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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행복 즉 구경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인과 연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성제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연기법의 지견을 설명했는데 4성제 가운데 멸제에 의해 고통의 因까지도 점차로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인을 없앨 수 있는 비결은 밖에서 말했듯이 전도된 지견인 무명 즉 육도에 윤회하는 12가지 인연 가운데 첫 번째 단계부터 생겨난 무명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없앨 수 있고 없는지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없애지 못하면 고통이 조금씩 계속 남아 있게 되어 결국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없애게 되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멸제가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고통의 원인인 집제를 없앨 수 있느냐 없느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도리를 잘 알게 되면 앞서 말한 나라는 집착을 마음으로만 갖고 있으면 큰 허물이 되지 않겠지만 아집이 반복되게 되면 그런 집착이 견고해져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이 바로 전도된 지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서 무아의 지견을 세워야 하는 것이고 전도되지 않은 바른 지견에 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되지 않은 지견으로 전도된 마음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화를 낸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쾌해지게 되고 마음이 불편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내는 마음은 전도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려면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타인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모두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 모든 사람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들이 자비로운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마음을 생각만 하는 것으로 화나는 마음을 없앨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되지 않은 바른 지견으로 전도된 지견을 없앨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자비로운 마음을 수행한다 해도 성내는 마음을 없앨 수는 없지만 화나는 정도가 줄어듭니다.
그와 같이 무아의 지혜가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의 힘을 확실히 줄어들게 할 것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번뇌의 뿌리인 무명이 내 마음 속에서 얼마나 힘을 쓰느냐 마느냐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번뇌는 굉장히 힘이 강합니다. 그러나 번뇌가 일어날 때 우리의 마음이 장성청정한 모습으로 안주한다면 우리가 자성의 본래면목을 깨달았을 때 항상 자성본연의 상태에 안주하게 되면 번뇌가 일어난다 해도 자성광명에 의해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내는 마음과 같은 번뇌가 발 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바로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번뇌의 연을 막는 것입니다. 번뇌의 도둑을 바로 알아차려서 본연의 우리 마음과 구분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가 일어나자 마자 바로 대치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번뇌를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번뇌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성제 가운데 세 번째인 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멸제엔 여러 단계가 있는데 번뇌의 근본에서 벗어난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윤회와 열반에 住한다 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불법이 여타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첫 번째 연기법의 지견이 없습니다. 두 번째 무아의 지견이 없습니다. 세 번째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아의 지견을 수행해서 아집에 의해 생겨난 모든 허물을 완전히 정화해 내는 것을 해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생각만이 아닌 실제 마음의 공덕에서 생겨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와는 공유할 수 없는 불교에만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반복해서 관찰하고 사유해야 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불법이 다른 점을 알았습니다. 한국 불자 여러분들은 조상 때부터 불교도였습니다. 티벳 사람들도 조상 때부터 불교도였습니다. 어쨌든 조상 때부터 어떤 종교를 믿었던 그 종교를 믿고 신심을 내게 되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조상이 믿어 온 불교와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경시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는 수백 수천 가지의 종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힌두교 예수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있는데 이런 종교를 믿는 신도들은 수백만에 달합니다. 이런 종교들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도움이 되었고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복은 원하고 불행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경의 영원한 해탈을 얻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마음을 편안케 하고 이생에 큰 행복은 얻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수행하면 내생에 천인의 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들도 인류에게 도움이 되므로 당연히 인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견해도 다르고 목적도 다릅니다. 다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천성과 원하는 바가 다르듯 거기에 맞춰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한 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하였지만 적성과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실제적인 상황과 인연을 살펴 여러 가지 다른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유식파의 견해와 중관파의 견해가 크게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중관파의 견해에서 보면 유식파의 견해가 내적으로 모순점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견해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때와 적성과 원하는 바와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하고 그 종교가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중관파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유식파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관파의 견해도 소중한 가르침이다 라는 생각으로 인정하고 유식파의 견해도 신심을 가지고 인정해서 마음으로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할 뿐이지 중관을 좋아한다 해서 유식을 부정하고 유식을 인정한다 해서 중관의 학설을 비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을 내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지 자신이 인정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연법과 인과법을 생각해서 번뇌가 고통의 뿌리인 것을 인정하고 무아의 지혜를 일으켜서 번뇌를 끊고 행복의 길에 이르고 해탈을 얻게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신심을 내게 되면 아마도 기독교를 믿기가 계속해서 예수를 믿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와 같이 힌두교 이슬람교 등 여타 종교도 인연법을 알게 되면 창조주를 인정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고통의 뿌리는 아집에서 오고 전도된 지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집을 버리고 불행의 원인을 없애게 하는 수행법을 알게 되면 외도들의 교리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타 종교에 대해서 존중하고 인정해 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믿지 않는 타 종교의 수행방법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과 예수 마호메트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찬탄해 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지혜롭게 분석하고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믿고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근기는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관파의 학설도 유식파의 학설도 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근기에 유식의 지견이 맞으면 유식을 수행하고 반대로 중관의 학설이 맞으면 그것을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부처님 법이 맞으면 불교를 수행하고 다른 종교는 존중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도 외도의 법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법을 듣고 수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성제와 같은 초전법륜을 굴리실 때 외도들과 공통된 법을 설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자신이 외도의 법을 수행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삼매를 얻는 법이라든지 세간의 위빠사나 수행은 불교와 외도들의 공통된 수행법입니다. 