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회심은 역대 모든 기독교인의 구원 사건 중에서 가장 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환상이지만 실제와 똑같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 그를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극적인 회심 사건은 그가 죽을 때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산 후에 사형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울은 회심 후 3년 정도 지난 후부터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쓰면서 신약성서의 저자로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바울과 같이 극적인 회심을 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따져보면 이와 같이 명백한 증표를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전체 기독교인에 비하여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뜨뜻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특히 신앙심이 불타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다보면 자신의 신앙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심지어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게 된다. 그나마 어떤 계기를 통해서 '결단'을 하게 되면 소위 성령에 충만해지기 위해서 투지를 불사르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를 강력히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기적과 같은 증표를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오래 지속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은 구원받은 후에도 인간은 죄의 속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존적 문제는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 자신은 곤고한 자라고 울부짖게 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랴! 다시 말해 아무리 강력한 표적을 받아서 하나님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그 느낌이 지속되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옛말에 작심삼일이라는 표현이 공연히 있겠는가?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바로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 자신은 과연 그러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돌아본다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표적이 주는 믿음의 한계이다. 표적에 기반하는 신앙이 얼마나 쉽게 이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예이다. 따라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거기게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