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보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략)
선생의 작가적 위상이나 우리 미술계에 미친 공적과 영향 면을 떠올려보면 국가 차원이나 전미술계가 의미있는 추모 행사를 마련해야 마땅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나 하고 안타갑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운사회(운보선생에게서 직접 사사받은 제자와 선생의 감화를 받은 후진들의 모임)가 조촐하나마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로 회원전을 마련하였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몇 작품과 회원의 작품이 한 자리에 전시되는 행사로서 구차한 변명이지만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는 갖추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후략)
오광수
위는 운보 김기창화백의 탄생 백주년을 기리는 <운보백년의꿈전>에 기고한 원로 미술평론가 오광수 선생의 글이다.
운보선생은 주지하다시피 보통학교에 들어간 8살 때 장충단 공원으로 봄소풍을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청력을 잃은 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웃에 살고 있는 이당 김은호화백의 문하에 들어가 장애를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17세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집안을 책임지는 어려운 환경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지금처럼 사회복지제도가 잘 구비된 21세기 환경에서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때는 더 말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스승 이당의 보살핌으로 그림도 팔아가며 노력한 결과 천재성을 발휘하여
그 당시의 국전에 해당하는 선전에 도전하여 여러 차례 수상을 하고 화가로서의 위치를 다져가게 되었다.
오원 장승업이 임금에게 인정을 받아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나
이당 김은호선생이 고종에게 인정을 받아 어진을 그리면서 궁궐 안에 있던 고관대작들(그 당시의 실권을 쥔 세력가)과 친해지는 것처럼
운보도 당시의 등용문인 선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당시의 문화 향유세력인 미술계 인사와 신문사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그 당시에 화가로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란 선전에서 상을 타고 신문잡지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21세기 오늘날과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날은 상을 받기 위해 국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들과 음으로 양으로 인맥을 쌓고 수상을 위해 몇 백만원에서 천만원 대에 이르기까지
뒷돈이 오고가는 부끄러운 일까지 관행이 되는 바람에 결국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국전을 폐지해버리고 미술대전으로 개명하게 되었었다.
국전이 30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한국미협에서 그 공모전을 이어받아 미술대전을 개최하고 있는데
미술대전도 30회를 치루면서 여러가지 부작용을 말하는 이들이 있는 걸 보면 사람이 하는 일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의 생각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가 보다.
선전은 그 당시 이당 선생이 영향력을 가졌을 때라서 후소회원들의 등용문으로 삼기에 좋았다.
국전이 홍익대 출신 학생들의 등용문이 되어 홍익대에 미술지망생들이 많이 진학하려던 것처럼
그 당시는 후소회가 미술 애호가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때라서 이당 선생의 洛靑軒과 以墨會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왜정 때의 상황이라 당시의 고관들이나 문화 향수 세력은 총독부나 친일 고관들의 영향 아래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정치인인 이완용도 있고 궁궐의 고관들도 언론인도 문인사대부도 이묵헌과 친했다.
이당과 마지막까지 친했던 문인으로 <가고파><봄처녀>의 鷺山 李殷相을 들 수가 있다.
이당은 그들의 후원으로 금강산 여행, 북경 여행, 일본 유학 등을 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화가들의 콜렉터라면 그들을 뺄 수 없다.
1913년생인 운보는 20대말인 1940년경부터 민족적이고 개인적인 위기의 시기에 빠져든다.
그 당시 선전에서 연4회 특선을 하고 상을 받으면서 鮮展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 때쯤 중일전쟁이 격해지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서 일제의 전쟁 홍보와 국민수탈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이때 끌려간 여성들은 견딜 수 없는모욕을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고통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여성들이 돈을 벌려고 전쟁터에 갔다는 것은 일본측의 궤변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징용에 징병을 당해 전쟁터로 끌려갔으며 학생들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끌려 나갔다.
일부는 징병을 피해 총독부가 요구하는 군수품 제조 공장이나 그와 관련된 곳에서 일을 하며 목숨을 연명했다.
문인과 교수 예술가들은 전장에 가는 대신 전쟁을 고무 선전하고 조선안의 참전의지를 독려하는 여러가지 창작물을 내놓아야 했다.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글이나 그림은 발표를 하기 어려웠지만 전쟁참여를 독려하는 창작물은 강요받는 대로 신문 잡지에 올랐다.
