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하루 전 (2018. 9. 23.)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최상의 공동체다. 그럼에도 이 공동체의 우두머리인 나는 늘 이 공동체에서 아슬아슬하게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아내와 아들의 담합에 의한 대외용 지위 보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휴~~~!!! 우리 아버지들은 역사에서 모두 다 이방인이었어, 나만 그런가 뭐?"
올해도 스스로 위안하며, 추석 선물을 준비하는 아내와 아들을 따라 마트에서 처가댁에 가져갈 선물을 한보따리를 실으니 왠지 넉넉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한가위인가보다. 그럼에도 이 사회 어디에선가는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차가 가끔씩 정체됐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명절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순수 서울 토박이로 자란 탓에 온 집안이 모두 서울 경기에만 살아서 명절에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기 때문이다.
처가댁에는 이미 차 두대가 와 있다. 큰처남과 작은 처남. 과수원을 하시는 장인 어른 댁에는 항상 개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 보는 덩치 큰 개가 보인다. 인사 후 마눌의 명령으로 밭에서 고추를 한 봉다리 따서 봉투에 채워놓고, 앞산으로 처남과 함께 조카들을 데리고 밤을 주으러 가서 한자루를 금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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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한쪽 귀퉁이의 고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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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일부만 남기고 콩과 다른 작물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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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양을 지키는 강아지라는데, 덩치에 비해 무지 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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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귀퉁이에 남은 사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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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도록 열린 대추나무
저녁, 대가족이 둘러앉아 저녁 상에 앉았다. 큰 처남이 목포에서 특별히 주문한 홍어회가 곁들여지고 아들을 시켜 제천 백운에 가서 사온 토종 막걸리 두병과 삶은 돼지 목살과 김치를 곁들여 홍어 삼합이 만들어졌다. 젊어서 부터 술을 안 잡수시던 장인의 영향으로 큰 처남을 제외하고는 술과 홍어같은 날생선을 먹지 않는 처가댁에서, 큰 처남과 나, 그리고 교수인 작은 처남댁 셋이 대작하고, 막걸리 반잔씩 강제로 모두에게 부어주고 건배로 저녁 만찬을 즐겼다. 만년손님인 나도 처가댁의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돼 가고 있다.
추석 (2018. 9. 24.)
아침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처가댁의 관례에 따라 예배를 본 후에, 처형댁이 아침 일찍 와서 함께 푸짐한 아침을 하고 우리 가족만의 여행 길에 올랐다. 처제는 시댁에서 아침을 하고 오고 있고, 큰 처남의 두 딸들도 오고 있음에도 우리의 여행을 위해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제천 신림 톨게이트로 고속도로에 올랐다. 중앙 고속도로는 이미 만원이었다. 홍천까지 가서 서울-양양 고속도로로 인제를 지나자 무려 12km에 달하는 터널이 나왔다. '이렇게 긴 터널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라는 방정맞은 생각을 하는 사이 동해바다에 다다랐다.
아들과 와이프가, 아들의 직장의 얘기부터 여자친구 얘기까지 많은 얘기가 나오고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아들이 뜻밖의 말을 한다.
"나는 우리 가족의 지금 상황이 좋아요. 더 바랄게 없어요. 아빠도 건강하시고 아프지만 않으시면 돼요,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는 게 참 행복해요. 성과급이 나오면 일부는 이렇게 여행 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저금할거에요."
늘 아이로만 알았던 아들이 이렇게 아빠를 위해 말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따듯해져 왔다. 늘 아빠에게 무뚝뚝하던 아들이 마음으로는 아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내 녀석이 속 마음을 털어 놓지 않아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아들이 예약해 놓았다는 호텔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와이프가 '추석같은 명절날 누가 호텔 같은 곳에서 잠을 자겠냐'며 예약을 하지 않고도 맘 놓고 갔다가, 모든 호텔과 콘도는 물론이고 모텔까지 방이 없어서 양양읍의 허름한 곳에서 겨우 잠을 잤던 기억이 나서, 올해는 아들이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다.
대포항에 왔다. 아들에게 어느 호텔이냐고 물어도 대답없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대포항에 있는 '라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운다. 감동이 밀려 왔다. 차를 3층에 주차하고 로비로 가서 방 키를 받았다. 방에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와 대포항 언덕에 있는 롯데 리조트를 한바퀴 돌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별로 없을 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설악산은 입구부터 차량들이 밀려서 거의 한 시간만에 매표소 입구에 다다랐다. 차를 돌려 대포항으로 왔다.
아들이 '라마다 호텔'을 예약한 이유를 말했다. 작년 추석에 왔을 때, 라마다 호텔 앞의 대포항에서 대게를 먹으며 회포를 푼 후에, 언덕 위의 롯데 리조트에서 대포항을 내려다 보며 "다음에는 저 라마다 호텔에 예약을 하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을 했는데, 그래서 일부러 라마다 호텔을 예약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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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에서 바라 본 대포항과 라마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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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북적이는 수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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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펄적이고 바닷물이 콸콸 넘쳐 흐르고 ...
대포항은 참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횟집들이 새로 지은 건물에 양 옆으로 들어섰고 수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다양한 수산물을 구경하며 또는 흥정하며 지나갔다. 수산물 시장을 구경하며 맨 끝 자락에 있는 전문 횟집으로 갔다. 주인 아저씨의 사람을 끄는 멘트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스끼다시를 20여 가지나 준다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는데 아들이 아까부터 카톡을 하더니 전화를 들고는 밖으로 나가는 거였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같다. 스끼다시가 한상 푸짐하게 올려지고 회가 나올 때 쯤들어 온 아들의 얼굴이 밝지가 않다. 아들이 집에 오면 술을 좋아하는 아빠가 술을 권해도 한번도 먹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버지와 오랫만에 술을 대작하고 싶다고 한다. 소주 2병을 시켰다. 와이프는 아들이 여자 친구와 문제가 있다고 귀띔을 해준다.
아들이 처음으로 여자 친구에 대해 말을한다. 여자 친구도 대기업 수시채용에 합격해서 앞으로는 자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아마 여자 친구와 결별을 준비하는 것 같다. 아들은 매우 보수적이라서 학교 다닐 때도 애인을 만들지 않아서, 젊어서 여자를 몇명 사귀어야 한다고 했더니,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된 다음에 얼마든지 사귈 수 있는데 뭐하러 지금 사귀냐?'고 말해서 오히려 아빠인 내가 머쓱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여자 친구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가, 만약에 나중에 여자 친구와 결혼하게 되면 그 동안 나쁘게 본 것을 말했으면 여자에 대해 편견을 갖고 볼 수 있어 일부러 얘기를 않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20대 애들은 엄마시대의 20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며, 엄마 시대는 결혼 해 아이를 갖는 것이가장 우선했지만, 요즘엔 자기의 삶을 즐기는 것을 가장 우선한다며 엄마시대 여자들의 가족을 향한 애정과 희생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유 이렇게 속이 깊은 녀석일줄이야! 이렇게 정말 오랫 만에 가족이 함께 앉아 속에 있는 말을 하며 저녁을 보내는 황금같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공동의 선을 위해 잘 작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존재감이 없는 대외용 가장이 아니었다.^^ 창밖으로 휘황찬란한 불빛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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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대보름달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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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항 부둣가
모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밤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낭만이 있다. (2편으로)
첫댓글 우와~~~~!!!!!
내가 쓰고도 놀랍네요. 아니 어떻게 2,000회 이상의 조회가 나오죠? 누가 와서 보는건가요? 아니면 마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