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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의 줄거리:
사회적 거리두기란 코로나19 확진 자가 급증하면서 지역사회 감염 차단을 위해 실시되고 있는 캠페인입니다. 시대의 구호처럼 된 '모이지 마라'와 '거리를 두라'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설교 주제입니다. 사회적으로 즉 인간세상 안에서는 늘 모든 대상과 2m의 거리를 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2m 안쪽으로 삼위 하나님을 모시라는 겁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
(마가복음 2:18~28)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
어제 미국에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신앙의 가족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의 피부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무척 심각한 상태라고 합니다. 초등학생 손자손녀가 있는 전도사님에 의하면 4월 초순인데 방학을 시작해서 9월에나 개학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어제부터 온라인 개학을 시작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갈 정도니 마트나 영화관 같이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루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전 세계의 의료진과 공무원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편 어머니께도 전화를 드렸는데 제가 “전 세계가 같은 질병으로 감염되는 것으로 인해 위기를 겪는 것은 60평생에 처음입니다.”라고 했더니 91세 되신 어머니께서 “내 평생에도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코로나19 사태는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신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 사태로부터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
마침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생각해볼 수 있는 두 사건이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금식 문제를 다루고 있고 뒤에는 안식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건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코로나19 사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씀의 근간을 이루는 주제는 바로 거리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통용되는 구호가 있다면 “모이지 말라”와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초등학교가 방학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온라인 개학을 했습니다. 또 거리두기를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 2m”라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신앙적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서 1장 13절을 봅니다. 특히 우리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제물 타는 냄새도 역겹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집회의 선포를 견딜 수 없다. 악을 행하면서 성회를 여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집회와 모임을 역겨워하시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렇게 모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전역의 교회 또한 모임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르침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이란 마음의 거리두기입니다. 부부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이 밀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자녀가 밀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마음을 붙이는 것이 자녀사랑이 아니고 자녀가 부모에게 마음을 붙이는 것이 부모공경이 아닙니다. 회사에 출근한다고 해서 직장에 마음을 붙여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언제나 “사회적 거리두기 2m 신앙”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을 중심에 놓고 전 방향으로 세상과의 2m 거리두기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역겨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모여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문제 삼고 계신 자들이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역겨워하시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코로나19 사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세상과의 2m 거리두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재난의 주범입니다. 오히려 세상과 마음을 밀착시킨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청업자 정도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잘못된 것이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코로나19 사태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 사태에서 반드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는 금식과 안식일의 주제는 거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근본취지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을 하던 자들로써 성경에 기록된 금식의 근본취지를 훼손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6장 16절에서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통해 원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밀착이 아니라 세상의 칭찬과 존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금식은 율법 상 대속죄일 하루 동안 이루어지는 행사였습니다. 다만 국가나 개인에게 재난이 임하여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처했을 때 회개의 의미를 담아 금식을 하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외세에 의해 대제사장 그달랴가 암살당한 사건 등의 국가적 재난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식이 선포되기도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시대가 흐르며 금식의 취지는 회개에서 기념이라는 형태로 점차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의 제자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바리새인의 금식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금식은 먹고 마시는 것을 중단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삶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의 근본취지를 생각해보자면 바로 세상과의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주목했던 것은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세례 요한의 특이한 행색은 금욕주의와는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금욕주의는 세상적인 기쁨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제함으로써 보다 높은 정신적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드러내고자한 것은 하나님을 통해 얻는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세례와 금식의 의미 또한 이와 연결됩니다. 세례는 마음에 세상을 담은 나를 물에 잠기게 하여 죽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상태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 또한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하던 모든 일이 중단되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일 등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세상을 담는 만큼 하나님과의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지면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세상이 담기게 된 상태를 중단하고 하나님과의 밀착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금식이었고 안식일이었습니다. 27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을 수밖에 없는 죄적 속성을 가진 인간을 위해 안식일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던 복음적 차원이 열립니다. 안식일은 마음의 방향과 거리를 재조정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디에 마음을 둘 것이고 어디에 거리를 둘 것인가를 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향하고 밀착해야 할 곳이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과 밀착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제자들이 금식을 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은 늘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금식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금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 대신 세상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생긴 삶에 저항하는 모습이 금식으로 나타났습니다.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고동락하는 관계였습니다. 한시도 떨어져있지 않았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생활했습니다. 예수님과 밀착된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된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제자들은 온전히 예수님과 마음을 밀착시킨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육체로 함께 한 상태가 마음으로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를 눈으로 보이게 표현한 하나님의 설교였던 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 똘똘 뭉쳐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과 마음이 밀착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금식과 안식일 의미의 충족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거리는 없어지고 밀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날 예수님께 마음 드리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세상과 밀착시킨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세상과 밀착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역겨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코로나19가 신종 바이러스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지 않은 신종 인류가 탄생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적 인간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오늘날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처럼 어느 시대에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과 밀착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당연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예배당 모임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에 편만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금식과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김을 통해 신앙적 거리두기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신학적 내용이 예수님과 밀착하는 것이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서로서로 안으로 파고 들어오실 정도로 밀착되어 계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때에 금식과 안식일의 목적도 충족됩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마음에 담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안식일은 세상을 담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 제정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마음을 밀착시킨 상태에서는 금식의 의미가 충족되고 모든 날은 안식일이 될 수 있습니다.
회사원을 예로 들어 마음의 거리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회사원이 일주일 내내 거래처의 계약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온 마음이 일에 쏠리는 중에 하나님과의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안식일의 의미는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계약문제는 2m의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오직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고 계약문제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사회적 거리두기 2m는 비단 일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도 마음의 거리두기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거리를 둔 삶의 영역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는 영역이 됩니다. 이 거리두기를 무시하고 마음이 세상과 밀착한다면 나 스스로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바라보고자 할 때에 연합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사명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일 것이고 2m 바깥 영역에는 절대적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는 단순한 재난이 아닌 하나님의 또 다른 방식의 복음 선포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과 사회적 거리두기 2m는 실천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2m 바깥 영역은 사랑과 전지전능을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이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것처럼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역설적으로 전하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생활화가 뼛속에 사무치는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보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과의 거리가 없이 밀착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시고, 2m 바깥은 사랑과 전지전능을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영역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