그 당시의 정부는 총독부였으니 정부에서 하는 일에 적극 참여를 종용하며 전쟁의 기운을 부추기던 때였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총독부 몰래 독립군을 지원하다가 잡혀서 죽거나 감옥에 가는 일이 많아졌고
일부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사람들도 국내에서 견디지 못하고 만주로 상해로 탈출할 때
국내에 남아있는 유약한 문인 언론인 교수 작가 예술가들은 총독부의 하는 짓을 수수방관하고 따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독립을 낙관하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심지어는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 선수는 조선이 독립하지 못할 거라고 믿기까지 했다.
어쨌든 28세의 청년 김기창은 선전 추천작가 자격으로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30세 때에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했었다. 또한 그는 이당, 청전이 심사위원 으로 참여한 일제 말 친일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월전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이 전람회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전쟁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선전하는 도구로 개최된 것이었는데, 이 당시 화단에서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라면 총독부의 강요에 의해 그림을 내야 했었다. 누군가는 핑계를 대고 내지 않기도 했으나 청년 김기창의 입장에서는 막 선전 추천작가가 되어 정부에서 개최하는 전람회에 그림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초년생 추천작가 주제일뿐 아니라 귀머거리 벙어리인 자신을 오늘까지 키워준 이당과 청전 등 선배들이 참여하는 전시회에 그림을 내지 않을 수도, 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총독부 주최의 전쟁독려 선전도구였으니 친일활동에 속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정부의 문화 예술 지원 겸 시국 홍보 정부행사였으니 청년작가들에게는 그림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29세 운보, 30세 월전 청년 작가들에게 독립운동은 언감생심, 작가로서 성공하는 과정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며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6.25전쟁을 기억하자는 전쟁포스터가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초등학생들을 정치적으로 전쟁 반대파라고 재단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 당시를 살던 우리 민족은 그것이 정부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생명 보존의 시민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화가에게 선전에 내면 친일파라고 매도하며 다른 전람회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화가는 그냥 죽으라는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붓을 꺾은 화가는 없다. 누구나 선전에 내서 상을 타려고 했다. 당시의 화가는 모두 잠재적 친일파일까?
선전 심사위원들이 일본인이 많았고 선전작품의 주류는 일본화풍이 많이 섞였으니 그렇게 그려야 상을 타게 된다.
그렇게 그린다고 탓할 수는 없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모전에 그림을 내는 목적이
심사위원들의 눈에 맞게 그려서 상을 타는 것이지, 심사위원들을 내 수준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지극히도 예외적인 일이다.
이건 오늘날의 공모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8세 29세의 운보 월전이 스승과 그분의 친구들이 주관하는 전람회에 작품을 내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못할 각오를 하고 스승을 배반할 용기는 있는지 묻고싶다.
운보 월전이 작품을 낸 반도총후미술전은 3년간 개최되었고 운보 월전은 스승을 따라 출품했다.
물론 인물화의 대가들이니 그 그림은 총독부의 요구에 맞게 실감이 나도록 그렸고 그것이 전쟁화나 전쟁독려의 그림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당시 정부의 요청으로 모든 화가들에게 강요해서 그려진 것이며 벙어리 운보가 정치활동을 하려고 그린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적극적으로 친일하고 조선을 죽이고 자신만 살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자신만 살기 위해 일본에 대항하지 못한 사람을 친일파라고 하기엔 그 대상이 너무 많고 애매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자기가 가고자 하는 분야의 정부에 누군가가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 정부는 친미파 친일파가 장악하고 있어서 안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기는 있는 걸까?
조선을 일본에 넘긴 을사오적은 물론이지만 순종황제도 왕족으로서 전쟁독려 반도 순회연설에 동행했던 것을 친일이라고 봐야 하는가?
영친왕이 일본에 가서 천황의 가족과 결혼하고 천황을 위해 맹세하고 훈련받은 것을 친일이라고 보아야 정상인 건가?
친일파 명단에 순종황제와 영친왕, 방자여사가 올라가야만 정상인 건가?
이당 선생은 19살에 고종황제 어진을 그릴 때에 당시의 궁궐 고관인 윤덕영·윤택영 민영익 민영휘에게 도움을 받았다.
한일강제 합병이 이루어진 바로 그 다음해의 일이다.
고종황제는 일본인 사진사가 당신 곁에 오는 걸 싫어해서 해강 김규진에게 일본에 가서 사진을 배워오라고 유학을 보냈다.
