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는 소년의 재앙
“아저씨, 추워요. 라이터 하나만 사 주세요.” 라이터 하나를 사고 나는 게임에 접속한다 ‘접속하시겠습니까?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당신의 목숨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PC방에선 연일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접속 중이다 ‘할머니가 게임을 알아요?’ 신문에는 게임 속 영웅처럼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매니아들이 이 세상에서 떼구르르 떨어져 나간다 ‘병원으로 가시면 소녀를 구할 확률은 0%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는 버스를 탄다. 600원을 적선하고 남은 돈은 400원. 주머니 속에서 100원을 꺼내 창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남은 돈은 300원. 바람이 휭하니 들어와 창이 절로 닫힌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한푼만 적셔 달라굽쇼?
사오정 같으니.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 애써 상기시키듯 낙엽이 뒹군다 여기가 어디지?. 가을, 아니, 겨울. 여기가 어디냐구?. 겨울, 아니지, 가을. 사오정 같으니, 여기가 어디냐니까?, 대체 몇 정거장을 더 지나쳐 온 거야?. 아직 가을은 지나지 않았어, 추워졌을 뿐이지. 젠장, 묻는 게 아닌데. 영화는 재밌었어?. 여기가 어디냐니까?. 병신, 뭘 봤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대체, 여기가 어디냐구?. 네가 오늘 본 건 라이터 파는 소녀가 아니잖아, 왜 아직도 가을이냐구 묻는 거야?, 가을 맞다니까. 정말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해. 병신, 지하고도 말이 안 통하면 누구랑 말을 하겠다는 거야?. 네온사인 간판이 빽빽이 들어찬 어느 정거장, 버스를 내려 터벅터벅 걷는다.
남은 돈으로 뭐할까?.
적선.
병신, 미쳤어? 300원 남았는데.
응, 너 미친 거 맞아, 내가 미쳤거든.
제기랄.
나는 100원짜리를 하나씩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첫번째 100원은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 위의 어느 차에 정확히 명중했다. 워낙에 씽씽 달리던 차라 미처 멈추지 못해,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두번째 100원은 지나가던 꼬마애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으라고 쥐어주었다. 요즘에 1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어딨냐고 투덜대는 아이 덕에 나는 18세 이후 한번도 하지 않았던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세번쨰 100원은 슬쩍 집어서 바지주머니 옆으로 흘러뜨렸다. 아주 착한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주워서 나한테 건네주려고 해서, 나는 열심히 뛰었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아저씨도 열심히 쫓아왔다. 나는 아저씨 가져요, 라고 소리쳤지만.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요즘 100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냐며, 나를 잡으려 했다. 숨을 헐떡이며
여관방에 서 있다. 부끄러워 그랬나 보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도 쳐다보지 않았다. 숨을 헐떡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이유 없는 세상에 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섹스에 이유가 있다면 본능일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라이터가 필요했었나? 그래서, 소녀를 얼어죽여야 했나?
정신차려, 여기가 지네 집인 것도 몰라?.
야, 너 누구야?, 누군데 자꾸 말을 시켜?.
내가 너지 누구야?, 지금까지 얘기해놓고 기억도 못해?.
주머니 속이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