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사구게의 ‘원형’이 초기경전에, 페나삔두빠마경(포말경, S22.95)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금강경에 실려 있는 사구게이다. 금강경에 여러 개의 사구게가 있지만 이 사구게만큼 널리 알려진 것은 드믈다. 그래서 신심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명구이다. 그런데 이 사구게의 ‘원형’이 초기경전에 있다는 것이다. 페나삔두빠마라경(Pheṇapiṇḍūpama sutta, S22.95)이다. 우리말로 포말경이라 한다.
페나삔두빠마라경
(Pheṇapiṇḍūpama suttaṃ- Foam-포말경, 상윳따니까야S22.95,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아욧자의 강가강 둑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이 갠지즈강이 커다란 포말을 일으킨다고 하자.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포말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물질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물거품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감수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늦여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 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아지랑이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지각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견고한 나무심을 바라고, 견고한 나무심을 구하고, 견고한 나무심을 찾아,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그가 거기서 커다랗고 새로 자란 아주 높이 솟은 파초의 줄기를 발견하면 그는 그 뿌리를 벤다. 그 뿌리를 베고 꼭대기를 자른다. 꼭대기를 자르고 바깥 껍질을 벗긴다. 그가 그 바깥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벗겨도 어떻게 그 수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파초줄기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형성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환술사나 환술사의 제자가 커다란 길에서 환술을 보여준다고 하자. 눈 있는 자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환술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그것을 수행승이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이것을 보고 깊이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해보면, 비어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것이 실로 의식의 본체인가?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잘 배운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감수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 고 그는 분명히 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물질은 포말과 같고 의식은 수포와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그 근본을 보아 자세히 관찰하고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네.
이 몸을 비롯해 모두 그렇다고
위대한 지혜자는 가르치네.
세가지 것을 떠나 물질을 버려야할 것으로 관찰하라.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여지니 의도 없이 타자의 먹이가 되네.
이 몸이 상속하는 것 이와 같네.
무지한 자가 지껄이는 환상이라
살해자라고도 불리우네. 여기에 실체는 없다네.
수행승이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처럼 존재의 다발을 관찰하라.
낮은 물론이고 밤낮으로 올바로 알고 바로 새겨라.
모든 결박을 끊어버려라. 자기 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註.
- 본체 : saro.
원래 나무의 심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본체라고 번역한다.
- 태양의 후예 ;
adiccabandhu. 부처님에 대한 찬사.
- 상속 :
santāno. 相續.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니까야에서는 오직 이 시에서만 등장한다.
(페나삔두빠마라-Pheṇapiṇḍūpama suttaṃ- Foam-포말경, 상윳따니까야S22.95, 전재성님역)
페나삔두빠마라경(포말경-S22.95).docx 페나삔두빠마라경(포말경-S22.95).pdf
나의 자아가 아닌 이유
부처님은 존재의 다섯가지 다발 즉, 오온에 대하여 포말(물질, 색), 수포(감수, 수), 아지랑이(지각, 상), 파초(형성, 행), 환술(의식, 식)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보면 텅 비어 있다고 하였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고 자아가 없음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섯가지 무더기로 분해 하여 설명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포말’등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래도 나가 있다거나 윤회하는 주체가 있다거나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빤짜왁기야경(다섯경, S21.1.2.1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빤짜왁기야경- Pañcavaggiya suttaṃ -다섯경, S22.1.2.17, 전재성님역)
빤짜왁기야경(다섯경-S22.1.2.17).docx
빤짜왁기야경(다섯경-S22.1.2.17).pdf
우리의 몸이 나의 것이라면 우리 몸은 병들지 말아야 하고 죽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 등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오온에 대한 지배력을 나의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다. 분명히 나의 몸이라고,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통제되지 않고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아는 현상계에 한정된다?
이처럼 부처님은 초기경 도처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오온)으로 분해하여 놓았고 자아가 없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연기적 존재’라고 하였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형성된 존재들은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 상주론, 상견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현상계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유위법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위법을 벗어난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댓글에서 어느 네티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고苦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무아를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은 업에서 생기고, 업은 집착에서 나오므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 나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현상계의 이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한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현상계에 한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를 잘못해석하여 영혼체가 없다고 하여서는 아니되오며, 또한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상일주재하는 아트만과 같다고 해서도 아니 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라문교의 상일주재하는 아트만은 현상계 어디도 없다고 바라문교의 아트만을 부정하셨습니다
이 영혼체 관련내용은 너무나도 심오하여 불교 대학자의 견해로서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영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현상계의 이법을 말씀하셨음을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붓다님과 무량무수 제보살님 앞에 이 내용이 진실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어느 네티즌 댓글)
부처님이 무아를 말씀하신 것은 현상계에 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계를 넘어 또 다른 무엇이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래서 영혼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너무나 심오한 경지이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아론적 진아론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잣대가 삼법인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이다. 여기에 열반적정 하나를 더 넣는 다면 사법인이 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다. 특히 제법무아의 경우 불교가 타 종교와 가장 구별되고 차별화 된 사상으로서 매우 독특하다. 따라서 어느 불교이든지 무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불교라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론자들도 무아를 주장하긴 하는데 오로지 현상계로 한정시켜 버린다. 그리고 진아가 있다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무아론적 진아론’이라고 볼 수 있다.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
하지만 이는 ‘궤변’이자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최근 법보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인 무아설에 위배되는 ‘나’찾기가 마치 선수행의 근본인 듯이 여겨지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의 현실이 아닌지 반성해보야 할 일이다. 진정한 자신의 자아와 우주의 본질이 둘이 아니라는 인도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바탕한 요가 수행과 선수행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선을 하고 나를 찾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성태용교수,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 , 법보신문 2012-01-18)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성태용.docx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성태용.pdf
법보신문에 실린 성태용교수의 글이다. 글의 제목은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라는 매우 도발적 내용이다.
