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 눅22:1-6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번째 제자로서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열한 제자와는 달리 갈릴리 출신은 아닌 듯하며, 주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시던 때의 상황이나, 또는 그전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 무시못할 한 부분을 차지하는 가룟유다, 그에 관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같이 생각해보며 신앙의 유익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유다 1) 본래는 '택함을 받은 자'였습니다. 당시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심히도 많았음을 감안할 때 그 중에서 주님의 제자로 지명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요 특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유다는 남다른 신앙의 열심과 용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모든 환경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을리가 없습ㄴ디ㅏ. 더욱이 당시의 사회를 주도하던 세력들을 모두 주님을 배격하던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후에 주님을 배반하는 인류 최대의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요13:3) 우리는 이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앞날에 대해 스스로 자신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되어 겸손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2) 명예욕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가집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메시야 왕국을 실현시키지 않으시는데 대한 실망과, 두번째로는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놓음으로써 억지로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한 술책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위의 사실들이 정확한 이유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훌륭한 성경신학자들의 주장이고 보면 그저 흘릴 수만은 없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명예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메시야관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요한과 야고보도 그런 명예욕을 드러낸 적이 있었기 대문입니다.(막10:35) 그러나 유다는 그 소욕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3) 물질욕에 사로잡혔습니다. 5절에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돈을 좋아하는 유다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이외에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가룟유다를 돈을 훔치는 도둑'이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요12:4-6) 그는 예수님의 선교단체의 재정을 맡아볼 정도로 회계사무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한편 매우 탐욕스러웠고 물질에 눈이 어두운 자였습니다. (마26:14-16) 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자칫 물질욕에 사로잡히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잠30:8,9) 이러한 물질적 욕구는 결코 복음적이 아니며 예수께서도 정죄하신 바 있습니다. (눅12:16-21)
2.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유다 1) 사탄은 본래 천사장 루시퍼였으나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타락하여 공중 권세잡은 사탄이 되었습니다. (엡2:2) 따라서 그는 오늘날에도 변함없ㅎ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며(막4:15)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부추깁니다. (요13:2,27) 유다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그러나 가룟 유다는 사탄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 조력자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유다가 행한 일련의 악한 행위들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가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슥11:12,13) 2) 사탄은 가장의 천재입니다. 사탄은 때때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고후11:14) 사탄이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로 가장 하였듯이 특유의 천재적인 가장술로 주위 사람들을 교묘하게 기만합니다. (계12:9) 초대 교회의 당시에 복음이 흥왕하던 시절 많은 거짓 선생들이 출현하였습니다. (고후11:4,5) 그들은 선지자나 선생으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헛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간혹 표적과 능력을 베풀기도 하지만 그것은 무리들을 미혹하기 위한 거짓 기적입니다. (살후2:9)
3. 유다의 말로 친구라고까지 불러 주었던 예수님께(마26:50) 배신의 입맞춤으로 답했던 유다(막14:43-45)는 결국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27:5) 무죄한 피를 판 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보았지만 (마27:3,4)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죄책에 대한 진실된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후기 그의 사도 자리는 맛디아가 차지합니다. (시1098)
준비된 유월절 눅22:7-13
유월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말하자면 그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유월절이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명하여 유월절을 준비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순종과 함께 축복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유월절이 이르름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른지라'. 때는 니산월 13일 목요일이었습니다. 이 날 오후에 모든 누룩은 제거됩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이라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어릴 적부터 율법으로 교육을 받으셨으며, 율법이 정하는 규례를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눅2:21) 유월절이 되면 어김없이 예루살렘에 가곤 하였습니다. (눅2:41) 이런 모든 율법에 대한 순종은 공생애를 통하여 계속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복음의 모든 규례를 지킬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권하는 모든 절기들, 특히 주의 만찬은 구별된 성도의 의식으로서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으로서 계속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2. 