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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07
신명기 6장 4절 [제5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에서 38문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를 가르치는데, 가장 먼저 설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영으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며, 복합적인 존재도 아니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본래부터 계셨던 분, 시간과 공간이 지어진 때가 있었는데 그 이전에도 계셨던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을 의지한다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혜에 있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권능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거룩과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이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소요리문답 제5문과 6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5문을 통해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6문을 통해 삼위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우선 제5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5문.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습니까?
답.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신6:4, 렘10:10).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하나님은 삼위로 계십니다. 이 부분에 있어 가장 분명히 말씀하시는 구절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삼위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6장 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유일하다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유일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신명기 4장 39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이사야 44장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장 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다만 4절 다음에 나오는 5절에 의하면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란 표현이 나오지만, 이때 ‘많은 신과 많은 주’라는 말은 실제로 신과 주라고 칭하는 자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늘과 땅에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라고 불릴 뿐 그들이 참 신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0장 10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고 분명히 말하기도 합니다. 즉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늘과 땅에 많은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에서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시115:5-7)고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안과 밖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지만, 타락한 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게 돌리는, 그래서 소위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 이하 23절에 보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8절에서 20절은 일반계시에 대한 설명으로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안과 밖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고,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의 것들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종교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종교들마다 다른 신들이 있는데, 그렇게 많은 신들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1장 21절로 오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는 부분이 있는데, 본래 인간은 하나님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해야 할 존재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한 가지로만으로도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할 자들이 인격적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방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쪽으로 가게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존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으로 통칭되는 것들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썩어질 사람, 새와 짐승, 그리고 기어 다니는 동물의 모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즉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결국 가장 어리석은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14:1-4)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그들의 안과 밖으로 주셨습니다. 양심의 법이 있고, 또한 만물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사실을 사실로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라는 말로 유혹을 해서(창3:5) 실제로 눈이 밝아졌지만(창3:7) 사탄의 유혹처럼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 대하여 더 밝아졌을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죄를 향해 보는 자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으로 핑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의 죄를 가려주셨습니다. 하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죄를 가려주셨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경우 아벨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경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가려주신 것이 아니라, 가려주시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가려주시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가려주신 자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만을 섬기길 바라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요 여호와란 사실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신명기 6장 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쏟아야지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5:7)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상들과 관련된 사상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신들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가 문제였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혼합주의 신앙을 가졌는가? 간단히 말하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 안에는 어떤 사상들이 있는데, 그 모든 사상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자기 유익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방 신이 ‘바알’입니다. 이 바알은 풍요의 신이라고 해서 그가 토지의 비옥함과 생물의 번성을 주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토지의 비옥함을 주십니다. 생물의 번성을 주기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만이 토지의 비옥함을, 생물의 번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외적 형식으로 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되는데, 부패한 본성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복이 아니라 진노와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진노와 저주를 받으면 돌이켜야 하는데, 돌이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완고함을 꺾지 않습니다. 돌이키고 꺾어야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도 거두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진노와 저주가 오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찾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 우상에게로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는 어렵고, 그러나 세상적인 복과 유익은 받고 싶고,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우상을 들여놓게 되는, 소위 혼합주의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만연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역사에 앞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역사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지만 진멸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아간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않음으로 그들의 문화가 남아 있게 됨으로 동화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아 있는 그들과 혼인하게 됨으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그들의 우상도 받아들이게 되는 일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저들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가장 먼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다 거짓된 신들입니다. 신으로 불릴 뿐 참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이름만 있을 뿐 죽은 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을 통해 뭔가 역사되는 게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 중 제2계명은 형상과 관련된 것인데,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두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상징 하면 보통 십자가를 생각하는데, 십자가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복이 오거나 그것을 통해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보이는 것만 우상이 되느냐? 골로새서에서는 이것도 우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즉 우리 마음 가운데 무엇에 대한 탐심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 숭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상, 그것도 가장 심각한 우상은 물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금주의(拜金主義, mammonism)라고 해서 금에게 절한다, 다시 말해 돈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사상인데,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물질에 대한 경계를 하기도 하셨는데,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단순히 하나님과 재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인데 다른 모든 것의 대표가 무엇인가 하면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말 그대로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경계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결과까지 낳느냐?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돈에 미혹되어 믿음에서 떠나 자신을 찌르게 지경에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사랑함으로 믿음을 떠났다면 그것이 참된 믿음인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처럼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 안에 소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을 버릴 것은 권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다른 신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빌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시냐?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5장에 보면 십계명에 대하여 선포하면서 2계명과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신5:9)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마음이 나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혼합주의를 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투하십니다.
