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다(最多) 유배자의 땅, 거제도 귀양살이 실상(實狀) 소개> 고영화(高永和)
거제도는 현재까지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유배객이 다녀간 곳이다. 유배인의 이름이 확인된 명단만 509명에 이른다. 예로부터 거제도는 일본에 접해있는 변방의 섬으로써, 육지와 가까운 우리나라 두 번째 큰 섬이자, 섬을 빙 둘러 수군 7진영이 위치하고 있었던 관계로 인해, 유배인의 관리가 용이했기 때문에 수많은 유배객이 다녀갔다. 그 중에 유배문서상 ‘해도(海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고 기록된 거제유배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위리안치란? 원래 집 주위를 빙 둘러 가시나무 울타리를 친다는 뜻이나, 조선중기까지는 그런 배소가 거제도엔 없었고, 형식상 집 사립문 주위에 몇 그루의 탱자나무를 심어 위리안치된 유배객의 주거지임을 알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조선말기 세도정치 정국에서 권력의 격화로 인해, 추방된 중앙정부의 중요인사는 몇 겹의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배소에서 실제 위리안치된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거제도의 경우는 기록상 병조판서 조병현(趙秉鉉)이 1847년 11월부터 1848년 12월까지, 그리고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1858~?)이 1895년 6월27일부터 거제군에 위리안치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유배인이 거제도에 도착하면 거제수령(현령, 부사, 군수)이 호송책임자에게 유배자와 유배문서를 인계받은 후에 유배인의 배소를 결정했다. 보통 관내 유배인이 적을 경우에는 유배인을 위한 초가집에 따로 수용했으나, 조정의 큰 일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이들이 오면, 매일 보고 관리가 가능한 거리 內, 집이 두 채인 집에 한 채를 사용토록 했다. 거제도의 집단 배소지로는 조선후기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터, 반곡골짜기가 대표적인 곳이었고 그 외에는 초가집 위채와 아래채가 있는 집에, 보수주인(保授主人)은 위채에 유배객은 아래채에 거주토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러고도 인원이 초가하면 거제관내 7진영에 배분하기도 했다. 특히 지세포진영에 1623년 정규(鄭逵), 1628년 유현립(柳顯立), 유옹립(柳顒立), 유명립(柳命立). 그리고 옥포 조라진영에 1628년 박영택(朴永澤)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거제도 內 유배인의 배소지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오양역과 둔덕기성, 조선조 1434년부터는 고현만(舊 신현읍)일대, 1644년부터 1912년까지는 거제면 동상리와 외간리였다. 이는 거제현의 읍치가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그 시대별 유배객의 배소(配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 <조선전기 거제도 유배객의 귀양살이 기록> 먼저 조선전기 무오⋅갑자사화로 인해 유배 왔던 중앙 관료(官僚)이자 학자인 유배객 몇 명의 거제도 귀양살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1506년 당시 거제도 舊신현읍 일대에 살고 있었던 용재(容齋) 이행(李荇) 선생은 죽장(대 지팡이)을 들고 짚신을 신고 세칸 띳집(상문동)에서 살았다. 노복(종 아이)이 있었으며, 보수주인(保授主人)은 궁핍한 할미였다. 그는 거제목장에서 말을 한필 샀고, 충재(忠齋) 최숙생(崔淑生 1457~1520)도 말이 있었다(고현동).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은 채소밭을 가꾸는 역할이 주어졌으며, 이행은 양치는 일을 했다(장평동). 이행을 지키고 감시하는 병졸은 술을 좋아해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했으나 최숙생의 병졸은 규칙대로 행하는 융통성 없는 감시자였다. 홍군미는 유자도(댓섬) 대숲에 주로 은거했으며, 당시 유배자는 자신의 가솔 한명 이상을 데리고 와서 귀양살이 했다. 처자식은 유배형에 처해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형제와 부친은 연좌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행의 맏형은 이행이 유배 중에도 관리로써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1548년부터 1560년까지 고현동에서 귀양살이 했던 유헌(遊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은 노비와 후처를 포함해 4명 정도의 가솔과 함께 살면서 거제도 전역을 자유로이 다녔으며 거제향교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거제최고의 스승이었다. 이후 조선후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 등은 중앙 정부의 고위관료 출신답게 그들을 수발하는 가솔들과 늘 함께 했고, 특히 우암(尤庵)은 손자 제자들까지 그를 봉양하며, 옮겨가는 귀양지마다 끝까지 함께 했다. 그리고 죽천(竹泉)의 거제도 제자들이 ‘거제반곡서원’을 창건(1704년)하여 그 일대가 도론동이라 불릴 정도로 거제유학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거제도는 변방이라, 이 당시 야간통행 금지가 있어 어둑하면 야경꾼이 소라나팔을 부르면서 그 시간을 알렸다. 새벽에는 통행 해제 시간에 맞추어 소라나팔을 불렀는데, 대부분 그 소리에 맞추어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당시뿐만 아니라 거제도 유배역사 약800년 동안 대부분의 유배객을, 통제 관리하던 관청으로부터 약 10리 內에서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1) 매화를 노래하다[咏梅] / 조병현(趙秉鉉 1791~1849) 陋紅羞綠獨爲春 천한 붉은 빛에 수줍은 초록빛, 나 홀로 봄이라, 剩馥衝寒雅韻新 추위 속에 향기 남아 맑은 운치 새롭네. 靜夜背燈看不厭 고요한 밤 등잔 밑을 바라보아도 싫증나지 않음은 淡如秋水有情人 가을철 물과 같이 맑은 정인(情人)이 있음이라.