유월절을 준비케 하심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들어가 그 주인에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먹을 객실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11절) 이 명령은 불확실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불분명하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집에 가서 주인에게 말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그 장소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기를 원했고, 그러므로 그들의 삶이 주님의 섭리와 은총에 의해서 인도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한 존재입니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랑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의해서 인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으나(히11:8) 믿음으로 행함으로 약속하신 땅에 거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에녹이 평생을 통하여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창5:24) 우리에게 부여된 삶의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미리 준비되어 있는 유월절 장소 '그리하여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시하신 곳으로 갔을 때 이미 그 장소는 말씀대로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지시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곧 그대로 행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실망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오늘 유월절 장소를 예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천국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굳게 믿을 때 인간적인 예상과 기대를 초월한 여러가지 축복들이 구속의 은총 속에서 기쁘게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제자들의 철저한 순종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큰 다락방이 보이리니'. 이 다락방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으로서 꽤 넓은 방이었습니다. 이 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 한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불어넣으신 장소였으며(눅24:36) 도한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바로 그 방이었던 것입니다. (행1:13) 순종! 그것은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삼상15:22) 순종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순종=궁극적 축복'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의 등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이성이 맞지 않는다 해도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킬 때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과 성만찬 눅22:14-20
예수께서는 유월절 음식 잡수실 때가 되자 열두제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 놓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이 자리는 인간적으로 구속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날밤의 만찬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잡수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이별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식탁을 중심으로 주님은 당신의 구속사업을 이어나갈 제자들과의 인간적 교제를 나누시면서 음식을 잡수시고 새로운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신 다음에 제자들에 대한 간곡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요14:16)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대속의 날이 내일로 박두해 있었던 이 마지막 밤의 의식은 엄숙한 가운데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 잡수시기를 원하심 1) 제자들과 고별을 위하여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4,15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 잡수시기를 원하신 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고별의 시간을 갖기 위한데 있습니다. 거의가 무학불식했던 그들을 주님은 제자로 삼아 3년반 동안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그들을 가정과 직장에서 빼내어 하루 전부를 교육 받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밤 주님께서 잡혀 가시게 될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자들임을 알고 계셨습니다.(요16:32)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번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 그들이 지금은 약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대사도들이 될 것을 믿고 계셨습니다. (행1:8) 그들은 주님께서 위임하시는 복음 사역을 충분히 감당해 낼 것으로 주님은 믿으셨습니다. 오늘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이런 주님의 마음이 간곡한 고별사를 통해 표현될 것입니다. 2) 마지막 교육을 위하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심에 즈음하여 그들에게 교훈해야 할 간곡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날 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장차 갈 천국에 대하여 (요14:1-14), 보혜사 성령의 보호하심에 대하여(요14:15-26), 하늘이 주는 평안에 대하여(요14:27-31)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요15:1-17) 그들을 핍박할 세상에 대하여(요16:7-15), 그리고 주의 재림에 대하여(요16:16-33)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동안의 제자들의 삶을 염려하여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17:1-6) 이날밤의 고별 순서를 마치셨던 것입니다.
2. 구약의 유월절을 신약의 성만찬으로 승화시킴 1) 민족해방의 기념 의식으로서의 유월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 지금까지 지켜오던 유월절 음식을 이 세상에서는 다시 잡숫지 않겠다는 주님은 말씀은 '유월절'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시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원래 유대민족의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은 출애급 전야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도록 함으로써 천사들의 장자 살륙에서 구원받았던 것이며,이로 인하여 민족의 해방(애굽탈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린양의 살(고기)과 피, 그리고 민족의 해방, 그것이 '유월절'이었습니다. 2) 인류 구원의 기념의식으로서의 성만찬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17-20절) 주님은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유대 민족의 구원이라는 '유월절'의 의미를 넘어서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요1:39)으로서 그 살과 피가 유대 민족의 구원을 가져온 것이라면 예수의 살과 피는 인류의 구원을 가져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는 말씀의 개인적 적용이 '성만찬' 예식으로 상징되었고, 이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그 대속적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애찬의 암초 눅22:21-23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21절). 이 충격적인 선언은 성찬 예식을 마치신 후에,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신 주님의 슬픈 탄식입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앞잡이로 변절한 유다의 양심에 대한 채찍입니다. 그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중에도, 오직 주님을 넘길 계획에만 골몰했을 것입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 성경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유1:12)라고 묘사했습니다.