또한 일본인 화가가 당신의 영정 어진을 그리는 것이 싫어서 열아홉 어린 이당에게 당신과 순종을 그리도록 했다.
이때 인천 출신 어린 '양은'이는 궁궐법도를 몰랐으므로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의 조언을 듣고 윤덕영에게 도움을 받아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당은 궁궐 안에 있던 권세가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친일파가 된 셈이다.
당시 궁궐 안에서는 친일파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모두 죽거나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고종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특사를 보낼 때 주변사람들 몰래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린 이당은 자기도 모르게 친일파가 된 셈이지만 운보까지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앞뒤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이다.
인물화가인 이당은 궁궐 안에서 역대 임금의 어진과 궐내의 고관들의 초상화를 수없이 많이 그렸다. 물론 일본인도 포함해서 ...
그러나 인물화가인 이당이 남긴 전쟁 그림은 오늘날 볼 수 없다. 전쟁냄새가 안난다고 일본인에게서 타박을 들었던 가족이 둘러앉아 하모니카를 부는 그림이 전쟁독려화라고 친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억지다. 그것을 두고 친일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면 이는 침소봉대의 전형일 것이다.
금비녀를 뽑아 정부(당시의 총독부)에 바치는 그림이 전쟁부역의 의미가 있다고 친일이라고 한다. 그건 말이 된다.
궁내에서 도움을 많이 줬던 그 고관의 부인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부탁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다 그린 그림이니 인정할 수밖에.
그러나 단 몇 개의 작품을 가지고 친일작품을 그렸으니 이당선생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궁색하다.
사실은 그 애매한 그림 몇 점이 아니라 친일파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서 친일파라고 하는게 오히려 덜 궁색해 보인다.
그 당시에 일본은 문화적으로 선진국이어서 출세하려면 누구나 일본유학을 갔던 동경의 대상이기는 했어도... 친일이라면 친일이다.
이당은 3.1운동 때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골목골목 다니며 돌리다가 일경에게 뒷머리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을 만큼 조국을 사랑했지 일본을 위해서 산 분은 결단코 아니다. 선생은 그 기록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혹자는 출감 후에 변절하였다고 말하지만 이처럼 무책임하고 대충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유언비어를 살포하는 더 위험한 사람이다.
이당 선생은 궁궐에 들어갈 때부터 윤덕영 민영익 등 궁궐 내부의 고관 친일파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3.1운동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태극기를 돌렸던 사람이다. 그 후에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출감후에 변절하여 친일파와 가까워졌다느니 감옥이 무서워서 친일파로 돌아선 것이라느니 하는 말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다.
이당은 태극기를 돌릴 때부터 각오하고 작정한 일이었는데 감옥이 무서웠다면 아예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옥에 가서 반 년 고생해보니 안되겠다 싶어 돌아서거나 할 만큼 유약한 분이 절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운보의 경우는 확실히 다르다.
주변에 친일파가 많아서 친일파도 아니고 이당이 친일파라서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 것도 아니다.
운보가 태어난 집이 돈화문 앞이었으며 이당이 살던 곳도 돈화문 앞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당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 것이다.
더구나 운보 어머니의 진명여고 동기생 중에 이당 선생의 제자인 향당 백윤문의 누나가 있어서 함께 이당선생에게 가게 되었다.
그런데 운보의 천재성과 불우한 환경 때문에 이당이 특별히 보살펴준 것은 사실이다. 누군들 측은지심이 있다면 안 그러겠는가?
운보 역시 인물화가로 성공한 사람인데 그가 그린 수많은 작품중에 궁색하게도 소품 몇 장이 친일파라는 단서로 제시되곤 한다.
그것은 반도 총후 미술전에 냈던 작품과
매일신보의 이른바 <님의 부르심을 받고>라는 글에 삽화로 올라간 작은 스케치와
식산은행의 사보인 <회심>지에 삽화로 실린 <병사>라는 스케치와 <노인>이라는 스케치이다.
이 그림들만 가지고 운보를 친일파로 호도하는 것은 어이가 없을만큼 지나치다.
운보가 얼마나 다작을 했는지 그를 욕하는 사람까지도 다 안다. 신문 삽화만으로도 책이 몇 권 나오는 작가인데
열 점도 안되는 단 몇 점의 스케치를 들어 이 작가가 친일작품을 그린 친일파 작가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호도행위이다.
