서면 왕조와 제왕 자신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체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대아의식 혹은 객관성 내지는 공공성을 체득해야 한다.
군주가 공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군주는 항상 치우치지 않고 정도 혹은 대도를 걸어야 한다. 큰 물고기는 항상 깊은 연못에 사는데, 얕은 못으로 나오면 반드시 낚이는 우환이 발생한다. 군주의 최고 덕목은 대도를 걸으면서 솔선수범하여 근검절약하고 은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제왕학의 기본, 용인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혼자 할 수 없기에 군주는 널리 들어야 한다. 문제는 간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유능하고 올바를 신하를 선발하여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판단이다. 오로지 현명함과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창업기에는 재능 하나만을 볼 수도 있겠지만, 평시에는 재능과 덕행을 모두 갖춘 사람만을 기용해야 한다. 우선 종친이나 외척, 공신 그리고 그들의 자제들에 대해서는 예우는 해주되 실절적인 자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재능 있는 사람이 기용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군주는 주요 관리들의 이름을 자기 방의 병풍에 적어놓고 앉아서나 누워서나 항상 보면서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을 이름 아래에 적어 놓아야 한다. 직책을 정해놓고 인재를 기용해야지 인물을 먼저 정해놓고 적당한 자리를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군주와 신하 간의 올바를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 군주가 신하를 대할 때 지켜야 할 준칙들. 첫째, 군주는 신하에 대해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둘째, 信賞必罰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셋째, 정부 부처의 서로 다른 의견을 바로 잡아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군주의 본분이란 학문을 숭상하고 신하들의 간언과 의견을 수용하면서, 덕망 있는 인재를 찾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이들이 제대로 활동하도록 단속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법과 제도의 공정한 운용
당태종은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이를 퇴치하기 위해 직접 잡아 먹기까지 하였다. 태자의 관례를 위한 길일이 농번기와 겹치자 농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를 변경하였으며, 스스로 농사철에는 일체의 오락을 삼가기도 하였다.
형벌의 중요성과 원칙. 첫째, 범죄는 사실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둘째, 인간의 정리, 즉 상식에 부합되어야 한다. 셋째, 상은 무겁게 형벌은 가볍게 해야 한다. 다만 지배층은 무겁게, 생계형 범죄는 가급적 가볍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주인을 고발할 경우에는 이를 수리하지 않고 오히려 고발자를 처형토록 하였다. 심지어 모반죄를 고발한 경우에도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군주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도덕과 규범 그리고 사회풍속을 바로 잡는 일도 중요하다. 도덕풍속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순박한 사회 기풍이 진작되도록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仁義, 忠義, 孝友, 公平, 誠信을 강조하였다. 말할 때 신용이 있으려면 말하기 이전에 신의가 있어야 하며, 명령을 할 때 성의 가 있으려면 명령한 뒤에도 일관되고 성실하게 이를 추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성들의 윤리적 덕목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지도층의 儉約, 謙讓, 자비심, 좋아하는 것 삼가기, 언어에 신중하기, 讒言참언 근절, 탐욕과 비루함 버리기 등이 요구된다.
대외관계
군대는 흉기이고 전쟁은 불행하고 위험한 일이므로 부득이 할 경우에만 허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라가 비록 태평스러울지라도 전쟁을 잊고서 변방 수비에 소홀히 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결국 해이해져서 나라가 망한다고 보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보았다. 혼란을 평정한 뒤에는 평화를 가져 백성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
전통적 제왕학과 성리학
역대 중국 제왕학의 중심이 정관정요였다면, 송대 주자에 의해 성립된 성리학은 국정운영원리와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성리학의 특징. 첫째, 천지의 원리인 理와 氣로 만물을 설명하는 고도의 사변 철학이다. 둘째, 修身齊家治國 중에서도 자기를 다스린 연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修己治人之道를 강조한다. 방법론으로 講學, 定計, 任賢을 핵심과제로 제시하였다. 셋째, 원래 하늘은 이러한 원리를 인간세계에 전해 주어 공자와 맹자에게서 완성을 보았지만, 이후 그것이 전해지는 데에는 단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修己의 통치학은 황제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라 황제를 중심으로 하되 사대부층 전체의 몫이라고 보면서, 국가운영에서 지배층 특히 관료집단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성리학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제왕학을 대체하지 못했지만, 고려후기 한반도에 유입되어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사회생활 전체의 기본원리이자 지침으로 작동하였다.
2. 한반도 국가에서의 전통적 스테이트크래프트
고구려?백제?신라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당시 삼국은 일차적으로는 살아남기 위해서, 패자의 위상 확보라는 현실적인 목표 사이에서 ‘어두운 밤에 허둥지둥 헤치며’ 나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3국 간의 전쟁수행과 동맹외교뿐 아니라 국내의 권력투쟁, 개혁정책에 투영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스테이트크래프트가 구사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고려는 호족 중심의 귀족국가를 기본 성격으로 하면서 무인정권의 등장, 원에 대한 항복과 부마국으로성 전락과 친원세례의 등장 등 내부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고려 말기 수입된 성리학은 한반도 국가의 국가운영원리 혹은 통치학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성리학은 본성상 과도하게 관념적이며 현실적 경제사회관계나 정치역학상의 문제를 다소 경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전통적인 제왕학이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성리학적 성학론이 더해져 양자가 교차되면서 스테이트크래프트로 작동했다. 전반기에는 양자의 영향력이 비등했지만, 후기에는 성리학적 통치원리가 강해졌다. 전통적 제왕학은 왕권을 중시하는 데 비해, 성리학적 성학론은 주로 신권을 중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성리학적 통치원리
이방원은 자신이 일으킨 찬탈을 정당방위의 행동으로 새 왕조가 창업되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은 천명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군주는 형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중요시했다.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갖고 있던 정몽주와 길재는 역성혁명을 거부하는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불사이군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같은 성리학의 입장이지만 정도전은 이성계의 찬탈 행위에 대해 침묵하면서 왕조가 천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이 ‘一代之制를 이루어 장기간 지속되었는가‘의 여부로 판단된다는 결과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후세 세조의 권력 찬탈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도전은 창업자가 개창한 왕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신하와 더불어 국가제도의 수립의 필오하다고 보고 ’재상 중심의 강력한 관료제‘를 주창하였다. 왕은 虛君이요 虛位라는 것이고, 재상은 천관총재의 실위라고 보았다.
왕권 강화에 힘쓴 태종
이방원의 제왕학은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 정치와 왕권은 비정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권력의 집중, 왕권 강화였고, 육조직할제를 실시하였다. 태종은 왕권 강화는 위민철학을 바탕으로 한 각종 시책들 토지제도와 신분제도와 연계되었다.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양민들을 해방시켰다. 노비종부법을 실시하여 사노비를 줄여나갔다.
세종 시기의 융성의 비밀
세종의 치세는 풍부한 인문학과 민본?위민의 실용적 휴머니즘을 두 축으로 하나다. 대표적인 것이 훈민정음 창제다. 세종의 스테이트크래프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스템의 접근과 통합의 리더십이다. 貢法제정에서 답험손실법은 풍흉을 조사하여 적절한 세율을 책정하려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재량권의 남용으로 부작용이 커지자 정액제로 바꾸었고, 공법상소소를 설치하여 17년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至誠事大를 통한 실익 추구
태종과 세종 시대에는 명에 대해 지성사대를 표방하였다. 사대의 구체적인 정책내용은 상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태종은 중원의 정세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이를 크게 경계하는 이중적 자세를 취하였다. 황실과의 사돈관례를 맺자는 요구에 불가근불가원의 입장에서 끝내 회피하였고, 군사시설인 방목장이 있는 제주를 시찰하려는 명에게 제주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도 지성사대를 표방하여 공물이나 환관 요구에는 충족시켜주었지만 추가적인 요구에는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태종과 세종은 여진관계를 중요시하였고, 대일외교에도 우호관계를 유지해 150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수차례의 정변으로 훈구공신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귀족의 토지병합이 확대되고 양민의 노비화가 증가되었다. 이로 인해 연산조에는 국역체제가 거의 붕괴되어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이 중종조의 사림파에 의해 나타났다. 사림파는 정변과 사화로 인해 재야로 몰린 양반 지식인들로 성리학을 탐구하는 경학파가 중심이었다. 공신들의 반정으로 추대된 중종이 정통성 보완을 위해 사림의 힘을 필요로 하여 조광조를 대표로 하는 사림파를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문제는 아직 이론이나 자기 수양 면에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였고, 국정참여 경험이 전무한 성리학적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 데 있었다. 개혁의 칼날은 예리했지만 기본기마저 갖추지 못해 결국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일거에 목숨을 잃었고, 국가운영상의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敎民 중심의 국가운영
선조는 처음으로 방계 서자 출신으로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림세력을 본격적으로 정치에 끌어들여 사림정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사람파가 대지주로서 이미 기득권층화 되어 있어 훈구대신과 외척 등 투쟁할 대상이 없어졌기에, 서로 공격하며 스스로 분열하게 되었다. 일부는 국역체제를 개혁하여 養民, 즉 민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제도개혁보다는 향약의 시행 등 성리학적 예치를 사회 속에 관철시켜야 한다는, 교민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교민을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국가운영방식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율곡 이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집안을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며, 修己, 正家, 爲正을 주장했다. 국정운영은 군왕의 덕치를 기본으로, 兵보다는 富가, 그보다는 信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군주는 스스로 잘난 체하지 말고 현자가 있으면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야 하며, 군신관계는 의혹을 버리고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성룡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임진왜란 당시 제왕은 아니지만 스테이트크래프트의 관점에서 주목할 대상이 유성룡이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경제?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인재를 알아보는 지인지감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에 있다. 이순신을 등용하여 적시적소에 배치한 것, 실책을 저지른 김성일을 재기용하여 영남 의병의 핵심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 등이다. 임진왜란은 유성룡의 실용적 리더십과 탁월한 치국경륜에 힘입어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란 후에는 철저한 교민의 입장에서 향약이 실시되고 주자가례가 정착되며 국가운영은 예학과 사변적 성리학 그리고 당쟁으로 전개되었다.
병자호란과 최명길의 경세론
광해군은 세자로서 전시 리더십을 발휘한 바 있다. 그러나 서자요 차남이라는 정통성의 하자 때문에 역모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군권장악에 실패함으로써 반정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 결과 왕권과 실용적 국가운영 방식은 더욱 위축되고 신권중심의 성리학 지상주의가 풍미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조가 결정적인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면 병자호란은 국가운영 원리로 부상한 성리학적 세계관에 커다란 내상을 주었다. 최명길은 집권 서인의 성리학자였지만 이념과 현실을 구분하여 척화는 청론이지만 중국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사고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에는 청군과의 담판을 제의,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으며, 강화교섭을 전담하여 국왕의 신변안전 보장 등 불리한 항복조건을 최소화하는데 진력하였다.
사림정치와 당쟁
양란을 거친 후 조선은 당쟁 중심의 사림정치가 본격화 되었다. 사림정치의 핵심제도는 언관의 존재였다. 3사의 언관은 의정부의 정승들과 6조의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된 특유의 제도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권신견제가 목적이었지만, 중종 말기 이후 천거제로 사림이 대거 진출하여 전랑직을 차지하고 공론을 주도함에 따라 사림정치가 가능해졌다.
사림에 의한 당쟁은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나타났다. 제도개혁을 중시하는 양민 입장이 동인이고, 사족 중심의 교민을 강조하는 입장이 서인이다. 이후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노론은 인조반정 이후 이념과 현실에서 모두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국가운영에서는 현상유지를 지향, 제도개혁보다 주자가례를 통한 사회의 재통합을 추구했다. 대외정책도 대명의리론, 존주론, 북벌론 같은 비현실적인 명분논리 및 소중화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탕평을 통한 스테이트크래프트의 회복
영정조에 사림의 붕당적 국가운영을 지양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통합의 노력, 탕평정책이 본격 추진되었다. 영조는 각 당파를 기계적으로 고루 배치하여 균형을 기하는 완론탕평을 적극 추진하였다. 영조는 당쟁에 휩쓸려 세자를 사사하기도 했지만 탕평책과 더불어 군권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양반과 상민이 군역세를 부담시키기도 하였다.
세자시절 당쟁의 피해를 본 정조는 탕평책을 발전시켜 기계적인 인사 배치가 아니라 원칙 있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준론탕평 혹은 의리탕평을 추구하였다. 정조의 제왕학인 성왕론은 경학에 토대를 둔 왕권중심의 국가운영 철학이었다.
정조의 군주권 강화 노력
정조는 성왕론을 바탕으로 경장, 즉 개혁을 추진하였다. 민생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얼허통 정책을 실시하고 노비추쇄관을 폐지하여 신분상의 제약을 크게 완화하였다.
