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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7일 주일 메시지
시리즈 제목: 신약성경의 세상살이 가이드
6. 미래를 열어가는 교회를 위한 세 가지 지침: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설교를 위한 묵상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의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 이것은 신약학자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가 그의 책, ‘신약의 윤리적 비전’(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제시하는 통찰이다. 나는 전에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여 책을 썼는데 그 제목은 ‘성경이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 하나님의 경륜’이다.
요새 나는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세상살이 가이드’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리처드 헤이스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해 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 책을 참고하면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나는 톰 라이트의 글을 주로 읽으면서 성경과 신앙에 대하여 생각해 왔는데, 리처드 헤이스의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리처드는 위의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하여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바울서신과 사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을 다룬 뒤에, 다양한 글로 이루어진 성경 이야기를 종합하는 세 가지 주요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다. 그 이후에 리처드는 성경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다섯 사람의 예를 소개한다: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칼 바르트(Karl Barth),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엘리자베스 슈슬러 피오렌자(Elizabeth Scheussler Fiorenza). 이 인물들은 성경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 알아가고 있다.
나는 최근에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코로나 판데믹과 상관없이 종교는 이미 세상에서 그 영향력과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교인들의 고령화 속에 젊은 세대에게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설득할 방법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던 가운데 종교의 미래에 대한 두 학자(오강남, 성해영)의 대담을 보고 교회가 변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변화의 방향은 바로 공동체 의식과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종교는 지구라는 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하여 초월적 은혜를 힘입어 변화의 동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변할 때 종교는 미래에도 여전히 유익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리처드의 책은 오늘날 우리가 실제적으로 고민해야 할 윤리적 과제들도 다룬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violence)을 사용하는 문제와 이혼(divorce)과 재혼(remarriage), 동성애(homosexuality), 그리고 인종갈등(ethnic conflict)과 낙태(abortion)의 문제다. 앞으로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주님이 지혜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이번 설교에서 나는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한 가이드로서 세 가지 키워드를 기억할 것을 제안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림추(錘, plumb)가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온갖 그럴듯한 이론으로 미혹하는 종교적 주장들을 판단하는 시금석(試金石, a touchstone)이 될 것이다.
우선 나는 문제제기를 위하여 성경을 붙들고 살아가는 다양한 진영의 소리 가운데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화의 길을 찾아보자고 권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위의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미래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될 것이다.
설교 개요
1. 문제제기: 종교의 미래는 있는가?
2. 공동체 - 나로부터 우리로 생각을 넓히자!
3. 십자가 -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자!
4. 새 창조 -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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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종교의 미래는 있는가?
오늘은 종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종교인으로서 우리는 기독교에 속하며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는 매우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전부터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교회의 고령화라고 부르거나 출산율의 감소로 젊은이들이 줄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다음 세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하며, 예전과 달리 교회 안에 은혜가 없고 목회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교회의 수적 감소에 대하여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에는 병이 들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이제는 병원에 갑니다. 전에는 돈이 없으면 작정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은행으로 달려갑니다. 전에는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거나 이성을 만나기 위해 교회의 문화활동이나 교회가 주관하는 체육활동에 참여했는데 이제는 클럽이나 동아리를 찾습니다. 전에는 동네의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는 놀이터와 배움터로 가기 위해 교회의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찾았다면 이제는 더 많아진 인터넷 게임과 학원을 찾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수가 줄어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거리에 내어놓기 보다는 가정 중심으로 생활하도록 더 세심하게 돌보는 것도 달라진 풍속입니다.