그나마 정부주도의 총후전람회 결전미술전람회 출품작 외에는 여기 저기 스케치하며 그린 노인과 군장 메고 쉬는 군인을 그린 스케치인데
운보와 친하게 지내던 선배기자가 화실에서 발견하고 거의 빼앗다시피 가져가서 신문에 삽화로 이용하였던 소품이다.
이것을 높이 치켜들고 "이것이 친일작품이니 운보는 친일파다"라고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감추려고 , 아니면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렇게 외치는 것인지 한심하게 보일 정도이다.
자신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벙어리 화가라면 붓을 꺾고 시골에 가서 소나 쳤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 소가 농사를 지어도 일본이 수탈해서 전장으로 보내면 어차피 군수물자를 지원한 꼴이라서
너 역시 침략전쟁에 군수물자를 제공한 친일파라고 매도한다면 수긍할 자신은 있는가?
여기에 이용된 소위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와 <노인>과 <병사>는 한 가족의 비극을 옆에서 보고 그린 스케치이다.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살고 있는 이웃집에 어느날 징병소집명령을 받고 한 손자가 전쟁터로 나갔다.
그 손자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두번째로 징병영장이 날아와서 두번째 손자도 나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두 번째 손자를 보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손자의 어깨띠에는 태평양 전쟁 참여를 고무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祝 入營 ...>
운보는 이 이웃집의 비극을 스케치했고 앞의 그 선배 기자는 자신의 글에 올릴만한 삽화로 운보의 이 스케치를 택한 것이다.
운보의 눈에는 안타깝게 보이던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민족의 슬픔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이 기자와 요즈음의 일부 인사들은 이 그림이 일제의 부름에 감격하여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으로 친일작품이라고 한다.
보는 눈이 다른 건지 보는 마음이 다른 건지는 각자가 판단하리라 생각하고 여기에 옮겨본다.
우선 1943년의 매일신보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기사에 삽화로 실린 스케치이다.
운보의 눈에 비친 이웃집 안타까운 사연이 전쟁독려의 그림이라고 이용되었다.
그림 속 할아버지 할머니 청년의 표정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전장에 나가는 기쁨이나 전의가 보이는지
식산은행 사보인 <회심>지에 실린 스케치 <노인>
이 노인의 표정에서 전장에 나가는 손자를 보내는 안타까움이 보이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 참여 독려의 선전선동적인, 천황에게 보국충성하려는 감사의 눈빛이 있는지를 보자.
아니면 형의 뒤를 따라 전장에 끌려가게 된 손자를 보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식산은행 사보인 <회심>지에 실린 스케치 <병사>
쉬고 있는 이 청년의 표정이 전의를 불태우는 눈빛인가 아니면 형의 뒤를 따라 전장에 끌려가게 된 한 청년의 고뇌에 찬 표정인가
이상의 그림들은 정말 작은 스케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친일 전쟁 독려의 친일행위라고 몰아 붙이기는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회의가 늘 함께 했었다.
그러다가 아래의 그림이 나왔다 이거야말로 전쟁터의 병사를 묘사한 뛰어난 전쟁그림이라고 볼 수가 있다.
또 병사의 눈빛도 살기가 번뜩이는 전쟁화로 실감이 난다. 인물화가인 운보의 묘사력과 구도가 상을 줄 만 하다.
이거야말로 친일행위라고 확증을 잡은 것처럼 말하는데 ....
정말 전쟁화를 실감나게 그리면 친일이고 ... 반대로 멍청하게 그리면 친일이 아닌 것인가?
위 그림은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은 작품<적진육박>이라고 한다.
반도총후미술전은 일제 총독부에서 전쟁독려와 학병 징병의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로 기획한 전람회이니
거기에 그림을 내서 상을 타면 친일이고 거기에 그림을 안내면 친일파가 아니란다.
정말 그런 정리는 객관적으로 참된 정리인가?
만 서른 살 벙어리 화가 운보 김기창은 이 그림을 출품하여 상을 탐으로 해서
인물화가로서 확실히 인정받게 되는 동시에 친일파로 확실히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운보 김기창의 만 여점의 그림 중에서 이 그림 몇 장이 없으면 그는 친일파가 아니고
만 몇천점 중에 이 그림 몇 점 때문에 그는 친일파라고 한다.
사실은 반도 총후미술전람회에 그림을 낸 자체가 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전시회에 그림을 낸 그림은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데 동참한 그림이라고 한다.