정조는 개방적 경제관을 가지고 신흥 상업과 상인계층에 주목하였다. 시장가격과 화폐의 자율성을 존중하였고, 독점의 폐해를 풀고 상업을 진작시키기 위해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정조는 군제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군의 명령체계를 일원화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병서를 출간하여 방위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정조는 전체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경장은 미완에 그쳤다. 신하를 신임하고 많은 것을 위임하려고 했지만 그를 이해한 신하는 거의 없었다. 결국 신하에 대한 위임과 책임의식 부여에 실패하였고,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총찰의 폐단을 자초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정조의 치세는 ‘통하는 데는 비교적 성공하였으나 통은 못하였다’고 하겠다. 이후 조선은 강력한 군왕이 아니라 외척이 독주하는 세도정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실패로 끝난 대원군의 개혁
19세기 중후반 조선은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며 문명을 수용하여 근대화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대원군은 둘째 아들을 국왕으로 즉위시킨 후 왕권강화와 왕조의 중흥을 목표로 설정하고, 안으로는 개혁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밖으로는 쇄국양이 정책으로 외적에 대처하였다.
대원군은 인사개혁부터 하였다. 소론, 남인, 북인까지 골고루 능력 위주로 등용하면서,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여 노론 일당 체제를 척결하였다. 왕권강화의 상징적 조치로 임진왜란 중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공역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유림을 견제하기 위해 서원과 향사를 철폐하였다.
대원군의 실패요인 첫째, 근대화의 세계사적 흐름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시대적 과제와 국정목표를 설정하는 데 차질을 빚었다. 둘째, 그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하여 법적, 제도적 근거가 취약했다는 점이다.
근대화를 놓치니 국권을 잃다
대원군 실각 이후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척신정치 혹은 세도정치의 모습으로 후퇴하였고, 일본의 무력시위 앞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확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를 갖지 못한 채 국정자체가 표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제4장 서양국가에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정화종목사
1. 서양 전근대국가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그리스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서양의 경우 초창기 정치공동체 단계의 통치술은 비범한 무사적 영웅, 즉 군사적 지도자들의 활약과 운명의 역할을 중시한 측면이 드러난다. 그러다가 점차 본격적인 정치체제, 즉 고대국가가 등장하는데, 그래도 기본은 어디까지나 군사력에 두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탈리오 법칙(lex talionis)'과 더불어 종교가 국가운영의 주요 원리로 나타난다.
아테네 민주정의 통치술, 즉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원활하게 작동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물론 페리클레스의 황금시기와 같이 민주정이 만개하고 동시에 국력이 절정에 이른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겉모습은 민주정치였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지배한 나라”였다고 기록한 것을 유추해 볼 때, 그의 시대가 과연 민주정의 일반적 특성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적지 않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아테네를 포함하여 민주정을 실시하던 모든 도시국가들이 몰락하여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래, 민주정은 가장 나쁜 정치체제로 간주되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그 국정운영상의 노하우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부분이 일실되고 망각되어왔으며, 근대 민주정치가 대두된 이후에야 새롭게 재발견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로마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그리스 문명은 독창성을 갖고 있으나, 로마 문명은 실용성은 두드러질지언정 그리스 문명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현실 특히 국가와 그 운영 면에서 볼 때 오히려 로마야말로 독창성을 가졌으며, 인류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 로마는 1천 년 이상 지속되면서 공화정을 포함한 다양한 정치체제를 경험하였고, 특히 사상 최초로 보편제국을 지향하였으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말처럼 일정 부분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해 낸 정치체제였다.
로마 정치체제는 아테네 민주정과는 달리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이 공존하는 혼합정치(mixed polity) 속에 과두적(寡頭的) 엘리트 지배가 관철되는 공화정(res publica)으로 알려져 있다. 숱한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켈트족(Celt)족의 침입과 한니발(Hannibal)의 침공 같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도시가 정복?파괴되는 등 괴멸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패배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되 특히 내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을 찾아 스스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오히려 전화위복의 전기로 삼을 수 있었다.
2. 서양 근대국가에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마키아벨리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근대국가의 원리와 통치술을 가장 먼저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면에서 고민한 사람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다. 그의 관심은 철저히 실천적인 것이었다. 유명한 ?군주론?에서 국가를 분류하는데 있어서도 통치체제의 유형을 철학적?이론적으로 복잡하게 분류하지는 않았다. 성공적인 군주란 늘 시대에 맞추어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상황이 요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무조건적 묵종이나 편승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적 제약 속에서도 가능한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중의 비르투(virtu-남자다움의 근원적 속성), 그 한계
?로마사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분석의 대상을 공화국으로 확대하였다. 여기에서는 외국의 힘으로 탄생한 공화정을 어떻게 하면 유지?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실천적 관심이 정면으로 등장한다. 그 자신이 외국의 힘을 빌려 공화정으로 체제전환을 하려다가 발각된 음모에 연루되었던 경험이 현실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먼저 그는 인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공화국을 높이 평가하였다. 어떤 도시국가가 전제군주의 내적 지배든 제국주의 세력의 외적 지배든 정치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스스로를 다스리게 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엄청나게 성장하고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화국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조건
이러한 비르투의 쇠퇴를 방지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지도력이다. 둘째는 보다 근본적인 국가 제도(ordini)로써, 시민들이 비르투를 획득하고 자유를 유지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조직되는 것이다. 셋째는 정치가 타락하고 세력 간의 균형이 파괴되는 위험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심이다. 이와 같이 마키아벨리는 근대국가의 태동기에 당시 국가의 특성과 운영원리, 그리고 통치술에 대해 심도 있는 통찰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종교개혁과 개인주의 철학의 대두와 함께 근대국가의 논리와 운영원리 역시 상당 부분 개인의 권리와 자유 보호라는 방향으로 각도를 달리하여 전개하였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공 요인
오늘날의 국가통치술, 즉 스테이트크래프트의 요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분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근대 이후 여러 나라들이 연이어서 부침(浮沈)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이어간 유럽 국가들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형성?발전해온 국가체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근대국가, 특히 국민국가(nation-state)의 표준적 유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폴 케네디(Paul M. Kennedy)의 ?강대국의 흥망?에서와 같이 군사비가 경제적 재투자를 상회하게 되면 쇠퇴하게 된다는 명제가 제기되어 세인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
계몽적 지도자와 솔선수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Ⅰ)은 <뉴욕타임지>에 의해 지난 1천 년간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선정된 인물이다. 그녀는 당대의 뛰어난 인텔리 여성으로서, 당시의 풍습대로 왕실간의 결혼으로 국가의 소유권이 뒤 바퀴는 현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유수한 유럽 귀족들의 청혼을 거절한 채 오로지 영국을 애인으로 여기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국가발전에 매진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는 강력한 왕권 수립과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통해 경제를 충실히 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Wilhelm Ⅰ)는 솔선수범의 근면한 군주로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진 경우다. 철혈정책과 외교술로 유명한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Bismarck)는 보수 정치인의 한계를 넘어서 최초로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한 정치가였다는 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대에 와서 미국 레이건(Ronald W. Reagan) 대통령도 확고한 국정 철학과 철저한 권한의 위임 그리고 위대한 소통자로서 성공한 정치가가 되었다.
개방과 관용 및 제도화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영국은 헨리 8세(Henry Ⅷ)이래 극심한 종교적 갈등으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중용적 치세로 갈등을 완화시키고 국교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프랑스 역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앙리 4세(Henri Ⅳ)의 ‘낭트 칙령’을 계기로 국가 발전의 계기를 잡은 이래 루이 14세 시대에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실패한 국가들의 스테이트크래프트
근대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나라들이 좌절을 맛보았고 한때 성공적이었던 국가들도 쇠락의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실패의 요인들을 일별해 보면, 국토가 작고 인구도 적은 포르투갈의 경우, 과도한 해외 의존도에 치우친 네덜란드의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도자의 자질로서, 특히 대외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다.
제5장 현대 국가들의 스테이트크래프트
1. 후발 국가들의 트스테이트크래프
근대국가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산업혁명과 민주혁명, 즉 근대 국민국가로 변모하는 문제였다. 여기에서는 왜 산업혁명의 발원지가 영국이었는지, 그리고 민주화에서는 어찌해서 영국의 점진적 모델과 프랑스의 혁명적 모델이 나타났는지 등에 관한 문제가 있다. 독일은 후발 국가로서 특히 19세기 초의 비엔나 체제 이후 자국의 통일과 강대국화가 견제를 받는 분위기 속에서 권위주의적?군국주의적 노선을 택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에 성공한 경우다. 미국은 유럽의 전통적인 정치적 유산으로부터 사회와 국가를 창건하였다. 청교도 정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무엇보다 계몽주의적 근대정신을 갖춘 건국의 아버지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일본은 비서구 사회가 19세기 말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다.
2.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트스테이트크래프
근대 국민국가의 내적 구성 원리와 국가 운영의 핵심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그리스에서 출발하였을 때부터 인민대중의 지배라는 특수한 형태의 정치체제(polity)라는 성격과 더불어 그것이 지향하는 바 인간의 ‘자기 지배’의 이상(ideal)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복권된 민주주의가 자신의 모체 혹은 통로가 되었던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이를 보완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고유한 이상을 구현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20세기 후반기를 놓고 볼 때 국가의 내적 구성 원리 및 국가운영 차원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는 3자 대결 구도가 펼쳐지다가 세기 말에 와서 공산주의가 붕괴되었고 또한 상당수의 권위주의 국가들도 제3의 민주화의 물결을 따라서 민주체제로 전환하였다.
민주화 과제의 해결과 그 후의 문제들
그동안 스테이트크래프트와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가장 관심을 집중시킨 주요 현안은 주로 권위주의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로 전환하는, 즉 민주화의 과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위주의 체제의 경우, 스스로를 민주화를 위한 기반을 닦는 단계라고 합리화하였지만 사실상 국가운영을 질서 있는 민주화로 이끈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은 봉기와 혁명과 같은 ‘밑으로부터의 민주화’를 통해서 체제전환의 발동이 걸리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국가운영 문제 또한 오늘날 세인의 관심을 끄는 주요 현안이다.
제6장 소결론
대한민국의 미래, 스테이트크래프트에 달려 있다
모든 정치 체제는 강제력을 동반하는 공동체인 만큼 여타의 집단이나 단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운영 원리와 특성에 입각하여 작동된다. 무엇보다도 공공성을 핵심적 가치로 요구하며, 그 운영은 실천적 지혜(prudence)에 입각한 독특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필요로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국가는 나름대로 이에 관한 경험을 축적해 왔다. 우리 역시 중국에서 축적된 지혜와 우리 민족 나름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전통적 국가에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발휘해왔다.