조병현은 거제 유배기간 1년 1개월 동안 다른 거제유배자와는 다르게 문밖에도 나올 수 없는, 신발을 신는 섬돌에도 내려 올 수 없는 지독한 울타리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위 시에서 보듯, 봄날 그는 밤새 등잔불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매화꽃 향기에 취한다. 매화는 나의 소신을 믿어주는 분과 무척 닮았다. 그래도 극한의 귀양살이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절망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 있으니 이것이 행복일 거라고 자신을 다독거리고 있다.
● <조선말기 병조판서 조병현(趙秉鉉)의 거제유배 위리안치 기록> 1847년 정미년(丁未年) 11월 15일(十五日), 죄인 조병현(趙秉鉉)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 위해 이달 초 1일 날 어명을 받은 의금부 도사(金吾郞) 홍선용(洪選容)이 이날 왔다(初一日有命 是日來). 11월 15일 유배자 집의 담이나 울타리에 가시나무를 밖으로 둘러쳐 가극(加棘) 천극(栫棘)되었다. 12일 날에 어명을 받은(十二日有命) 의금부도사(金吾郞) 조석린(趙錫麟)이 이날(20일경) 왔다(是日來). 조병현 판서의 죄가 워낙 중한지라, 거제도에 위리안치 되는 날에 2번이나 어명을 받은 의금부 도사[홍선용(洪選容), 조석린(趙錫麟)]가 차례로 서울에서 내려와 확인하고 엄히 지킬 것을 (다음과 같이) 하명했다.
○ 위리안치(圍籬安置)를 하명하다. “공이 말하길,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국법의 지엄함을 보이고 부자가 함께 살게 함은 매우 황송해야 할 일이다. 그대들로 하여금 다른 방에 거주케 하고 비록 이웃 고을의 수령을 예로부터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틈을 내어 와 청하여 잠시 뵈는 것도 접견을 불허한다. 또한 혹시라도 고을의 수령이 보내주는 물건이 있다면 알리도록 하고 받지 못하게 하라. 빈번히 죄를 저질러 몸을 더럽혔으니 스스로 집안에서 지내도록 하고 오로지 붓을 잡고 글을 쓰지 못하게 하라. 일 년 후에 죄인이 풀려나더라도 지게문 열고 아래 섬돌에 시험 삼아 내려오지도 못하게 하라. 구름과 해만 우러러 보며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해를 희롱하는 단단한 눈으로 여러 질의 책을 만들어 손수 추리어 쓰도록 하라. 조정에선 유일한 선정으로 들을 것이며 집 밖에서 문득 기뻐하는 얼굴빛을 볼 것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참으로 나라에 충성한다 생각하면 먹고 숨 쉬다가도 해이해지지 말라.” [公曰籬棘國法至嚴 父子同居 甚涉惶悚 使子輩異室居住 雖隣邑守宰及舊知 時或來請 暫謁不許接見 又或有邑倅之饋 辭而不受 輒以罪累自居 一不把筆作書 歲周蒙宥 未甞開戶下階 仰見雲日 安於處坎 日翫綱目 手抄成帙 聞朝家有一善政 喜色輒見于外 惟愛君忠國之誠 食息靡弛]
○ 특별 사면령이 내려지다. 1848년 무신년 12월 을사 초 6일, 특별히 사면하는 임금의 명을 받들라. 12월 13일 전계(傳啓) 속에서 죄인(罪人)의 이름을 삭제(削除)한다. 대사헌 서좌보(徐左輔 1786∼1855) 등. “12월13일 금부 문서에 임금의 재가로 석방됨을 알리는 일이 있었다. 대사령을 적은 문서가 거제에 도착했다. 삽시간에 마음이 기울어져 한 고을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모여 몸을 뛰며 기뻐했다. 얼굴마다 서로 축하하며 자기 집안사람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쇠사슬 문을 없애고자 관리가 문을 조금 열었으나 많은 백성들이 스스로 가시울타리를 거두고는 기뻐 날뛰었다.” [무신년(戊申) 58세(五十八歲) (1848년) 十二月乙巳 初六日 奉特宥之恩命 停啓 大司憲徐左輔等 同日禁府草記放送事啓下 赦文到巨濟 霎時之傾 一邑吏民咸聚歡聳 面面相賀 無異家人 且旣鎖之門 自官纔開 衆民自撤籬棘而喜躍之] 해배되어 떠나가는 조병현을 견내량까지 거제부사가 환송해 주었다.