대체 누가 선으로 공갈친다는 것인가. 더구나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성교수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관 큰스님은 ‘학승’이라는 칭호가 따라 붙던 분이셨다. 왜 일반적인 고승대덕들처럼 상당법문 안하시냐는 물음에 “니나 많이 공갈치며 살아라…”하셨다는 일화는 우리 불교계의 문제점에 대한 그분 나름의 뼈아픈 통찰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종을 표방하는 불교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가? 공갈치는 불교가 되는 것이다.
(성태용교수, 선으로 공갈치지 마라 , 법보신문 2012-01-18)
불과 몇 일 전 입적하신 지관스님이 하신 말이라 한다. 평생 학승으로 사셨던 스님이 “공갈치지 말라”고 일갈하였던 것은 우리나라 선사들이 교학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이라 한다.
참나 찾기식의 법문은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기 때문에 선종이 다른 불교보다 훨씬 더 수승하다는 논리이다. 그래서일까 선종에서는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세우면서 교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알음알이만 늘어난다고 하여 수행에 방해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 출가자들이 평생선방에서 보내게 되고 법문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법문을 하더라도 선가에서는 통용되는 문구를 활용함으로서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 되어 세파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법문할 때 주장자를 내리친다든가, “으아” 하고 ‘할’을 한다든가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식의 법문, 그리고 ‘업타령’과 ‘마음타령’식의 법문,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식의 법문이 이 되고 마는데, 이는 교학적 뒷받침이 없고 경전적 근거가 없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과 같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불자를 상대로 공갈치는 것과 같다고 지관스님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교학의 바탕이 없는 선사들의 참나 찾기식의 법문은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의 주장과 구분이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론은 현상계에 한한다며 ‘무아론적 진아론’을 주장하는 것은 다름아닌 궤변과 꼼수로서 지관스님의 말을 빌리면 선으로 공갈치는 것과 같다.
철수불교, 영희불교
법정스님은 “중들을 믿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들이 또 언제 훌쩍 떠나 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 믿고 따르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자가 된 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오로지 "나만을 믿고 따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계하자는 말과 같다.
그리고 보면 현실에서나 사이버세상에서나 자신의 주장으로 넘쳐 난다. 어떤 이는 경전의 한 구절을 근거 삼아 ‘단멸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영속론’을 주장한다. 이들 모두 무아론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입맛대로 경전을 해석하여 철수불교, 영희불교 등 모두 ‘각자불교’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에게
우리나라에서 재가불자는 전체불자의 99.9%에 달한다. 0.1%가 출가수행자이다. 출가수행자들은 은사스님 등 스승이 있어서 지도 받기 쉬우나 재가불자의 경우 스승이 없다. 따라서 각자 알아서 공부를 하는데, 이럴 때 단멸론, 영혼론 등을 주장하는 각자 불교가 난무하였을 때 큰 혼란에 빠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럴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자는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관찰해야 한다.
(앗따디빠경-Attadīpa suttaṃ-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 1. 5. 1, 전재성박사역)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docx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pdf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의지할 것이라곤 자신과 부처님의 가르침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특히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철수불교, 영희불교 등 각자불교를 경계해야 한다. 이런 경우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 ‘견해’, 즉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라면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하여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과 담마를 섬으로 하고 귀의처 하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슴설레이는 게송
이렇듯 부처님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초기경전을 접하면 늘 마음이 설레인다. 더구나 아름다운 게송까지 있으면 더욱 더 사랑스럽다. 그런 게송 중의 하나가 금강경의 사구게 원형이라 보여지는 ‘포말경’이다.
포말경에서 빠알리어와 영문을 추가하여 다시 구성하여 보았다.
1.
Pheṇapiṇḍūpamaṃ rūpaṃ vedanā bubbuḷupamā
Maricikupamā saññā saṃkhārā kadalūpamā,
Māyūpamañca viññāṇaṃ dīpitā 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의식은 수포와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Form is like a glob of foam;
feeling, a bubble;
perception, a mirage;
fabrications, a banana tree;
consciousness, a magic trick —
this has been taught
by the Kinsman of the Sun.
2.
