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예천 권씨들의 정자 병암정과 초간정을 찾았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에 있는 이 병암정과 별묘는 일제강점기에 예천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권원하(權元河)와 관련이 있는 건물이다.
병암정(屛巖亭)은 1898년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를 살펴보면 앞면 4칸·옆면 2칸 반의 규모이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별묘(別廟)는 1920년에 건립되어 1946년에 옮겨 세워졌다.
넓은 들 한가운데 운동장 같은 크기의 바위가 병풍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위에 이런 한옥이 자연과 어울려 들어서 있으니 선조들의 멋을 느낄만 하였다 황진이 촬영장으로도 유명하다
병암정에서 금당실 마을로 가던 중 있는 복천감음
다음은 금당실마을이다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금당이란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하며, 마을 주변에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을만큼 오래된 마을이다.
‘금당실송림’은 금당실의 지형이 낙동강 지류인 복천과 용문사 계곡과 청룡사 계곡으로 흐르는 계류가 만나는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어 여름철 하천물의 범람을 막고 겨울철 북서한풍을 막기 위하여 주민들이 조성한 마을 숲으로 달리 임수(林藪)라고도 한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구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마구 벌채하자 1895년(고종 32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
그러나 봉화 닭실마을, 산청 남사예담촌 정도를 예상하고 간 우리는 크게 실망하였다 전혀 정리되지 않은 면소재지 정도로 뛰어난 산이나 맑은 물도 없는 그냥 그저 평범한 요즈음 시골마을일 뿐이여서 말이다
물론 겉모습만 번지르르 많은 돈을 쳐들인 것들만 보는 속물같은 내 눈으로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니 아직 이 마을을 몰라서 그럴법도 하다
금당실[金堂谷]은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의 주산인 오미봉에 오르면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명당이다. 남사고(南師古)는 <정감록(鄭鑑錄)>에서 금당실을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면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禍)가 들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때도 온전했다고 하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신하에게 닭을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에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고 했는데 닭이 먼저 울었기 때문에 도읍지를 취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처럼 조금 더 가꾸면 충분히 관광객의 욕망을 채울 컨텐츠는 넉넉한 듯 하다
추원재(追遠齋)와 사당(祠堂)은 금당실마을 뒤 오미봉을 진산으로 남향하여 자리잡은 사학의 공간이며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박종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아들 영이 1665년에 세웠는데 토석 담장 안에 사당과 내삼문, 강당, 대문칸 등 4동을 튼ㅁ자로 배치하여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곳이 고인돌군이라는데 도통 고인돌에 대해서는 그 자취를 어떻게 찾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내 눈에 그냥 넓다란 돌이 산재해 있을 뿐이다
기록상으로는 15세기 초엽에 감천문씨인 문헌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사위인 박종린과 변응녕 등이 금당실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당실 마을에는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 터를 비롯하여, 초간 권문해의 유적인 종택과 초간정, 용문사, 금곡서원, 추원재, 사괴당 고택, 조선 숙종때 도승지인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의 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10여채의 고택 사이를 미로처럼 이어주는 돌담길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숙종대에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갈천 김빈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살았던 집으로서 처음 지은이는 갈천의 아우 정인데 그의 자손들이 가세가 쇠미하여 타인에게 전매될 때 구한말 법무대신 이유인이 매입하여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배치와 평면구성법을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