우리가 지난 60여 년간 피땀 흘려 경주해온 노력 역시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뚜렷한 한계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여전히 남북분단과 남북한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행착오와 실패도 적지 않았다. 이제 시선을 국가로 돌려할 시점이다. 경제?사회?문화?계급 혹은 계층 나아가 민족 모두 중요하지만, 총체적인 틀로서의 국가 즉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운영원리를 깊이 탐구하고 그 실천적 노하우와 지혜, 즉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제 2부 대한민국 대통령의 스테이트 크래프트
발제: 박태영
제 1장 일제시대가 남긴 유산
일본제국의 특징
일본의 군사대국화 및 대외 팽창의 양상은 구미 열강과는 차별성을 보였다. 서양국가의 경우 식민화의 대상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종, 문화적으로도 종주국과 이질적이었으며, 국가의 발달 단계도 대체적으로 부족국가 상태에 있었다. 또한 현지에 자국민을 이식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현지에서 출생한 자국 혈통 및 혼혈인으로 이루어진 ‘식민지인 문제’를 현안으로 갖고 있었다. 반면에 일제의 식민화 대상이 된 한국은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통신사가 오고가던 인접한 국가였다. 특히 한국은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정비된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문명국이었으며, 한국인은 스스로 일본인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양 식민지의 경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 원주민을 철저하게 대립되는 피지배 백성으로 대했던 데 반해서, 일본의 경우에는 한국인대해서 동화와 차별이라는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정적 국가관의 뿌리
조선총독부는 본국 정부의 간섭마저도 거의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로 군림하였다. 총독은 일본 통치 집단 내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르는 군벌의 몫으로서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선정되었고, 그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을 장악 하였을 뿐 아니라 독립적인 군사지휘권을 갖고 헌병사령관과 주둔사령관을 장악하는 존재였다. 식민지 한국에서는 일본제국의 벌률체계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일본의 법령에서 현지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적용하였고 일본에 없는 것은 제령이라고 해서 별도로 제정하였다. 일종의 포고령 혹은 계엄령 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러한 강제력을 바탕으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중앙관료에 의한 상명하복이 군 단위 아래 일선 촌락까지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체제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 합방직후 한국 관료의 숫자는 1만 명이었던 데 비해 1937년에는 8만 7,000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참고로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때 공무원의 수가 3,000명에 불과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경찰도 합방직후에는 6,000명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6만 명으로 10배나 증가하였다. 이는 숫자상의 증가뿐만 아니었다. 일제는 치안 뿐만 아니라 국정개입의 범위가 극도로 확대된 다기능 경찰 제도를 운영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 사이에서는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고도로 강력한 국가와 이에 굴종 혹은 저항하는 국민이라는 대립적 관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체제와 형태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외세의 지배뿐 아니라. 부정적인 국가, 특히 근대국가 자체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였다. 즉 조선조의 관존민비정치 문화를 지속시키면서 여기에 더하여 권위주의, 군사통치, 포고령 정치, 그리고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토양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식민경제, 물적 토대의 형성문제
혹자들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를 주장하며, 1930년대 이후 약 15년간 집중적으로 추진된 중공업화가 한국의 산업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1930년대의 한국의 공업화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함이 아니었으며, 또한 일본의 자본가들이 한국이 세금은 싸고 규제는 적었기 때문에 이런 이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한 것이었으며, 한국의 자원을 수탈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1931년도 만주 사변이후로 만주는 군국주의의 계획경제의 대표적인 모델이었다. 총독부는 ‘기회의 땅’으로 만주의 붐을 일으켜 이민을 장려하였고 만주국의 하급관리에 상당부분 한인들을 충원하였다. 또한 식민통치 말에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인력자원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군국주의적 동원체제의 첨병으로써 한국인들이 하위관리직에 대거 등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관리로 등원된 사람들은 부일 협력한 자로 낙인이 찍혀 민족사회로부터 상당부분 배척되었고, 결국 자유민주주의적 엘리트로 발전하는 데 도덕적 한계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이념의 등장과 민족사회의 분열
3.1운동 이후 당시까지만 해도 이념적 분열이 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온건파와 민족주의 좌파 사이에 분열이 생기게 된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타협파들은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하되 현실적인 한계를 감안하여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지향할 것을 표방하였다.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이광수의 사설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의 법에 순응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키워나가자는 개량주의 입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춘원을 비롯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인사들 중에 상당수는 후일에 친일파로 돌아섰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좌파의 사람들은 타협파들의 입장을 반대하면서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좌우합작에 의한 정치단체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사정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형성, 신간회를 창건하였다.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거의 유일한 국내 좌우합작의 합법적인 정치단체라는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신간회는 해체되고 만다. 혁명을 기본노선으로 하는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은 정치적 유토피아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인 반면교사 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등장과 활동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1920년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거의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민족의 독립이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한 서방이 우리에게 아무런 현실적 도움도 주지 못했던 데 반해 소련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혁명가들이 효과적으로 항일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크다.
둘째, 해외중심과 분파성의 문제이다. 식민통치의 혹독함 때문이지만 공산주의의 주요 활동의 거점은 해외에 있었다. 국내에서는 몇 차례의 공산당 조직사업이 있었지만 바로 발각 되어 분쇄되었기 때문에 어려웠다. 문제는 해외에서 조직된 공산당들이 소련의 이르쿠츠크와 연해주, 중국의 상해, 만주지역, 연안 등 여러 곳에서 활동을 펼쳤는데 그들은 현지 국가와 공산당의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상호 분파투쟁이 극심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국내에 그대로 전이되어 어렵게 만들어 놓은 조직마저도 그러한 분파적 갈등에 빠져 스스로 붕괴하게 만들었다.
셋째, 일부 비타협적 노선을 걸은 사회주의자들이 항일투쟁의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해방후 남북한 공산주의의 주력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제 말 철저하게 비전향을 고수한 박헌영 분파가 정통성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이후 남로당의 중심으로 되었으며, 국외에서는 연안의 중국공산당 지역에 자리 잡은 ‘조선독립연맹’과 만주지역의 ‘항일연군’ 특히 그중에서도 김일성 분파 가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문제는 그들의 항일투쟁의 실적이라는 나름의 명분은 가지고 있었지만 근재대적인 국가운영의 안목과 통치력, 즉 치국의 경륜을 갖추지 못한 소수의 이념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제 2장 해방공간이 치국경륜에 남긴 영향
해방 3년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을 잉태, 회임, 출산한 산고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조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점과 더불어 일제하에서 더욱 왜곡 심화된 온갖 모순과 문제들이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과 냉전개막이라는 환경 속에서 한꺼번에 분출한 대 혼돈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의 경우 해방과 독립 특히 근대국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대이쇼 데모크라시’의 분위기 속에서 이론의 형태로 습득되고 전파된 것이었고,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실제 이해나 국가운영에 대한 실천적 지식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해외 독립운동가들 역시 대부분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였던 만큼 근대국가와 그 운영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과 경험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중들과 유리된 가운데 자신들만의 정쟁의 늪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과 선택
해방공간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 혹은 국가가 출범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남과 북에서 출범한 체제가 정부가 국가인가 하는 문제이다. 정부가 출범했다고 보는 시각은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정치체로서의 국가를 형성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처럼 2차 대전이후에야 부족의 단계를 넘어서 처음으로 정치체를 건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국가가 출발했다고 보는 입장은 정치체로서의 국가, 즉 왕국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근대 국민국가 즉 민주공화국은 한반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졌다는 이론적 시각을 토대로 한다. 과거의 수천년 동안 한반도의 국가들은 소수의 통치 집단이 주권자로 군림했던 신분제 왕조국가였던 데 반해,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신민 혹은 백성이 아니라 주권자인 민주공화국,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한 유형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건국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과 국가 중 어느 쪽을 중요시 하느냐하는 것도 중요하다. 민족을 우선시 하는 입장은 20세기 현대사의 과제를 ‘자주적 민족 통일 국가의 수립’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민족통일이 확보된 국가가 일차적이며 그것이 근대국가인가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또한 남북의 국가가 설립 된 이후의 중요 논의 중 하나는 분단국가의 원인이 ‘내쟁 형’ 인가 즉 민족 내부적인 것인가? ‘국제형’ 인가 즉 민족 외부에서 강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남북 정부수립에서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그 체제 선택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외세 및 이에 의존한 일부 집단의 의사가 강요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체로 보아 당시에는 지식인과 기층대중에서는 사회주의가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군정청 여론조사에 의하면 경제체제의 경우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비율이 70%인 데 비해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비율은 각각 13% 와 10%에 그쳤다. 당시 지식인들의 경우에는 평등이념과 휴머니즘의 이상에 열광하였으며, 사회주의 혁명까지도 수용하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당시 외국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건준과 그 산하 조직들이 불과 수개월 내에 한반도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대중적인 염원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확보하고 있는가, 그리고 경제사회적 발전에 따라 제도가 변모, 발전 할 수 있는 길을 확보 혹은 보장하고 있는가가 창업기 치국경륜에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건국과 분단, 미소의 역할과 책임
38선 확정에 있어서 미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관동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련군의 참전을 요구하는 한편, 소련에게는 참전에 따르게 마련인 보상(세력권)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이에 수반되는 복잡한 과정으로서 외교보다는 땅에 선을 긋는 조잡한 방식으로의 분할을 선택한 것이다. 다음은 군정에서의 미국의 책임 문제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총독통치의 연장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의 일장기를 내린 자리에 대한민국 국기가 아닌 성조기를 꽂았던 것이다.) 그리고 군정당국은 점차 한인화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택하였고, ‘통역정치’를 하여 폐단을 남겼다. 반면에 소련군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를 설립하였지만 거의 처음부터 인민정부를 앞세우는 간접통치 형식을 취하였다. 소군정은 처음에는 완비된 건준의 지방조직을 활용하려 하였으나 우익이 우세한 분포를 보이는 것을 알고서는 이를 환골탈퇴시킨 이후에 인민위원회를 새로 구성하였다.
분단국가를 건립한 것을 놓고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 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최종적으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단정의 책임을 유엔에 미루었지만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의 파탄 끝에 이러한 변환을 모색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일각에서는 한국내의 좌우대립과 냉정이 국제적인 냉전을 추동하였다고 하지만 그 반대로 국제세력이 국내의 분열을 이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국내 세력들 역시 책임이 적지 않지만 근대 국민국가의 상이라는 상호타협이 불가능한 적대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속에서, 특히 공산주의 전성기라는 시점에서는 어차피 중간파의 입지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분단은 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단독정부 수립의 책임을 비교하자면 형식적으로는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소련이 우선 한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과 박헌영
해방이후에 국내의 어느 집단이 국가수립을 위한 정통성과 국가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가? 당시 대표적인 토착세력으로는 건국준비위원회와 한민당이 있었고, 해외세력으로는 망명에서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 외 미국에서 귀환한 이승만과 그가 중심이 된 대한 독립촉성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여기서 건준이야 말로 해방이후 순수한 국내의 자생적 정치력의 발현으로 불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건준이 국가경영을 맡지 못한 것일까?
윤여준은 몽양 여운형이 엔토 총감이 소련군 주둔을 시사하자 서둘러 행정권 장악에 나섰던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운형은 세력결집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고하 송진우가 좌우 결집을 거절 한 점과, 민세 안재홍이 이탈함으로써 건준의 정치적 기반이 현저하게 약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진주하기 전날 갑작스럽게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실책을 범했다고 말한다.(박헌영이 자신이 위치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 한편 박헌영의 지휘아래 있던 공산당이 국가운영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것은 미군정이 일찍부터 극좌파를 배제, 탄압하는 등 분단지향적인 정책을 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런 주장이 틀린 견해는 아니지만, 문제는 공산당 자체 안에 있었다. 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야기한 점과 박헌영은 위기극복 차원에서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는 전술을 전개하는 한편 좌파 정당의 합당으로 세를 확대하여 미군정에 대한 투쟁노선을 본격 추진하였으며, 9월부터 비합법적인 폭동전술 노선으로 변화한 이후 총파업이 시작되었으며, 10.1대구 폭동이 일어남으로써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다. 한편 47년 7월 19일 몽양의 암살, 12월 6일에는 죄우합작위원회의 공식해체로 건준의 힘은 사실상 상실된 것이다.
남북한의 제헌헌법
남북한 헌법의 원리와 제도의 근본적인 차이는 북한의 인민주권의 원리와 한국의 국민주권의 원리의 대립이다. 북한의 경우 주권은 인민에 있는 만큼 전인민의 단일한 일반의지가 중요시되었고 따라서 국가에 의한 인민의 통제가 중시되면서 권력의 분립이 아니라 일체성, 융합성이 강조되었고, 반면에 한국의 경우 주권이 국민이라는 공적 시민에 부여되었던 만큼 개인의 국가로부터의 자유 확보, 나아가 개인이나 사회의 국가에 대한 통제가 중요시 되었다. 북한에서는 전인적인 대표성이 보장되었지만 실제로는 노동당의 압도적 우위가 관철되었던 반면에 한국에서는 국민이 단일하고 무차별적 정치적 단위로서 설정된 가운데 지역적 대표성과 정당의 대표성이 반영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전체의 동의를 요구하였으나 정해진 견해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반면, 한국에서는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면서 반대할 수 있는 토론의 자유는 보장되었던 것이다. ?
제3장 제1공화국과 이승만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발제자: 김 춘 한
일체감 조성과 국가체제 확립
해방된 지 만 3년이 된 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분단국가로서나마 민족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신생정부를 어렵게 한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쪽의 경쟁자를 강하게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일제 36년에 걸쳐 훼손된 민족정기를 바로 잡음으로써 민족적 .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긴박한 과제였다.
좌익 축출과 북진통일론
한국으로서는 1949년 겨울에 걸친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빨치산들을 거의 완전하게 제압할 수 있었고 특히 이를 계기로 4,800명을 속아내는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함으로써 당시만 해도 좌우익이 혼재해 있던 핵심 국가 기구에서 대부분의 좌익들을 축출해 낼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 체제를 완비해가면서도 강렬한 민족적 염원인 통일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북진 통일론을 제창하였는데 대내적으로는 통일이 반대세력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과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예정된 주한미군 철수방침에 경각심을 제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북진 통일론은 당시 남북한의 객관적 군비태세를 무시한 허황되고 공허한 발상으로서 6.25이후 북한의 ‘북침’주장 선전에 이용되기만 하였다는 점에서 볼때, 이대통령의 선동가적 측면이 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좌절된 친일 청산과 농지개혁
이 대통령은 막 출범한 취약하기 짝이 없는 국가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나머지 반공을 최고의 당면 과제로 설정하였던 반면 식민잔재 청산은 부차적인 과제로 치부하였다. 향후 전개될 수 있는 국민통합의 위기를 내다보았더라면 비록 소수에 대해서일망정 확실한 단죄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특위 활동시한을 무리하게 단축하지 말고 재판결과를 기다렸다가 적어도 악질 친일 부역자 몇 명이라도 판결대로 극형에 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로 김구도 거두 친일파 263명만을 청산대상으로 거론한바 있으며, 또 반민특위도 실제로 221명을 기소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한 방식이 당시의 국민적 정서에도 부합되는 최대 공약수로 볼 수 있다.