우리들은 종교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나빠진 원인을 기독교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일탈 행위는 기독교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이비 이단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교회가 함께 비난을 받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필요하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가 적지 않아서 ‘가나안 신자’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소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배당의 빈자리가 점점 많아지게 되고 결국은 교회가 텅 비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이유는 아마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답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우리의 시름은 깊어 갑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돌아보는 존재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근본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종교의 위기는 우리에게 종교의 근본에 대한 질문을 마음 속에 일어나게 합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무엇을 참 신앙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을까요? 위기의 시대는 마치 얼음이 녹고 그 밑에 있던 것이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생각 밑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본래 바로 그 위기의 시간에 인간이 발견한 자신의 참 모습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다’(이사야 55:8~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볼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평소에 옳다고 확신하며 살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그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에 꽂혀서 성경 전체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소속하여 질서와 규범 속에 살아가는 것을 율법에 매인 삶이라고 규정하고 자기들끼리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말하면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인간의 책임을 말하면 싫어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목적을 종말과 휴거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재림을 암시하는 신호가 아닌가 하는 강박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상기후, 또는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기보다는 그것들로 인하여 이 세상이 끝나고 주님이 재림하시지 않을까 하는 말세의 표시로 이해하려고 듭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더러는 코로나 예방백신을 맞는 것을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미국의 신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 까닭에 할리우드가 만든 재난 영화에는 자주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목에 성경말씀을 매어 걸고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사교의 장으로 여기며 또는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하여 예배당에 나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정치적 계산을 하면서 성경책을 들고 교회당을 찾아 어색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나라와 구별하지 못할 때에는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그릇된 기도를 해줄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교회 내부에 있는 우리들은 스스로 거룩한 성도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언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까? 그 생각에 따라 우리는 우리 교회의 미래상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좌우정승의 자리를 요구했던 세베데의 아들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기도 그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10월 15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47명이 목숨을 잃고 70여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슬람 세력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 표출된 것입니다. 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쉽게 던지는 것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 복락을 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사후에 들어갈 천국을 바라며 이생에서 그렇게 극악무도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사람의 신념이 왜곡되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하여 검토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 우리의 신앙과 신조를 점검해 보고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네비게이토 선교회 소속의 선배를 만나 나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점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동안의 신앙생활이 헛것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와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전도사님이 바로잡아 주지 않으셨다면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전하면서 그들이 잘못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감지하셨고 끝내 십자가에 달리시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을 전했을 때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도 동족에게 붙들려 고소를 당하고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고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보통 때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그 동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면 강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시간에 인간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자신들의 고향에서 살 수 없고 낯선 이방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을 때, 유대인들은 비로소 조상들이 만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피의 제사를 드리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열방을 위한 빛이 되는 민족으로 거듭날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기독교의 쇠퇴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위기의 시대는 기독교에게 새로운 각성과 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고 우리는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00년 전 영국에서는 산업혁명(1760~1850)으로 기계가 보급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자 기계파괴운동 (Luddite Movement, 1811~1812)이 일어났습니다.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노동자들을 폭력시위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기계를 통한 산업혁명은 영국을 강대국으로 바꾸어 놓을 기회였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의 영국은 바로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꽃을 피웠습니다.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오늘 우리들처럼 위기를 겪은 시절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교회는 다시 근본으로(ad fontes, back to the sources) 돌아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 소망은 신자들을 다시 성경으로 인도하였고, 신자들은 자기 시대의 상황 속에서 성경을 새롭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진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깨우침이 있을 때마다 교회는 새롭게 되었고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서 역할을 다시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유럽의 종교개혁입니다.
저는 작년에 성경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를 소개하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이드가 성경이라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길은 매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함으로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열고 들어갈 미래의 문고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2. 공동체 - 나로부터 우리로 생각을 넓히자!
종교의 정의가 본래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인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도 개인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의료시설의 발달로 질병의 치료가 용이해지고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 지금 종교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큰 흐름으로 보면 하나님은 한 부부를 부르시고 한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만민을 회복하시려는 꿈을 나누시고 그 일에 초대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불러 교회를 세우시고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는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세상의 회복과 번영을 목표로 살아가는 대안문화적 공동체(a counterculture community)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낼 몸이며, 산 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며, 산 위에 있는 마을이며, 광야의 이스라엘’이라고 비유합니다. 이렇게 볼 때 좋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교회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흔히 개인이 성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유명한 축구선수가 월드컵 같은 시합에서 승리의 골을 넣은 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기뻐하는 모습처럼 우리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표적을 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아버지를 구원하실 때 어머니의 희생적인 돌봄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오천명의 신자들을 모으시고 벳새다 광야에 빛나는 성전을 건축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서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세상에! 모욕과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 알맹이, essence, quintessence)입니다!