Yathā yathā naṃ nijjhāyati yoniso upaparikkhati,
Rittakaṃ tucchakaṃ hoti yo naṃ passati yoniso
그 근본을 보아 자세히 관찰하고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있고 공허한 것이네.
However you observe them,
appropriately examine them,
they're empty, void
to whoever sees them
appropriately.
3.
Yo imaṃ kāyaṃ gārayhaṃ bhuripaññena desitaṃ,
Pahānaṃ tiṇṇaṃ dhammānaṃ rūpaṃ passetha chaḍḍhitaṃ.
이 몸을 비롯해 모두 그렇다고
위대한 지혜자는 가르치네.
세가지 것을 떠나 물질을 버려야할 것으로 관찰하라.
Beginning with the body
as taught by the One
with profound discernment:
when abandoned by three things
— life, warmth, & consciousness —
4.
Āyu usmā ca viññāṇaṃ yadā kāyaṃ jahantimaṃ
Apaviddho tadā seti parabhattaṃ acetanaṃ.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여지니 의도 없이 타자의 먹이가 되네.
form is rejected, cast aside.
When bereft of these
it lies thrown away,
senseless,
a meal for others.
5.
Etādisāyaṃ santāno māyāyaṃ bālalāpinī,
Vadhako eso akkhāto sāro ettha na vijjati.
이 몸이 상속하는 것 이와 같네.
무지한 자가 지껄이는 환상이라
살해자라고도 불리우네. 여기에 실체는 없다네.
That's the way it goes:
it's a magic trick,
an idiot's babbling.
It's said to be
a murderer.
No substance here
is found.
6.
Evaṃ khandhe avekkheyya bhikkhu āraddhavīriyo,
Divā vā yadi vā ratti sampajāno patissato.
수행승이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처럼 존재의 다발을 관찰하라.
낮은 물론이고 밤낮으로 올바로 알고 바로 새겨라.
Thus a monk, persistence aroused,
should view the aggregates
by day & by night,
mindful,
alert;
7.
Pajahe6- sabbasaṃyogaṃ kareyya saraṇattano,
Careyyādittasīsova patthayaṃ accutaṃ padanti.
모든 결박을 끊어버려라. 자기 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should discard all fetters;
should make himself
his own refuge;
should live as if
his head were on fire —
in hopes of the state
with no falling away.
(포말경, 한역: 전재성님, 영역:Thanissaro Bhikkhu)
2012-01-24
진흙속의연꽃
일곱.눈먼쥐.하나
일곱.눈먼쥐.하나 Y
2012.01.2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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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과거의 일본 학자들 사이에 무아-비아 논쟁이 잠시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사-영산불교 = 비아-영혼체-윤회 ~ 여기에서 “영혼체”라는 말을 쓰고 있네요!
무아가 아닌 “비아”가 윤회한다고요? 스승의 주먹 속에 비아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던데.
함께 읽어 보세요. (인용)
1) 無我와 非我의 문제 ~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학적인 문제이다 --- 동국대/경주 ~ 김성철 교수님 … 2002년 5월
이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린 제 논문 \'중론 귀경게 팔불의 배열과 번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불교학> 제30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아인지, 비아인지 묻는 것은 넌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아, 비아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학적인 문제입니다. 무아 또는 비아를 산스끄리어로 an-atman(장음부호 생략)이라고 하는데, 산스끄리뜨어는 영어와 같은 계통인 인도-유럽어족에 속합니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에서는 무와 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영어의 \'is not\'의 경우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Ther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에는 무가 되고, H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는 비가 됩니다. 이는 산스끄리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의 접두어 \'a\'(자음 앞에서 쓰임)나 \'an\'(모음 앞에서 쓰임)은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한국어로는 없다와 아니다가 모두 됩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문장의 맥락을 보고 판단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중촌원 등 많은 일본 학자들이 무아가 맞는지, 비아가 맞는지 토론을 벌여 왔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이는 언어의 차이를 간과한 넌센스입니다.