당시 국민통합을 위하여 가장 절박했던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 농지개혁이었다. 1949년 당시 한국의 노동력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농지개혁 자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으며, 제헌 헌법에서도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86조) 규정하고 있었다. 농지개혁은 일차적으로 농민 포섭이라는 이대통령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해 줄 수 있었으며, 주권자인 국민들로서는 아쉬우나마 물질적 토대와 계층적 기반을 갖추어 국민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신생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전쟁초기엔 ‘등신’, 후반에는 ‘귀신’
전쟁 초기 대응 면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 최고 지도자로 보기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국군이 북한 공산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그대로 서울에 있기 바란다” 는 이대통령의 대국민 라디오 녹음방송과 한강 인도교 폭파는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 하였고, 이후 도강파와 비도강파와의 갈등은 국민간의 소모적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한국군 지휘권의 미군 이전 문제 역시 지금까지도 크나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긴다는 ‘대전협정’은 비록 전쟁수행의 효율성을 위한 조취였다고 하지만 주권국가의 기본적 권리 포기의 문제요, 편의주의적인 발상에 의한 단견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정전회담과 관련해서는 이 대통령의 외교 전문가로서의 스테이트크레프트가 진면목을 발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휴전이 되면 ‘대전협정’에 의거한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이 소멸된다는 점을 카드로 활용, 한국군 단독북진의 가능성을 틈나는 대로 시사하는 한편 급기야는 2만 7,000여 명의 ‘반공포로석방’ 등 충격적인 조치를 취하는 등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최대의 대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대통령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정전협정의 대가로 확고한 한미동맹과 대한원조를 확보함으로써 국가안보체계를 구축하였고 향후 발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안보체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그는 뛰어난 스테이트크레프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를 통해 유엔군과 별개로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둘째, 경제 및 군사 문제에 관한 한미합의의사록이다 이는 한마디로 한국의 돌출행동을 억제 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갖는 대신에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경제, 군사원조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철저한 지미(智美), 용미(用美)주의자였다.
실추된 리더십
전시상황에서 한 가지 간과 할 수 없는 것이 부산정치파동이다. 당시 이대통령은 전쟁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범실과 실정으로 지도력이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특히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되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재선이 무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권연장을 위해 친위 쿠테타로 개헌을 압박하는 헌정 파괴적인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승리를 바탕으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정치적 위상과 기반을 강화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치적 권위주의 즉 독재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독재와 파국
먼저 3선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희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로써 자유당 일각이 붕괴되는가 하면, 보수와 혁신이 갈린 가운데서도 반이승만 세력이 결집하여 강력한 보수 야당인 민주당이 등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개헌과정에서 벌어진 사사오입이라는 희화적 작태로 인해 이대통령이 국부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으며 민심이 이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연로한 대통령의 주위에는 자유당 강경파가 득세하고, 경무대 비서가 대통령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나마 여권내에서도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관련자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겠지만 집권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인사에 실패한 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을 귀착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자유당 강경파들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시읍면장을 중앙정부 이명 방식으로 전환한데 이어 자유당의원의 의견에 따라 해당지역 경찰서장을 임명하였고 이른바 청년단체들을 ‘대한반공청년단’으로 통합한 후 노골적으로 폭력조직을 동원 사상 유례가 없는 3.15부정 선거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에 정권은 한마디로 최고 권력자의 통제마저 벗어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파국을 향해 질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창업의 지도자 vs 독재의 기원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냉전이 개시되는 세계사적 격동기 속에서 19세기 말 실패한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분단된 상태에서나마 이룩해낸 국가 창업의 지도자였다. 당시 열악한 현실에서 농지개혁과 교육혁명을 주도함으로써 후일 민주화와 산업화로 나갈 수 있는 기본 인푸라를 깔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전쟁을 마무리 하면서 한미동맹과 미국의 원조를 확보함으로써 국가 수호와 발전의 기본 틀을 다진 공적도 상찬될 수 있다. 반면에 체질속에 남아 있는 양반 신분과 엘리트 의식, 그리고 미국적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실용주의와 기능주의에 사로잡힌 몰역사적 의식은 창업기를 지나 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미동맹 체결과 선거승리에 도취하여 국부의식에 빠진데다 고령까지 맞물려 한국정치의 가장 큰 폐해인 장기집권 문제, 뒤집으면 평화적 정권교체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 였는 지 후일의 역사가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대통령이야말로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제4장 4.19와 5.16혹은 근대화 경로 선택의 스테이트크레프트
1. 서론
1950년대 중반이야 말로 선택된 자유민주주의 모델 하에서 구체적인 국가적 비젼과 목표를 제시하면서 국민들을 통합시켜 나가야 할 시기였다. 민주주의 기반을 구축하고 국가와 사회발전을 기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정치 리더십이었다. 강경파가 득세한 자유당은 스테이트크레프트를 결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연로한 이승만 대통령의 승계문제를 놓고 오로지 정권연장에만 혈안이 되어 이러한 역사적 과제를 수행해낼 정치적 의지도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4.19에 의해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2. 스테이트크레프트관점에서 본 이승만 정부의 몰락 과정과 과도정부
4.19와 미국의 역할
4.19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국민의 뜻을 저버린 독재정권은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아 결국은 무너진다는 것,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보루요 수호자로서의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존재라는 현대 한국의 국가운영에 있어서의 새로운 신화를 창출하였다.
미국은 자유당 정부와 절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점차로 거리를 두다가 3.15부정선거 이후 데모가 확산되자 자칫 한국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승만에게 압박을 가하고 지지를 철회하는 방법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즉 미국은 한국 군부에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한편, 이 대통령에게는 점차 압박을 가중시키다가 4월25일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중지 및 대한 원조중단을 선언한다. 이어 4월26일에는 매카나기 대사가 이대통령을 면담, 현재 ‘미국의 이익’까지 위험에 처할 정도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 할 것을 직접 권유하는 등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이승만 하야에 쐐기를 박았다.
민주당 정부수립
과도기간 중 역할을 한 민주당, 특히 당지도부가 보여준 스테이트크레프트 역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들은 당시 혁명적 상황에 대한 명확한 현실 인식은 물론 자신이 담당할 새로운 통치질서와 국가운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젼도 제시하지 못한체 해방이후 한민당 시절부터 오매불망 주장해 오던 내각책임제로서의 개헌이라는 제도개혁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당시 헌법상 개헌에는 국민투표가 필요 없었던 만큼 별도의 국민 의견 수렴 과정과 이로 인한 갈등 없이 권력 엘리트간의 권력분점을 보장하는 내각제 개헌안의 합의를 통해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3. 민주당 정부의 스테이트크레프트
취약한 민주주의
민주당 정부는 불과 9개월 남짓 존립하다가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제2공화국 정부는 이승만의 가부장적 정권에 이은 두 번째 정권으로서 보수우익의 바탕위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이념을 정착시키려고 시도한 정권이었다. 문제는 이승만을 타도한 학생들로부터 권력을 선사 받았지만,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명분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어떻게 한국사회에 정착시키고, 이를 위해 필요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나가야 하 것인가에 대해서는 스테이트 크레프트를 발휘하지 못한체 오로지 파벌간의 권력쟁탈전으로 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파벌 싸움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한국정치의 특징인 정파간 극한 대립과 갈등의 한 원형을 이루며, 특히 그것이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치 리더십 결여
2공화국의 가장 첨예한 문제는 보수와 혁신 간의 이념적 대립이라기보다는 민간사회의 도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국가적 취약성과 더불어 정치 지도력의 무능 그리고 집권세력의 파벌 투쟁 등 스테이트크레프트의 결여에 있었다.
씨앗만 뿌린 경제 . 외교 정책
자유당 시절 부흥부에서 추진했던 3개년 계획은 균형성장 이론에 토대를 둔것이었던 데 반해 제2공화국 5개년 계획은 전력부문에 중점 투자하는 등 노동력은 풍부하고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실정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한 것으로서 군사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이것을 그대로 표절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한일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특히 배상금을 상당한 수준에서 실질적으로 확보해 놓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 내용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원조 혹은 자원의 조달 자체가 산업화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업체나 기타 일반적인 조직 운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 운영에서도 돈의 액수보다 중요한 것을 일을 추진하는 정부의 능력인 것이다.
민주당 정권의 몰락
민주당 정권은 정당성은 있었지만 스테이트크레프트가 부족한 정권이었으며, 내적 분열과 외적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특히 현안에 적의 대응해야 하는 시간 관리, 그리고 문제의 경중과 우선순위에 대한 수순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군사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4. 정권붕괴 과정에 드러난 민주당 정부의 스테이트크레프트
대통령도 총리도 포기한 정부
합헌적 정부를 전복한 군사 쿠데타의 세력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추궁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장면 총리다. 쿠데타 발발 이후 사흘간 수녀원에 피신한 것도 문제지만 은신 중에도 미 대사관에 두차례나 전화를 걸어 유엔군 사령관이 “상황을 맡아서 권한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군 통수권자로서 무책임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윤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진압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한 밖’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또 적법 절차를 함께 찾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미군의 작전 통제권
미국이 ‘불개입’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반란을 인정한 것을 사실이지만 그 배경에는 무엇보다 한국정치 지도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 한국정체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명분과 매개체가 필요한데 당시 미국은 이것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미군의 역할과 책임문제는 이후 역사에서도 되풀이 되는 쟁점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 지도자의 확고한 국가관과 스테이트크레프트, 그리고 민심의 향배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미 방위조약에 의해 주둔해 있는 미군과 그 작전통제권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것이지, 국내 정치용은 아니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5. 5.16의 성격과 새로운 스테이트크레프트
5.16 쿠데타의 성격
5.16쿠데타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5.16은 상당히 모순되는 성격을 가진 복합적인 산물이었다. 한편에서는 전전 일본극우파들의 쿠데타를 연상시키는 측면을 갖고 있는가 하면, 경제발전을 앞세우는 제3세계 쿠데타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도자의 과거 좌익 경력과 더불어 일부 반미적 성격을 띤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4.19와 5.16 근대화의 이중 혁명
5.16은 4.19와 역사적인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일한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또 근본적으로 같은 정치구조 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정치적 응답으로서, 다른 두 세력 곧 학생과 군인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근대화의 교착상태에 대한 국내의 두 선진 집단의 순차적 반발과 대응으로서, 4.19는 민주화를 앞세운 이상주의적 근대화 세력인 대학생 세력의 등장, 5.16은 반공 그리고 경제건설이라는 산업화를 중요시하는 군부의 등장이었다는 것이다. ?
제5장 박정희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와 공과(功過) 강채은 목사
1. 서론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운영과 그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 그것은 기본적으로 강권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직?간접적 희생자를 수반했으며 그 당사자들이 상당 수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의 통치기는 한국에서의 산업화 나아가 근대화 혁명 특히 근대국가의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이 일어난 시기로서 싫든 좋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 국가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박대통령 통치의 결과는 오늘날 국가 운영상의 여러 문제점들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현재의 정치적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통치는 민주화 이전 단계에서 18년이라는 장기 집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민주화 되고 산업화된 사회의 정치제도와 환경, 경제, 사회적 여건 그리고 탈냉전의 국제 정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여건에서 스테이트크래프트가 발휘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박정희는 정치가라기보다는 군인이요 혁명가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반정치적 반민주적 리더십과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오늘날에는 규범적으로 옳지 못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조차 어렵다. 다만 그의 우국충정의 진정성과 남다른 청렴성, 헌신적 열정, 그리고 영민함과 과단성과 같은 통치자로서의 덕목과 능력은 높이 평가 될 수 있으며 후학들이 연구할 대상인 것이다.
박대통령의 국가운영 철학은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틀에서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당시의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치의식 뿐 아니라 경제사회적 기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던 데다가 국민대다수가 절데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북한과의 경쟁에서도 한참 뒤쳐진 한국사회를,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을 모델로 삼아 근대국가로 환골탈태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가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국가 운영 철학과 스테이트크래프트가 철저한 가난과 비참함을 경험한 동시대 국민들의 비원과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건설 국가건설 자주성 확보와 같은 박정희의 지향점은 적어도 쿠데타 전후 당대 지식인들의 가치관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박대통령 통치 혹은 국가운영은 제도적 환경적 차이에 따라서 군정, 3공화국, 유신의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군정은 5,16쿠데타 직후 약 2년 반 동안의 전형적인 군사 통치시기로서 특히 헌정을 중단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포고령에 의한 통치로 시종한 시기다. 반면에 3공화국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적 헌정질서가 회복된 가운데 국가 운영이 이루어 졌다. 다만 집권세력이 헌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1.5정당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군 및 경찰력과 정보기관 등 공권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리드해 나갔던 점에서 유사 민간화의 시기였다. 유신은 그것이 헌정의 일시적 중단이나 유보에 그친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들을 상당부분 부인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정치사에서 매우독특하고 예외적인 시기였다. 다만 이러한 시기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모든 국가 운영은 북한과 대결하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조국근대화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여 주었다.
