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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07
디모데전서 2장 5절
맨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할 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은 우리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델베르크 12문에서 우리가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묻는 것은 성경이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피조물인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대상으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할 때 그들 안에 있는 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늘려갈 뿐입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자로 있지, 자신의 죄를 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는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혹 구약 제사 제도를 보면서 우리를 위해 보상해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우리 아닌 다른 피조물들 중에서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만물의 으뜸이라고 할 때 으뜸인 사람을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피조물 중 다른 사람이 나의 죗값을 치르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방금도 말했지만 피조물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조차 만족하게 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형벌을 피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은 이런 대상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 즉 참 하나님이신 분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15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16문과 17문입니다.
16문. 중보자는 왜 참 사람이셔야 하고, 또한 완전히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답. 죄를 범한 동일한 인간 본성이 죄에 대해 보상할 것을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기 때문이요(겔18:4,20, 롬5:12-18, 고전15:21, 히2:14-16, 벧전3:18, 사53:3-5,10-11), 또한 스스로 죄인인 자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7:26-27, 시49:7-8, 벧전3:18).
17문.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것은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사9:6, 63:3, 롬1:4, 히1:3)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신4:24, 나1:6, 시130:3)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기 위함이요(사53:4,11, 요10:17-18),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의와 생명을 얻으사 우리에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사53:5,11, 벧전3:18, 요3:16, 행20:28, 요1:4).
이 부분과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사람의 죗값은 사람이 치러야 합니다. 사람의 죄를 사람이 아닌, 사람보다 못한 다른 피조물이 값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6문은 중보자가 왜 참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 죄를 범한 동일한 인간 본성이 죄에 대해 보상할 것을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때문에 죄인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보상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6문은 중보자가 왜 참 사람이어야 하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죄인이 아닌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조금 더 상세히 살피자면, 첫째로 중보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중보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할 때 다른 이유로 사람이어야지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2:17). 때문에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물론 구약 제사를 보면 짐승도 피를 흘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장 4절은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는 사람,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중보자는 참 사람이어야야 합니다. 단지 사람처럼 보이는 분에 불과해서는 안 되고 죄를 범한 동일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동일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여 보상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참 사람으로서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에서 나온 자여야만 합니다. 아담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매우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시험을 받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중보자가 참 사람이어야 한다고 할 때 이런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중보자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왔다면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만 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 있는 중보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게 할 수 있게 만들려면 반드시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자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 죄가 전혀 없는 사람, 원죄와 자범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7문은 중보자가 왜 참 하나님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데, 15문에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참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7문은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우리의 중보자가 그저 사람에 불과했고,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스스로 짊어졌다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참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신성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성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감당하고, 또한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절망 가운데 빠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무한한 형벌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은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기에 중보자가 당한 진노와 형벌 역시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그런데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기간에 있어서는 영원하고 무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형벌을 피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원토록 죽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가 죽음에서 살아 나오셔서 우리의 구속의 은택을 이루시고, 완전한 공로를 세우시고, 또한 그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값 주고 사신 그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셔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를 대신하여 의와 생명을 얻으사 우리에게 회복시키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능력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저 사람만으로는 이런 일들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덧붙이자면 구속자가 지불한 속량금이 무한한 가치를 지녀야만 하는데, 우리의 영혼의 구속을 위하여 충족한 위엄과 공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의와 생명을 우리 속에 회복시키는 목적을 위하여 효용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중보자는 우리를 위하여 이런 보상을 할 수 있고, 또한 무한한 위엄을 소유하신 분이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8문으로 오면 15문의 답변을 충족하는 분, 그리고 16문과 17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참 사람이면서도 완전히 의로운 사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분은 누구인가를 질문합니다.
18문. 그러나 과연 누가 참 하나님이요(요일5:20, 롬8:3, 9:5, 갈4:4, 사9:6, 렘23:6, 말3:1)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눅1:42, 2:7, 롬1:3, 9:5, 빌2:7, 히2:14-17, 히4:15) 의로우신(사53:9,11, 렘23:5, 눅1:35, 요8:46, 히7:26, 벧전1:19, 2:22, 3:18) 중보자이십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마1:21-23, 눅2:11, 요1:1,14, 14:6, 롬9:5, 딤전2:5, 3:16, 히2:9),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고전1:30, 고후5:21).
