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해설(周易解說)
6. 역의 전본 및 주석서
<한서> 유림전에 의하면 역은 공자로 부터 노나라의 상구(商瞿) 등을 거쳐 제나라 전하(田何)에 전해지고, 진시황의 '분서' 때에도 복서의 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재난을 면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전하는 그 학문을 동무(東武)의 왕등(王同), 낙양의 주왕손(周王孫) 등에게 전수했고, 그 뒤 역의 전수는 더욱 더 왕성해져 무제 때 왕동의 제자 양가(楊可)가 벼슬하여 비로소 역경의 박사가 되었다. 이어 선제(宣帝)때 시수(施讐), 맹희(孟喜), 양구하(梁丘賀)의 삼파의 학문이 나란히 학관(學官)으로 임명되는 성황을 보였다.
그러나 삼파가운데 맹희는 음양 재변(災變)의 설을 섞어 강의하고 스승의 전통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동문 양구하의 배척을 받았다고 하며, 그 뒤를 이은 초연수(焦延壽), 경방(京房)에 이르러선 술수 이단적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하나 경방의 학문은 시대적 조류를 타고 세인에게 환영되었기 때문에 원제 때에는 다시 학관으로 임명되고, 이로부터 시 맹 양구 경씨의 사파 역학이 함께 행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민간에서 역학으로 이름이 난 자로 비직(費直)과 고상(高相)이 있었고, 특히 비직은 괘서(卦筮)에 능했으며, 그 역 해설은 장구(章句)를 사용치 않고 단, 상, 계사, 문언의 말로서 상하 경을 해설했다고 하는데, 아직 학관으로 세워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후한 시대에 이르러 진원(陳元) 정중(鄭衆) 마융(馬融) 정현(鄭玄) 순상(荀爽) 등이 모두 그 학문을 배웠으므로 이로서 비씨역이 흥성했고 경씨역은 마침내 쇠퇴했다.
일반적으로 한유의 역은 상수(象數)를 주로 주장하는 것으로서 주역의 옛 뜻이 왜곡되고 그 폐해가 많았다. 이에 위(魏)의 왕필(王弼)이 나타나고 비씨역에 의해 역주(易注) 6권을 저술했으며, 주로 노장(老莊)의 현리(玄理)로서 역을 해석하고 한역, 상수의 폐단을 일소했다. 이로부터 한역은 멸망의 길을 걸었고 남북조 무렵에는 북조에서 정현의 주, 남조에선 왕필의 주만이 통용되었다. 더구나 당나라 초기 공영달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할 때 역은 왕필의 주를 채택하여 그 소(疎)를 만들었으므로 정현의 주도 쇠망했고, 그 뒤로는 오로지 공영달의 '주역정의'가 사계의 권위로 군림했던 것이다.
그 뒤 이정조(李鼎祚)가 ,<주역집해>17권을 찬했고, 자하(子夏) 맹희 경방이하 35가의 역설을 접록하여 옛 학설의 산일을 막았으므로, 오늘날 한유의 설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북송의 정이천은 왕필이 노장의 설을 섞어 역을 해석하고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역전>의 4권을 저술하여 오로지 유교의 관점에서 역리를 설명했고, 남송의 주자 역시 <주역본의> 12권, <역학계몽> 1권을 저술하여 이천의 설을 보족하는데 있어 '점서'의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역도 역시 정자와 주자의 해석을 따른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정이천은 근세의 철인(哲人)이지만 엄격한 성품 까닭에 소인의 모함을 받아 사천의 부주(剖州)로 귀양 갔었다. <역전>은 이 귀양지에서 간난과 결핍 속에 이루어젔던 것이다. 나중에 사면되어 이천은 낙양에 들어왔는데 그 기상과 안색은 예와 다름없었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이천은 대답했다. [학문의 힘이다]라고. <역전>은 이천의 심혈을 기울인 것이었으며, 역학의 이치를 배우는 데 없어선 안될 작품이다. 마치 문왕이 감금되자 역을 썼다는 것과 같은 의의를 발견해야 한다.
명나라 때엔 정주의 설이 더욱 더 유포되었고 영락제 시절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찬한 <주역대전> 24권도 [정주본의]를 그 첫머리에 실었고, 이것을 주해하는데 동해(董楷)의 [전의부록], 호일계(胡一桂)의 [부록찬소] , 호병문(胡炳文)의 [통석], 동진경(董眞卿)의 [회통]으로서 할 뿐이라, 후세 학자로부터 그 정주의학을 지나치게 지킨다면서 비웃음을 살 정도였다. 명나라때의 우익대사(藕益大師) 지욱(智旭)은 <주역선해(周易瑄解)>를 저술하고 천태종(天台綜)의 교의로서 역의 어구를 해석했다. 이것은 이색적인 것이다. 하지만 역은 온갖의 것에 정용시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이광지(李光地) 등이 칙명으로 찬한 <주역절중> 22권은 [본의]를 첫머리에 싣고 다음에 [정전]을 두고 그밖에 한나라 이래의 제유 설을 널리 채택하여 참고로 하고 있으며, 그 박식하고도 요령있는 편집은 앞에 나온 [대전] 따위가 따르지 못한다. 건융 년간에도 부항(傅恒)등이 칙명을 받들어 또한 일서를 찬했고 고의(古義)를 많이 풀이해 놓았으므로 <술의>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청나라 때의 것은 그 실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정약용 선생은 <역학서언(易學緖言)> 22권을 저술하여 종래의 정주적 역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