2. 군정기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세 마리토끼를 한꺼번에 쫓은 박정희장군이 직면한 국가운영 과제는 편의상 세 가지로 대별해볼 수 있다. 하나는 군정자체의 정당성확보 즉 군정의 타당성과 실적을 인정받는 과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국가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문제였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정치 주체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통치 질서를 수립하는 과제였다.
박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963년도를 거치면서 당초 민족주의와 자주성이라는 혁명이념에 따라 자립경제를 지향 농업육성을 통한 국내 시장의 확대와 기간산업 건설에 치중하는 남미식 대내 지향적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흉작으로 인한 쌀값파동 개발에 따른 통화 팽창과 수입의 확대, 내자동원을 목적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의 실패 그리고 외자도입 부진에 따른 외환 압박 등 숱한 난관에 직면한 가운데 미국은 재정안정정책을 추진하라는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사정부는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 주목, 수출 지향적 공업화로 정책기조를 전환하게 되었다. 즉 중농주의에서 공업화로 그리고 기간산업 위주의 내포적 공업화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사업으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3. 수출지향형 경제개발계획과 스테이트크래프트
한국적 대통령제: 제 3공화국 헌법의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권력 구조면에서는 미국적 대통령중심제의 특징을 상당부분 갖춘 것이었다. 다만 부통령이 없는 대신 특히 국회에 출석하여 대통령의 역할을 대리하는 국무 총리제를 두었다는 점에서 한국적 대통령제의 전형적 특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중심주의를 헌법에 담았다는 점이다. 복수정당제를 보장한 것과 함께 대통령 후보 및 국회의원 후보의 정당 공천을 헌법에 규정한 것이다. 이로서 국회의원들이 정당의 강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박대통령이 당면한 과제는 수출지향 공업화를 성공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필요한 재원조달이 문제였다. 박대통령은 일본자금에 강력한 관심을 갖고 마침 미국이 강력하게 요청해오던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교정상화는 최종적으로 3억 달러 무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 투자라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한일국교정상회담의 가장 큰 실익은 외국자본 특히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확보 유치함으로서 야심찬 경제개발계획을 위해 필요한 결정적인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제우선 협상논리에 밀려 과거사 청산문제 즉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더불어 약탈 문화재반환, 군대위안부 문제, 원폭피해자에 대한 배상, 그리고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이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명확히 처리되지 못한 결과 오늘날까지 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한일회담이야말로 적지 않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의 뛰어난 스테이트크래프트가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한일회담의 타결이야말로 박정희식 경제개발계획이라는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걸음이 된 것이다.
베트남 파병의 통치술: 베트남 파병은 군 출신인 박대통령의 뛰어난 스테이트크래프트가 돋보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빼돌리는 것을 가장 우려하여 미군철수 명분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확고히 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설정하였다. 아울러 참전을 통한 실리 확보도 고려하였다. 박대통령의 통찰력 있고 빈틈없는 협상으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경제 원조가 삭감되는 것을 연기시켰고 나아가 신무기를 획득하는 등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 작업에 착수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주월 한국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갖고 이를 행사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1966년 불안전한 것이었지만 처음으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도 소득이었다고 하겠다.
베트남 파병은 당초 계획보다 오히려 경제적 효과가 지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베트남과의 무역에서 2억8,30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군인들의 수당 및 기업과 노동자의 수입을 포함하여 총7억 5,000만 달러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이 후 중동 등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전역시 부정적 효과를 수반하였다. 총4,960명의 사망 1만962명의 부상이라는 인명상의 피해를 감내해야했다.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베트남 전쟁에서 지나친 실리추구는 ‘한국군 용병론’ 논란을 불러와 국가 위신이 저하 되고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빚기도 했다.
현장주의로 경제성장이 시동을 걸다: 박대통령은 자유시장 경제론을 존중하여 수입을 자율화하면서도 정부주도 수출정책에 드라이브를 건 것은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의력 있는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이를 밀어붙인 박대통령의 안목과 추진력이 돋보인다. 박대통령의 행정 특히 경제건설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 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점은 그의 스테이트크래프트가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대통령은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은 95%’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성장의 그늘: 무엇보다 반자유적이고 비민주적인 국가주의적 체제가 갖는 각종부작용이 그치지 않았다. 대기업이 돼야 대규모차관에 유리한 결과를 빚게 됨에 따라 재벌중심 체제가 탄생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대기업 즉 재벌역시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정부에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금의 원천은 국내 자본을 총동원한대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및 베트남전 파병에 따른 외자도입이었다. 정부는 외자도입뿐 아니라 분배권까지 장악하였다. 박대통령의 개발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지배연합이 ‘노동의 배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미숙련 내지는 반 숙련노동자로 흡수하였다.
4. 권위주의적 스테이트크래프트의 한계
정치위기의 도래와 강력한 대응: 1960년대 후반은 새로운 위기가 등장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 정치제도상의 문제 둘째 안보외교상의 문제 셋째 그동안의 경제발전이 가져온 경제사회적 문제점의 대두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해 박대통령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부심했다. 박대통령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위협적으로 표출된 것은 그의 3선을 결정하는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북한의 도발과 미군 철수: 북한은 1960년~69년 사이에 심각한 도발을 해오기 시작하였다. 68년1월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이후에는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여명의 북한 무장게릴라들이 울진 삼척지구에 침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이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9년 미국의 닉슨행정부가 출범한 후 아시아 지역의 방위는 아시아인에게 맡긴다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미국은 주한미군 3분의 1감축 계획을 발표하고 이미 철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 부통령 애그뉴가 방한했을 때 6시간에 걸친 박대통령의 ‘난폭하고 사정없이 공격적인 자세’의 마라톤 회담을 통해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총 15억 달러를 지원키로 합의 하였고, 그해 연말 미 의회는 대한 특별 군사 원조법안을 통과 시켰다. 그리하여 71년 미 제7사단 2만명은 완전철수 하되 2사단은 후방지역으로 철수, 이때부터 비무장지대 250킬로미터 전체를 한국군이 방어하게 되었다.
안보위기와 남북대화: 남북한 긴장이 고조된 상황 속에서 가장 우려한 것은 북한의 우월한 군사력에 비해 턱없이 노후 된 한국군의 장비문제였다. 박대통령은 두 가지 방향으로 대처하였다. 하나는 대규모 방위산업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특히 미사일과 핵무기개발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71년 8월 적십자회담으로 시작된 남북대화의 개시였다. 문제는 7.4공동성명 및 남북조절위원회 구성과 같은 통일을 명분으로 하는 고도의 정치적 움직임으로 비화되어 전개 되었다는 데 있다.
저항과 도전에 맞선 ‘싸우면서 건설하자: 60년대 말부터 외부로부터 위기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경제?사회적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에 대한 박대통령의 대응기조는 기본적으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슬로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북한을 경제와 국방에서 모두 압도하는 힘을 갖추는 것을 최고의 현실적인 목표로 설정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당면 과제는 이러한 자주? 자립? 자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국가총동원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즉 궁극적인 목표인 독자적인 국방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벌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안보 면에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한편 남북회담을 통해 당분간 시간을 벌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수출입국과 더불어 중화학공업 정책으로의 전환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새마을 운동의 대대적 추진으로 나타났다.
5. 유신정권과 스테이트크래프트
유신이전의 유신: 박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이후 연이어 터져 나오는 사회경제적 갈등에 더하여 ‘10?2항명파동’과 71년10월14~15일에는 서울일원에서 약5만명의 대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정치권과 재야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박대통령은 71년12월6일 ‘국가비상사태선언’을 하였다. 이에 더나가 12월27일 공화당 단독으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강행 통과시켰고 ‘군사기밀보호법’ ‘군사장비보호법’ ‘징병법 개정안’등도 통과 시키는 등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10월유신, 권위주의 체제의 클라이맥스: 유신헌법은 그 명분과 목표를 어디까지나 ‘민족중흥’을 위해 국론분열을 방지하는 일원적 체계를 구축하지는 것에 두었다. 남북관계개선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며 평화 통일을 위한 국력의 조직화가 긴요하다고 스스로 밝힌바 대로 현실적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국내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정부기구 나아가 국가자체를 전시와 유사한 사태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였다. 특히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과 그를 뒷받침하는 중화학공업에 올인 하려는 야심찬 계획이 연계되어 있었다.
10월 유신이 박정희 개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요 총통제 독재체제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회복과정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켰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나아가 유신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최악의 헌법’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신이 개인의 권력적 요인으로 환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10월 유신에 대한 박대통령의 주장은 단순히 그의 권력욕을 희석 분식시키기 위한 논리로만 매도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는 북한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1968년부터 1983년까지 15년 동안 네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한국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은 적어도 한국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북한의 명백한 도발행위였던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당시의 안보와 경제위기의 객관적인 정황에 대해서는 보다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유사 전시내각 체제: 유신체제는 권력의 사인화 일인집중 문제 등 각종 폐해를 양산하였다. 특히 통일과 국가발전을 위해 낭비를 배제하는 행정의 효율화 및 질서 유지를 표방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시민권을 심하게 위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는 정당정치 자체를 극도로 약화시켰고 나아가 정부에 대한 신뢰마저 크게 저하시켰다. 그 결과 박대통령은 광범위한 국민 사찰과 일종의 테러활동이나 다름없는 긴급조치라는 포고령 통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 현대화와 중화학공업 추진: 국군현대화 사업은 박대통령의 스테이프크래프트가 그 중 돋보이는 영역이다. 사업은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전개 되었다. 첫째, 는 ‘율곡사업’이라는 무기 구입 극비 방위 프로잭트였다. 박대통령은 특히 외부의 견제가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재정적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효율적인 예산 집행을 위해서는 2중 3중의 감시체제를 마련했다. 한 논자는 박대통령을 ‘청렴한 독재’내지는 ‘선의의 군국주의’라고 평하기도 했다. 둘째, 핵무기와 미사일개발프로그램이었다. 무엇보다 박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을 버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한국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한 나머지 이러한 무기 획득 노력을 억제하려는 미국에 주저 없이 도전하였다. 그는 특히 미국의 정책적 모순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미사일 개발에 있어서는 프랑스로부터 대함미사일을 구입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결국 자국산 미사일 판매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했다. 또한 미 국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록히드사의 로켓 추진체 공장을 구입하여 결국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국산 유도탄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핵무기 개발 프로잭트는 일찍이 71년 말 미7사단이 철수한 직후 본격 착수한 바 있다. 74년에는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플로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프랑스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연간 20킬로그램의 플로토늄을 추출 히로시마급 핵무기를 연간 2개씩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 규모였다. 그러나 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을 계기로 미국은 한국 등 여타 국가들의 핵개발 중단을 위해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시작하였고 특히 75년 에는 한국에 대해 만일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한미 군사적 경제적 관계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최후 통첩성 경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프랑스와 재처리시설 확보를 비밀리에 재추진하는 등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아도 한국은 끝내 하고야 만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우리들의 능력으로 해 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이 한국의 요구에 협조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미국이 맹렬하고 조직적인 반박정희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글라이스틴 대사의 말대로 “박정희의 몰락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유신체제의 내외적 위기: 숱한 문제점을 안고 출발한 유신은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항의 선봉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열어놓은 공간에 종교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유신에서 배제된 구 정치인들로 구성된 재야세력들이 파고들어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라든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과 같이 이를 국민적 저항으로 연결시키는 운동을 펼쳐나갔다. 78년에는 ’민주주의국민연합‘이 결성되어 반정부활동의 연대기구화가 이루어져 유신이후 처음으로 대중시위가 발생하였다.
유신체제의 대외적 위기는 주로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카터대통령은 77년 취임직후 3,000명의 병력과 더불어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서전트 미사일을 일방적으로 철수 박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군부는 물론 공화?민주 양당의 보수파 그리고 후쿠다 다케오 일본수상 등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또한 북한의 군사력이 기존의 예산 수치보다 40%가 넘는 다는 미정보기관의 최종 결론을 토대로 주한미군 철수를 사실상 중단키로 극비리에 결정한 가운데 79년6월말 카터대통령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카터대통령은 동두천 미군부대에 머무르는 등 의전절차를 어기는 방식으로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정상회담 석상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제기하지 말라고 사전에 수차례 경고하였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참는 전략’을 포기하였다. 박대통령은 ‘카터의 쌀쌀함’에 격노, ‘갈 테면 가라’고 하면서 미국의 경고를 무시한 채 카터 대통령의 면전에서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후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과거에 수많은 정상회담에 참석해 보았지만 카터와 박정희가 그날 아침에 한 것처럼 지도자들이 무지막지하게 얘기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여하튼 박대통령은 그 후 총 180명의 정치범을 향후 6개월 내 사면 할 것이라고 천명하였고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81년까지 연기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이회담은 오히려 방위력강화와 유신체제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응능력의 실종, 유신의 종말: 박대통령은 국가지도자로서 매우 뛰어난 자질과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갖춘 인물이었다. 특히 자기성찰 그리고 자신과 주변에 대한 절제와 단속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사망 이후 박대통령은 통치감각이 크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신붕괴엔 여러 가지 구조적인 요인이 지적될 수 있다. 우선 정치적 불만에 불을 지른 경제적 요인이 있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이 일반 대중의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 이것이 정치적 파행으로 점화되어 부마사태라는 시민항거를 자극한 것이다. 다음으로 미국 요인을 지적 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 추진된 핵무기와 유도탄 개발계획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한국을 핵무장화 하려는 계획이 박대통령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었던 것이다.