2) 모든 사물엔 ‘자아’가 없다 - 삼법인 ③ - 제법무아 ~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로 욕망사슬 끊어야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952
~ 2011.10.22 이필원 박사/동국대 강사 [불교신문 2759호/ 10월15일자]
삼법인이라 하면, 일체개고 대신 일반적으로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고통은 현실인식이지만, 열반적정은 모든 고통이 소멸된 결과로서 획득되는 결과이다. 열반이란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고요한 적정(寂靜)의 경지이며, 번뇌에 의해 다시는 오염되지 않는 완전한 청정(淸淨)한 경지를 의미한다. 일체개고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열반적정은 긍정의 뉘앙스가 강하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는 경전 편찬자들이 아마도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추구해야 할 긍정적 요소를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삼법인 가운데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가장 극명하게 차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아관념을 부정하는 제법무아의 가르침일 것이다. 제법무아는 개인적인 자아의 부정과 동시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것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가르침이다.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법무아를 설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자아라 할 만한 것이 없다’(제법무아)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9게송, <테라가타> 제 678게송)
한편 무아(無我)는 비아(非我)라고도 번역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 비아라고 번역할 경우 어떤 자아(영혼)가 긍정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인간을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오온이란 색(色, 물질), 수(受, 감각작용), 상(想, 개념작용), 행(行, 의지작용), 식(識, 식별작용)이다. 무아가 되었든, 비아가 되었든 의미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이외에 여섯 번째를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의 부정은 의식의 근원에 자리한 소유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경전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五蘊)은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늘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니 솔직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는 망상이 된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 역시 다섯 가지(오온) 이외에
여섯 번째가 존재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 우리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의 칼로 욕망의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한 금강석의 지혜를 부처님은 삼법인의 내용으로 요약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추천 = 지난 연꽃님글
http://blog.daum.net/bolee591/16153981 ---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전재성/한국빨리성전협회 대표)
http://blog.daum.net/bolee591/13510583 --- 존재의 세가지 특성, 삼법인 (마성/팔리문헌연구소 소장)
감사합니다. __()__', 'true', 'cmt'); return false;" href="#">신고
대반열반경 ~ 스승의 주먹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과거의 일본 학자들 사이에 무아-비아 논쟁이 잠시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사-영산불교 = 비아-영혼체-윤회 ~ 여기에서 “영혼체”라는 말을 쓰고 있네요!
무아가 아닌 “비아”가 윤회한다고요? 스승의 주먹 속에 비아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던데.
함께 읽어 보세요. (인용)
1) 無我와 非我의 문제 ~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학적인 문제이다 --- 동국대/경주 ~ 김성철 교수님 … 2002년 5월
이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린 제 논문 '중론 귀경게 팔불의 배열과 번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불교학> 제30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아인지, 비아인지 묻는 것은 넌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아, 비아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학적인 문제입니다. 무아 또는 비아를 산스끄리어로 an-atman(장음부호 생략)이라고 하는데, 산스끄리뜨어는 영어와 같은 계통인 인도-유럽어족에 속합니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에서는 무와 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영어의 'is not'의 경우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Ther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에는 무가 되고, H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는 비가 됩니다. 이는 산스끄리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의 접두어 'a'(자음 앞에서 쓰임)나 'an'(모음 앞에서 쓰임)은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한국어로는 없다와 아니다가 모두 됩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문장의 맥락을 보고 판단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중촌원 등 많은 일본 학자들이 무아가 맞는지, 비아가 맞는지 토론을 벌여 왔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이는 언어의 차이를 간과한 넌센스입니다.
2) 모든 사물엔 ‘자아’가 없다 - 삼법인 ③ - 제법무아 ~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로 욕망사슬 끊어야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952
~ 2011.10.22 이필원 박사/동국대 강사 [불교신문 2759호/ 10월15일자]
삼법인이라 하면, 일체개고 대신 일반적으로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고통은 현실인식이지만, 열반적정은 모든 고통이 소멸된 결과로서 획득되는 결과이다. 열반이란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고요한 적정(寂靜)의 경지이며, 번뇌에 의해 다시는 오염되지 않는 완전한 청정(淸淨)한 경지를 의미한다. 일체개고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열반적정은 긍정의 뉘앙스가 강하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는 경전 편찬자들이 아마도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추구해야 할 긍정적 요소를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삼법인 가운데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가장 극명하게 차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아관념을 부정하는 제법무아의 가르침일 것이다. 제법무아는 개인적인 자아의 부정과 동시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것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가르침이다.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법무아를 설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자아라 할 만한 것이 없다’(제법무아)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9게송, <테라가타> 제 678게송)
한편 무아(無我)는 비아(非我)라고도 번역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 비아라고 번역할 경우 어떤 자아(영혼)가 긍정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인간을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오온이란 색(色, 물질), 수(受, 감각작용), 상(想, 개념작용), 행(行, 의지작용), 식(識, 식별작용)이다. 무아가 되었든, 비아가 되었든 의미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이외에 여섯 번째를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의 부정은 의식의 근원에 자리한 소유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경전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五蘊)은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늘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니 솔직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는 망상이 된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 역시 다섯 가지(오온) 이외에
여섯 번째가 존재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 우리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의 칼로 욕망의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한 금강석의 지혜를 부처님은 삼법인의 내용으로 요약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추천 = 지난 연꽃님글
http://blog.daum.net/bolee591/16153981 ---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전재성/한국빨리성전협회 대표)
http://blog.daum.net/bolee591/13510583 --- 존재의 세가지 특성, 삼법인 (마성/팔리문헌연구소 소장)
감사합니다. __()__
장문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__()__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우주의 체성을 이야기하심과 동시에 이미 설명드린 수행의 방편으로 "나라는 생각을 버리라는"의미입니다. 그리고 오온과 영혼체를 혼동하시지 말기를 바라며 영혼체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는 현상계에 한정된다는 내용을 깊이 사유해 보시기 바라며, 이 깊은 내용을 알지 못하고는 영원히 영혼체에 관하여 알 수 없을 것이옵니다.