1. 애찬의 암초 1) 교회내에 존재합니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에 있도다'(21절)라는 말은 유다도 성찬식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화체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다도 주님의 거룩한 몸과 피로 화한 성체를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를 멸망할 죄인으로 여기셨습니다. (마26:24)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격이 있다고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거룩한 혜택 속에서도 악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참된 신앙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타락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의 생명력과 참된 감화력에 의혹을 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 호소는 하시지만 결코 구걸은 하지 않으십니다. 또 구우너에 이르도록 강권하시고 도우시지만, 결코 인간의 최종적인 의지를 억지로 변화시키지는 않으십니다. 절대자가 피조물인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기독교만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내에는 아직 진실하게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악한 동기와 목적에 의지를 귀속시킨 자도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2)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충격적인 선언에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22절)하고 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반은 짐작도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만큼 그는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덕과 신용이 있었기에 열한명의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 사이에서 타지방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재무 관리자로 선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13:29) 이와같이 사탄은 오늘날도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해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벧후2:1) 교회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날 허다하게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는 이 위장된 유다의 암초들을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유다는 천국을 추구하되 '지상의 천국'을, 사랑을 역설하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닌 인도주의를 (요12:4-6), 행복의 길을 모색하되 주님 대신 '물질'을 그 조건으로 여기고 (마26:15), 그 목적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안전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폭력주의와 타협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오늘날 '유다의 암초'를 진리로 추종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암초들을 교회내에 허용하신 것은 위선적인 신앙인들을 가려내기 위하신 심판적인 섭리임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마13:12)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딤전6:3)해야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을 것이며, '믿음과 착한 양심'(딤전1:19)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 신앙호의 돛이요 착한 양심은 나침판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한 자족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딤전6:5-8)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침륜과 멸망에 빠지게'(딤전6:9)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불평과 불만의 틈을 우리 영혼에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틈으로 죄악의 물결들을 들여보낼 것입니다.
2. 암초의 운명 1) 소모품 인생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22절)간다고 했습니다. 즉 유다의 배반에 관계없이 구속의 사역을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인들의 눈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직접적인 동기가 제자의 배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오늘날까지 교회사에서도 풀지 못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지혜요 비밀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의미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섭리의 소모품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화가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나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로다'(22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누구에게나 베푸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마13:44-46)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영생이라는 축복이 임합니다. (롬6:23) 유다는 그 기회와 조건을 은 삼십냥과 바꿨으니, 인생에 이것처럼 큰 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26:14-16)
제자들의 다툼 눅22:24-30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가'하고 다투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진정한 제자의 도는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교훈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칭찬을 들으려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제자들의 욕망 제자들 중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에는 누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한바탕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모습은 자만과 허영심에 가득 차 있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우리 주위에서도 이와같은 자리다툼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교만의 아성, 이것은 인간이 버려야 할 본질적 죄악입니다.
