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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전 임금님의 시신을 옮겨 서쪽 대청에 빈소를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원년(서기 927) 11월, 임금의 아버지를 신흥대왕(神興大王),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에 침입하여 밭과 들에 쌓아 놓은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2년(서기 928) 봄 정월, 고려 장수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의 도적 흥종(興宗)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5월, 강주(康州)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니, 고려 태조가 명지성(命旨城)의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벼와 곡식을 베어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3년(서기 929) 여름 6월, 천축국(天竺國)의 삼장(三藏) 마후라(摩睺羅)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義城府城)을 공격하자, 고려 장수 홍술(洪述)이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순주(順州) 장군 원봉(元逢)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었으나 원봉의 지난 공적으로 용서하고, 단지 순주를 현(縣)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加恩縣, 경북 문경)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서기 930) 봄 정월,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하게 예로 대우하고 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자,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생각하여 은총을 베풀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 병산(甁山)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임금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쪽 바다 연안의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5년(서기 931) 봄 2월, 고려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서울 근방에 와서 임금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와서 마주 대하였다. 정성으로 예우를 극진히 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의롭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으리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을 머물다가 돌아가자 임금이 혈성(穴城)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사촌동생 유렴(裕廉)을 볼모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들이 엄숙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규율을 범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호랑이나 이리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었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베와 비단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6년(서기 932)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昢), 부사로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서기 933), 후당 명종(明宗)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8년(서기 934) 가을 9월,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년(서기 935) 겨울 10월, 임금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고립되어서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없겠다고 여겼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않아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곧 시랑 김봉휴(金封休)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고려 태조가 임금의 편지를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임금을 영접하게 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임금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을 주고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임금을 정승공(正丞公)으로 삼아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섬을 주고, 따르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고쳐서 경주(慶州)라 하고, 이를 정승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고려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그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원컨대 종실과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영원히 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 아비인 잡간 억렴(億廉)이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이 있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사람 외에는 집안일을 책임질만한 자가 없습니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현종(顯宗)의 아버지로서, 안종(安宗)으로 추봉된 사람이다. 경종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尙父令)으로 삼아 봉하였다. 정승공이 송나라 흥국(興國) 4년(서기 978) 무인에 이르러 돌아가시니, 시호를 경순(敬順)[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시조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3대로 나누니, 처음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고 하였다.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金氏)는 금궤 안에 들어있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臣) 김부식(金富軾)은 글 쓰는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가게 되었다.
우신관(佑神館)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舘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 사람을 아는가?”라 하고, 또 이어서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 없이 임신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지은 「동신성모문(東神聖母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단지 그 시초를 고찰해 본다면,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검소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하게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宿衛)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습득하여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군사의 신령한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어, 군사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락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방탕하게 되어, 궁인과 가까운 신하를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을 마시며 놀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금호(韓擒虎)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려화(張麗華)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에게 귀의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만약 죽기를 다하여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우리 조정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의 마지막 왕인 전숙)가 오월(吳越) 땅을 송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蘇子瞻, 소식)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왕비와 첩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지정 번호; 사적 244호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지정일; 1975년 6월 25일
•시대; 고려 경종 3년(978)
•분류; 능원
•내용; 연천 경순왕릉은 신라 56대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경순왕은 927년(통일신라 경애왕 4)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고려 태조 18)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고 태조의 둘째 딸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고,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백성들을 위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왕건(王建)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이다.
경순왕릉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이다. 능 앞에는 단조로운 형식의 비가 있고, 그 전면에 ‘新羅敬順王之陵(신라 경순왕지릉)’이라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간략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봉분 둘레와 능 주위에는 각각 호석(護石; 둘레돌)과 나지막하게 곡장(曲墻; 능이나 원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둘렸고, 장명등․망주석 등이 있다. 경순왕릉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 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3,967㎡[약 1,202평]에 달한다.
•감상 포인트; 고려시대의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도인 경주 지역을 벗어나 타 지역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며, 망국 후에 조성된 때문인지 왕릉으로서는 매우 소박하다.
•이야기;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 첫째 아들은 마의 태자(麻衣太子)로 알려진 김일(金鎰)과 둘째 아들 김굉(金鍠)을 제외한 일곱 아들은 낙랑 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 3자 김명종(金鳴鐘)은 경주 김씨의 영분공파, 4자 김은열(金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구 안동, 청풍, 김녕, 도강, 전주, 양근, 영광, 안산 등이 모두 후손], 5자 김석(金錫)은 의성 김씨, 6자 김건(金鍵), 7자 김선(金鐥)은 언양 김씨, 8자 김추(金錘)는 삼척 김씨, 9자 김덕지(金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첫댓글 상세한 자료를 실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중에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유흥에 빠졌던 이야기는 이설도 있는것 같아서.....
지난 가을에 경주 남산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경주대학 손 교수님의 해설중에
포석정 인근에 큰 절인지? 사당인지가 있었는데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중신들이
포석정에 모여 그쪽을 향해 제를 올린일을 가지고 결과만 가지고 어차피 무방비로 크게
당하고 말았으니 술판을 벌리다가 당했다고 표현 한 것 같다는 일설도 있다고 하는걸 들었습니다.
같은 값에 그 표현이 더 듣기는 좋았습니다. 공식적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제가 확인은 못해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