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과 완생
생존은 우리 현실에서 아주 소중한 가치다. 아무리 밑바닥 인생일지라도 먹고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가령, 백화점 입구 계단에서 구걸하는 동냥아치나 그 아래 지하도에서 푸성귀 파는 노파로부터 우리는 삶의 초라함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존 전략의 일면도 엿본다. 그런 행위가 그들에겐 생업이기 때문이다.
바둑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치열한 것은 생존 문제다. 삶을 확보하려는 돌들의 움직임은 귀퉁이에서 두 칸짜리 오두막을 짓기도 하고 '변'이나 중앙에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하기도 한다. 때로는 염치 불고하고 커다란 남의 집 안에 쳐들어가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완전한 삶을 확보하는 일은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상대방과의 경쟁 속에서 많은 집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확장, 개발 사업을 펼치다가 어떤 돌들은 노숙자 신세로 무작정 떠돌기도 한다. 이 경우에 바둑에선 '미생(未生)'이란 이름을 붙인다. 미생 상태의 돌들은 바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없이 시달리다가 굴욕적으로 살기도 하고 비참하게 죽기도 한다. 살아 남으면 '완생(完生)'이고 죽으면 '사석(死石)'이다. 일반적으로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해서 덩치 큰 말은 죽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대마도 두 집 못 내면 죽는다.
일단 한 판의 바둑이 '끝내기' 단계를 거쳐 완성되면 모든 돌들은 '완생'의 상태가 된다(죽은 돌들은 사석 처리하여 들어내 버린다). 그러기에 계가 직전의 바둑판은 화엄 세계를 방불케 한다. 치열하게 전투했던 흑백의 돌들이 각양각색의 기하학적 무늬로 살아 꿈틀거린다. 이른바 두두물물(頭頭物物), 처연하게 빛을 발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다가오는 바둑돌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도(道)이고 모두 진리다. 바둑판이 우주라는 사실도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애당초 세상은 판을 짤 때부터 / 흑백으로 갈라진 전쟁놀이 판 / 대세에 밀린 국면의 경계에서 어중간하게 떠돌던 / 피라미 몇은 끝내 / 구제 못 받고 작전에 밀려 천방지축 / 구석으로만 내쫓기고 있다 / 반전의 기회도 없이 무작정 변방으로 밀리다가 / 악의 축으로 일사천리 밀리다가 / 꼴깍, 참극을 목전에 두고 있다 -조성래, '바둑'에서
꿈틀거리고 있거나 / 꿈틀거릴 준비가 되어 있으면 / 완생이다 / 미생(未生)은 없다 / 별 하나가 완생이다 / 돌 하나, 먼지 하나가 완생이다 / 눈에 띄거나 띄지 않거나 / 미생은 없다 / 빛나지 않느냐 / 눈빛이 만드는 만남 그리고 이별 / 고립과 죽음과 부활까지 / 이미 완생이다 -최석균, '완생' 전문
이 두편의 시는 각각 미생과 완생을 다루고 있다. 조성래의 시에서 "피라미 몇"은 큰 세력 틈바구니에서 미생으로 떠돌다가 위기에 처한 약자의 심각한 국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천방지축" 내쫓기고 밀리는 불안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미생마는 대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핍박받는 약소국이나, 보수와 진보의 양대 진영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군소 정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느 정도 작품의 우의성을 고려해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반면, 최석균의 시는 '완생'이란 개념으로 생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생존의 의지("꿈틀거리다")만 지녔다면 이 지상에 출현한 존재는 "돌"이나 "먼지"처럼 하찮은 것일지라도 의미 있는 존재로 "완생"한다는 것이다. 최석균의 시를 해설한 김경복은 이를 두고 바둑에서 완생이란 자신의 존재성을 완전히 확보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한 상태는 "눈에 띄거나 띄지 않거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두루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의미는 화엄 사상의 두두물물과 연관된다고 하겠다. 바둑을 통한 깨달음을 세상 만물의 존재적 가치에 적용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