2. 예수님의 교훈 1) 제자들이 이방인의 임금처럼 되었음을 교훈하심 이런 다툼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이방의 임금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백서응 ㄹ주관합니다. 주관하는 일은 그리스도에게보다는 이방인들에게 어울리는 사역인데, 제자들은 이방인의 임금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또 이방인 집권자들은 스스로 은인이라는 칭호를 받기 좋아했는데, 제자들은 이런 어리석은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지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화합하며 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은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심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해서 상당히 곡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실제적으로 제자드르이 발을 손수 씻기심으로 인해 참다운 제자가 세상에 대해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13:5) 만일 우리가 진실로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다툼이나 시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큰 자에 대한 세상의 표준과 하늘나라의 표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성도는 이 세상에 살지만 삶의 방식은 하늘나라의 차원에서 살아야 합니다. 3) 충성을 요구하심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에수님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실수와 연약함을 눈감아 주시며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고 칭찬하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하더라도 충성된 삶을 살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십자가와 면류관은 이처럼 성도 앞에 함께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입니다. 따라서 면류관을 선택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각오해야 하며, 자의든 타의든 십자가를 선택한 사람은 면류관을 소망해야 합니다. (롬8:17) 이렇게 볼 때 성도는 외적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자이나 내적으로는 기쁨이 넘치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가 참으로 부요한 자입니다.(고후6:7-10) 4) 축복을 약속하심 ① 영적 권위를 주심: 그리스도께 충성된 봉사를 할 때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심같이 제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진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위는 다툼이나 폭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봉사를 통하여 무언 중에 사람들로부터 위임 받아야 합니다. ②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심: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충성된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천국을 유업으로 허락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섬기는 일을 다할 때 그 보상을 하늘에서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친구나 부모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천국잔치에 동참케 된다는것은 더 없는 영광이며 비길 데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눈물은 씻겨질 것입니다. ③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제자들은 이 세상의 상석을 원했으나,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의 보좌를 주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이 세상에 한정되어서는 안 되며, 눈을 열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눈에 어두운 나머지 자신에게 주어질 놀라운 축복들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축복과 영광과 권세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들을 성취받기 위해서는 앞에서의 주님의 명령을 우리는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세 종류의 열정 눅22:31-34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그 신앙이 곧 실족하게 될 것을 예언하시고 따라서 신앙 자세를 정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사탄의 집요함과 인간들의 무지함, 그리고 지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상고함으로써 영적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1. 사탄의 악한 집념 1) 인생들을 파멸로 이끌고자 함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31절)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특별히 거듭 부르신 것은 우월감으로 해이해진 그의 심령에게 각성을 주시고자 함이었으며, 그를 통해 모든 제자들에게 사탄의 시험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탄은 이미 가룟 유다를 자신의 수하로 삼았으며(3-6절) 이제는 명예욕을 통하여(24-27절) 남은 제자들마저도 신앙의 길에서 파멸시키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딤전6:3-9) 이와같이 사탄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오직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불신앙인들이나, 거짓 신앙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시21:4)사탄이 까부르는 바람에 휩쓸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훼방함 주님께서는 이어서 사탄이 제자들에 ㅔ관한 송사를 주님께 청구하였다고 하셨습니다.(31절) 사탄은 항상 우리의 죄와 흠을 가지고 하나님께 송사를 합니다.(욥1:6-11)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를 시행코자 비록 사탄의 비틀린 심보를 아시지만 인간의 죄악에 대한 송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시험을 마치신 후 송사 결과 인간이 온전이 사탄에게 속한 자임이 판명되면 사탄이 청구하는대로 그의 영혼을 '사단에게 내어'(고전5:5)주십니다. 사탄은 그와같이 하여 가룟유다를 얻었고, 이제는 남은 제자들의 결점을 송사하여 그 영혼들마저 자기 것으로 삼고자 청구하는 것입니다.(욥1:8) 이와같이 성도된 우리들의 부덕함이나 불충한 생활은 우리에게도 해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업의 걸림돌이 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10:5)고 했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의 유한한 열정 1) 무지한 의욕 이와같은 주님의 경고에도 각성하지 못하고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로'(33절) 갈 각오가 되었다고 장담했습니다. 이와같은 의로운 욕구는 선한 것이기는 하지만 (딤전3:1) 근본적으로는 무지한 소치입니다. 그는 인생의 본래적인 타락성과 자신에게 닥칠 사명적인 고난과 그리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엡6:12)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장담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 종 된 사명의 길을 계획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각오가 과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산출된 것인지 냉정하게 검토해 봐야 할 것입니다. (눅14:25-33) 2) 불순한 동기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가장 충성된 신앙을 가진 자인가?'라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24절) 이는 주님께서 곧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의 왕이 되실 것으로 생각하고, 최고 각료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마20:20-23) 따라서 베드로는 이번 기회에ㅔ 주님을 도와 공을 세움으로써 (눅22:50) 자신의 신앙적 우월을 과시하고 수석제자로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인본적인 의도를 아시고 '베드로야…오늘…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34절)고 깨우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외면하고서는 삶의 참된 성공과 승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고후4:2)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과 믿음의 진위는 고난과 희생의 환경이 닥칠 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의지 1) 지켜 주심 이와같은 제자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32절)하였다고 주님께서는 위로해 주셨습니다. 