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쿠스코 근교에 있는 잉카제국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마추픽추로 가기 위한 전진기지 아구아 칼리엔테스로 가 1박을 하는 일정이다. 쿠스코 시내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로 가득한 유럽풍 분위기가 강하지만, 시 외곽이나 근교로 조금만 벗어나면 원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나 옛 잉카 제국의 유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1박을 위한 준비만 해 호텔 앞에서 미니버스를 탄다. 쿠스코 시내 중심으로는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없어 잠시 미니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 대형버스로 갈아탄다. 대형버스에는 1박 2일 동안 우리를 안내해 줄 예쁘고 당차 보이는 한국인 여자 가이드가 우리를 반긴다.
▶ 사크사이와만 입구
▶ 사크사이와만의 거석
▶ 사크사이와만 지그재그 축조 형태
▶ 사크사이와만 석벽을 오르는 입구
▶ 사크사이와만 정상에서 바라 본 쿠스코 시내
▶ 사크사이와만 전경
▶ 매년 6월 사크사이와만에서 열리는 태양제<퍼 옴>
버스는 비탈진 고갯길을 올라 시내에서 멀지 않은 사크사이와만(Sacsayhuaman)에 도착한다. "펄럭 이는 독수리 날개" 라는 뜻을 가진 사크사이와만은 쿠스코 동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요새 유적으로서 길이가 360m에 22회의 지그재그를 가진 3층 구조로 된 석벽이다. 잉카 9대 파차쿠치 왕 때 하루 3만 명을 동원하여 80년에 걸쳐 축조하였다고 한다. 잉카의 특징인 석조 기술은 그 정교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9mx5mx4m 크기에 360톤이나 된다는 거석은 바퀴나 쇠, 문자가 없었던 잉카에서 어떻게 운반하고 축조하였는지 놀라울 뿐이다. 성벽 위에 올라서면 쿠스코의 시가가 내려다보인다. 잉카 사람들의 세계관은 우주를 크게 하늘, 지상, 지하 셋으로 나누고 그 각각을 콘도르, 퓨마, 뱀으로 상징하였다 한다. 지구의 중심인 쿠스코를 퓨마에 비유하면 사크사이와만은 그 머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쿠스코의 현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유적 뒤쪽에 있는 커다란 자연석 지하로부터는 쿠스코 중심 대성당 등에 이르는 미로 같은 지하도가 연결돼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24일 Inti Raimi, 태양 축제가 열려 잉카시대의 의식을 재현하는데 이 행사는 브라질 리우의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 쿠스코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예수 상
한편, 한쪽으로 거대한 예수상이 서 있는데 그 자리는 피사로와 스페인 용병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잉카인들을 모두 학살한 장소로 훗날 이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페루 교회 측에서 예수 상을 세웠다고 한다. 어찌 보면 참회의 뜻이 아니라 페루 교회의 상징물을 세운 것 아닌가?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잉카의 신상을 세웠어야 되지 않을까? 종교가 없는 한국인인 내 눈에는 참으로 한심한 작태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을 처형한 곳에 독립 운동가들을 기린다는 뜻으로 도리이(鳥居)를 세운 격이다.
