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8일 기억해야 할 날
석현수
결코 무심한 하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뚝뚝 눈물 떨어뜨리고 있는 걸 보니.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 1호선,
승객들은 중앙로역에서 은하철도로 환승한 채,
순간에서 영원으로 먼 길 떠난 날이다.
하늘도 무심타 하며 울부짖던 그때 슬픈 기억을 알고나 있는 듯
대구에는 연삼일 비가 내린다.
마침 계절은 2월 중순이라 옷 갈이를 채비를 할 즈음이었다.
개학을 기다리는 학생은 팬시 한 옷 한 벌 장만 했을 거고,
갓 졸업을 하고 첫 직장에 대한 설렘으로 나들이 한 젊은이는
하얀 와이셔츠 한 벌을 손에 들었을 지도 모른다.
억센 억양의 경상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는
칠성시장 난전을 다녀오는 길이었으리라.
눈동자 풀린 사내가 성냥을 몇 번이나 그어댔다.
휘발유 페트병을 들고 저주의 주문들을 외우며 죽음을 불러들였다.
더러운 세상,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사내는 지병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풀었단다.
전동차 속에서는 거동수상자를 제압하는 의인하나도 없었고,
소화기를 쓰는 지혜로운 승객도 없었고,
비상조치도 제대로 아는 승무원도 없었다.
불타는 사고차량 옆에 반대편 방향 차량이 떡하니 들어와
더 큰 희생자를 내고, 납품 건은 써서는 안 될 가연성 의자가 검사필을 받았고
뉴스를 듣는 시민들은 설마하고 답답하였고
행여 살아올까 기다리는 유족들은 생사를 몰라 답답하였고,
모두 것이 답답한 해진 날이 이어졌다.
가여운 영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 밖에 없었다.
엄마와 딸아이의 마지막 소통이 오래 동안 사람들을 울렸다.
“엄마 나 없어도 살겠어요?”
어머니는 아이의 철없는 농담 전화인줄 알았단다.
“그래 너 없어도 잘 살고말고.”
그게 절박했던 아이의 마지막 송신인 줄도 모르고 …,
어머니 가슴에 큰 무덤 하나 덩그러니 남기고 어린것이 먼저 가다니.
차라리 “너 없인 못 산다고나 했었을 것을”
우리세대는 징용, 해방, 이념, 전쟁,
아버지세대의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일에만 몰두했다.
빨리 빨리 파이를 키우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했다.
2000년을 들어서자 친구들은 하나씩 둘씩 퇴직을 하고
훌륭히 소임을 마쳤다고 자찬하던 즈음이다.
높은 수치의 통계에 자만하고, 솟아오르는 빌딩의 높이에 자만하고,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있어 국제대회 유치에 자만하고,
자녀들에게는 국·영·수에 매달리게 하고
바른생활은 가르치지 않은 세대가 우리다.
사회가 바른길로 굴러가지 못한 것이 모두 우리세대의 탓이라 생각되었다.
다음날 나는 비를 맞으며 중앙로역 하단 출입구 앞에서 고개를 숙였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오 가슴을 쳤다.
포장용 테이프로 얼기설기 걸쳐 놓은 출입금지 팻말 사이로
난장판이 된 계단과 그을린 검은 자국과 흩어진 사물私物들이
그 시간의 참혹함을 대변해 주며, 죽죽 내리는 빗물에 젖고 있었다.
아, 하늘은 무심하여라.
빗방울이 굵어질수록 내 참회의 눈물도 굵어졌었다. 그것도 하염없이….
2009년 12월 29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사고난지 6년 만의 일이다.
천국으로 떠난 희생자는 먼 길에 말이 없었지만,
희생자 때문에 희생된 가족들에게는 길고 거친 세월이 지나갔다.
안전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었기에
팔공산 자락 대구시민안전테마공원에 돌 비석 하나를 남겼다.
마음이 풀어질 때면 ‘진주만을 기억하자’라고 외쳤던 미국사람들처럼,
이 비석하나가 그 때의 아픈 기억을 오래도록 후대에 전해 주면 좋겠다.
‘대구지하철참사를 기억하라’는 말은
앞만 보고 급하게 살아온 우리 세대의 자성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졸지에 유명을 달리한
그때의 192명의 가여운 영혼들을 잊지 않겠다는 위로의 말이 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