우주본체인 空이 있기에 우주가 성주괴공을 미래제가 다 하도록 계속할 것이며, 나의 器體(본체)가 있기에 윤회를 계속합니다.(해탈하지 않은 한), 즉 사진의 원판이 있어야 현상을 계속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일부 학자의 관념이나 선불교의 禪의 개념으로 영혼체를 이상한 방향으로 매도하시지 말기를 진심으로 당부드립니다
.
아울러, 부처님의 삼법인 사상중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현상계에 한정되며, 열반적정은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통달무아법자 여래 설명진시보살, 즉 "나我라는 생각이 없는 그 나我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분을 보살이라 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위법을 벗어난 것이 있습니다. 열반입니다.
성태용 교수님의 말씀은 참선의 기본으로서의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선종의 부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성태용 교수님의 스승이신 백봉 거사님께서는 선사로서, 처음 공부하실 때 교리를 거의 모르시는 상태에서 조주 무자를 참구하시다가 선사 어록을 듣고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백봉 거사님의 가르침은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누구냐,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놈이 누구냐?" "빛깔도 소리도 없는 바로 그 자리, 허공이 본바탕이고 법신"이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종입니다. 지관 스님의 말씀은 선종에서 구두선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겠습니다.
무아와 비아의 경우는 둘 다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은 나가 아니고 오온 속에는 내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문장구조만 놓고 보면 알기가 쉽습니다. 오온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은 한국에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과 같고 내가 없다는 말은 호랑이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른 말이죠.
그리고 한국어에서는 자아와 영혼과 불성은 서로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혼용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은 제가 마지 못해서 썼지만 불교식 용어는 아닙니다. 중음신이나 영가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그냥 썼습니다.
각묵 스님의 여래장 사상 비판에 대해서 두 불자님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A불자님:
무상,무아,일체개고하고 여래장하고 틀린게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각묵스님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는것은 신을 믿는 사람은 불교를 믿지 않아요.
그럼 남는 것은 도교인데 도교는 이론적 근거가 없어서 도교를 믿는 것이 불교를 믿는거보다 더 어려워요.
각묵스님은 혼자 남들은 이럴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거 같네요.
무상,무아,일체개고니깐 여래장인거예요.
그것은 실체가 없는 위없는 깨달음인것이죠.
다른 이름으로 여래장이라서 그런거예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연기하여 모든것이 충만한것이 되는 것이죠.
실체가 없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실체가 없다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인 자아의 극치만 인식할수 있어요.
거기가 신심환희예요.
실체가 없다까지 갈수도 없고 갈필요도 없어요.
실체가 없다가 진리라는 것만 알면되요.
B불자님:
과거 밝힌 바 있듯, 개인적으로 여래장 관련 교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래장이 일심과 밀접한데요. 일심은 선불교와 밀접하구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선불교도 좋아하지 않죠? 일관되게...
다소 거칠지만,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래장 교학은, 수행에서 사성제 중 멸성제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좌부 교학은, 수행에서 사성제 중 고성제에 입각하죠. 그런즉 상좌부교학과 여래장교학 상호간은, 거울에 비친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대칭된단 말이죠...
고성제에 입각하면, "무상-고-무아"라는 글자가 전면에 등장하죠? 멸성제에 입각하면, 어떨까요?
"무상-고-무아"의 부정이 되겠죠? 그래서 "상-락-아"가 나옵니다. 물론 반야부 논리에 따르면, "상-락-아"가 나와선 안되죠? "무무상-무고-무무아"가 나와야죠. 그런데 여래장 교학은, 단순하게 그냥 "상-락-아"라는 표현을 채택합니다. 이게 특징이죠. 왜 그러냐 하면요...멸성제 즉 열반의 교의에 입각하기에, 열반을 부정하는 언명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반야부와 위와 같은 표현상의 차이가 나는 거구요. 반야부는, 멸성제에 입각하더라도 괴로움이 중심입니다. 멸성제에 입각하여 괴로움을 파악하자면, 어떠한가도 논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부정"이 "머무르지 않음"의 의미구요. "무무상-무고-무무아"등 "부정의 부정"도 나와요.
반면 여래장 교학은, 열반을 중심으로 두고 멸성제에 입각한다는 차이가 있는 거예요.
왜 그런 교학이 나왔냐? 과거 적은 글에 있는데요. 수행은 유위입니다. 형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형성으로, 어떻게 형성되지 않은 것에 이를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그럴 수 없죠? 그런즉 아무리 수행해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단 말이예요. 아니면 무위법이 있어 그것을 취할 수 있거나... 하지만 취해진다면, 이미 무위법이 아니란 말이예요. 취해진다면, 열반이 아니예요. 반면 여래장 교학은, 왜 괴로움이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취약합니다. 열반이 중심이니까... 그래서 괴로움을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말이 바로, 망집 내지 망분별등입니다.
