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文四人의 驪州 神勒寺 나들이
국문과 출신 대학 동창과 함께 신륵사 나들이를 했다.
답사 순서는 丹嵓과 枕石亭터, 神勒寺, 馬巖, 淸心樓터,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였다.
이번 나들이의 최대 목표는 驪州라는 지명에 왜 검은 말이 들어가 있는지를 밝히자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여주는 말을 키우던 곳도 아니며 말과 관련이 있는 어떤 것도 있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말을 뜻하는 글자가 지명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여주에는 검은 말과 누른 말과 연관이 있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지명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단서가 된다. 지금 시청이 있는 공간이 신라 때부터 여주의 중심 지역인데, 이곳을 감고 흐르는 남한강의 모습이 검은 말과 누른 말로 상징화된 것이다. 음향오행설에서 물은 검은 색으로 북쪽을 나타낸다. 그래서 평소에 흐르는 강의 색은 검은 색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른 말은 홍수가 나서 흐르는 물의 색을 상징화한 것으로 지역과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여주의 신라 때 이름은 黃驍(누를 황, 용맹한 말 효)이기도 했으나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黃은 검은 말을 뜻하는 驪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주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검푸른색으로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안겨주는 구실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검은색이 누런색으로 바뀌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여주 부근의 강 지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한강교에서부터 강천보 부근 단현리를 거쳐 이호대교 부근까지는 말의 목에 해당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금당천과 합류하여 신륵사 앞 부근까지는 말의 머리에 해당하는 모양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마암 부근까지는 말의 입에 해당하는 형상인데, 바로 다음에 여주 시청이 있다. 신륵사 석벽과 마암 석벽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어서 물길의 속도를 줄이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낸다. 이 덕분에 여주시는 홍수로부터 안전했다. 사진으로 첨부한 지도의 표시를 보면 그 모습이 아주 잘 보인다.
이제 해당하는 유적을 따라가 보자.
단암과 침석정터가 있는 丹峴洞은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 민씨의 오빠인 閔鎭遠이 살았던 지역으로 국운과 임금에 대한 충심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일설에는 강가의 바위가 붉어서 단암이라 글자를 새겼다는 말을 하지만 그 바위는 붉지 않다. 단암의 의미는 단현이라는 지역 이름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진원은 나라에 대한 충심을 담아 자신이 사는 지역은 단현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丹은 그냥 붉다는 뜻이 아니라 열정과 정성을 담아 무엇인가에 대한 충심을 간직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은 지형상 말의 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곧게 흐르는 남한강의 물결이 여울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바로 아래쪽에 강천보가 있다. 지금은 이 보가 물길의 강도를 줄여준다.
이곳에서 아래로 좀 더 내려가면 금당천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물줄기가 꺾이면서 소용돌이를 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 신륵사와 石壁이 있다. 고려 때 승려인 나옹화상의 장례를 치른 강가에 세워진 강월헌과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암벽을 이루는데, 거칠게 내려오던 물줄기가 이곳에 부딪혀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이곳에 세워진 사찰이 신의 굴레라는 뜻을 가진 신륵사이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여러 전설이 있지만 신륵은 물줄기를 막아서 여주 시내를 보호하는 비보 사찰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형상으로는 말의 고삐를 통해 말을 제어할 수 있는 굴레의 핵심이 되는 머리 부분이다.
신륵사는 신라 때 원효가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고 하는데, 근거는 없다. 고려 때는 나옹와 인당 승려가 말을 다스려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는 전설도 있다. 나옹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나옹화상 부도,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에 서 있는 삼층석탑, 구층석탑, 다층전탑, 대장각기, 보제존자 석종, 보제존자 석종비, 신륵사 조사당,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등이 있는데, 모두 보물이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신륵사에서 보은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나중에 다시 신륵사로 되었다.
석벽에 부딪혀서 일차적으로 힘이 약해진 물줄기가 다시 세차게 흐를 즈음에 이것을 다시 막아서는 것이 영월 근린공원 강변에 있는 마암이다. 황마와 흑마가 나왔다는 전설과 여흥민씨의 시조가 나왔다는 전설 등이 있지만, 이 바위 절벽은 신륵사를 지나 휘몰아쳐 오는 물줄기를 막아서는 역할을 한다.
마암의 바로 서쪽 편 강가에 여주 관아가 있었는데, 이것은 신라 때부터 존재했었다. 조선 시대까지는 행정의 중심지로 여주 관아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청심루 등이 있었던 자리였지만 1908년에 여주초등학교를 짓는 바람에 사라졌다. 여주 관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강가 도로 옆에는 청심루터라고 새긴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여주시에서는 여주초등학교를 옮기고 여주 관아를 복원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날씨가 좀 덥기는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나들이였다. 마지막에는 남한강 출렁다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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