● 조선시대 신분에 따른 유배형(流配刑)의 실상(實狀) 조선시대 형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오형(五刑) 즉, 사형(死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笞刑)이 있었는데, 그 중에 사형 다음가는 무거운 형벌이 유배형(流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에 해당된다. 이에 유배형(流刑)은 죄 지은 모든 국민에게 다 해당되는 형벌이다 보니 정말 많은 이들이 이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언론 방송에서 귀양살이했던 유명인사들의 상황을 소개하다보니, 양반 죄인들만 유배형(流配刑)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민⋅노비⋅여성⋅연좌된 가솔들이 더 많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명단이 확보된 거제도 유배죄인 509명 중에 고위관료 사대부는 약30% 정도이고 나머지 약70%는 평민⋅노비⋅여성⋅연좌된 이들 순이다. 한편 고위관료 사대부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에서 형벌을 받고 유배길을 떠났지만, 일반 백성은 지방의 관청에서 실형을 받고나면 그 지역 변경이나 도서(島嶼)지방으로 보내졌다. 또한 귀양 사는 지역 배소(配所)까지 가는 비용도 모두 유배자 본인이 부담하다보니 명문귀족 또는 고위관료는 말을 타고 자신들의 노비까지 데리고 가면서, 지나가는 고을의 수령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백성은 귀양길 자체가 지옥의 문턱으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가는 중에 얻어맞아 죽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이 유배지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에서 죽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게다가 고위관료나 사대부 양반들이 먼 변방으로 유배를 오면, 고을 수령들이 같은 양반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별히 배려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을 관할 지역 내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 받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덧붙여 거제도 유배역사상 가장 편안한 귀양살이를 한 분이 있다. 조선말기 1881년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영의정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분이라 복권이 확실하다보니, 약 5개월 동안의 거제유배동안 거제부사가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릴만큼 그는 마치 호화로운 휴가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조선 제일의 갑부였다. 그러니 거제도 명승지를 유람선을 타고 절경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상경한 인물이었다.
2) “새해 달밤에 차운하여[月夜韻]” 두 분의 손님(최명식,최재규)과 함께 1848년 거제도에서(次二客 崔明植 崔在奎 戊申) / 조병현(趙秉鉉 1791~1849) 經冬經歲地無寒 해가 지나 겨울이 가니 대지엔 추위가 사라질 때 種麥鋤蔬土俗安 이 지방 풍습에 따라 보리밭에 풀을 맨다네. 病裡幾何元夜月 병중이라, 올해 대보름달은 어떨는지? 明光應是舊時團 옛날에는 둥글고 밝은 빛이었는데.... 又 枳籬如壁復如墻 벽 같은 탱자나무 울타리 담장되어 둘러싸고 墻外人民各美庄 담 밖의 백성들은 제각기 아름답고 씩씩하다 箇箇新衣新歲祝 한 사람 한 사람 새 옷 입고 신년을 축하 하는데 臨汀賽皷徹宵長 물가에서 북치며 굿을 하고 길고 긴, 밤을 샌다네.