6. 오늘에 주는 교훈
오늘날 한국의 환경은 박정희시대와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는 박대통령의 국가운영을 초역사적으로 일반화하여 거기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다면 의미 있는 해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한다면 박정희의 강열한 공적 열망과 치열한 문제의식 개인적 물적 욕망을 자제한 청렴하고 헌신적인 자세 그리고 현장을 장악하면서 끊임없이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귀감이 된다. 박정희 역시 인간적으로 적지 않은 약점을 안고 있으며 또한 공인으로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항상 공적인 것을 앞세우면서 진정성이 있고 성실하고 매사에 두려워하는 진지한 자세로 국정에 임한다면 자신과 시대의 한계 그리고 좁은 이념의 폭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박정희는 보여 주었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
......
이등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이런 시를 수첩에 꼼꼼히 적어 놓았던 혁명가 민중주의자 모습을 방불케 하는 그가 현대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상황이 불가피하였다 할지라도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거슬러 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뛰어 넘어 장기간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성공적으로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면교사 박정희의 교훈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제6장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요약/ 이 종 엽
1. ‘서울의 봄’과 권위주의 체제의 연장
무기력한 위기관리 정부
10.26은 유신 정권 핵심부의 권력균형이 무너진 결과 발생한 돌발적 사건으로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경로의 마찰과 특히 광주의 대형 유혈참사로 그 5공화국은 또 하나의 ‘유신’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5.16 당시 상황과는 전혀 달랐고, 먼저 박통의 헌법상 승계권자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보면 무기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10.26 당시 육본 지하벙커에서 비상계엄을 재촉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향로를 바꿨으며 12.12사건 때에도 정승화 육참의 체포를 협박하는 전두환 장군에게 노재현 국방장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맞섰지만 결국 다음 날 새벽 승인.. 5공의 서막을 열어.. ‘내란 발생’을 우려한 불가항력적 결정이었다는 동정론도 있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결단력을 결여했거나 기회주의적 처신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스스로를 ‘위기관리 정부’로 자처하며 기존 헌법절차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뽑고 자신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하는 등 전환기적 비상시기에 필요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보수적인 민주주의 국가운영 철학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원유확보를 이유로 긴박한 국내정세는 외면한 채 중동방문을 하는 등 국정 운영에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명분 없는 다단계 쿠테타
다음은 신군부 전두환의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살펴보자. 전두환은 10.26 다음 날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회의를 소집하는 등 신속하게 상황을 장악해 나갔고 12.12사태를 기점으로 수도권 지역의 무장 병력 6,000여 명을 불법 동원하고 육참을 체포하는 등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명백한 하극상을 보이고 끝내 유혈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해가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명분 없는 다단계 쿠테타’로 전두환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마땅한 데 그는 별을 스스로 달고 인사규정도 무시한 채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직함으로써 권력 장악의 야심을 드러냈는데 다음 해 개학을 맞은 학원가에서의 대학생 시위가 5월15일에 이르러는 서울역 광장에서 10만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기까지 이르렀는데 국회해산, 모든 정치활동 금지, 대학폐쇄, 언론검열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하는 5.17조치가 강행되자 광주에서 격렬한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5.18은 한국 민주주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분수령이 되었지만 이러한 와중에 신군부는 5.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라는 일종의 군사평의회를 출범시켜 실질적 두 번째의 쿠테타를 감행 실로 또 다른 5.16인, 변질된 유신인 제2의 군부독재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양김의 갈등과 분열
당시 양김의 스테이트크래프트에 대해서도 그 역할과 공과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양김은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각자 권력의지에 연원하여 서로 분열을 고집 신군부에 빌미를 준 과오가 컸다. 물론 양김이 단결했더라도 신군부의 집권을 막을 수 없을 가능성이 컸지만 단합했더라면 신군부의 명분을 극도로 약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민주화가 그만큼 지연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으나 5공화국이나 6공화국을 거치지 않고 보다 부드러운 경로를 통해 오히려 더 빨리 민주화에 이를 수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5.18과 6월항쟁과 같은 큰 희생을 치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에 양김의 갈등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집권, 그러나 정당성의 결핍
1980년 9월 전역한 장군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과 새 헌법 통과 후 1981년 2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으로 집권을 마무리하였으나 무엇보다도 5.18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정당성의 결함을 안고 시작한 5공은 어차피 군을 기반으로 집권하여 당분간 국민의 반응은 중시하지 않는 철저한 권위주의적인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발휘하였다. 그는 박통 말기 과도한 대미 대결적 태도와는 달리 레이건 미 대통령과의 우교에 심혈을 기울여 한편으론 국민들 사이에는 반미감정을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빚기도 했지만 미 행정부와의 밀월관계를 돈독히 함으로 집권 초기 무난하게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발휘할 수 있었다.
몰라서 성공한 경제정책
당시 국가적으로 직면한 가장 절박한 현안은 경제문제였는데 사실 그는 경제에 문외한이어서 과외를 받는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고 특히 경제현상을 물가안정문제라는 각도에서 파악하여 임기 내내 ‘물가안정’정책에 주력했고 경제구조 개선에도 주력한 결과 마침내 집권 후반기 결실을 보아 86년도부터 시작한 저달러(저금리). 저유가. 저원자재가 등 이른바 ‘3저 현상’을 맞아 물가안정. 고도성장. 국제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문외한이었지만 평범한 정책기조를 중심으로 우수한 인재들을 경제참모로 다양하게 영입,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함으로 지극히 평범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보여준 하지만 그의 치세 중 가장 괄목할만하다 평할 수 있는 통치력을 보여 주었다.
3. 전두환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
과거 박통이 치밀한 참모형 이었다면 전통은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전투지휘관형으로 적극성을 발휘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선수치기식 저돌적 해결사에 가깝다. 하지만 지난 시대를 답습, 흉내내기 바쁜 아류로 일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정의사회 구현’과 같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치구호를 남발하는가 하면 대중 언론조작을 하여 ‘뚜뚜전뉴스’라는 희화어를 양산하는 등 정상적인 국가운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각종 대형 권력형 부정과 비리에 자신까지 퇴임 후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7,000억 규모의 비자금 조성하고 은닉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능력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시한 나머지 가족이기주의, 정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제7장 노태우 대통령과 스테이트크래프트
1. 6.29선언 이후 새로운 민주적 스테이트크래프트의 등장
‘6월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6.29선언은 집권 말기 전통의 사실상의 국가운영의 종료를 뜻하는 것이었고 결국 13대 대선에서 6.29선언의 당사자인 노태우를 당선시켰으나 여소야대의 국회 출현과 1노3김의 정치 구조로 5공에서의 권위적 통치는 사라지고 일종의 타협 민주주의의 국정운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노태우후보를 당선시킨 주역인 양김이 그 다음을 노림으로 양김에 의한 싹쓸이 식의 지역주의가 극에 달하는 부작용이 일기도 했다.
2. 정권 초반기 여소야대 국면에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
4.26총선 이후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하면서 노정권의 국가운영은 국회와 정확히 말하자면 3김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노통은 국가운영상의 명확한 원칙과 소신 없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스테이트크래프트에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보였다. 하지만 비록 1노3김의 타협에 의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통의 친인척들을 구속하고 전통을 백담사로 귀양보내고 광주 과잉진압 책임자 정호용 의원을 의원직 사퇴시키는 등 5공 비리를 청산하고 군부 권위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단죄하였다는 점에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포명령에 관한 진상규명이 미흡했던 결과 1노3김의 스테이트크래프트는 한계를 보여 주었다. 반면 88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89년 후반 소련 등 공산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과 맞물리며 노정권 임기 후반기에 가서는 전대미문의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그는 외교면에서는 뛰어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발휘했다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전통과는 달리 나름대로는 노력했지만 경제 분야에선 점수를 얻지 못했는데 그는 민주화에만 시대적 과업으로 몰두했고 경제 낙관론이 대두되어 소홀했고 또 경제문제는 실무자들에게만 권한을 위임 몇몇 개혁정책을 시도하긴 했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잦은 주무 장관의 교체로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3. 집권 후반기 여대야소 하에서 노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1990년1월 3당 합당을 계기로 그는 집권 후반기 국가운영의 다른 상황을 맞게 되는데 우선 여소야대가 거대여당이 되어 노태우 고유의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명분은 지역주의 악화에 따른 정치 파행과 국제경쟁력 약화를 극복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을 표방하지만 정치적 세 불리기 위한 1노3김의 이해타산이 맞은 결과로 합당 본래의 의도가 달성되기는 했지만 지역주의는 특정 지역구도 정치로 고착되게 했고 견제 없는 거대여당의 독주가 재연되는 등 부작용을 가져왔다. 또 그는 경제 분야가 자신의 치적 상 치명적 약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절실히 인식하고 합당 후 경제관리에 좀 더 힘을 쏟았지만 탁월한 변화의 결실은 나타나지 않았고 특히 재벌기업에 3개의 주력기업을 선택하고 그 외는 여신을 규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재벌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그 또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중도 철회하고 말았다.
4. 노태우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평가
그는 우선 6.29선언을 기점으로 시민권의 신장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데 특히 군부 등 5공세력이 즐비함에도 자신의 5년 임기 동안 군부 통제를 원만히 하여 문민정권으로의 가교 역할을 원활히 잘 한 평가를 받았다. 경제 분야에서는 언급한 대로 재벌개혁 등 경제력 집중 완화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부분적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경기침체와 잦은 경제팀의 교체로 정책의 일관성을 잃어 그의 경제분야 통치력은 큰 평가를 받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된 환경 속에서 이에 적합한 민주적인 국가운영 원리를 도입하는 등 ‘민주화의 가교정권’으로서의 통치력을 나름 발휘했으나 여론에 민감하고 내실보다는 명분과 외양 이미지를 중시함으로 인기 지향적 리더십으로서의 소극적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보여주었고 그 결과 민주화의 바람직한 틀을 만들지 못하고 향후 극한적인 갈등과 대립과 혼란과 부패의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
제8장 김영삼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발췌자: 김재호 목사]
1992년 12월28일 3파전 구도로 전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41.4%의 득표율을 기록, 33.4%를 득표한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였고, 이듬해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민정계 및 공화계의 3당 연합으로 집권했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장면 정권 이후 32년 만에 첫 ‘문민정부’가 출범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취임 당시 한국은 자신감 상실과 패배주의라는 ‘한국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고 ‘변화와 개혁’을 통해 이를 치료하여 ‘신한국’을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부정부패 청산, 경제 살리기, 국가기강 확립의 3가지 과제를 제시하면서 ‘위에서부터 바꾸자’고 바른 방향 설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문제는 정치개혁의 구체적인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채 부정부패 청산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래지향적, 창조적인 방향에서 근본적인 국가개혁이 필요했다.
대외정책 부분에서 무엇보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 우선’을 내세운 것은 적실성에서 문제가 있었다. 한편 우루과이 라운드가 실질적으로 타결되어가는 상황에서 ‘쌀 개방만은 결사 저지하겠다’는 대선공약 이후 아무런 실질적인 비전과 대안제시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김대통령은 처음부터 스테이트크래프트 상의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1) 초기 개혁의 성과와 문제점
청와대 앞길과 경복궁 후궁 그리고 인왕산 출입을 허용하고, 밀실정치의 상징인 궁정동 안가 철거, 청와대 경내 골프 연습실과 공항의 대통령 전용시설을 철거하고 지방의 대통령 전용공관도 폐쇄하여 상당히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취임 이후 열흘 만에 전격적인 군부개혁의 시작으로 하나회 숙청 등으로 ‘정치군인’으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군의 사기저하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단 한 푼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폭탄선언과 함께 가족 재산 자신 공개와 공직자 재산공개로 김대통령의 지지도는 95%까지 치솟았고 청소년들의 가장 좋아하는 ‘우상’까지 선정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집중된 반면 협력자들에게는 ‘솜방망이’ 흉내만 내는 결과로 개혁의 기대에 충분히 부흥하지 못하고 말았다.
김대통령의 초기 개혁 중 회심의 역작은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재정명령 제16호로 전격 발동된 ‘금융실명제’였다. 문제는 경기회복과 투자 및 수출증대를 통해 국가경제를 활성화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고, 정치개혁, 즉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금융질서상의 도덕적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구상, 추진된 것이었다. 이것은 후에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과 효과를 미친 것은 분명하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고 말았다.