우리가 상좌부를 포함하여 소위 소승으로 통칭되는 그룹의 교학들은, 법을 일일이 구별해서 특정 법은 버리고 특정 법은 취하는 작용을 하도록 안배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솔직히 그렇거든요. 실제 상좌불교 행자들 글을 보세요. 그렇잖아요... 왜 그럽니까? 무위법을 취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형성으로 형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그러한 논리적 부분은 외면하고, 모른 척 하고...그냥 두리뭉실 소위 간택이라는 형식으로 우회하고 있어요. 그래가지고서야, 합리적으로 의심이 제거되냔 말이예요... 눈 가리고 아웅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무상-고-무아"를 입에 달고 살 뿐, 실제로는 취할 열반을 찾아 헤매죠.
어떤 체계가 있을 때, 그 체계에 속하는 이는 그 체계가 어떤 문제를 다루는 비중에 따라 끌려다니게 만듭니다. 그런 효과가 있어요. 부지불식간에, 그 체계에서의 비중에 따라 중요도를 판단하고 마음을 강하게 둔단 말이죠... 이러한 비판은 여래장 교학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여래장 교학은 안배를 하고 있어요. 열반을 중심에 두고 열반에 입각해 선언하지만, 오히려 "망집-망분별"등을 없애는 일만 강조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그 수행에서, 심해탈을 추구하는 "삼매 중심 체계"라는 거예요. "망집-망분별"이 없은 즉, 이미 여래장 즉 열반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여래장 교학을, 개인적으론 아주 나이브한 대승 교학으로 생각하죠.
물론 여래장 교학이 좀 더 세련되면서 보완되어 나가긴 합니다만... 그 발상은 아주 나이브한 거예요... 세련되지는 않아요.
지금 생각을 정리하면서, 바로 바로 적자니 난삽한데요. 숙고하고 생각을 다듬어 적어야 하는데... 참... 좌우당간 상좌부교학은 열반을 논함이 금기시죠? 여래장교학은, 괴로움을 논함을 곧잘 금기시했어요. 반면 신심과는 잘 연결될 수 있으니, 신심은 강조하죠... 상좌부 교학을 이해하면, 여래장 교학도 이해해요. 서로 쌍둥이거든... 논리적으로는...["망집이라는 유위"를 "수행이라는 유위"로 없애기만 하면, 이미 열반]이라고 말하는 여래장 교학이 뛰어나죠. 그런데 이러한 요소가 상좌부 교학에도 있어요...
그러니 당최 [상좌부 교학을 이해했는데, 여래장 교학을 이해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상좌부 주석에도...[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에,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난다]와 관련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을 "조건지어진 것"의 논리적 근원으로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가다님이, 넷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교학은 교학인 것인데...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지, 그래서 뜻을 바르게 파악하려고 해야지...단순히 글자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그거는 문제가 많죠... 각묵스님은 "무상"의 부정인 "무무상"을 말하는 반야부는 긍정하는 듯 한데, 그렇다면 그거는 왜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는지 궁금하구만...
가장 최근에 대승기신론과 관련해 적은 글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지적을 했듯...[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에,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난다]는 언명을, [여래장의 성공덕으로,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난다]고 표현하면 어떻습니까? 다른 뜻인가요? 아니죠?
결국...<<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 열반 : 여래장]이 있기에, [조건지어진 것 : 괴로움 : 오온]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난다 >>는 겁니다. [오온]은, 소위 배우지 않은 이가 ['나'라 이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네 중생은, 오온을 '나'라고 믿고 있잖아요... 그러니 어떻습니까?
차라리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 열반 : 여래장]을 [나]라고 믿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왜? 적었듯,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 열반 : 여래장]이 있어 ['나'라 이름하는 것 : 오온]에게서 벗어나니까... 위에 적은 상좌부 주석의 논리를 차용하자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 열반 : 여래장]이 [ '나'라 이름하는 것 : 오온]의 논리적 근원이니까...
상좌부 교학과 여래장 교학은 같죠? 같아요... 동일 평면이란 말이죠. 제가 "참나"등의 표현과 관련된 비판의 글을 적은 것이 아주 많은데, 그것은 단순히 글자만 보고 그랬던 것은 아니예요. 물론 여래장 교학은, 위험성이 있어요... 삼매수행은, 소위 수행전문가에게 적합한 것이거든요.
게다가 여래장의 성공덕으로 이미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그침(지:삼매)"이면 이미 족하다는 겁니다. 분명 일차적으로 소멸을 지향한단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여래장 계열 역시, 상좌부 계열과 관련해 대승에서 문제로 삼을 몇 가지 부분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이브한 형태를 떠나 세련되진 경우, 달리 볼 수도 있을 거예요.
[경]을 함부로 부정하면 안됩니다. 뜻을 알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글자만 보고 함부로 [경]등 거대 전승을 부정하면, 얄팍하게 되요. 제대로 아는게 없게 됩니다. 법이 아니라, 한참 모자라고 알량한 자기 견해만이 위 없는 기준이 되니까요...
와우, 재미있네요. (그리고 이제서야 담마님이 일관되게 들이댔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조금 느끼겠네요.)