▶ 켄코를 전체로 보면 이런 형상이다
▶ 켄코 입구에서 유적에 대해 설명하는 한국인 가이드
▶ 동지 때 퓨마 형상으로 보인다는 바위(우측 바위)
▶ 켄코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
▶ 켄코 내부 제단과 황제가 앉았다는 옥좌
▶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일행들
가이드를 따라 거대한 돌로 만든 켄코로 간다. 미로란 뜻을 가진 켄코 입구에 있는 6m크기의 바위에는 퓨마의 모습을 새겼는데 동지에는 바위의 그림자가 퓨마의 형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켄코는 바위 전체가 하나의 유적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 올라가니 산 제물의 피를 흘려 점을 쳤다고 하는 지그재그로 파인 홈이 보인다. 거대한 돌기둥과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벽 사이의 좁은 미로를 따라 들어간다.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낮아 서서 들어가기에 조금은 비좁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반쯤 트인 동굴로 되어 있고 황제가 앉았던 옥좌와 잉카제국 당시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는 넓적한 제단이 있는데 처음에는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의 심장을 꺼내어 바치고 다음은 범죄인의 심장을, 마지막에는 평민의 심장을 꺼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잔인한 의식에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지자 결국 제사가 중단했다고 한다. 퓨마의 바위 뒤로 바위벽들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 탐보마차이 입구
▶ 탐보마차이 입구에서 탐보마차이로 가는 길 우측 나무 숲
▶ 탐보마차이 전경
▶ 탐보마차이 수로
켄코에서 나와 탐보마차이(TamboMachay)로 간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려 비가 내리는 호젓한 길을 걸어 올라가니 경사진 농경지의 하부에는 잉카 특유의 석벽들이 쌓여있다. 거칠게 마무리된 돌들도 아귀가 잘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잘 다듬어진 돌들은 여전히 빈틈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 5분 쯤 걸어가니 탐보마차이(Tambomachay)란 유적이 나타난다. 탐보마차이는 언덕 한쪽 면에 돌을 쌓아 계단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고 돌 틈 사이로 물이 흘러 내리도록 수로와 작은 폭포를 만들어 놓았다. 탐보 Tambo는 숙소, 객사라는 뜻으로 탐보마차이는 잉카의 목욕탕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샘솟는다고 해서 성스러운 샘이라고 불리는 이 물은 잉카인들이 목욕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의식을 행하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어디서 끌어온 물인지 수원조차 찾지 못해 잉카인들의 과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예전에 목욕탕의 용도로 사용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 피삭 입구 우르밤바 강이 보이는 고개 휴게소에서 바라 본 성스러운 계곡
▶ 피삭 입구 우르밤바 강이 보이는 고개 휴게소에서 아내와 한 컷
▶ 피삭 입구 우르밤바 강이 보이는 고개 휴게소
탐보마차이를 둘러보고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오른다. 가이드가 이제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 de Los Incas)으로 간다고 한다. 성스러운 계곡은 피삭에서 오이얀탐보까지 우루밤바 강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이다. 직접 가서 보고 느끼지 않는 이상 왜 성스러운 계곡이라 칭해지는지 알 수 없는 이곳은 날카롭게 위로 뻗은 험한 산세와 살아 있는 듯 구불거리는 계곡 사이를 붉은 강줄기가 흐르는 곳으로 이곳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안개와 산꼭대기에 걸쳐 있는 구름이 묘한 기류를 형성하면서 절로 숙연한 기분을 느끼게 하며 이곳에는 아직도 옛날 방식대로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차창으로 보이는 잉카인들의 집
▶ 도로변에 심겨진 유칼립수스 나무
▶ 피삭마을 전경<퍼 옴>
다시 버스에 오르자 창밖의 분위기는 금새 잉카 제국이 존재하던 시절로 회귀한 듯 모습을 바꾼다. 붉은 벽돌로 쌓아 만든 원주민들의 소박한 집이 중간 중간 스쳐 지나가다 마침내 완전히 깊은 산세로 접어든다. 30여분을 달려 우루밤바 강의 좌측에 자리 잡은 피삭(Pisaq)을 지난다. 안데스 골짜기로 우루밤바 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잉카의 오래된 유적과 인디오 촌락들이 있으며, 양 옆으로 유칼리투스 나무가 풍치를 돋구어 주고 있다.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왕래조차 제대로 없었던 피삭은 유적이 알려지고 여행자들이 차츰 찾기 시작하면서 제법 유명한 마을이 되었으며 매주 화, 목, 일요일에는 큰 시골 장이 열린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상업화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미비한 수준의 시골 마을이다. 이곳은 표고(2,863m)가 쿠스코 보다 낮아 숨쉬기가 한결 수월하다.