비록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고자 송사하지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는 이와같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롬8:34)해 주십니다. 2) 지혜로운 섭리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언대로 사탄의 시험에 넘어졌으나, 그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연단하시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오순절 성령 충만하심을 입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전보다 더욱 순수하고 굳건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헌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최후의 교훈 눅22:35-38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의 최후의 교훈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나눈 유월절 만찬석을 떠나셔야 할 시각이 다가옴을 아시고 마지막 교훈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게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처형이 되었을 때 그 이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새로운 운명에 대해서 각오를 일깨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을 때의 제자들의 삶과 주님께서 떠나시고 난 후의 제자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젠가 그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처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10:16)라고 하신 때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와 함께 있을 때 1)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35절) 주님의 이 말씀은 전에 열두 사도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셨을 때를 상기하신 것이라고(마10:5-10)생각되며, 동시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생활하던 전 기간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에 나가건 주님과 함께 있건 그것은 모두 주님의 실제적인 보호와 능력 아래 있었을 때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지낸 생활 가운데서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풍족히 공급받은 것입니다. 2) 주의 은혜 아래에 있는 풍족함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는 풍족함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1:7-9)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풍족함은 영적인 것인 동시에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풍성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 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저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8-9)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은 은혜이며 진리이며 대속의 사랑입니다.
2. 예수께서 떠나고 안 계실 때 1) 성령의 보호와 인도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서 이 세상에 안 계실 때를 염려하셔서 여러가지로 말슴하실 때 특히 성령께서 보호하실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요14:15)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것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따른 것이지만 그것은 제자들을 통한 복음 사역을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하나님의 조처이기도 했습니다.주님은 이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ㅔ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제자들의 복음 사역의 능력과 인간의 회개와 믿음등이 성령 강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 자기보호의 필요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없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와 멸시를 주님은 생각하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말씀하셨으나, 본문에서는 자기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교훈에서 우리는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령의 보호와 인도에 의존해야 하나, 또 한편 인간으로서 해야 할 최선의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십니다. 3) 계시를 이루는 생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37절)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 가운데 특히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신 말씀은 그것이 '검'으로서의 물리적인 사용을 뜻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만 이사야 53장12절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날 밤 베드로가 준비했던 검을 사용했을 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계시를 이루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생활화, 그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고뇌의 기도 눅22:39-44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평소의 습관을 따라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기도는 특별한 기도로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던 예수께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하여 갈보리 구속의 역사를 감당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역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습관적인 기도생활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평소에도 감람산에 자주 기도하시러 가셨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정이 사는 길도, 교회 부흥의 길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도 기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살전5:17)기도명령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무것도 하지말고 기도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곧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은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킵니다.
2.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기도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의 자리에 드리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다가오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그런 시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죄악된 자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은 성도의 신앙을 앗아가는 마귀의 고등 책략이지만 기도하는 성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3.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께서는 기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기도하셨습니다. 마치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과 격리되어 기도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따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 처소는 바로 구약의 지성소의 성막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조용한 골방의 기도(마6:6) 즉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하는 장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골방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의식적인 행위를 방지케 하여 줄 뿐만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즉 응답받는 기도가 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마6:6)
4.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지니신 인간 예수의 간구는 인간적 고통이나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사욕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긴다고 고백합니다. (시40:8) 그런데 우리들은 자주 하나님의 뜻 행하기 보다는 나의 뜻 행하기를 즐깁니다. 인간의 모든 뜻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 도우시는 기도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올리는 그때 연약한 몸을 지닌 예수님을 천사가 내려와서 도와줍니다. 우리의 기도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없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미사여구의 나열은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기도해도 성령의 인도없이 기도한다면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없이 기도할 때 인간의 바벨탑만 높아가 결국 그 교만함으로 인하여 신앙적 파탄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성령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롬8:26,27)
6. 간절히 드리는 기도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는 말은 그만큼 애써 기도하셨기 때문에 땀에 피까지 섞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감람산의 기도는 수난의 일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에서는 육신의 피를 흘리셨으나 감람산에서는 영혼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끈기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예수님처럼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도가 지니는 최선의 특권입니다.