원래 금융실명제는 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위한 수단으로서 종합과세와 함께 실시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금이자에 대한 종합소득세를 점진적으로 확대, 발전시켜나가야 하는데, 종합과세는 뒤로 미룬 채 그 수단에 불과한 실명제에 집착하여 이를 개혁의 상징으로 추진하여 여론몰이식으로 실시하므로 제대로 실효를 못거두고 말았다. 오히려 일상적인 자금의 흐름을 교란시켜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중소기업들이 자금만을 겪다가 부도를 맞는 사태가 줄을 잇게 되고, 근로 소득자의 수입만 투명하게 드러남으로써 ‘못 가진 자가 고통을 받는 사태’가 도래하고, 가진 자의 과소비 풍조가 만연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임기 말에 IMF까지 오게 되고 말았다.
93년 말 우루과이 라운드가 완전 타결됨에 따라 쌀 개방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고, 선거공약으로 쌀 개방을 대통령직을 걸겠다고 장담했던 김대통령은 자본자유화, 국제적 시장개방 등에 대한 대응책에는 미약하여, 수년간 57조 원을 농촌에 투자하므로 중소기업 육성정책은 증발되고 말았다.
2)김 대통령의 중반기의 스테이크크래프트
초기개혁을 바로잡아 가는 듯하였으나, 1993년 말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이후 국제환경의 변화로 국정우선 순위를 조정해 나가야 했고, 국내적으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문제였다.
그는 탄탄한 지지층 구축보다는 지지율에 매달리는 이벤트성 개혁, 일종의 ‘뺄셈의 정치’로 집권연합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는 성급한 ‘국제화, 세계화’ 구호를 앞세움으로 일관하였다.
1996년 10월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29번째 회원국으로 정식가입, 선진국 진입의 환상을 심어주고, 무분별한 해외여행과 조기 유학, 과소비를 부추겨 경제위기, 특히 외환위기와 경제혼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95년 1월 김종필은 민자당 대표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며, “구국의 결단인 3당 통합의 정신이 소멸되고 정치적 약속과 신의가 지켜지지 않았다.” 절대권력과 독단과 오만과 전횡 앞에 민주대의는 무너졌다며 김영삼 대통령을 ‘문민독재’로 비난하고 나섰다.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6개월 만에 귀국해 정치를 복귀 안한다고 하면서 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했다.
김대중은 95년 7월18일 ‘정계복귀 선언’을 하고 ‘새정치국민의회’ 신당을 창당하였다. 그 결과 지역분할 정치에 기반하는 ‘후3김 시대’가 도래하였다.
96년 총선을 앞두고 등장한 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그 대표가 국립박물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였으며, 4?19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시켰고, 93년 5월에는 민간합동으로 5?18광주민중항쟁 추모식을 거행하였으며, 4?19를 혁명으로, 5?16을 쿠데타로, 6?10항쟁을 ‘명예혁명’으로 규정하고, 12?12에 대해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식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문제는 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패배한 것을 계기로 후3김 시대가 도래하면서 국가운영상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역사 바로 세우기’가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3)김영삼 정권 말기의 총체적 실패
대통령의 최측근의 부정부패 실상이 드려나면서 96년 3월 대국민 사과문을 시작으로 6차례 발표하게 되었고, 97년 1월 발생한 한보사건, 미림팀의 불법 도청, 차남의 구속, 도덕성 추락으로 정상적인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4)김영삼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평가
“개혁은 있어도 국가운영은 없었다” 결단과 헌신으로 국민을 이끌어온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치가였으며, 32년 만에 이룩한 민주화, 부정부패의 척결, 정치자금의 공개와 처벌 등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국가운영의 안정과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첫째로 그는 민주화를 선도한다는 자각과 자신이 이룩한 공적에 대한 확신이 넘친 나머지 국민을 가르치고 선도한다는 계몽주의에 빠져 점차 ‘무오류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둘째는 여론에 대한 과도한 의식으로 정치적 이벤트나 사건들을 창출하려고 했다. 셋째는 막강한 군부 권위주의에 투쟁하는 과정에서 의사결정의 폐쇄성과 비공개적 성향이 체질화된 비밀주의에 있다. 바로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치인 김영삼의 러더십은 ‘감에 의한 승부사형’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탈냉전과 세계화?정보화라는 국제정치적 흐름에 적합한 새로운 국가운영 모델을 수립해야할 적합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제9장 김대중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1998년 2월 25일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IMF 관리체제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속에서 집권하였다.
그의 집권이 호남의 압도적 지지와 DJP 연합, 즉 충청권 기반으로 하는 자민련 연합토대로 40.3%를 득표, 차점자인 이회창 후보와 39만 표밖에 나지 않아서 국민적 지지기반 역시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제15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 남북관계의 개선, 민주주의의 진전을 ‘국민의 정부’의 3대 목표로 제시하였다.
1)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의 스테이트크래프트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기까지 약2년 동안 무엇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국정을 운영하였다. 국정 초기에는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나름대로 발휘하여,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금모우기 운동’으로 350만 명이 참여, 226톤, 즉 당시 시세로 21억5,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을 모을 수 있었고 국가의 대외 신인도 상승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외자도입 및 수출 위주의 성장정책을 비판하면서, 자립경제의 건설을 강조한 ‘DJ노믹스’로 알려진 ‘민주적 시장경제’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IMF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그대로 수용한 점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해외자본의 무제한적 약육강식 질서를 용인, 촉진시킬 우려가 컸고, 기업의 채무비율을 200% 이내로 강요한 결과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게 되었고 유수한 공기업들이 외국에 헐값으로 팔려나감으로 ‘국부 유출’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4대 개혁에서 기업과 금융부분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나, 노동과 공공부분은 부진하였다. 기업부분은 재벌개혁으로 대우그룹은 공중 분해되었다. 공기업들은 해외자본에 헐값에 넘겼다는 비판이 있었다. 전자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세계제일의 지식장보 강국으로 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의 정부’는 IMF 지원자금 195억 달러를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상환함으로 99년 11월 19일 약속대로 1년 반 만에 IMF관리체제를 완전히 극복하였다고 선언하였다. IMF 역시 같은 해 12월29일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를 ‘성공’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 점에서 김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에서는 뛰어난 스테이트크래푸트를 발휘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복정책에서 정주영의 ‘소떼 몰이’방북이 이뤄졌고, ‘햇볕정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대회에서는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를 바탕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하였고 그것을 이루었다. 2000년 4월13일 제16대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선전하고 자민련의 참패와 민주당의 참패로 이어진 것은 ‘옷로비 사건’과 ‘언론장악 시나리오’ 등 각종 스캔들과 선거 사흘 전 전격 발표한 남북정상회담은 오히려 국민적 경계심과 반발 때문이었다. 특히 IMF 조기 졸업은 한나라당이 차떼기 당에서 죄의식을 벗는 기회요, ‘탄압받는 여당’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오히려 미숙한 스테이트크래프트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총선에 부진에도 불구하고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발표로 화려하게 후반기가 시작되었다.
①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공통성이 있다는 인정 및 그 방향에서의 통일 지향 ③이산가족과 친척방문단의 상호교환및 남측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문제의 해결 ④경제협력과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교류 활성화 ⑤이상의 합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 당국 사이의 대화 개최 등, 별도 항목으로 적절한 시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 계획이 부가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안인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관한 사항은 전무했다는 점이다. 결국 임기 말까지 북한에 제공된 금액이 2조7,028억 원이 되었고 ‘참여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북한의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02년 6월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 전사자 6명, 부상자18명이라는 희생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김대통령의 임기 말인 2002년에는 전년도에 발생한 9?11테러 이후 부시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대북강경정책과 북한의 핵개발 강행정책이 부딪히는 가운데 임기를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햇볕정책은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오히려 핵개발을 용인하여 안보상의 위험을 초래하였다는 보수진영의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국내의 이념적 분열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김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는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과 그 해말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이후 김대통령의 리더십은 급격히 추락하였고 국정은 혼미로 점철되어갔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4?13총선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총선 이후 정책연대로 어렵게 복원된 DJP 공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면서 민주시대 국정 최고 지도자로 스테이트크래프트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후 ‘개혁 드라이브’정책으로 자신의 대북유화정책과 지역 편중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보수계 신문들, 6개 언론사의 12명을 검찰에 고발하고, 동아?조선?국민의 3개 언론사의 대주주를 구속하였다. 그 결과 한국정치사회에 소모적인 이념적 갈등을 첨예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소위 이를 지지하는 ‘홍위병’ ‘곡학아세’ ‘가당찮은 놈’의 살벌하고 원색적인 폭원, ‘도서 화형식’같은 막가파식 형태가 사회에 공공연히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 개혁 드라이브와 더불어 김정권이 주력하였던 것이 ‘시민단체’의 활용이었다. 100여곳에 연간 75억의 사업비를 지급하여 시민단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민단체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결국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남남갈등으로 증폭되어 서울에서 개최된 광복절 경축대회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임기 말 김대통령의 국가운영은 리더십의 ‘총체적 와해’로 인해 전형적인 레임덕 양상을 보여주었다. 대외 환경도 새로 출범한 부시대통령과 대북정책에서 상당한 시각차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한 국정원의 감청문제가 다시 드러남으로써 정권의 도덕성에도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이용호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이형자 리스트 등 아태평화재단의 비리온상으로 부각되면서 그의 처남과 아들 ‘홍삼 트리오’의 비리가 드러났다.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구속되므로 역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민주당을 탈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6월 역사적인 한일 공동주체 월드컵 분위기 속에서 서해 교전 사태가 발생, 6?15선언과 햇볕 정책 자체가 크게 빛을 바래고 말았다.
그는 ‘민주적 지도자’라기 보다는 ‘민주화를 향해 국민들을 이끈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후반기 국정을 독단적으로 이끌고 또 주변관리를 소홀히 하는 결과 였다. 한편 그는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 ‘대지소심형(大志小心型)’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실용주의 혹은 시류에 대한 민감성 있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여소야대 상황에서 구집권세력을 설득하는데 한계성을 보였다.
한마디로 ‘창업(創業)에 성공하였으나 수성(守成)엔 실패’한 리더십이었다. ?
|제10장| 노무현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조 재 호
1. 서론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독특한 위상과 성격을 갖고 있다. 양김의 퇴장은 단순히 최고 지도자의 교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국정 주도 세력의 퇴진을 동반함으로써 한국정치의 세대교체와 맞물려 있었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정치적·이념적·계층적으로 철저하게 소수파 출신이라는 변방의 리더십을 기반으로 ‘기성의 타파’를 전면에 내걸고 대통령이 된 인물이었다. 노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이어 한국정치 사상 두 번째의 ‘보주·진보연합 정부’이면서, 진보적 성격이 한층 강화된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2. 노무현 대통령 집권 초기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최초의 진보 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구시대의 막내’보다는 ‘새 시대의 맏형’이기를 염원하면서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로 규정하고,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구현이라는 ‘평화·참여·균형’을 3대 목표로 설정하고 국정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노정부의 국가운영은 처음부터 야당과 보수세력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의 국가운영 목표 중 하나인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는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서는 ‘기성 정치권 타파’의 정치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노정부는 야당과의 관계만 악화시킨 것이 아니라 여당과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시켰다. 공직사회와의 관계도 문제였다. 노대통령은 특히 대표적 권력기관인 검찰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판사 출신의 젊은 여성 변호사인 강금실을 법무장관에 임명하였다.
주류세력 교체 시도와 탄핵의 역풍
‘구어체 현장언어’를 자주 구사했으며 또한 반어법과 냉소적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등 ‘언어와 태도에 관한 한 분명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탄핵안이 재적 271명의 3분의2가 넘은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노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재임 중 탄핵소추를 받아 직무가 정지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치러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신생 열린우리당은 299석 중 과반수가 넘는 152석으로 대승, 일거에 여대야소 국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타협적 균형’의 대외정책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기본노선은 김대중 대통령 때 나온 햇볕정책의 연장선에 서 있는 ‘평화번영정책’ 기조 위에서도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 쳐도 괜찮다”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남북관계의 발전을 국가운영의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 바 있다. 집권 초 대외정책 특히 대미정책은 반미주의를 기저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타협적 균형노선을 추구하였다.
적극적인 사회정책
경제정책에서는 처음부터 뚜렷한 청사진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는 보수진영의 의제이므로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한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노정부는 균형발전에 정책적 무게를 실었다. 특히 지역 균형발전을 중시하여 취임 초부터 공기업 지방 이전, 행정도시를 비롯한 혁신도시 및 기업도시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참여정부의 특징 중 하나는 적극적인 사회정책이다. 무엇보다 사회문화적 힘의 분포에서 진보진영을 강화시키기 위해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였다.