정리하자면 15문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중보자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고, 16문과 17문이 왜 그런 중보자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라면, 18문은 그가 누군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런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서로 반목하는 상태에 있는 두 편을 화해시키는 자를 뜻합니다. 여기서 두 편은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반목하는 상태가 된 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반복하는 상태가 된 것은 불순종이요, 죄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서로 화해시키는 분이 중보자인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죄이기 때문에 결국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에 있는 사람을 화목 시키는 것이 목적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참 사람이셔야 하는데, 그 이유는 앞서 살핀 바와 같습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성인들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중보 사역을 행한다고 주장하는데, 구원 사역을 이룬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지만 중보 기도의 사역에는 다른 중보자들이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도 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이해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중보 기도라는 용어를 통해서도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중보자가 되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고 오늘 본문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연히 가톨릭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를 통해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중보자와 관련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라고 해서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길도 다양하다고 말하는 것도 오늘 본문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라고 해서 소위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름은 세계교회협의회이지만 종교다원주의와 손잡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을 부정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중보자 역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가르치지만 다른 신, 다른 중보자에 대하여 분명히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다시금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진리를 거절하는 모든 내용은 거짓입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8문을 보면 디모데전서 2장 5절의 말씀처럼 유일한 중보자는, 다시 말해 참 하나님이요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의로우신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변하면서 그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시느냐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러니까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교사가 되셨고, 의롭다 하시는 자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요, 또한 구속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함께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릴 수 있는 의가 없었고 또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힘도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드려졌음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또한 의롭게 된 우리로 하여금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결국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친히 우리의 교사가 되셔서 이끌어 주십니다. 이런 내용은 그가 자신의 공로와 효능으로 말미암아 중보자요 구주가 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의 주체가 누구시냐 할 때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문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는가 물을 때,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 15문에서 참 사람이시고, 의로운 분이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 있는 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할 때, 그리고 18문에서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 모든 일의 주체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은 사람 탓이지만 그런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구원의 은혜까지 베풀고자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중보자를 통한 죄 문제 해결,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모든 내용은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9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19문. 그대는 이 사실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낙원에서 처음 계시하셨고(창3:15), 후에는 거룩한 족장들과(창12:3, 22:18, 26:4, 49:10-11)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하셨으며(사53장, 42:1-4, 43:25, 49:5-6,22-23, 렘23:5-6, 31:32-33, 32:39-42, 미7:18-20, 요5:46, 행3:22-24, 10:43,롬1:2, 히1:1), 또한 율법의 희생 제사들과 기타 의식들로 예표하셨고(히10:1,7, 골2:17, 요5:46),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입니다(롬10:4, 갈3:24, 4:5, 골2:17).
1문에서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2문에서는 이 위로를 얻기 위해서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첫 번째가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두 번째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와 관련하여 요리문답 3문은 그대의 비참함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면, 요리문답 19문은 두 번째와 관련된 것으로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요리문답은 거룩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은 누가복음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요한복음 8장에는 다음의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구약이나 신약이나 복음, 즉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중보자에 대해 살폈지만 복음은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죄 씻음과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고 선포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이런 복음이 언제부터 약속되고 선포되었는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내용은 에덴 동산에 있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뒤 곧바로 약속되고 선포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3장 15절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즉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단을 말하는데, 사단으로 하여금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네 후손’ 즉 사단의 후손,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마귀에게서 난 자들, 그래서 마귀를 아비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여자의 후손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단을 아비로 여기는 자들이 여자의 후손으로 난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는데,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만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단의 머리가 완전히 상하게 된다면, 사단의 저항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만 상하게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세력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라면,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미약하게나마 상처를 부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후에 거룩한 족장들에게도 약속되고 선포되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때 복을 준다는 것은 정확하게 복음으로 말미암는 영적 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먼저 보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복이고, 동일한 복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창세기 22장 18절에서는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여기에 대한 갈라디아서 3장 16절은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런 약속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삭, 야곱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복음이 약속되고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특히 이사야 53장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말씀하십니다. 3절 이하 5절만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또한 율법의 희생 제사들과 기타 의식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0장에서 간략히 볼 수 있는데, 1절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7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셨는데, 신약 사도들의 증언을 보더라도 이미 구약에서부터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43절에서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서신인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도 말했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바울은 로마서 1장 2절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셨습니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구약의 희생제사와 기타 의식들은 다 폐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 즉 복음이 신약에서야 비로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계속해서 증거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자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만이 유일한 중보자요, 그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반목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