상실한 기회들 눅22:45,46 본문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필사의 기도를 하시던 중, 안일하게 잠든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곧 도래할 위기에 대비해 기도할 것을 권하시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고통에도, 또 자기들에게 닥쳐올 위기에도 무관심하고 깊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고 했습니다. 과연 제자들이 어떤 기회를 상실했는지 상고함으로써 주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된 기회들을 십분 활요하는 지혜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안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막14:33) 따로 데리고 갔다고 했고, 마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마26:38) 기도하자'고 부탁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누가만이 그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39,40절) 초대 교회의 양대 산맥인 바울과 베드로의 사이에서 베드로의 결점이 되도록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던것으로 보았습니다.(딤후4:11) 여하튼 열한 제자 중에, 주님과 함께 구속의 사업을 위해서 기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중 누가 크냐'?(24절)하는 의제로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로 가기를 준비(33절)했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주님께서 고뇌하시는 중요한 시기에는 모두 잠만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겟세마네의 기도에 진실로 동참한 인물이었다면 성경에도 기록되고, 교회사에서도 가장 충성된 사도라고 인정받아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수석제자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관심에 무관심한 자세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귀히 쓰는 (딤후2:20)이 될 수 없습니다.
2. 봉사의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제자들은 본래 자기들의 생활을 위해서 밤새도록 힘든 그물질을 예사로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복음의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는 피곤함을 못견뎌 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과 내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태도의 주된 원인은 아직 제자들이 희생과 봉사를 기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신앙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숙된 신앙인격의 소유자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봉사적인 자세로 기도하며 기꺼이 희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와 같은 봉사적 삶이야말로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진실한 청지기적 삶입니다. (눅12:41-42) 그리고 봉사하는 것은 장래의 축복을 쌓아놓는 것이며(마6:19,20) 무엇보다도 봉사하는 자의 인격이 그리스도화 되는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짜들은 이와같이 봉사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상실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을 더 뵐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자주 오신 것을 모르고 잤습니다. (45절) 마가는 주님께서 세번씩이나 기도중에 오셨다고 기록했습니다.(막14:37-41) 이와같은 주님의 태도는 긴박한 수난 전에 조금이라도 더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게'(딤후3:14) 하려 함이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시작하신 때와 체포되신 때까지의 시간적 여유는 불과 한 시간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이 죄악 세상에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진리로 무장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시84:10)낫다고 한 것처럼 주어진 짧은 삶 속에서 항상 주님과 교제함으로써 진리 안에 깨어 있다가 장차 '인자 앞에 서도록'(눅21:36)해야겠습니다.