무상의 관하는 법이나 보시 지계 인욕 정진과 세간의 지혜를 얻는 수행법은 공통된 수행입니다. 그렇지만 보시바라밀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싫어 속세를 떠나는 염리심은 공통된 수행법인데 강약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외도들의 수행법 가운데 공통된 법을 수행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기독교나 회교에서도 불교처럼 인욕 자비 사랑 명상수행 등을 하는데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같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된 법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는 팔리어<BC 2세기부터 발달한 인도 중부지방 언어>가 주 언어였습니다. 팔리어에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알진 못하지만 그 당시엔 주로 팔리어로 법을 설해 점차로 팔리어 경전이 성립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인도 내에서 불교를 잘 아는 대학자들이 부처님의 사상을 잘 보존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에서 산스크리트어로 해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나란다 대학의 대학자들이 주석한 논장들 대부분이 산스크리트어로 돼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팔리어로 법을 설하셨고 후에 부처님께서 부분적으로 특정 대상을 위해서 무슨 언어로 법을 설하셨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처님의 경전들이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함경 등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으로 여겨지며 용수 무착보살들이 부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서들이 나왔습니다. 용수 무착보살 등은 대학자이고 상상지혜를 가지신 분들입니다. 어리석은 범부들과 같이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세히 분석하고 관찰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큰 지혜를 가진 수승한 분들이 인정하신 경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 근거 없이 대강 그렇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구경의 해탈을 위해서 산스크리트어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어쨌든 후에 나란다 대학에서 용수 무착보살 등이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표기하기로 결정해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편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경전은 팔리어 경전과 거기서 발전된 산스크리트어 경전 2가지로 나누어졌습니다.
팔리어 계통은 태국 스리랑카 버마 캄보디아 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산스크리트어가 외국어로 번역되기로는 중국어가 가장 먼저 되었고 그 후 한국과 일본 베트남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8C경 팔리어는 산스크리트어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를 외국어로 번역한 것은 중국어와 티벳어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한 중국어 경전을 번역해 수행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역으로 한국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경전과 티벳어에서 한국어로 직역된 경전이 통용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양에는 부처님의 경전이 태국어나 스리랑카어 중국어 일본어 티벳어로 번역됐는데 그 중 티벳어가 제일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 특히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된 경전이 지구상의 많은 언어로 번역돼 있지만 티벳어 경전이 가장 많고 완전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한국분들 중에도 티벳어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분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통역을 하고 있고 경전도 공부하고 있는데 티벳어를 배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따시엘레<축하합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된 경전 중 처음에는 티레비쩬이라는 왕 때 사째라는 언어로 처음 번역됐다고 전해지는데 두 번째는 티송데우쩬 왕 때 번역됐습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티벳의 경전이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은 원전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깊은 뜻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티벳에 불법이 왕성하게 된 것은 손쩬간뽀라는 왕 당시 불교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다음으로 불법이 가장 성행하고 왕성하게 된 때가 리송데우쩬 왕 때입니다. 리송데우쩬 왕 때 많은 경전이 번역되고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관파의 학설이 널리 성행하게 됐습니다.
당시 학자 중에 켄첸시와쵸라는 대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꽃 피우던 부상요가부의 밀교를 공부하는 방법과 체계를 그대로 옮겨오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율장을 번역해 오셨습니다. 켄첸시와쵸는 나란다 대학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특출 난 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티벳이라는 새로운 땅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수하고 불교를 배우는 강원의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토대 위에 계정혜 3학을 배우는 나란다 대학의 학풍을 그대로 전수했던 중요한 인물입니다. 켄첸시와쵸 덕분에 수천 년 동안 티벳에서는 불교를 배우는 열풍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티벳의 강원에서는 20~30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각 단계마다 시험을 거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게시라는 학위제도가 있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배우고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서 시험을 거치고 단계별로 통과해야 하는 아주 세밀하고 상세한 체계를 완벽하게 세우신 분이 바로 대학자 켄첸시와쵸입니다.
지금 현재 많은 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겠지만 이런 완벽한 강원과 불전을 연구하는 과정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 티벳 아닌가 생각됩니다. 티벳의 불교는 인도 나란다 대학의 전통을 허물과 오점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는 산스크리트어 계통의 경전과 팔리어 계통의 경전을 다 배우고 있습니다. 나란다 대학 내에서 불교는 대승과 소승 금강승까지도 총 망라한 전승입니다. 처음엔 티벳도 나란다 대학의 법통이나 전통을 다 수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점차 발전해 오면서 지금은 나란다의 대승 소승 금강승까지 전승을 모두 갖춘 완전한 나란다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티벳에는 닝마파 까담파 까규파 사갸파와 같은 4가지 파들이 있습니다. 그런 파들이 생겨난 원인은 시대에 따라서 원력과 스승들에 의해 달라지는데 원력과 시대에 따라 이론은 조금씩 다르지만 교리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를 근본으로 하는 것은 같고 내용 자체에 대승 소승 금강승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같으니 불법의 뿌리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티벳의 4파나 거기서 갈라진 작은 파들도 용수보살의 후예로서 용수보살의 가르침과 전승을 잇고 있고 월칭보살과 용수보살의 뒤를 이어 가르침을 본받고 있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오늘 공부하고 있는 입보리행론 역시 티벳의 4파가 모두 공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입보리행론을 설하겠습니다.