특히 2계명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지난주 살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과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태로 만드는 것, 그것은 분명 죄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있는 것처럼 형상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 형상화하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에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복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다 우상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상이 아닌,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신명기 6장 4절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난 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5절에서 그분만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어떻게 하면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만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실천적인 부분으로 말씀을 드리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육신을 위해 돈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필요 때문에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정신도 버려야 합니다. 좀 더 넓게 어떤 것이든 탐심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알리신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인지를 알고 그분의 뜻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2계명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2계명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참된 예배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짓된 예배는 무엇인지를 밝혔는데, 말씀으로부터 허락된 것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자의적 예배(will-worship),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규칙 외에 무엇을 임의적으로 더하거나 빼는 것,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한 예로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었는데(민26:61), 그만큼 자의적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구약의 모든 의식법은 폐지해야 합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는데, 4문에 이어 5문에서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4문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분명히 밝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의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은 유일하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5문에서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혹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외에 다른 일체의 신들은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다 죽은 신이요 거짓 신일뿐입니다. 바알이 그러하고, 아세라가 그러하고, 다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도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죽은 신이요 거짓 신일뿐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그리고 북유럽에 있는 다양한 신화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신인 겁니다.
물론 그런 거짓된 신들에게 빌었을 때 때로는 빌었던 일이 응답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살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이 점을 칩니까? 맞추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틀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13장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다른 신이 있어서 다른 신에게 빌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장에 있는 말씀으로 적용해 보자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는 방편으로서 빌었던 대로 응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응하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응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응하게 하시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로 그 마음을 두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공의의 형벌인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죄로 벌하실 때 다른 신들에게로 그 마음이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겁니다. 막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저들의 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믿도록 만들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이 말씀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즉 너희는 그런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가 보인다 할지라도, 또 그런 이적과 기사를 통해 뭔가 실제로 일어나고 경험하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너희가 과연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를 찾는지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결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바가 있는데, 그 소원하는 바를 들어 응답해 주면 소원을 빌었던 대상이 있다고 믿습니다. 혹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하면 그 경험 때문에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에서 19절만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도 베드로는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변화산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형되어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던 것에 대한 것입니다(마17:2). 이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렸는가?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그것을 자신의 편지에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절에서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베드로 자신의 경험은 자신만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성경이 보증하고 있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달리 성경에 기록되기까지 한 경험이요, 그만큼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19절에서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합니다. 경험보다 더 확신한 것, 심지어 성경이 보증하고 있는 그런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으로 유일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5장 1절 말씀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세상의 복이 아무리 값지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 세상의 복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빌3:8 참조).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복은 결국 다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최고 상급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으로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복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게 유익할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시고, 주신 것을 거두기도 하십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만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여기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기복주의 신앙을 뿌리 뽑기 위하여 외적인 물질들을 주시기도 하시다가 거두기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신들 가운데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결코 없습니다. 다른 신들이 있다고 믿고 사람들이 섬기는 것은 다 하나님을 그 마음 두기 싫어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신일뿐입니다. 거짓된 신들이 말하는 모든 사상들, 그 중에는 도덕적으로 괜찮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은 더 깊은 내면까지 살펴보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배운 대로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