개인이 복을 받고 가정에 좋은 일이 일어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도록 임무를 받았습니다.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나로부터 우리로 그 생각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셨으니까요. 그때 비로소 교회는 나 자신을 염려하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기보다는, ‘하나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공동체임을 모르고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 유익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고 앞으로도 볼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교회에 계시하시고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삼으셔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실 것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며 자신을 드릴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분명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공동체야말로 미래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십자가 -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자!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 교회가 되자는 표어 아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문을 열고 미래 세대에도 여전히 세상의 빛이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세상에 대안이 되는 공동체가 되라고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세상에 대안이 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일에 가장 모범이 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은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신 일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표지이자 모범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8, 16:24, 막 8:34, 눅 9:23, 14:27). 그렇게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스승인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 새번역성경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이 가진 권세와 특권을 내려놓고 그것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근에 신천지 집단이 일어나 교회를 향하여 매주 홍보물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천지 집단이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수십만의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러 왔으며 훈련을 받고 수료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속물근성에 찌들어 자신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자신들의 부끄러움인 줄 알지 못하고 그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너무 닮아가는 바람에 대안이 되는 모범을 보여주기보다는 더 세속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더 큰 욕심에 사로잡히고 더 큰 불의를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합리화하고 있다면 그 규모가 어떠하든지 간에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야망과 탐심을 키우면서 자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생이나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성공한 목회자를 선정할 때 어떤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얼마나 큰 교회를 세웠는가를 생각하고 선교사업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에 가산점을 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작고 외진 곳에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사역하는 사람을 알아주며, 없는 사람을 위해 소리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목회자나 선교사들을 칭송하며 존경합니까? 저에게는 그분들을 교회의 자랑으로 여기고 따르기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든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하고 겸손히 십자가를 따르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차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는지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지 않았습니까! 새번역성경은 그 대목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마태복음 16:22, 새번역성경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생각은 너무 낯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늘이 땅보다 높음 만큼 그렇게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미래에도 여전히 세상에 필요한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규모와 상관없이 자기의 특권과 권세를 내려놓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날마다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얼마이든지 간에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을 없는 사람과 나누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크게 되기만을 바라는 공동체는 여전히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고 대드는 베드로와 같은 모습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특권과 권세를 내려놓는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갈 때 자신의 삶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그리고 그 앞에 다가올 열매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면서 고난과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4. 새 창조 -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희생과 헌신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큰 고통을 참아야 하는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열매를 기대하며 기뻐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는 십자가 이후에 하나 더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무덤에 갔을 때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곧 피조세계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선언했습니다! (고후 5:17).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지으실 때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를 다스리며 그것을 축복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죄의 종노릇을 할 때는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고 살다 보니 사람으로서 사람이 아닌 행동을 하면서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살면서 누리게 된 해방과 자유와 기쁨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에 대한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그 분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만국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 중에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도 그를 맏아들로 삼아서,
세상의 왕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왕으로 삼겠다.
그에게 내 신의를 영원토록 지키며,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성실히 지키겠다.
시편 89:27~28, 새번역성경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2:8~9, 개역개정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10, 새번역성경
이 말씀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 마침내 세상 만국의 왕이 되셔서 통치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셔서 하늘에 올리시고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셔서 만국의 왕이 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행 2:35, 7:55~56, 8:34, 골 3:1, 히 1:3, 13, 8:1, 10:12, 12:2, 벧전 3:22). 그러므로 땅의 일을 주관하는 하늘에서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실을 믿는 교회와 성도가 이 땅의 그 어떤 존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며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며 자기의 특권을 내려놓은 삶은 억울한 삶도 아니며 불쌍한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신앙을 믿는 기독교인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로 살다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보았고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비로소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하신 새로운 창조 사역에 자신들이 부름을 받았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예수님의 분부를 지키는 것이며 그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늘의 소임을 맡은 새로운 대리인들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으로 세상을 섬긴 결과 인류는 오늘과 같은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세상 도처에 어둠이 많이 드리워져 있음을 압니다. 아직도 질병이 많고 억압과 한숨, 테러와 갈등, 전쟁과 죽음이 인간이 사는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소망합니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고 그의 대리인인 교회를 통하여 새 일을 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협력하고 헌신합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선한 기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며, 주님의 뜻을 따라 새 창조를 위해 신실하게 일한 포도원의 일꾼들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완성하시는 새롭게 지어진 세상을 물려받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이런 희망과 확신이 있는 한 우리는 어떤 어두움이나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으며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미래로 가는 문을 활짝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마음에 품고 세 가지 키워드를 기억하며 성경을 읽고 교회를 세워갑시다: 공동체-나로부터 우리로 생각을 넓히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자! 새 창조-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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