언젠가 제가 서양철학 개요를 소개했더니, 담마님 왈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사실 좀 민망했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담마님의 말씀을 따라가기가 힘드네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잘 읽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담마님의 글도 수행자.禁, 진짜불자.禁일 것 같네요. 그래서 저도 더불어 이것 몰라도 되는 거죠!
그러나 궁금한 것은 여쭙겠습니다. 먼저 담마님의 두 번째 글 중 "실체가 없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
좀 더 부연 설명 가능할까요? 설마 누구처럼 분명 본체계로 빠지는 것은 아닐 텐데요. 삼가 부탁 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담마님이 소개하는 우다나경에 대한 저의 감회를 쓴 것이 제가 이 곳에 쓴 맨 첫 글 이었더군요.
분명 불교는 역류도이어서 고금에 걸쳐 사람들은 보통 쳐다 보려고도 잘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불교를 그나마 재미있게 표현한다면 관심 있어 하는 분에게는 저는 “Gautama’s Fantasy”라고 소개합니다.
“실체가 없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실체가 없다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인 자아의 극치만 인식할 수 있어요. 거기가 신심환희예요.”
부탁 드립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__()__
저도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하겠네요. 죄송합니다.
B불자님의 글 한단락을 추가합니다.
"과거에 적은 바 있는데요. 일심계열은, 달마가 본격적으로 중국불교에 도입한 거죠... 선불교가, 일심 계열이예요.
그런데 선불교인 조계종의 승려가 "일심 계열 경론은 불법에 반한다"고 말하려고 한다면, 조계종에서 나와야죠. 몰몬교 성직자가 몰몬경은 위경이라고 성경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주장을 한다면, 몰몬교 성직자직을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과 불공등 관련 표현에 관한 지식도 이해도 없이, 나오는 대로 막 말하는데요. 물 건너간 상태로 봐야 함...
우리나라 불교 특히 조계종은, 승려가 [경]을 비방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어요. 대단히 특이한 종파인데요. 그런 것은 관대함이 아니예요. 전혀 아니죠...한심하지..."
각묵스님의 여래장 유감에 대한 글을 둘러싼 논평의 다양한 글들이더군요.
대충 둘러보긴 했습니다만, 보고 나니 오히려 별로 끌리지 않게 되네요. 너무 머리 아파요.
재미있는 사유들이고, 또 붓다의 깨달음은 어쨌든 참으로 다양하게 변용되긴 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지만요.
그리고 그 분들의 사유적 노력과 공부하신 정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솔직히 못 따라 가겠어요.
그러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머리가 덜 아프려고요.
먼저 있었던 것은 붓다의 "수행"에 의한 "정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법"에 의한 "교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극단.수행~중도.수행-정각-전법-교학)
교학의 논쟁에 의해 붓다의 수행, 그리고 붓다의 정각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교학적 이성적 논쟁에 의해 새로운 수행을 개발할 수 있으면, 그 분도 각자이시겠죠. 그러나 고타마 붓다는 아니죠.
그래서 저는 우선 고타마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들을 중시하겠습니다.
왜곡의 가능성이 최소화되어 있다는 소위 남방경전인 빠알리 경전을 더 우선시하고요.
또 머리가 나쁘니 당분간 그 쪽 체계의 교학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제는 선배님들이 많이 생겼잖아요.]
사실 이것도 저에게는 벅차기 때문에, 연꽃님 같은 다른 분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만요.
어쨌든 생각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진정 가야 할 길은 많지 않겠죠!
덕분에 새로운 구경 좀 했습니다. 재미는 있네요. 좀 더 구경해볼래요. 감사합니다. __()__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는데요, 저는 대승불교를 권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불교를 하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대승불교에 대한 비판 중 제가 다르게 생각하는 것만 저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적당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재미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먼저 지적 특허가 영구히 인정되는 상품인 고타마 붓다의 불교가 있습니다. 하나이겠죠. 논리상.
어느 상품이든 시간이 달라지고, 공간이 변하면 다양한 복제품들이 나오는 것처럼,
불교의 역사에도 다양한 변용의 유사 불교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의미로는 불교가 불교를 생산해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불교의 다양성은 그 동안 어쩔 수 없었던 역사-시간적, 지리-공간적, 인간적인 한계성 때문이기도 하겠죠.
오리지날과 다양한 복제품들 사이의 공통성을 그 상품들의 고유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불교들에 있어서도 불교 공통의 고유한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불교 공통의 고유 가치 기준을
삼사화합의 오온 “경험적 인식”에 의한, “실체성 부정”을 통한, “탐진치 해악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사유라고 봅니다.
형이상학적 실체성을 거부하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현대철학에서
불교와의 교차점을 찾아내려는 김종욱 동국대 교수님의 시도도 같은 맥락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반면에 최근 어느 분은 자신이 불자라고 하면서 인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형이상학적 실체를 거론합니다.