운보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학병으로 나가라는 기원을 담아 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인가 보다.
아니 꽃 그림이나 산수화는 괜찮은데 전쟁그림이니 친일이라고 한다면 그는 또 인ㅁ물화가에게 불리한 잣대이다.
정부에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면서 여기에 맞는 그림을 그려 공모전에 출품하라고 할 때
꾀를 부리고 꽃 나비를 그리면 될 걸 왜 전쟁하는 그림을 그려서 친일파가 되었을까.
그것은 정녕 친일하려는 행위인가, 심사위원의 요구에 맞춘 정상적인 청년화가의 창작행위인가?
아마도 인물화가 청년으로서 정부의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수상할 수가 있다면, 인물화가로서 욕심을 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화가들에게는 그것이 눈에 제일 크게 들어오고 서른 살 운보는 그것이 눈앞에 잡히는 듯 빤히 보이는데
굳이 이상한 걸 그려 내서 심시위원들을 곤혹하게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미스코리아가 되면 부와 명예가 들어오니까 성형도 하고 감비도 해서 탈 수 있는 왕관이라면 타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두고 세상이 바뀌고 나서 여권주의자들이 "벋고 다니면서 알몸 수준으로 뭇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것은 여성의 상품화"라고 비판한다면 당시 상황에 대해 너무 경직된 비난이 될 것이다. 또 그럴까 두려워서 모델이 므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안 나간다면
그것은 미스코리아 후보도 모델도 아니고 화가가 아닌 것이다.
운보는 벙어리지만 화가였기에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고
그것이 친일이라는 말은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린 죄로 인하여 매도에 가까운 억울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화가에게 공모전에 그림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성공을 포기하거나 미루라는 요구일 것이며
그 공모전의 주제에 벗어난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에 냈어야 한다는 말도 억지일 것이다.
공모전을 주최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스승이 있을 경우는 더더욱 어렵다. 요즈음도 그렇고 식민지 시대라고 그것이 다를 리는 없다.
여성 모델에게 미스코리아 선발전에 나가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꿈꾸던 모델에게는 사형선고일 것이다.
특히 명동의 OO미용실 원장님께 신세를 진 여성모델이라면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참가했다고 욕을 하고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 그림이 너무 공모전의 주제에 들어맞고 심사위원의 입맛에 맞게 잘 그려졌다고 욕하는 건 더더욱 우스운 꼴이다.
모델에게 왜 미스코리아 경연에 나갔냐고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며 미스코리아 진이 되면 더 나쁜 여자라고 욕하는 건 더더욱 우스운 꼴이다.
정작 친일행위로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국민평등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정치인 경제인이 활개를 치는 건 어쩌지 못하면서
공모전에 최선을 다해 그림을 출품한 그림쟁이에게만 손가락질을 해서 대한민국의 예술가 사회사업가를 매장시키려 한다면
이는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평생 그린 그림이 얼마나 많고 귀중한데, 몇 점의 그림만 엉터리 잣대에 올려놓고 그 작가의 공적까지 모두 난도질하는 것은 자기 발등에 휘발유를 들이 붓고 불을 붙이는 격이다.
운보는 장애인으로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장애를 이기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 본받을 만한 사람이고
화가로서도 남들이 이루지 못한 수준에까지 예술을 완성한 뛰어난 작가이며
교육자로서 수많은 한국화단의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가르쳐 낸 훌륭한 스승이며
제자로서 스승의 뜻을 이어 한국화 단체 후소회를 죽는 날까지 지켜왔던 사람이며
사회복지사업에 남보다 일찍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 대한민국의 장애우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베풀어준 사람이다.
또한 장애인 올림픽에 남다른 관심과 정력을 쏟아부어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이다.
그림 몇 장이 총독부의 요구에 맞게 그려졌다고 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하며 그의 훌륭했던 인생 전부를 무시해버리는 태도는
스스로 부끄럽다 못해 과거와 미래의 많은 장애우들과 민족적 피해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삿갓을 눌러쓰고 얼굴을 감춘 채로 전국을 외롭게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던 선배를 기억하며
남을 헐뜯을 때는 자신에게 그 화살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운보는 민족적 역사적 아픔을 겪었던 전과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이 자랑할 수 있을 만큼은 훌륭한 화가이며 사회복지가이며
훌륭한 스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