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문학으로서의 디카시
김종회(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디카시 대중적 확산의 열기가 놀라울 정도로 뜨겁다. 올해 황순원문학제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황순원디카시공모전〉의 응모가 1,095편으로 마감되어, 지난해의 2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통계 수치는 한국디카시인협회를 비롯한 여러 디카시 추진체의 문예 운동에서 비롯된 바가 없지 않으나, 더 중요하게는 디카시 자체의 자가 발전이 이제 하나의 단계를 넘어 자율적인 사회현상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만큼 디카시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 창작에 합류하는 이들의 숫자가 증폭되고 있는 것은, 20년에 이른 디카시의 문학 마당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다.
익히 알다시피 디카시는 남녀노소 갑남을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 놀이 문학’이다. 어린아이까지 손에 쥐고 있는 소우주 핸드폰과 그에 내장된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여 순간 포착의 사진을 찍고, 그에 부응하는 몇 줄의 시를 부가한다. 그리하여 사진과 시가 한 몸이 되어 작품 창작을 완성하고, 이를 동시대의 첨예한 SNS 통신망을 활용하여 디카시 이웃들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영상문화 시대에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식으로 최적화된 문예 형식이다. 다만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으나, 읽는 이가 무릎을 치며 탄복하도록 잘 쓰기가 쉽지 않다는 데 숙제가 있다.
디카시를 ‘잘 쓴다’는 것은, 그 작품이 미학적 가치 곧 예술성을 담보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의미와도 같다. 미상불 이 대목은 디카시 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 예술의 한결같은 과제이자 목표에 해당한다. 값있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이에 결부된 촌철살인의 시 몇 줄이 읽는 이에게 공여할 수 있는 공감과 감동은, 그 작품이 순간적이고 짧은 소재에서 착상했다고 해서 허약해져서는 안 된다. 예컨대 일본의 독특한 짧은 시로 세계적인 공유에 이른 하이쿠는,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치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문학으로서의 위세를 자랑한다.
하이쿠는 17자로 규정된 짧은 정형시 장르로, 450년 전부터 일본의 상류사회와 서민사회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하이쿠 시인들은 짧은 시가 긴 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에도 시대 전기의 시인으로 하이쿠의 전설이 된 마츠오 바쇼는 “모습을 먼저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추어라”라고 권고했다. 기본이 3장으로 된 한국의 시조나 14행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소네트 등이 하이쿠에 못지않은 예술적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세계 무대를 향한 전파력에 있어서는 하이쿠에 미치지 못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나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자국어를 사용하여 하이쿠를 즐겨 쓴 사례가 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영상이 없이 문자만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일이 어색하고, 수용자 또한 문자만의 메시지에 흔연히 호응하지 않는다. 이는 한 시기의 잠정적 현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추동하는 정신적 흐름이 된 형국이다. 그래서 디카시다. 이처럼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의 삶을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데 디카시를 따를 자가 없는 형편이다. 다만 문제로 남는 것은 여전히 ‘예술성’이다.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가진 디카시를 강조하여 말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디카시가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본격문학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 그래야만 평범한 디카시 동호인이 수발한 디카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제51호/ 본격문학으로서의 디카시|작성자 dpoem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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