장춥 셈촉 린포체<보리심의 귀한 보석이며> 마께 빠남 께규르찍<보리심을 아직 일깨우지 않은 이들은 일깨우고> 께빠 냠빠 메빠이<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기울지 않도록 하며> 공네 공두 팰와르 쇼<보리심은 항상 위로위로 증장할지어다>
먼저 가걀께두라는 말이 있는데 티벳 경전을 보면 무슨 경전이었다 라는 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근거를 남기는 것입니다. 인도말로는 보디사뜨바아와따라 티벳말로는 장춥셈뻬 쬐빠라 죽빠라고 합니다. 이는 보리심의 실천에 들어가는 경전이다 라고 번역했다는 근거인 셈입니다. 모든 부처님과 불보살님께 예경합니다. 장춥셈뻬 쬐빠라 죽빠 장춥은 인도말로 보디<Bodhi 보리>라 하고 티벳어로 장춥은 장과 춥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장은 청정히 한다 정화한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깨끗이 하고 우리 마음이 본래 구생에 청정한 것인데 객진 번뇌나 허물을 청정히 하는 것을 장이라고 합니다. 춥은 우리의 전도된 의견을 없애고 내 마음 본연이 청정하고 내 마음에 본래 번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본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我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바른 지견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을 춥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춥하면 마땅히 끊어야 될 것 마땅히 버려야 될 것 청정해야 할 것은 청정해야 하고 욕망과 번뇌를 버리게 해 주는 것을 장춥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춥에는 성문의 보리가 있고 벽지불의 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살의 보리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장춥셈바는 큰 보리 그야말로 보살과 같은 대승의 마음을 일으켜 불가에 들어가는 큰 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큰 보리를 행해 타인을 이롭게 하고 보리심을 성취하게 해 주는 것을 장춥셈바라고 했는데 허공과 같이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대승의 보리심을 일으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불과를 깨닫는 사람을 장춥셈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원력과 정진력을 가진 사람을 장춥셈바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쬐빠라 죽빠라는 것은 보살의 행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쬐빠는 배운다 라는 뜻인데 배우고자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하고 또 배움의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3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살행을 하겠다는 동기가 있고 그 행을 배우겠다는 마음을 내는 입보리행이 있고 入行이라 해서 보살행으로 들어가는 행이 있고 마음과 원력을 내서 내가 보살행을 하겠다 라는 원행이 있고 보살행을 통해서 이미 성불의 과의를 증득한 성취행이 있는데 이것을 과행이라 표현했습니다. 3가지 행위를 지켜서 가지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장춥셈뻬 쬐빠라 죽빠라고 하며 보리심의 실천에 들어가는 보살행에 들어가는 경전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 모습이기 때문에 전도된 마음을 정화할 수 있고 대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연의 광명체이고 공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본연의 모든 것을 구족한 청정한 자성신이기 때문에 객진 번뇌를 정화해 부처의 자성신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의 자성신이 있기에 지혜법신이 있고 지혜법신에서 보신이 생겨나고 보신을 의지해서 화신을 나투게 되는 것입니다. 이 4가지의 몸은 동시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근본적으로 정화하고 나면 이 4가지 몸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에서 설하는 4가지 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4가지 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면 밀승을 통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보신이나 색신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밀승의 경전을 통해 생각해 보면 그렇겠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나의 마음 의식을 의지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이 다른 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삼독번뇌를 점차 정화함으로써 부처의 4가지 몸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 4가지 몸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갖추어져 있는 잠재능력을 수행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개발해내는 것입니다.
티벳의 종카파 대사께서 부처님을 찬탄한 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설하신 진리의 본질과 모든 현상계의 본질을 그대로 파악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하게 되면 고통의 뿌리인 마음을 조복 받지 못하게 하는 전도된 지견을 없앨 수 있습니다. 모든 고통의 근본인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아닌 다른 외도들의 법에 따라 수행하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끊임없이 윤회근본이 이어지게 하는 아집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나라는 것 즉 因有我 영혼이 존재한다고 집착함으로써 아집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가 생겨나고 그 위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성을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공성을 의지하면 다른 외도들과는 달리 我가 있다는 집착을 대치할 수 있어서 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진리와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알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로 수승하다는 것을 알고 찬탄할 것입니다.
2회. 달라이 라마 입보리행론 법문 중에서
[출처] 2회. 달라이 라마 입보리행론 법문 중에서|작성자 허허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