또 최근에 창교(?)한 어느 불교는, 붓다의 9제자들이 21세기의 한국에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영혼체와 함께
플라톤적 이원론인 현상계/본체.실체계를 거론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요. 기독교는 본체계 등정에 실패했는데 말이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대승불교의 시간적 환경에 있어왔고, 아직도 대승불교의 공간적 지형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불과 대승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기본적으로 담마님과 동일할 것 같습니다. 최근 들러본, 몇 개 안 되는 사이트이긴 하겠지만, 그곳에서 불교에 대한 치열한 사유적 노력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초불에 대한 상당한 적대감, 우리 사이트에서 간간히 우리가 대승에 대해 표현하는 불신감보다 더 큰 적대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거꾸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공통적인 최종적 지향은 탐진치 갈애의 해악으로부터의 탈출인데 말이죠. 좀 아이러니하죠?
괜한 노파심이겠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인간적 인식의 한계성에 대한 겸손한 인정이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탐진치에서 벗어날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또 언제 윤회가 끝날지 모르겠지만, 끝나든 안 끝나든, 그냥 바라밀이라도 축적해 두는 것이 남는 것 아닙니까? 담마님, 앞으로도 계속 삐딱해 주세요. 그리고 가끔씩 덕분에 대승불교 공부도 시켜주시고요. 믿습니다! 저는 당분간 계속 초불 경전 공부나 할 게요.
감사합니다, 담마님. __()__
저는 거기에서 적대감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B불자님은 누구보다도 초기불교를 잘 아시는 분이시죠. 그러면서 초기불교의 장점도 잘 아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저는 삐딱하려고 한 의도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도 무아를 기본으로 한다는 말이 삐딱한 것이라면 할 말은 없네요.^ ^
Welcome to 초기불교~!
깊은 숲에서 세달만 살아보면, 짐승처럼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예컨대, 십리밖 불피는 냄새까지 맡으니...
고기, 생선 비린 내는 오래 갑니다. 그래서, 옛날에 호랑이 곰이 앞산 뒷산에 살고 있을 때...
심산에 드는 자는 반드시 목욕재개하고 입산하라 했지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금은 고속도로변에 죽은 시체로 널부러진 산짐승, 들짐승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문명의 이기로 모르고 살 뿐, 터럭 구녕 속에 수억 중생이 산다는 말이 옛날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큰 바위, 큰 나무 주변엔 귀신이 잎사귀마다 달려 살고 있다는데...보이지 않으니...
그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할 뿐이죠...반은 물질이고 반은 뭐...물질 아닌 무어라던데..^^
귀신들리면 자기 삶을 못 산다고 하더군요...무당, 점쟁이..심신허약자..
울산 조심하세요...귀신 쓰레기통. 속지마라 속지마라...속지마라...울산 울산 울산....
누군가 말하길 한반도에서 정법 찾지마라. 물 건너 간지 오래다...
절간은 구신 쓰레기통. 세속은 사상론이 범람하고.
'불법은 사상이 아니니라' 이 말씀 하나 새기며 오늘도 갑니다!
아, 그리고 ...불경은 함부로 보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더이다.
화장실 갔다 온 후에는 반드시 손씻고...보라...
살아 있는 모든 님들, 성불하세요 _()_
무상이므로 무아이다...변하므로 실체가 없다...
Dhamma님과 일곱~님의 재미있는 댓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일곱~님의 댓글을 보고 있으려니 연꽃님의 글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초발심자의 정신(?),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 저는 그런 마음조차 있었는지 없었는지 까무룩합니다. 요사이 세간의 일에 얽매이다보니 출세간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드네요. 도피하고 싶어하는 마음 또한 알아차려야 하겠지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좋은 글들 계속해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_()__
참..사족을 좀 달아보고자 합니다.
Dhamma님께서 올려놓으신 글 중에 "수행은 유위입니다. 형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형성으로, 어떻게 형성되지 않은 것에 이를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그럴 수 없죠?"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부처님께서도 수행으로 열반을 이루셨는데,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유위법으로 즉 형성으로 형성되지 않은 것에 이르셨는지 궁금합니다. 제 짧은 생각으론 이런 말들 자체가 단순한 언어, 말, 즉 다시말해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이른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지요.
저의 이해를 말씀드릴게요. 말장난은 아니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인 것은 사실입니다. 화두라고 해도 될만합니다. 다만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정각하시던 때에 무엇을 형성했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지 만들어서 보거나 무엇을 조작해내어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올린 댓글에 Dhamma님께서 답글을 올리셨네요.
짧은 저의 생각으론, 부처님께서는 윤회의 사슬을 끊으신 것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일컬어지는 법구경의 게송에서 - 연꽃님께서 한동안 메인화면에 올리셨었죠, 저는 그, 글귀가 너무 좋아 한동안 입에 달고 지냈더랬습니다.- 부처님 스스로도 윤회라는 둑카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고 욕망을 완전히 끊으신 것을 말씀하셨었지요.
한동안 삶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절실히 했더랬습니다. 그러다보니 뭔가를 얻거나, 도달하거나, 그런 것 보다도 한량 없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벗어나는 것이 바로 열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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