▶ 피삭 마을에서 피삭으로 가는 중간 매표소
▶ 피삭 유적지 입구 주차장에 마련된 기념품 노점
높은 산을 굽이굽이 올라 피삭 유적지 입구에서 차들이 정차되고 버스에서 내리자 잉카 전통 기념품과 옥수수 등 먹거리를 파는 현지인들이 길가에 좌판을 펼쳐 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부터는 온전히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높은 신분의 사람만이 오를 수 있었다는 좁고 험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추픽추의 축소판이라 일컬어지는 피삭의 유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 피삭 유적지로 가는 길
▶ 피삭 유적지 계단식 밭
▶ 피삭 유적지 전경
입구를 지나자 먼저 산 한쪽의 3분의 1 이상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밭이 나타난다. 계단식 밭의 규모가 상당히 크고 밭에는 감자와 옥수수가 재배 되었다고 한다. 옥수수만 해도 50가지가 넘는 종류가 발견되었고, 일 년에 세 번 농사가 가능하였단다. 안데스 산지에는 농경지가 부족했을텐데 이렇게 계단식으로 농경지를 만들어 옥수수 등을 재배함으로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폭우 등으로 인한 산사태에 대비하는 한편 고산지대의 산소부족 문제도 해결하였다고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당시 그들의 지혜와 삶의 노력에 고개 숙여진다.
▶ 피삭 정상으로 가는 길
▶ 피삭 정상 유적
▶ 피삭 정상 부근 방어 초소
▶ 피삭 정상에서 내려다 본 아랫쪽 유적
▶ 잉카시대 공동묘지 도굴 흔적
계단식 밭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망루와 정교한 성벽과 요새, 신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돌로 만든 집에는 잉카의 제사장 등 성직자들이 거처했다고 하며 신전 건너편 계곡 너머 산등성이에는 고도 3,000m 피삭 유적지는 잉카 시대의 공동묘지가 있는 곳인데 산 중턱 굴들은 당시 귀족 계층의 약 140구의 미라(mummy)를 발굴한 곳으로 시신과 함께 순장품(금붙이)을 묻었었는데 스페인 약탈자들이 이곳까지 와 모두 도굴해 갔다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과거 서양 사람들의 식민지에 대한 약탈과 그들의 강도짓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곳은 농업과 종교적인 시설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사적으로 요새의 역할도 하였다고 하며 성스러운 계곡의 남쪽을 방어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계곡의 서쪽은 Choquequirao에서 북부는 오이얀탐보에서 방어했다고 한다.
▶ 피삭 정상에서 바라 본 풍경
▶ 피삭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산꼭대기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노라면 천지가 숨죽인 듯 고요하고 신비로운 안개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트래킹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 피삭마을 중심 도로
▶ 피삭 마을 골목
▶ 피삭 마을 아르마스 광장 음식점
버스는 올라 온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되짚어 피삭 마을로 향한다. 이 마을은 잉카제국의 번성기 때(잉카제국의 영토가 지금의 페루는 물론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일부까지 지배할 때)는 제국의 동부지역을 통할하는 중심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작은 시골 면 소재지 정도로 흙벽돌로 지은 초라한 집들이 대부분이다. 버스가 다니기 힘들 정도로 좁은 마을길을 따라 피삭마을의 아르마스 광장이란 곳에 버스가 정차하는데 시장구경은 점심식사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식당을 찾아 잉카 현지 음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 피삭 마을 아르마스 광장에 펼쳐진 기념품 노점
▶ 잉카전통복장을 차려 입은 상인과 기념촬영
식사를 하고 나와 시장구경에 나선다. 시장이 열리는 광장에는 잉카인들이 색색의 실로 짠 옷가지며 갖가지 장신구 등을 팔고 있고 한 켠에는 토기나 인형을 제작하는 모습을 시현하는 곳도 보인다. 시장구경을 하던 아내가 장신구를 사며 잉카전통복장을 차려 입은 아주머니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웃으면서 응한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같이 찍자고 하니 돈을 내라고 손을 벌린다. 가이드가 오면서 잉카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려면 물건을 사거나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이 새롭다.
▶ 지붕 위 장식
그런데 마을 지붕을 쳐다보니 모든 집의 지붕 위에 십자가와 소 두 마리로 이루어진 장식을 이고 있다. 지붕에 이런 것들을 장식한 유래에 대해 가이드가 설명한다. 스페인 약탈자들이 이곳을 침략하면서 들여 온 소가 농사에 큰 도움을 주자 잉카인들은 이 때부터 소를 신성시하여 지붕에 모셨는데 이를 본 카톨릭에서는 미신을 모신다는 위협을 느껴 십자가를 함께 모시도록 하여 잉카인들의 지붕에는 소와 십자가가 함께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 잉카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콘돌, 퓨마, 뱀