4. 삶의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잠들어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절)고 권고하셨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슬픔을 인하여'(45절) 잠들었다고 했는데, 이와같은 그들의 슬픔은 ① 동료가룟유다의 배신이 확실해 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요 ② 거듭하시는 주님의 자신에 대한 죽음의 예언과 성찬식(20절)의 숙연한 분위기 ③ 또 제자들이 모두 배신할 것이라는 불길한 경고 등 이 모든 일들이 복합적으로 저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3년동안 주님께로부터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눅18:1) 삶의 자세를 교육받은 것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혹자는 '자기 삶에 기도도 할 수 없을 만큼 절망감이 닥쳐올 때 그때가 가장 기도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와 같은 시기를 상실한 결과 불의와 죽음과 (49-54절), 자기 자신(56-62)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입맞춤과 제자들의 실수 눅22:47-53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며(46절) 특별히 기도를 당부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열두 제자중의 하나인 가룟유다가 한 떼의 무리를 동반하고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무리는 다름아닌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로서 주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유다의 안내로 찾아온 것입니다. (52절)
1. 유다의 입맞춤 1)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유대 민족들에게는 남녀간의 입맞춤은 물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도 사랑과 우정의 표현으로서 입을 맞추는 풍습이 있습니다. 따라서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아8:1), 우정(삼상20:41),복종(호13:2), 순종(시2:12), 일치(시85:10), 화해(창334)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유다의 입맞춤은 그러한 본래의 입맞춤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팔기 위한 신호의 한 방편으로서 입맞춤을 한 것입니다. (마26:48) 그 입맞춤은 요압이 아마샤를 살해하기 전에 입을 맞춘것과 같은 원수의 입맞춤입니다. 2) 탐욕의 입맞춤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슥11:12) 물질욕에 사로잡힌 그는 미리 무리들과 군호를 짠 대로 주님께 입을 맞추었고, 그로 인해 주님은 체포되었으며, 유다는 그 대가로 은 삼십을 얻게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입을 맞출 때 유다는 이미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입맞춤은 본래 순수한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곧 그의 입맞춤은 탐욕의 입맞춤 그것이었습니다. 3) 파멸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입맞춤의 신호를 통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는 얼마후에 엄청난 죄책에 빠졌다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27:5)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님과 입을 맞추었지만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로 인해 인생의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만 것입니다. 유다, 그의 입맞춤은 파멸의 입맞춤이 되었습니다.
2. 제자들 1) 그는 육신적이었습니다. '검으로 치리이까'(49절) 제자들은 몰려온 무리들을 대항해서 준비한 검으로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자칫 무리들과 제자들과 전투라도 벌어질 기세입니다ㅏ.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주님은 잘 아십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면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육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려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2) 육신적인 방법은 실패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이루려 하다가 가족으로부터 도망을 쳐야 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창27:42-45) 마찬가지로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제자들은 한편으로 검을 가지고 싸워서 주님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의지 자체가 인간적이요 육신적인 것이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곧 예수님을 버려두고 모두 도망챠ㅕ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마26:56) 제자들은 자기들이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실패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려 할 때 결코 인간적이요 육신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적도 결과도 방법도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은 모두 실패하고야 맙니다.
3. 주님의 반응 1) 이것까지 참으라 제자 중의 하나가(요한복음에는 베드로로 기록되었음)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50절) 제자의 그 행위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당연한 것입니다. 즉 정당방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51절)고 하십니다. 그것은 '인내'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븐은 말로만 인내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속에서 '인내'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삶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2) 치료하시는 주님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51절)는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말할 수 없는 수욕과 십자가 형벌이 곧 있을 것임을 잘 아시면서도 그를 잡으러 온 자의 상처와 아픈 마음을 치유하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도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사랑을 베푸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타락 눅22:54-62 본문은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보여 준 인간적 연약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과 모순된 신앙을 발견하면서 은혜를 얻겠습니다.