3. 노무현 대통령 중·후반기의 스테이트크래프트
4대 개혁 입법 시도와 에너지의 소진
2004년 4·15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획득, 17대 국회를 장악하면서 노무현 정부는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노정부가 바로 착수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이었다. 국보법 철폐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추진된 또 하나의 개혁과제는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였다. 4대 개혁 중 또 하나의 과제는 사립학교법 개정문제를 중심으로하는 교육문제였다. 4대 개혁과제 중에서 가장 커다란 현실적 갈등을 불러온 것은 언론개혁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부터 보수신문들을 ‘조폭언론’으로 부르면서, ‘언론과의 전쟁’을 적극 주창한 바 있다.
열린우리당의 몰락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운영의 실패와 그가 증폭시켜놓은 극도의 불신으로 인해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열린우리당의 붕괴를 맞게 되었다. 이로써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노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던 신당 실험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자주노선의 파열
노정부는 오로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매달렸다.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클라이맥스는 노대통령의 퇴임을 불과 4개월 반 남겨둔 시점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10·4공동선언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동선언의 내용에 있었다. ‘우리끼리’를 강조하면서 6·15공동선언의 고수와 6·15기념일 제정에 합의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자주 노선’을 더욱 강조하였다.
분배강화, 균형발전의 명암
참여정부 후반기 경제정책 역시 ‘성장’보다는 ‘서민’과 ‘빈부격차 완화’ 등 균형과 분배에 있었다. ‘골고루 잘사는 나라’ ‘중산층과 서민도 대우받는 나라’를 표방하면서 4대 보험의 안정적 운영과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 그리고 사회안전망 구축에 주력하였다. 한편 노대통령의 경제적 차원의 진보주의적 성격은 큰 정부로 이어져 국가의 비대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국가채무 역시 크게 증가하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참여정부는 성장 동력의 확충보다는 분배우선·균형정책·복지정책을 추구한 결과, 이것이 특히 유가 급등 및 환율 불안과 맞물리면서 투자 저조로 연결되어 성장 잠재력을 고갈시키고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본격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4. 노무현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평가
자연인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 양측을 포함하여 국가사회의 대부분으로부터 ‘실패’라는 데 사실상 컨센서스가 형성될 정도였다. 정치인 노무현과 그가 지향하려고 했던 가치는 앞으로 시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재평가 될 테지만, 이와는 별도로 대통령으로서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시대적 과제는 양김 이후 처음으로 탈권위주의 시대의 최고 지도자로서, 지역주의와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극한대결의 정치를 지양하고 타협과 협력, 그리고 화합의 선진 민주정치를 향한 첫 장을 여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사회의 절실한 의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대통령,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한 정치인 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성과 부족한 스테이트크래프트
첫째, 노무현 대통령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가, 그리고 대통령직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명확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둘째, 노대통령은 헌법적 가치를 비롯한 국가운영 원리에 대한 이해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내 보였다. 셋째,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략 그리고 이행전략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뺄셈의 정치
노무현 정부는 양김 이후 지역주의적·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국가운영의 원리를 제시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정권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노대통령은 올바를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으며, 특히 사회적 약자 문제를 국가운영의 핵심과제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너리티, 즉 소수파 출신으로서 정치적으로 외롭고 이념적으로 비타협적이며 계층적으로는 현상타파적인 의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 급진적 사회정책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신자유주의적 개혁노선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방황하였다.
국가와 헌법 특히 대통령직과 스테이트프래프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채 이념과잉의 아마추어리즘에 토대를 둔 코드정치, 편 가르기 정치, ‘뺄셈의 정치’로 일관한 결과, 새로운 국가운영 전략을 제시하지도 새로운 국가운영의 주도세력을 창출하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국정 자체를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면 ‘새 시대의 맏형’이 아니라 ‘구시대의 막내’가 됨으로써 대한민국이 성숙하고 선진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적지 않은 차질을 초래하였다.
|제11장| 이명박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1. 서론
이명박 정부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노무현 정부의 것과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화와 양김 이후, 탈냉전과 세계화·정보화 심화 속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사회의 모든 분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한편으로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가면서 평화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이명박 정부는 당초 상당히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먼저 대선에서는 민주와 이후 최고의 득표율과 득표차로 당선됨으로써 확고한 지지기반을 구축 할 수 있었다. 그의 압승은 기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응징 심리에 바탕을 둔 ‘회고적 투표’에 기인한 것이었다.
2. 추임 첫해에 맞은 리더심의 위기
불신을 자초한 ‘고소영’ 인사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 때부터 크고 작은 실책으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기 시작하였다. 인수위는 관련부처의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관계자들을 호통치는 자세로 군림하는 등 관료 세계와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서부터 차질을 빚기 시작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부자’ ‘고소영’ ‘S(서울시) 라인’등 사적 연고에 편중된 인사를 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광우병 파동’이 가져온 내상
이명박 정부는 취임한 지 불과 2~3개월 후 ‘광우병 파동’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맞았다. 그것은 1987년 민주와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의 국가운영이 너무나 큰 내상을 입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취임한 지 불과 넉 달고 안 된 상태에서 대통령실장과 수석비서관 7명 전원, 그리고 농수산부장관을 비롯한 3명의 각료들을 교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초에는 지지도가 20% 내외로 급락하는 등 취임 초부터 리더십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투신
취임 2년차 초반에 들어선 초기 이명박 정부에 정치적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뢰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새벽, 자택 뒤 부엉이 바위 절벽에서 투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6일간의 국민장을 거치는 가운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여론은 크게 확산되었고, 이는 특히 이대통령과 그의 국가운영 방식에 대한 실망감 내지는 반감과 맞물리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3. 이명박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의 특징과 문제점
공적 영역에 등장한 CEO형 리더십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를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로 자처한바 있다. 그의 정부가 국가운영에서 공공성을 간과 혹은 경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갖고 있는 이러한 ‘CEO형 리더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하면 된다’는 개발시대, 권위주의 시대의 신념을 토대로 국정을 돌파해내는 수직적·독주형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공공성 결여
이명박 정부의 공공성 결여는 무엇보다 인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노정부의 인사는 ‘회전문 인사’요 이명박 정부의 인사는 ‘호주머니 인사’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공공성 결여 문제는 또한 각종 정치·사회적 갈등을 다루는 데서도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용산참사’사건. 이대통령의 공공성 결여문제는 최근 퇴임 이후를 대비하여 내곡동에 사저 부지를 구입하려다가 이를 백지화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나 적지 않은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CEO형 리더십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의 공공성 결여는 또한 소통의 문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 잘살게 해줄 테니 따지지 말라’는 개발시대의 경제결정주의적 그리고 권위주의적 철학으로 일관한 채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소통과 합의 과정을 경시함으로써 국민통합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중심에서 공정사회로
이명박 정부의 공공성 결여 문제와 더불어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책상의 단견과 이로 인한 갈지之자 행보, 나아가 정책실행상의 실기와 무능력 문제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에 대한 부담을 안은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의 ‘기업 프렌들리’ 정책에서 탈피하여 2009년부터는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 그리고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등 정책전환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경시의 대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난맥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대북정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북한의 적극적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비핵개방 3000’을 제시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정교한 실행대책과 크고 작은 행동 프로그램들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첫째는 대북제재의 수준과 국제적 공조의 유지다. 특히 중국의 대북관계를 어떤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둘째는 예상되는 북한의 반발을 어떻게 관리하며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가 하는 문제다. 셋째는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컨센서스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특히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관한 대응문제와도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상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중국에 있었다. 무엇보다 북핵문제의 해결보다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우선을 두는 중국 지도부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함으로써 대북 제재를 위한 국제적 공조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보여주었다.
4. 잠정적 결론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래 ‘박정희 이후 가장 부지런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여 나름대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일각의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광우병 파동’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에 단초를 제공하는 등 민심 이반과 국정 혼란을 자초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는 ‘기업 프렌들리’으로부터 ‘친서민’ 그리고 ‘친중소기업’정책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으며, 나아가 ‘공정사회’를 강조하고 있지만, 양극화 현상은 여전히 개선될 전망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등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표방한 대로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노정부의 실험적 국가운영이 가져온 실패를 거울삼아 건전한 보수적 가치를 기조로 민생 중심의 국가운용으로 복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 역시 실패로 귀결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제12장| 맺는 말
2012년,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격들
대한민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 전쟁과 가난, 군사정변과 국민봉기 등 숱한 역사의 굴곡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남북 간에는 부분적인 교류와 협력 속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날카로운 군사적 대치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또한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체제로 전환한 1987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승효과로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듯 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화와 맞물려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경제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란 국가의 운영원리를 수립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일이며, 다시 말해 공공부문에 관한 ‘집단적 결정과정’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과 국가의 최고 행위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각종 공직선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인 특히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문제는 결국 유권자인 국민의 스테이트크래프트로 환원된다. 정치인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인 것이다
87년 체제의 극복과 올바른 변화
오늘의 시대적 과제는 이러한 정치의 카르텔 구조를 타파, 민주와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시민세력의 새로운 동력을 토대로 정치풍토를 개선하고 선진적 정치질서를 수립하는 데 있다. 오늘의 과제는 바로 어디에서 변화의 동력을 찾아, 어떤 방향을 향해, 어떤 방법으로 변화할 것인가에 있다. 변화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올바른 변화’인 것이다.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언행의 자질 4가지
스테이트크래프트에서 가장 먼저 언급할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자아의 완성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자기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특정 후보가 공직자 특히 대통령으로서 이러한 자질과 능력을 과연 갖추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판단할 몇 가지 현실적 근거나 기준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언어구사의 문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바도 있지만, 언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인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은 말의 일관성 즉 ‘원칙 없는 말 바꾸기’를 하고 있지 않은지 여부다. -세 번째 기준은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는지의 문제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난 병폐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인식과 태도에 달려 있다. 자기편에 대해서는 ‘선의’라고 하는 관대한 심정윤리를 적용하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규정을 들이댈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의惡意’를 갖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사고방식 뒤에 도사리로 있는 것이 선악 이분법적 흑백논리다. 마지막 -네 번째 기준은 매사에 신중한 자세와 금도襟度가 있는지 여부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진다는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매사에 두려워하고 삼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통령다운 사회관, 3가지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이해 혹은 사회관 내지는 시민관도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몇 가지 경계하거나 유념해야 할 측면은 첫째, 이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사회관은 그 효력과 타당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전통시대의 가부장적 사회관, 남성 중심의 사회관, 그리고 전체를 위해 부분은 희생될 수 있다는 유기체적 사회관이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관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갈등만을 일으킬 뿐이다. 둘째, 인간의 사회적·공동체적 성격을 무시 혹은 경시하려는 경향은 오늘날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셋째, 사회적 영역과 국가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회는 연대성과 공동체성을 생명으로 하지만, 민주사회에서 이는 어디까지나 자율성 위에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균형 잡힌 국가관
국가관이야말로 스테이트크래프트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중요한 이유는 특정 시대 특정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이 공적 영역으로 승화되고, 나아가 강제력을 동반하여 현실에 시행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국가관을 짚어보면, 무엇보다 ‘헌법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운영에서 이념의 중요성은 결코 경시될 수 없다. 그것이 없다면 방대한 영역에 걸친 다양한 정책의 전반적인 일관성과 통일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운영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념의 힘과 그것이 발휘되는 기제를 잘 알고 다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 지도자의 정직성이 중요하다. 정치이념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대의민주주의와 국민의 직접 참여문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의민주주의가 주主가 되어야 하고 국민의 직접 참여는 어디까지나 이를 보완하는 종從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견제와 대비, 협상의 대북관
우리의 경우, 국가관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과제, 즉 대북정책 혹은 민족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민족통일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국가를 뛰어 넘어설 수 없다는 데 대한 철저한 자각이 필요하다. 다만 현실로서의 국가는 민족을 포함한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라는 용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북한 동포와 북한 당국을 엄격히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 동포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를 갖고 있어야 하며 특히 인류보편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한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식견이 능력이다
대통령이 상당한 식견을 갖추어야 할 분야로서 무엇보다 경제를 들 수 있다. 대통령의 경제관리 능력이란 산업정책을 비롯한 특수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시경제 지표의 관리와 잠재성장률을 관리하는 등 국가경제 전체의 균형성을 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국가의 안전과 직결된 외교안보 분야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 통제력이 강하게 작동되는 국내 정치와 무정부 상태 속의 권력정치 즉 ‘레알 폴리틱스Real Politics'가 아직도 기본적인 특성을 이루는 국제정치의 개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손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안보는 국가의 기본이라는 점을 집권자는 명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국민적 의지를 북돋고 결집시키는 일이다.
장수를 다스릴 줄 아는 군주처럼
전문성과 더불어 중요한 자질이 사람과 조직의 관리능력이다. 다만 인재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지만 결국은 쓰는 사람에 달린 것이라는 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들은 사람을 구하는 데 공을 들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라이벌까지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경력과 도덕성
후보의 경력 자체도 스테이트크래프트를 파악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어떤 화려한 경력을 쌓았는가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해왔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능력을 보여주었는가가 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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