별신제(別神祭)라고도 하는 별신굿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을 제사하는 점에서는 동제(洞祭)와 유사하지만, 동제는 동민 중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별신제는 무당(巫堂)이 주재하는 점에서 다르다. 남해안별신굿(南海岸別神)은 주로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행하는데, 보통 마을회관에서 제물을 차린다. 각 가정에서 한 상씩 차려와 문 밖에 늘어놓는 거래상(退鬼床)이 특이하다. 굿거리에서 무녀는 부채와 무령(신방울),신칼,손대 등을 일률적으로 사용하고, 악기는 악사 셋이서 각각 장구,징,꽹과리를 잡아 사용한다. 그러나 이따금 북을 사용하기도 하고, 특히 굿의 시작과 끝 무렵에는 대금만을 사용했다. 마을에 따라 당산굿(당맞이굿), 용왕굿, 지신밟기 등을 올리기도 했으며, 어촌마을에는 어선을 모아놓고 풍어제를 올렸다. 또한 마을 어귀마다 대나무 두 개를 세워 위쪽을 새끼줄로 연결해서 마을에 들어오는 악귀를 막고 간단한 제를 올렸다.
3) 은혜를 입고 돌아가는 내(조병현)가 견내량을 건너려는데 거제부사 손량석이 따라와 고별하여 갈림길에서 글을 써서 주었다.[蒙恩宥還渡見乃梁 岐城太守孫亮錫隨來告別 臨歧書贈] 이 시는 1848년 12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견내량을 건너기 전에 지은 시(詩)이다. / 조병현(趙秉鉉 1791~1849) 孤臣積罪寄南荒 외로운 신하가 죄를 많이 지어 남쪽 변방에 이르러 萬死餘生白髮長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몸으로 백발만 늘어났구나. 再閱靑坮時憲曆 푸른 돈대에서 시헌력(時憲曆)을 재차 조사하여 雙擎彤綍放還鄕 두 손 들어 올려 붉은 상엿줄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石巓天接難於蜀 돌 산마루에서 천체를 연구하니 촉나라보다 험난한데 木道人歸見乃梁 하늘과 땅의 이치로 견내량을 건너 돌아가노라. 知府臨歧相對祝 갈림길에서 거제부사가 나타나 서로 보며 축하해 주니 吾君神聖耀三光 우리 임금의 신성함에 삼광(해 달 별)이 빛난다네. [주1] 시헌력(時憲曆) :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 [주2] 목도(木道) : 『천부경』은 동방 木道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과 땅은 이치로써 서로 느껴 만물을 기른다.
● 거제도는 기록상 고려 초기부터 1912년까지 우리나라 유배지 가운데, 유배인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지역 밭이나 집터 주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는 유배자의 배소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이는 위리안치된 죄인이 거제로 오면 그의 집주위에다 탱자나무를 옮겨심기 위해서이다. 한편 중앙정부 기록에 따르면 거제도로 보내는 유배자는 서류상 대부분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제주 거제 진도는 가시나무 특히 탱자나무가 많아서.." 라고 승정원일기에서 밝히고 있다. 형관(刑官)들이 모여 죄수를 다루는 장소에 가시나무를 심은 극목(棘木)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이어 진 것이다. 또한 거제도는 유배객과 거제주민과의 여러 인연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러나 실제 따져보면 대부분 서로간의 생존 년대도 맞지 않고 근거도 없는데도 거제도 관련 많은 유배설화가 전하는 것은 그만큼 유배객이 많이 다녀간 땅이었음을 반증한다. 아마 숫자로 기록된 것과 유배인의 가솔까지 포함하면 최소 1500여명 이상 거제도를 다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리하자면, 약 800년간 이어온 거제 유배자들은 죽거나 풀려날 때까지 자기 땅에서 쫓겨 난 슬픈 이방인이었다. 또한 우리 거제도 역사의 일부분이자 정체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다 기실 유배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거기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무엇보다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인생의 격랑을 헤치고 나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동과 교훈을 준다. 이에 역사상 우리나라 최다(最多) 유배지로써 거제도의 유배문화는 분명히 또 다른 역사문화자산이다. 특히 인문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를 인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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