1. 베드로의 실족 1) 미온적인 신앙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라간 행위는 칭찬받을 만한 용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나마 다 도망가 버렸으나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가는 미온적인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곧 베드로를 실족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성도라고, 주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삶은 예수님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때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설교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유두고는 졸다가 그만 떨어져서 죽게 됩니다. 이 미온적인 신앙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칩니다. 미온적인 신앙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불성실일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하신 주님께 실망을 안겨다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지고 주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3:15) 2) 불신자와 어울리는 신앙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베드로는 새벽녁에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뜰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는 무리들 틈에 끼어서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불신자와 함께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타협할 대 급기야 타락은 시작되며,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불신앙과 타협할 수 없으며, 비진리와 함께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말로는 신앙인이라고 직분자라고 외치면서도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죄악된 세상과 벗하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을 자행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어차피 세상과, 그리고 죄악과 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성도는 그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여 이 세상에서 죄악의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풍기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을 부인하는 신앙 베드로가 모닥불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을 때, 한 소녀가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 말을 인정할만한 용기도 없었고, 또한 그 말을 슬쩍 받아넘길만한 마음의 여유나 재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간단하게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부인하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때 주님앞에서 담대한 신앙을 고백했었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잘랐으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위를 걸었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무시로 우리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 순간 어떻게 주님게 충성해야 할지 생각하고 기도하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베드로의 회개 1) 주님의 부드러운 눈길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는 순간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는 눈길이었습니다. 훈계하고, 질책하는 눈길이었으며, 사랑과 연민의 눈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설혹 그리스도를 부인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경책과 사랑의 눈길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음성을 기억함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이 때 닭 우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베드로가 베드로되게 하였습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자신이 미워졌습니다. 자신만만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저주스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말할 수 없는 송구스러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3) 통곡하며 회개함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 자신의 죄악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베드로처럼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베드로의 통곡, 진정한 회개를 거울삼아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죄악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구세주의 참된 모습 눅22:63-71 본문은 주님께서 대제사장 관저에서 하속들에게 밤새도록 수모를 당사신 것과 새벽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불의의 재판을 받으신 사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누가는 주님의 참된 메시야로서의 인격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이 짙어갈수록 그 진가를 더욱 나타내는 법입니다. 유대인들의 죄악과 불의속에서 홀로 거룩하신 구세주의 모습은 더욱 그 빛을 발합니다. 상고함으로써 주님의 거룩하신 표상을 살펴보겠습니다.
1. 참된 선지자의 직무를 감당하심 1)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 제사장 안나스에게 일차로 심문 당하신 주님은 그 후 가야바에게 이차로 예비심문을 당하시기위해 이송되셨습니다. (요8:24) 누가는 주님을 감시하는 하속들이 '희롱하고 때리며, 눈을 가리우고'(63절) 주님을 상대로 소위 '장님때리기 놀이'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놀이는 술레가 때린 자의 이름을 알아 맞추지 못하면 계속 맞아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64절) 주님께서는 자기를 치는 자들이 누구인지 능히 아시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요1:47-49) 그리고 그들의 이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들과 그들의 깊은 비밀까지 들춰내심으로써 그들은 놀라게 하여 수모를 모면하시고,나아가서 그들을 주님의 수하들로 삼으실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치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사53:7)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인내는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4)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명 감당에서 기인합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인내는 참된 선지자의 의식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늘 하나님의 뜻과 경륜으로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복음의 영적 진리를 자주 외면하고 이 시대의 상업주의 사조에 아부하고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봐야만 합니다. 2) 인생들을 교훈하심 누가는 하속들이 밤새도록 주님께 '많은 말로 욕하더라'(65절)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했던 베드로 사도는 후에 증언하기를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벧전2:23)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삶의 위기와 고난 속에서 이와같은 주님의 자세는 참된 선지자의 표상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의미를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벧전2:21)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선지자란 불의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인생들로 하여금 바르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참된 행복과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 무엇인가 무언으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지독한 근시안적인 사고의식을 가지고, 매사를 보복과 폭력으로 처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의 유일하시고 참된 선지자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 평화의 길을 사랑해야 합니다.
2. 참된 제사장의 위치를 지키심 종교지도자들은 날이 밝자마자 주님을 '공회로 끌어들여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67절)고 주님을 심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저희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신 후에 (68절)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고 답변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실 세시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단7:13,14) 으로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신 대제사장 직분을 친히 확증하신 것입니다. (마20:28) 따라서 인생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사를 믿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순종의 제물로 응답해야 합니다. (히9:7-10) 그런데도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을 '끝까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대답치 아니할 것'(97,68절)이라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을 보면 그들은 겉으로는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사실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상태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3. 참되신 왕의 권위를 보여주심 주님께서는 공의회원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71절)고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같은 시인은 불의한 공회원들에게 신성모독죄의 구실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비굴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담대함은 만왕의 왕임을 확신하신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확신은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심으로 유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8:28,29)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본받아 삶의 불행함 속에서도 이제 후로는 내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 아래에 앉아 있으리라'고 하는 희망을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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